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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2권 (27, 完)

16 대사와 꺽정이가 쇠갓 동행과 함께 제주를 떠나서 강진으로 돌아왔다. 대사와 꺽정이는 장흥으로 작로하려는데, 그 동행은 해남 한덕을 간다고 하여 달포 동 행이 동서로 갈리게 되었다. 동행하는 동안에 성명을 말한 일이 없던 그 사람이 서로 작별할 때에 “나는 이지함이란 사람이다.”하고 성명을 알리어 주었다. “ 이씨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예사 선비가 아니다. 지모방략이 삼군 의 대장이 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일평생 크게 쓰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람이 양반인 모양인데 어째서 쓰이지 못할까요?” “양반이라고 저마다 쓰이 게 되나, 때를 못 만나면 할 수 없지.” “때를 못 만나다니요? 양반이면 쥐새끼 만 못한 것도 잘 쓰이는 때에 때를 잘 못 만나면 다시 만날 때가 어디 있소?” ..

임꺽정 2권 (26)

13 “소승은 임피 용천사 우올시다. 안변 석왕사에 와서 있사옵다가 금강산에 들 어온 지 두어 달 소수 되었소이다.” 병해대사는 말이 없었다. “스님 말씀을 총 각에게서 듣고 일부러 보이려고 왔소이다.” 병해대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보 우라는 중이 못 당할 소조를 당하는 듯이 귀밑까지 붉히고 앉았더니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묻자올 말씀이 있소이다. 부처님에 전생에 상불경보살로 재 세하셨을 때, 경멸하는 사람이나 모욕하는 사람들을 한결같이 공경하셨다 하옵 는데 여래로 출세하셔서 인천대중의 찬양을 받으실 때 그 경멸하고 모욕하던 사 람들은 어떻게 되었을 것이옵니까? 아귀도, 축생도에들 빠져서 세존을 우러러뵈 옵지도 못하였을 것이 아니옵니까?” 말은 공손하나 말하는 어취는 지금 나를 경멸하고 모욕..

임꺽정 2권 (25)

8 천왕동이는 산짐승이나 다름없이 자라난 까닭에 다리힘이 좋을 뿐 아니라 천 생으로 걸음이 재어서 겨울 해에도 하루에 사백여리 길까지 다니는 터이고, 병 해대사는 근력이 아무리 젊은 사람과 같아도 환갑 넘은 노인이라 자연히 걸음이 느린 터이니 걸음이 왕청되게 틀리어서 동행하기 어려웠다. 꺽정이는 대사와 동 행하기에 미립이 나다시피 되었건만, 그래도 갑갑할 때가 없지 아니하거든 길들 지 아니한 생마 같은 천왕동이가 갑갑증을 참느라면 조만히 애를 삭이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천왕동이는 곱길을 걸었다. 뒤에 오려니 하고 앞서가다 가 뒤에서 오지 아니하면 돌쳐와서 만나고 다시 앞서 걸어갔다. 칠성늪 가까이 와서 천왕동이가 애를 삭이다 못하여 “늪만 구경하고 도루 가자.” 하고 대사 와 꺽정이를 돌아..

임꺽정 2권 (24)

4 그 여편네는 갑산 관비로서 관노 한 사람과 정이 들어 죽자살자 할 지경에, 그때 새로 도임한 갑산부사가 여편네의 인물을 탐내어서 억지로 수청을 들이려 고 하는 까닭에 두 남녀가 공론하고 모야무지에 도망하여 운총내 근처 산골에 와서 초막을 짓고 살려다가 관가에 염문이 들어가서 잡히게 되었었더니, 다행히 선통하여 주는 사람이 있어서 또다시 도망하여 무인지경 이곳으로 들어와서 두 내외가 근 삼십 년 같이 살다가 사나이는 사 년 전에 죽고 지금 홀어머니가 아 들딸 남매만 데리고 지내는 중인데 천왕당에 발원하고 낳은 아들 천왕동이는 나 이가 열여섯이고, 그 누이 운총이는 나이가 스물 셋이었다. 처음에는 여편네가 호젓하고 무서울 뿐이 아니라 갖은 고생에 못 살것 같아서 사나이가 사냥 나가 고 집에 없을 때면 어..

임꺽정 2권 (23)

20 꺽정이가 옆에서 보고 섰다가 “고만들 일어나오.” 하고 말한즉 연중이가 먼저 입을 열어 “서방님, 저 총각이 누구요?”하고 물어서 덕순이가 “임꺽정이 란 총각이야.”하고 대답하니 “양주 임꺽정이오? 내게 칼 쓰는 법이 다르더라. ” 하고 연중이가 꺽정이를 치어다보며 “자네가 천하 장사란 것을 말로만 들었 더니 인제 눈으로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우리 선생님을 만나보았소?” “ 자네 선생님이 우리 형님이야. 지금 내게 계시지. 요새도 심심하면 자네 말씀일 세.” “선생님이 여기 계시단 말이지. 그러면 어서 들어갑시다.” 하고 꺽정이 가 재촉하니 연중이가 덕순이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덕순이가 꺽정이를 보고 “ 선생님 한 분은 여기 내버리고 갈 터이냐? 오시라고 해야지.” 하고 말하여 꺽 정이가 “..

임꺽정 2권 (22)

16 진이가 갖바치를 보고 “송도서 며칠이나 묵으시려나요?” 물으니 갖바치가 “일간 떠날 터이어.” 대답하고 심의를 돌아보며 “오늘 저녁에 망월대에서 달 을 보고 내일은 박연을 갑시다.” 심의가 대답하기 전에 진이가 “나도 갈까요? ” 하고 물어서 서처사가 “좋지.” 하고 대답하였다. 이때 젊은 축은 각기 숨은 재주를 다 내놓아서 법석을 벌이었다. 서형덕은 나무꾼의 노래를 흉내내고 서숭 덕은 금단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김덕순은 긴 활개를 펼치고 남무 한바탕을 법 제로 추었다. 노축에 섞이어 앉았던 김륜이가 어느 틈에 자리를 옮겨와서 거북 춤을 춘다고 팔을 짚고 엎드려서 목을 오므렸다 내밀었다 하며 궁둥이를 치어들 었다 내려놓았다 하여 여러 사람의 웃음을 자아내어 젊은 사람들이 돌아서서 손 뼉을 칠 뿐 ..

임꺽정 2권 (21)

12 김덕순이가 용인을 갔다올 때 조정이와 같이 왔다. 그때 정이는 성관한 사람 이지만, 덕순의 대부인이 자질과 같이 여기어 안으로 불러들여서 용이 죽은 인 사도 말하고 지내는 형편도 물어 보았다. 정이가 며칠 묵는 동안에 하루는 덕순 이가 정이를 보고 “여보게, 자네가 찾아가 볼 사람이 하나 있네.” 하고 말하니 정이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선장과 자별히 지내던 사람이야.” “노 인 어른이겠읍니다그려.” “노인이야. 나하고 같이 보러 가세.” 정이가 속으로 생각하기를 자기 아버지의 친구 노인이면 덕순이에게도 존장일 터인데 어찌하여 말을 홀하게 할까 괴상한 일이다 하고, 재차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다. “선 장이 자주 상종하시던 갖바치가 있어. 그 사람을 보러 가잔 말일세.” “갖바치 라니요..

임꺽정 2권 (20)

8 윤판서가 임동지 이외에 몇 사람을 데리고 술상 앞에서 고담준론을 시작하여 그칠 줄을 모를 때에, 마침 형조 좌랑 정희등이 공사로 와서 보기를 청하였다. 정좌랑은 성질이 강직하여 허물있는 사람을 면박주기 잘 하고, 아무리 귀인이 라도 위인이 부정하면 사람 같지도 않게 보는 까닭으로 누구나 다 꺼리는 사람 이다. 그가 전에 상처하였을 때, 김안로가 사위를 삼고자 하여 통혼하였더니 통 혼하러 간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일평생 다시 장가를 들지 아니할지언정 김씨 의 집 사위 노릇은 아니하겠다.” 하고 두 번 말 못하게 거절한 것이 김안로의 미움을 사게 되어 삼사이랑의 좋은 벼슬을 다니지 못하고 공조.형조의 낭관 부 스러기로 돌게 된 것이었다. 윤판서가 정좌랑의 보잔다는 말을 듣고 눈살을 찌 푸리며 “술이 취..

임꺽정 2권 (19)

4 꺽정이의 비위에 맞는 사람이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별다를 사람이 아니라 김덕순이었다. 김덕순이가 본래 탈속한 사람이 환란을 겪은 뒤로 더욱이 속이 서그러져서 양반의 티가 조금도 없었다. 갖바치의 집에서 꺽정이를 만나던 날 첫인사가 “촌수를 따지면 내가 너의 아재비다.” 하고 그 뒤에 “우리 누님이 가끔 너의 말씀을 하며 상면하고 싶다고 하더라. 언제든지 한번 나하고 같이 창 녕을 가자.” 하고 말하는 품이 참말 족척간에 말하는 것과 같았다. 첫째는 덕순 이가 훌륭한 양반 사람으로 양반의 티를 부리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는 덕순이 가 고리삭은 글 이야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또 그 다음에는 덕순이가 힘꼴을 쓰는 까닭에 힘겨룸을 할 만하여 가지가지 모두 꺽정이의 비위에 맞았던 것이 다. 그때 꺽정이의 ..

임꺽정 2권 (18)

25 돌이의 집 안방에 집안 식구가 모여 앉았다. 돌이는 “이 자식, 어디를 가려거 든 말이나 하고 가지, 그런 법이 어디있나? 망한 자식 같으니.” 하고 오래간만 에 돌아온 아들을 금시에 내쫓을 것같이 골을 내더니 아랫목에 일어 앉아서 아 들의 얼굴을 바라보느라고 병까지 잊은것 같고 갖바치는 돌이의 옆에 가까이 앉 아서 빙그레 웃고, 섭섭이는 문 맞은편 동생 옆에 붙어앉아서 동생의 입은 옷을 만져보고, 또 돌이의 여편네는 어린아이 젖을 물리고 문앞에 앉아서 아이의 얼 굴을 건너편으로 내밀며 “언니, 인제 오셨습니까? 그 동안 저는 어떻게 기다렸 는지 모릅니다.” 하고 어린아이 대신 말하고 웃었다. 꺽정이는 여러 사람을 돌 려보는 중에 병든 아버지의 야윈 얼굴과 어린 동생의 가냘픈 몸을 자주 바라보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