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휴가받아 동경서 나온 아들녀석과 놀아 주느라 한동안 블로그질을 비롯하여 두루 소홀하였다. (아들과 놀아 주었다고? 실은 아들놈이 아비와 놀아 준 것일텐데.ㅎㅎ)
아들놈은 호텔을 미리 예약하여 빼도 박도 못하게 못박아 놓고서는 아비 어미의 소매를 잡아 끌기도 하였는데.
모처럼 아들놈과 함께 하는 나들이가 늙은 가시버시에게 즐겁지 않을수 있겠는가.
통영에도 들렀다.
이순신공원의 너른 잔디밭, 깔깔대며 뛰 놀았을 비니미니 함께 못한 아쉬움은 애꿎은 전화 단추 누르게 하여 아기들 목소리 청해 듣는 할비짜리.
2.
그제 이른아침, 객실의 컴퓨터자판 두드리다가 뒤늦게 깨어 일어난 모자(母子)와 함께 아침 먹으러 가느라 중동무이, 나중 미완의 그 포스팅은 지워 버렸는데 강정의 바다를 아파하는 후니마미님의 답글도 같이 지워져 버렸다.
날씨가 우중충하여 바다는 잿빛으로 누워 있었지만 강정과 상거(相距)한 한려수도 나의 바다는 그러나 아프지 않았다.
3.
세병관(洗兵館)
거대한 규모의 목조건물.
한아름의 기둥들은 몇백년 연륜의 고풍스러운 품위로 늠름하였고, 벽화와 그 옛날 직위와 출신과 함께 기록한 옛사람의 이름들은 현판의 글씨가 희미하게 바래어 그 퇴락미(頹落美)는 오히려 어떤 숙연함을 자아내게 하였다
국보라는데, 세병관 뜨락에는 우리 세사람 이외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이른 봄 인색한 양광(陽光)속에 마냥 고즈넉하였다.
세병관의 운동장처럼 드넓은 마루는 오직 한 여성만이 차지하고 있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마루에 올라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여자였다.
정오 무렵, 고색찬연한 적요 속에 그윽하게 잠겨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여성.
적당한 체구에 수려한 용모, 검소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행복 차림, 그리고 기둥에 기대어 길게 앉아 책을 읽는 그 포즈는 그림으로써 너무나 참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나뿐 아니라 아내에게도 그리 비추어졌으니 서른 중반 미혼의 자식을 둔 부모의 눈은 어쩔수 없는가 보았다.
아들놈은 아직 저 아래 누각에 있었고, 나는 아내보다 몇걸음 앞 선 걸음이었는데.
뜨락 한켠에 붉은 꽃잎을 드러낸 동백나무를 대화의 물꼬 삼아 아내가 자연스럽게 그 여성에게 수작(?)을 거는 기미가 뒤편에서 느껴졌다.
내용은 알수 없으나 서울말씨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등을 간지럽힌다.
우리의 비상(非常)한 할마시는 한 10여분 동안 이모저모 신변에 관한 얘기들을 나누었던가 보았다.
스물아홉살의 미혼, 애인은 없고, 얼마전 안산 직장을 그만두고 홀로 남녘땅 여행중이라는.
그러나 그뿐.
그런 정보도 별무소용, 인연은 그것으로 그냥 그쳐 버렸으니.
함께 점심이라도 하였으면 하고 아래 쪽에서 서성거렸는데, 아들놈은 아연 질색을 하고 아비 어미의 등을 한사코 떠밀었다.
이름도 모를 그 참한 여성분께는 실례천만의 말씀이지만, 놓쳐 버린 고기인지라 더욱 탐나고 아쉬운건.. 늙은이 뿐이로다.
4.
요즘 젊은이들, 특히 사내녀석들은 도무지 결혼이라는 것에 대하여 초조함이라곤 없다.
예전에는 어디 그랬던가, 나이차서 때 되면 짝 찾아 가정을 꾸리는 것이 아침에 해뜨고 저녁에 해지듯 인생에 있어서의 자연법(自然法)인양 인식들을 하였지 않았던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잘났으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대로, 짚신도 짝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들놈 뿐 아니라 아들의 많은 친구들, 그리고 서른 중반 비슷한 또레인 내 머슴애 조카들도 죄 미혼이다.
이 녀석들, 평생 총각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어서 독신에 대한 무슨 신념이 있는것 같지도 않다.
이번에, 결혼문제에 관하여 아들놈과 술잔 나누면서 긴 대화를 나누었다.
부자간 얘기하기 힘든 주제인 성욕의 영역까지 넘나 들면서 딴에는 간곡하였는데, 그러나 결국 아들놈에게 순복할수 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며느리 손주 그리워 하는 그 마음 모르지 않는다, 불효인줄도 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결혼 생각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마누라 자식들을 거느린다 것을 생각만 하여도 끔찍스럽다,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결코 독신주의는 아니다, 나도 결혼하고 싶을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제발 부탁하오니 결혼얘기는 꺼내지 말아 줍시사...
아들놈 연수입이 억대를 넘나들거나, 우리집이 부자였다면 얘기는 달라졌을까.
내 여동생네는 부자인데 그 조카녀석도 도통 결혼생각을 아니 한다니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로서만 치부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양육, 부동산, 교육, 피터지는 경쟁, 왕따, 상명하복, 관료주의, 맘모니즘, 헤도니즘등등의 한국적인 것들..
한국적인 문화풍토를 상당히 싫어하는 편인 아들놈은 8년 넘도록 이국땅에서 개기고 있다.
녀석이 교유하는 사람들은 동서 여러나라 사람들, 그 중에 여성도 상당히 있음을 아비는 알고 있다.
그래서 아비는 아들놈에게 진작에 선언한 바가 있다.
국적불문 피부색불문, 네가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는 여성이라면 아비 어미는 쌍수를 들어 환영할터이다 하고.
그러나 이제 아들놈의 결혼 문제에 관하여는 입을 닫아야 할까보다.
아비로서 걱정하는 바는 이제 따로 생겼다.
혹여 이 녀석의 깊숙한 내면, 그 감정모체에 자리잡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인생이라는 걸 허무한 것으로, 삶이란 걸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그런 것들....
결혼이란 인생을 긍정하고 삶을 느꺼워 하는 기쁨의 축제같은 것이 아닌가.
그 기쁨의 축제를 축복으로 여기지 않고 부담으로 여기는 총각들.
아, 총각들로 하여금 장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자.
나라의 비극이다. 제도가 나서고 정책이 나서라.
5.
여러 가지 숙제가 밀렸다.
먹고사니즘을 위하여 바뀐 세법과 공법과 민사판례도 공부하여야 하고, 책부족 2월의 독후감 ‘싯다르타’도 써야하고, 3월의 책 ‘레미제라블’ (자그만치 여섯권 분량)도 읽어야 한다.
모레, 아들녀석 일본 들어가고 나면.
6.
일요일 아침.
아직 늦잠에 취해 아들녀석 제 방에 잠들어 있는 집안.
가득 흐르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무척이나 감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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