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원,4식구,3들꽃기탁두성,3배박어리강물)
<나의 영화 편력기 -其1->
2003년 5월
반백년을 넘어 살아 낸 여보게들.
생각해 본적이 있나?
우리들에게 한 때 영화란 무엇이었는지.
한시절의 푸르렀던 초록 잎새들은 이제 메마른 낙엽이 되어 우리의 목숨 언저리를 서걱거리고 있을망정 , 우리에게 한 때의 영화란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감성 어딘가에 남아있을것이라 생각되는데.
그렇지 아니한가?
영화를 회억하며 한조각 두근거림이 남아있지 않는다면 자네의 청춘은 사뭇 회색빛이었을걸세.
우리의 소년 시절.
추억컨대 얼마나 황량한 환경에서 우리의 성장은 꿈틀거렸던지.
문화적인 양태의 삶을 생각할 여유가 우리에게 있었던가.
생존이 급급하여 만사가 살벌하고 불안하였던 그 시절의 어른들 틈에서 우리 소년 소녀들은 무슨 꿈을 삼키고 어떤 아름다움을 잉태하며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을까.
그 황량한 풍경 한구석에는 영화가 있었던걸세.
영화는.
황량한 현실로부터 현란한 비현실의 장원으로 떠나는 여행-
아마존의 밀림 깊이 숨어있는 ‘녹색의 장원’.
사철 푸르른 수목에 둘러 쌓인 별천지, 벌새가 손가락에 앉아 비비거리고, 하타라는 꽃이 어딘가 피어있는 그 곳.
오도리헵번이 생명을 바쳐서 나를 사랑하는 그 곳.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극장 안에서는 퍼펄 살아있는 리얼리즘으로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여 주었던 그곳, 영화의 세계.
무조건적인 도취.
현실을 뛰어넘은 그 리얼리즘은 우리에게 어떤 好惡나 분별력이 작용할 대상이 아니었을걸세.
기회만 있다면 무조건 흡수하여 들여 마시는 오직 황홀한 향유만이 있을 뿐인 움직이는 문화 장르.
나는 지금도 믿고 있네.
유년과 소년과 청년을 거치는 동안 내가 접하였던 수많은 영화들은 알게 모르게 인격에, 품성에, 정서에, 예술관에, 도덕관과 가치관과 세계관에 끼어들어 지금의 나를 만든 아주 중요한 요소였음을.
요즘 청소년들에게도 극장에 들어설때, 옛날 우리가 극장에 들어설때의 그 설레임과 두근거림이 있을까.
일상으로 호흡하고 있는 매체인 영상, 그들에게 이미 설레임과 두근거림은 아마 없을게야.
무언가 자극적인 내용과 새로운 기법에 대한 호기심은 있을지언정.
예전의 극장- 그곳은 정녕 꿈으로 통하는 터널이었고.
예전의 스크린- 그것은 한 소년의 영혼을 확 빨아들이는 마법의 문이었네.
수년전에 작가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소설에서 나는 한 소년을 만날 수가 있었네.
아주 낯익고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의 그 소년.
주인공 임병석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영원히 자라지 않는 피터팬처럼 임병석은 영화의 판타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파국의 인생을 살게 되지만, 임병석이 다름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아무리 하여도 나는 부정할 수가 없다네.
그리하여.
먼지가 켜켜이 쌓인 옛날 옛적의 설합을 뒤적이고 뒤적여서 무언가 남아있는 흔적이 있거들랑 그것을 끄집어 내어 당시 나만의 리얼리즘을 반추하여 ‘나의 영화 편력기’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일세.
자네도 나와 함께 자네 자신의 영화편력기를 반추하면서 들어 준다면 시시한 이 얘기도 조금쯤 재미 있지도 않을까?
자, 이제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세.
시간적으로 단락을 나누어 옛일을 더듬어 풀어 나가는 것이 편할 듯 싶으이.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이후로 시대를 나누어.
오늘은 우선 국민학교 시절.
(TV같은데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라고 고처서 말해야 한다고 강요하는듯하는 어이없는 행태가 나는 자못 못마땅하이.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에 다닌 사람에게 왜 초등학교라고 하지 않느냐는 것은 관료적 횡포이고 일종의 건조한 폭력일세.국민학교라는 명칭 속에는 국민학교를 다녔던 사람의 정서가 녹아 있는 것인데 그걸 굳이 초등학교라고 해야한다니.)
부산의 피난민 국민학교 시절에는 전혀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없네.
내 기억 속의 영화편력의 시발은 국민학교 2학년때, 서울로 돌아와 성북구 정능이라는 변두리 동네에서 부터 막을 올리게 되네.
아련한 기억을 더듬노라니 정능의 커다란 개천가에 흰광목으로 울타리를 치고 상영하였던 흑백의 국산영화가 떠오르는데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변사가 대사를 읊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도 확실하지 않네. 김지미인지 이빈화인지 여배우가 되게 예뻤다는 가뭇한 기억...
영화라면 역시 극장에서의 영화일세.
당시 서울에는 개봉관과 재개봉관, 그리고 재재개봉관이라는 변두리 극장들이 있었지.
개봉관이라면 광화문 일대의 국제극장, 아카데미극장, 을지로의 국도극장, 종로의 단성사, 나중 생긴 피카디리, 대한극장, 스카라극장등이 떠오르네.
이런 일류극장들은 당시 선남선녀들의 데이트중 가장 고급스런 마지막 코스였으며 미아이(맞선)후 쑥스런 총각 처녀들이 무드 전환을 위한 필수 코스이기도 하였지 않나?
그리고 재개봉관은 화신 옆의 우미관, 세기극장, 동대문 쪽의 평화극장, 동보극장, 낙원동의 문화극장이 생각나고.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변두리 재재개봉관인 우리 동네의 미도극장과 돈암동의 동도극장이 내게는 가장 익숙한 곳이었고, 국민학교 시절 본 영화중 80 % 이상은 아마 이 두곳의 극장에서 보았을 거야.
6.25- 아버지 행불후 홀로 되신 내 어머니는 의사였는데 대단한 영화광이셨네.
국민학교 시절에 보았던 많은 영화들의 기억은 세살 터울의 형과 연년생인 여동생과, 병아리 새끼들처럼 어머니 치마폭을 잡고 극장을 드나들었던 정다운 추억과 함께 떠오르네.
또는 내 유모였던 젖엄마의 거칠지만 따뜻한 손의 감촉도 더불어.
어머니 일흔 넘은 말년에는 중년을 넘긴 아들녀석과 영화얘기 나누는 것을 사뭇 즐거워 하셨음을 나는 그나마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네.
어느 날인가, 줄리앙 듀비비에의 영화 ‘무도회의 수첩’을 얘기 하실적 어머니의 표정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할거야.
어머니의 표정, 늙어 주름 잡힌 노파의 얼굴은 그 순간 첫사랑의 아련하고 달콤한 얘기를 들려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찬란한 소녀의 얼굴이었음을.
그리웁고녀 내 어머니.
먼저 떠오르는 것이 뇌리에 깊이 각인된 한편의 국산 영화.
황해와 이경희가 출연한 ‘두남매’.
나중 곰곰 생각해 보니 지극히 유치한 신파극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이 영화가 어린 가슴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었네.
세상에 단 둘만이 남은 오라비와 누이, 그 비극은 황해의 비장한 연기로 정말 많은 눈물을 쏟게 하였었지. ‘두남매’는 당시의 내게는 그 어떤 명작보다 더욱 감동적인 스토리였고 플룻이었고 주제로서 완벽한 기승전결의 드라마로 읽혀 졌다네.
어린 나는 어깨를 들먹이며 훌쩍거렸는데 옆 자리의 젖엄마는 그야말로 엉엉 소리내어 울었기 때문에 나의 훌쩍거림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었지.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의 레이니에 공의 결혼식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덤으로 보여주었던 어린 투우사소년의 영화에서도 많이 울었던 기억.
죽은깨의 귀여운 여인 도리스데이가 나와서 케세라세라를 불렀던 ‘나는 알고있다’.
가죽잠바를 입은 시니컬한 카리스마의 말론 브란도의 ‘난폭자’.
이 영화에서 어린 놈이라도 남자는 남자인지라 폭력의 미학도 어렴풋이 깨달았고 남자의 야성미를 꿈꾸게 만든 최초의 계기였을거야.
그 유명한 ‘칼멘’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뮤지컬인지 오페레타인지 ,하리 베라폰테가 주연한 ‘칼멘존스’에서 나는 정념의 사랑의 비극을 보았고 막연하지만 성적인 엑스터시를 최초로 느꼈을 것일세.
그 영화 이후 여직껏 나는 하리 베라폰테 노래의 열렬한 팬일세.
크리스토퍼 리가 나오는 ‘드라큐라’
극장문을 나설때 내 사추리는 펑 젖어있었네.
공포로 오줌을 찔끔거리며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며칠간 혼자서는 변소에 가지 못하고 여동생을 밖에 세워 놓고서야 일을 보았던 기억이 새롭네.
수잔 헤이워드의‘나는 살고싶다’도 아마 그 무렵 보았을 거야.
가스실에서 몸을 뒤틀며 처형 당하는 그 리얼한 장면에 나는 숨이 막힐 정도의 충격을 느꼈네.
이 영화를 보고난후 나는 사형이라는 것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종류가 좀 다르지만 마리아 셀이 나오는‘교수목’도 기억에 떠오르네.
그리고 홀쭉이 뚱뚱이 시리즈들- 오부자, 논산훈련소에 가다등등.
막둥이 구봉서에게로 옮겨 가기 전까지는 양훈과 양석천의 팬이었었네.
캐리 그란트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자랑과 정열’에서 영국군 제복을 입은 캐리 그란트의 중후한 매력.
버트 랭커스터가 나오는 ‘진홍의 도적’은 바다의 낭만으로서 해적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네.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에서 존 웨인이라는 덩치 큰 사나이를 처음 대면하였고.
‘흑기사’에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예쁜 얼굴에 꼬마의 가슴은 콩닥콩닥. 미남인 로버트 테일러를 질투할 정도였다니까.
‘삼총사’의 진켈리는 또 어떤가. 보자기를 둘러쓰고 총채를 잡고서 그 멋진 펜싱 흉내가 한동안 나의 놀이였었지.
‘쿼바디스’에서 데보라 카를 처음 보았는데, 어린 마음에도 참 현모양처형의 여자다, 저런 여자한테 장가갔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 보았네.
그런데.
몇년전 TV로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는 노추한 데보라카를 보았을때는 작은 충격을 받았다네.
‘왕과 나’의 고아한 숙녀는 간곳없고 웬 쭈그렁탱이 노파가 서 있었으니.. 인생 무상이 절로.
바이킹.. 커크 더글라스와 토니 커티스.‘오딘-!’을 부르짖으며 맹수의 우리로 뛰어드는 커크 다글러스.
‘미시시피의 도박사’타이론 파워의 짙은 눈썹의 매력.
‘흑과 백’에서의 시드니 포이티어라는 배우, 아, 흑인도 참으로 멋지구나하는 느낌.
날렵한 검객 수튜어드 그랜저의 ‘풍운의 젠다성’
역시 스튜어드 그랜저보다는 중후한 검객 잔 마레가 나오는 ‘반란’
‘보리수’는 후에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리메이크 되었지만 나는 어쩌면 그 독일영화 보리수를 더 좋아 하네.
슈베르트의 가곡들은 그때부터 좋아하게 되었고.
‘피서지에서 생긴일’ 금발의 멋진 덩치 트로이 도나휴와 깜찍 그 자체인 산드라 디.
‘자니 기타’를 보고서는 비로소 기타를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어 결국 고등학교 때 기타학원에 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고.
곱상한 얼굴의 아란 랏드의 서부극 ‘북소리’
아란 랏드를 생각하면 신설동 동보극장(?)에서 보았던 ‘셰인’을 나는 잊을수 없네.
라스트 신. 말에 타고 홀연히 떠나는 아란랏드를 향하여 소리치는 소년.
“돌아와요! 셰인!”화면을 덮치듯 들려오는 주제가 ... 검푸른 저산너머..
소년보다 내게 셰인은 더욱 영웅이었네.
며칠 동안이나 ‘세인!’이라고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었지...
그리고 내게 시각의 아름다움의 본질을 충격과 감동으로 깨닫게 해준 한편의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월트 디즈니의 ‘피터 팬’.
중학생인 형과 한살 터울의 여동생과 함께 어머니 손에 끌려서 광화문 국제극장에서.
아아, ‘피터팬’
아직 여물지 못한 소년의 영혼은 그 화면에서 아름다움의 이데아, 그 정체를 접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걸세.
그 판타지의 충격은 몇날 며칠을 소년에게서 잠을 빼앗아 가 버리고 말았었지.
푸른 밤하늘 둥근 달을 배경으로 하늘을 나는 피터팬, 웬디, 팅커 벨...
그 색감과 그림은 이 세상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깊이 깊이 인식되었다네.
팅커벨의 금빛 가루 세례를 받은 나는 정말 오랫동안 하늘로 둥둥 떠다녔다네.
그런데 여기서 나는 고백할게 있네.
먼 후일, 내가 지나치게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한번 그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아뿔사! 나는 이미 그 영화에서 판타지를 잃어버리고 말았지 않은가?
이게 웬일?
그 당혹감이라니.
그냥 잘 그리고 잘 색칠하고 잘 만든 하나의 만화영화로 보아 버리는 눈은 언제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나는 진화하여서, 아니 역진화하여서 풍부하고 여리고 아름다운 감성의 사람으로 부터 교활하고 빈틈없고 메마른 원숭이로.
‘후크’의 늙은 피터팬인 로빈 윌리암스가 되어 있었던 거야.
사노라니 그러하네.
나이 먹어 잃어버리는 것이 어디 이 뿐이겠는가마는.
나이 먹어 때묻어 늙어가면 그 세월은 많은 영화들에게서 판타지를 빼앗아 버리게 되는 모양일세.
어린 시절 학교의 운동장은 얼마나 넓었던가하는 비유가 여기에 해당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 국민학교 시절, 이 외에도 나는 상당히 많은 영화를 보았을 터인데 내 기억이 너무나 부실하여 끄집어 낼수 없는 것이 안타깝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관람하였던 영화의 제목과 감독 배우들을 기록하여 둔 옛 공책의 기록이 있어 이 ‘나의 영화 편력기’로서는 실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네.
실은 그 기록을 믿고 이 글을 끌적이고 있는 것이네만.
그러구러 국민학교시절은 저물고 나는 종로 한복판 중학동에 있는 중학교로 진학하였네.
나의 본격적인 영화 행각이 바야흐로 시작되는 것이지.
오늘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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