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이경자]] 1.2 (1,4,3,3,1)

카지모도 2020. 12. 21.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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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정은 늙지도 않아>

-이경자 作-

 

***동우***

2018.11.16 05:05

1980년대 즈음.

'절반의 실패'란 소설로 화제를 일으킨 작가 '이경자(李璟子,1948~)'

당시로선 그녀는 상당히 래디컬한 작가였습니다.

페미니스트 작가라는 딱지도 붙었었지요.

페미니즘이란 그 시절만하여도 참으로 생소한 어휘였습니다.

그 때까지의 유무형의 사회적 체제는 지금보다 훨씬 가부장적 규범이 지배하고 있었으니까요.

'정은 늙지도 않아'

-이경자의 이 소설집에 대한 평 (인터넷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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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복잡성과 아이러니를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안으며 삶에 대한 성찰...

일곱 개의 단편들이 하나의 주제 아래 탄탄하게 짜여진 연작소설로 강원도를 배경으로 남편과 본처, 첩실의 삶을 각각 객관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이들의 실타래처럼 얽힌 인연과 그 이면에 감춰진 삶의 진실을 담아내고 있다.

흔히 이러한 작품들이 질투와 투기, 알력 등으로만 비춰지던 것에 반해 이 소설은 인연이라는 매듭을 통해 이들의 삶을 풀어내어 진한 감동을 선사할 뿐 아니라, 담백하고 정제된 문체, 섬세한 심리묘사를 선보임으로써 이경자 문학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

++++

그렇군요,

이 소설, '절반의 실패' 그보다 사뭇 안정되고 성숙한 느낌입니다.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여 전전긍긍하다가 어느새 일흔을 넘긴 필례.

<사람은 정만 있으면 살구말구....몸은 멀리 있어도 정은 여기다 둔 영감.>

영감의 몸은 작은년에게 빼앗겼지만 영감의 정(情)만은 오롯이 자신의 곁에 남아있다는, 그 하나만을 철썩같이 신앙하여 필례의 늙은 영혼은 느꺼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를 어쩌나.​

저 날, 다시 첩실에게 돌아가버린 도철 영감.

본마누라 필례 곁으로 다시는 오지 않았다고 하니.

그래도 필례는 철썩같이 믿습니다.

 

<사람은 정만 있으면 살구말구. 그 여자는 이렇게 속으로 말하고 장판 밑에 숨겨둔 돈다발을 꺼냈다. 십만원이고 이십만원이고 목이 지어지면 읍에 나가 첩년 몰래 영감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때마다 은근히 좋아하는 영감의 얼굴을 보면 만 시름이 사라졌다. 필례는 종이에 싸고 비닐에 싼 그것을 끌러 만원짜리와 천원짜리를 따로 세었다. 두 번이나 세었는데 십만원하고 팔천원이 더 되었다. 단오까지 부추를 열심히 잘라 팔면 이십만원이 될 것이었다. 그 여자는 돈을 다시 싸서 장판 밑에 넣고 그 위에 누웠다.

몸은 멀리 있어도 정은 여기다 둔 영감.

필례는 말로 할 수 없는 영감의 정을 느끼며 그 정을 이불처럼 덮고 눈을 감았다. 첩년에 대한 미움 때문에 뻣뻣해졌던 몸이 어느 결에 우무처럼 녹았다. 영감의 손길, 그의 숨결, 푸근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이럴 때면 그 여자의 몸은 온 뼈마디가 다 시었다. 칠순이 훨씬 넘도록 그랬다.

더이상 꼿꼿해지지 않는 영감의 자지는, 그것대로 좋았다. 몰캉거리는 그것을 밤새도록 잡고 잠을 자면 필례는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이상했다. 사람의 몸과 맘은 늙어도 정은 따로 있는지 평생을 새파랗게 젊었다. 정은 늙지를 않는 것이었다. 필례는 지금도, 도무지 그것이 신기했다.>

 

情이라는 그것.

나홀로 아리랑일지언정.

늙어 살아지는 것, 살게 하는 것.

 

이경자의 연작소설, '정은 늙지도 않아'

나머지 여섯개의 단편도 찾아 읽어, 필례의 사연을 더 들여다보고 싶은데 도서관에 있을랑가.

 

 

 

 

-독서 리뷰-

 

<사랑과 상처>

-이경자 作-

 

***동우...

2020.07.28 05:14

 

나와 동년배인 작가 이경자 (1948~ )

그녀처럼 여성이라는 사회적 존재에 관한, 치열하게 페미니즘을 천착한 여성작가도 드물겁니다.

1988년 발표한 소설 '절반의 실패'는 당시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지요.

 

근세사까지 이 땅에 뿌리박힌 세계관.

남존(男尊)과 여비(女婢).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고모 이모 숙모 누이들...

기억 속 애린한 아픔과 슬픔들.

그러나 나는 남자, 다만 내 리얼리즘은 어림으로 느낄 뿐입니다.

 

패니스 우월주의 따위, 그런게 어디있습니까?

개나 물어가라지요.

내 손주 비니미니에게, 남존여비 따위의 집단무의식은 결코 깃들어있지는 않을 겁니다.

 

1998년 발표한 이경자의 소설 ‘사랑과 상처’

시대적 현실을 배경으로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묘파한 역작입니다.

강원도 말씨와 풍토, 소설적 재미도 만만치 않고.

 

36회쯤으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함께 읽어요.

 

***동우***

2020.07.29 05:29

 

아래, 작가의 말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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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경자-

 

어느 날 나는 내가 성장이 멈춘 걸 깨달았다. 자그마치 나이가 마흔여덟이나 되어서였다.

성장이 멈춘 상태의 증세는 비참했다. 우선 무엇에 갇힌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앞을 향해 걸어왔는데 문득 앞이 막혀버린 것이었다.

불현듯 두려워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저 길은 놀랍게도 길이 아니었다.

앞이 막힌 걸 알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보다 더 끔찍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처음엔 죽어버리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죽지 못했다. 그리고 살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막힌 길을 뚫고 잘못 걸어온 길의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먼저 내가 살아온 인생을 내 손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가 먼지가 된 벌판에 섰을 때 나는 내 성장을 가로막은 것의 정체를 찾아냈다.

그것은 너무도 단단해서 금강석 같기도 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불가사리 같기도 하였다.

금강석이나 불가사리 같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존과 여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 외부에서 보았던 벽이나 잘못 걸어온 길이라고 여겼던 건 놀랍게도 착각이었다.

남존여비는 내 생명 속에 뒤섞여 있어서 쌀의 뉘처럼 골라내지거나 암처럼 도려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무서운 사실도 깨달았다.

남존여비, 그 금강석 혹은 불가사리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시대에 맞는 옷을 갈아입었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노래를 부르는 능력을 보여왔다.

그것은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도 그랬고 산업 사회에서도 그랬다.

 

소설 `사랑과 상처`는 우리들 남자와 여자들 생명에 뒤섞여 유구한 세월을 진화하면서 견뎌온 남존여비에 대한 실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인공 준태는 화전민의 아들이지만 어느 왕손의 상속자나 다름없이 길러졌고 정옥은 딸이었으므로 그 출생의 순간부터 비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극단적인 원체험을 가진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혼인이 두 사람의 삶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 그리고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두 사람을 얽어매는지 그리려고 했다.

 

소설가인 나는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내 나이가 내게 준 귀한 선물이었다.

인생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살이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결국 `사랑과 상처`라는 형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랑과 상처`가 우리들의 삶에 `자유'를 확장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디 그래만 준다면, 더 무엇을 기대하랴.

 

`사랑과 상처`를 쓰는 동안 많은 분들의 깊은 애정과 격려를 받았다.

발문을 써주신 박완서 선생님, 제자를 써주신 신영복 선생님껜 고마움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선배와 동료, 후배와 피붙이들은 물론 내가 자라난 양양 땅 고향 까마귀들의 격려와 기대는 눈물이 날 지경이다.

육이오 동란 이후의 최대 위기라는 이 을씨년스러운 시절에 책을 내야 하는 실천문학사에 감사드린다.

독자 여러분께도 사랑의 인사를 드린다.

 

수유리 집필실에서 이 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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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20.08.12 05:54

 

박완서의 발문(跋文)을 댓글란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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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처> 발문(跋文)

-박완서(소설가)-

 

`사랑과 상처` 1부가 (실천문학)에 연재되는 동안 나는 그걸 기다렸다가 읽곤했다. 읽고 나면 지겨웠다. 너무 지겨워서 이제 그만 읽어야지 벼르다가도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것부터 읽곤 했다. 그건 재미하고는 달랐다. 감각적인 재미는 이경자가 앞서 써온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은 그의 딴 소설들에 비해 월등했다.

이번에 2부까지 완결된 원고를 보면서, 이경자가 마침내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동업자가 길고 힘든 일을 끝냈을 때 축하하고 위로해 주고 싶은 심정하고는 다른 거였다. 그건 아마도 그가 여지껏 해온 일련의 작품세계로부터의 환골탈태를 보는 것 같은 신선한 놀라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페미니즘 작가라 불리는 작가군에 속하고, 그로 말미암아 칭찬받은 것보다 야유나 무시를 당한 경우가 더 많았지 않았나 싶다. 나도 어떤 부분에는 동의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그 목소리 높음과, 너무 겉으로 드러나 의도 때문에 식상한 적도 없지 않았다.

그가 페미니즘 소설의 범주 안에서도 성공적으로 변신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묘사를 뛰어넘어 마침내 감춰진 진실묘사에 이르렀다는 뜻을 함축한다.

내가 이 소설에 빨려들면서도 지겨워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보던 것을 송두리째 뿌리까지 보는 지겨움이 아니었을가.

인간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 없이 운명적으로 속하게 된 최초의 인간관계인 가족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너는 내 집 식구가 아니다. 장차 남의 집으로 가서 거기 속해야 된다`고 차별당하고 환영받지 못한 인간과, 존재 자체가 대를 잇는다는 존엄한 임무 수행이 될 뿐 아니라, 충실한 종 노릇에다 다음 대의 씨받이 노릇, 유교의 최고 덕목인 효도까지 대신해 줄 남의 식구를 데려올 권리를 천부적으로 부여받음으로써 황제처럼 떠받들어지는 인간이 어떻게 같은 자존심, 같은 책임감을 지닌 인간으로 성숙할 수가 있겠는가.

물론 여자가 속할 가족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내쫓기게 되면 문지방이라도 베고 죽어야 하는 시집이란 데가 있지만 시집에서나마 완전한 소속감을 얻기 위해서는 그 집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황제처럼 키우는 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것은 모든 가정의 여자이지 남자가 아니라는 책임 회피의 길이 남자들에겐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건 여자에게도 남자 못지 않은 권력 의지가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남자만이 권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걸 태어나기 전부터 입력된 여자는 아들을 얻었을 때 남성 성기를 자기 것으로 쟁취한 것 같은 성취감을 맛보고, 그걸 숭배하고 떠받듦으로써 가장에서 권력자가 될 기반을 닦는다.

이 소설에서 드러나 출가외인법과 남성 성기 숭배는 너무도 적나라하게 원색적이어서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중인물들과 거의 같은 시간대를 살아왔고, 지리적으로도 38선과 휴전선이 왔다갔다하는 지역에 고향을 둠으로써 남보다 더 심하게 분단상황에 부대끼는 등 공유하는 경험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지겨워서 나는 아니다, 나는 혜택받은 환경에서 충분히 존중받으면서 자랐노라고 여기고 싶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는 그런 특혜의식 자체가 옳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를 길러준 것도 남존여비와 출가외인의 위선에 찬 변형이었을 뿐, 그 원본은 `사랑과 상처`와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은 가정과 사회에서의 실생활에서뿐 아니라, 법과 제도에 있어서도 그때와는 댈 것도 아니게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처럼 보인다.

한때는 여성상위 시대라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리더니 근래는 고개 숙인 남자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그러나 그런 소리야말로 변화를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기득권을 지키려는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과장된 엄살의 소리이다. 그렇지 않다면 출가외인을 가부장과 같은 공력과 돈을 들여 키우는 손해나는 짓을 처음부터 면하기 위해 태중의 여아를 살해하거나 살해하고 싶은 충동이 만연한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출가외인법이 끼치는 해악은 이렇게 질기고도 섬뜩하다. 더욱 섬뜩한 건 남성도 더는 이런 남존여비의 수혜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준태라는 인간을 통해 우리는 가부장제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남성 자신임을 섬뜩하도록 낱낱이 보게 된다.

나는 이 소설을 남자들도 지겨워하며 읽어주었으면 싶다. 자기가 쥔 특권에 의해 왜곡되고 상처받은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서 말이다.

가부장문화는 더 이상 남자도 보호할 수 없을 만큼 퇴락했다. 남자도 여자도 다같이 상처받은 피해자이다.

상처는 치유받아야 한다. 치유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처를 드러내고 그리고 직시해야 한다. 그건 이 소설이 제기한 문제이자 해답이다.

어리숙한 듯하면서도 무던한 강원도 사투리도 이 책의 읽을 맛을 더해 준다. 이 어리숙한 말투에 그렇게 큰 호소력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경자 개인의 힘이 아니라 그 고장을 다녀간 여성의 조상들의 목소리가 아우성치며 분출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던하다는 것은 보수적인 것하고도 통한다. 보수적인 고장일수록 억울하게 억눌린 힘의 누적이 큰 고장이다. 또한 그쪽은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의 고장이기도 하다. 우리의 유구한 가부장 문화는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묶어두고 그 안에서 최고의 자리매김을 하려 들지만 신사임당이 누구인가. 그는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리고 그의 예술은 온몸으로 출가외인을 거슬름으로써 비로소 여류니 규방이니 하는 단서가 필요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이경자로서는 필생의 작업이었을 것이다. 지금 개운하고도, 외롭고 허전할 것이다. 널리 읽힘으로써 위로 받을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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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20.09.16 05:37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고모 이모 숙모 아줌머니들이 살아 온 세월.

출가외인법(出嫁外人法)은 관습법으로 삼엄한 것이었습니다.

여자의 몸은 아들만을 꿈꾸는 인큐베이터.

그리고 집안에서, 탱자탱자하는 남자와 노동으로 점철된 여자의 일상.

여자의 삶은 남성중심주의 질곡 속에서 꼼짝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여필종부(女必從夫)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삶.

 

동서고금을 막론, 여자라는 성은 관습과 제도와 관념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새로운 성이었습니다.

 

격변의 세월을 겪고 작금에 이른 現代.

이제 저 미몽(迷夢)에서 깨어났는지.

 

딸의 편지.

<사랑하는 엄마... 이제 그만 아버지를 용서해 주세요. 그래야 엄마가 편안해지실 거예요. 그만큼 엄마가 자신을 학대했으니, 이젠 됐잖아요? 엄마는 언젠가 저한테 말했듯이, 잘 사셨어요, 성공하셨어요. 제가 엄마 딸이라는 게 자랑스럽고요. 누구에게나 우리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오셨는지 말할 수 있어요. 엄마는 정말 성공하셨어요. 그런데 왜 엄마는 아직도 아버지를 미워하세요? 아버지를 미워하는 게 엄마 자신을 괴롭히는 거라는 걸 모르세요? 엄마는 아버지한테 아무 죄도 없어요. 우리는 다 이해해요.

엄마를 생각하면 저는 언제나 가슴이 아파요. 우리는 언젠가 엄마와 이별을 하게 될 거예요. 그때 우리가 엄마를 그저 그리워만 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더바랄 게 없어요.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예요. 엄마가 아직 다 풀어내지 못한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엄마,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했어요. 물론 엄마도 아버지를 사랑했지요. 그렇지만 두 분은 너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서로 엉뚱한 기대와 실망만 하면서 마침내는 미움으로 이별했어요.

하지만 엄마, 아버지에 대해 엄마는 아무런 죄도 없어요. 물론 아버지도 그래요.

엄마에겐 고통을 드렸지만 저는 이혼을 하고 나서 비로소 결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어요. 만약 내가 더 일찍 엄마와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슬기롭게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을지 몰라요. 하지만 엄마, 괜찮아요. 이제 다시 기회가 오면 잘살겠어요. 그럴 자신이 생겼어요.

엄마, 제발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세요. 겁내지 마세요. 아버지를 용서한다고 엄마에게 잘못이 돌아오는 건 아니예요. 엄마는 이미 아버지의 인생과 뒤엉켜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고 죄인으로 만들면 엄마 자신도 그렇게 되고 말아요. 물론 우리도 그렇고요.

엄마는 단 한 번도 엄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았어요. 제발 우리에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걸 보여주세요. 그러면 저도 힘이 날 거예요.

엄마, 이제 다 끝났어요. 엄마가 아버지만 용서하면. 그리고 엄마가 엄마 자신을 사랑하면...>

 

사랑 상처 그리고 용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엄마 자신을 사랑하면...

엄마 역시 스스로 자신을 용서하여...

아아, 늙어 삶은 스산하지만 스스로 따순 것들도 있어야지...

 

‘이경자’의 ‘사랑과 상처’

연재를 마칩니다.

 

함께 읽어주신 분들, 고맙습니다.

 

이어서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중 제2권 ‘로도스 섬 공방전’을 연재하겠습니다.

재미를 보장합니다.

 

함께 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