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R/B> 亂中日記 (51) -李舜臣-

카지모도 2021. 3. 19. 06:47
728x90

 

병신년 9월 (1596년 9월)

 

 

 

9월 초1일 [양력 10월 21일] <甲午>

비가 뿌렸다. 새벽에 망궐례를 행했다. 일찍 떠나 석제원(강진군 성전면 성전리)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은 뒤에 영암에 이르러 향사당에서 잤다. 정랑 조팽년이 와서 봤다. 최숙남도 와서 봤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22일] <乙未>

맑다. 영암에서 머물렀다.

 

9월 3일 [양력 10월 23일] <丙申>

맑다. 아침에 떠나 나주의 신원에 이르렀다. 점심을 먹고 나서 나주판관을 불러다가 고을의 일들을 물었다. 저물 무렵에 나주에 이르렀다. 별관의 종 억만이 와서 신원에서 알현했다.

 

9월 4일 [양력 10월 24일] <丁酉>

맑다. 나주에서 머물렀다. 어두울 무렵 목사(이복남)가 술을 가지고 와서 권했다. 일추도 술잔을 가져 왔다. 이 날 아침에 체찰사와 함께 문묘에 절했다.

 

9월 5일 [양력 10월 25일] <戊戌>

맑다. 나주에서 머물렀다.

 

9월 6일 [양력 10월 26일] <己亥>

맑다. 먼저 무안의 일로 가겠다고 체찰사에게 보고하고 일을 떠났다. 고막원(고막원:나주시 다시면 고막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나주감목관 나덕준이 뒤쫓아와서 서로 만났다. 이야기 하는 중에 강개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오랫동안 이야 기하다가 저물어서 무안에 이르러 잤다.

 

9월 7일 [양력 10월 27일] <更子>

맑다. 감목관 나덕준(나준) 및 무안현감(남언상) 함께 민폐에 관한 이야기했다. 한참 있다가 정대청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청하여 앉아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떠나 다경포(무안군 운남면 성내리)에 이르러, 영광군수와 함께 밤 열 시쯤이나 되게 이야기했다.

 

9월 8일 [양력 10월 28일] <辛丑>

맑다. 나라제삿날(세조의 제사)인데도 오늘 새벽에 조반에 고기를 올려 놓았다. 그래서 나는 먹지도 않고 도로 내놓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서 감목관에 이르니 감목관과 영광군수는 같이 있었다. 국화 떨기 가운데로 들어가서 술 두어 잔을 마셨다. 저물어서 동산원(동산원:무안군 현경면 옹산원;옹산원) 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말을 재촉하여 임치진(해제면 임수리)에 이르니, 이공헌의 딸 여덟 살짜리 아이와 그 사촌의 계집종 수경이 같이 와서 알현했다. 이공헌을 곰곰히 생각하니 참혹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수경은 곧 이염의 집에서 내다 버렸는데,(이공헌이) 얻어다가 기른 아이이다.

 

9월 9일 [양력 10월 29일] <壬寅>

맑다. 일찍 일어나서 임치첨사 홍견을 불러 방비책을 물었다.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뒷성(후성)으로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고 동산원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뒤에 함평현에 이르렀다. 도중 에 한여경을 만났으나, 말위에서는 만나보기가 어려우므로 타일러서 함평으로 들어갔다. 함평현감은 경차관을 마중하러 나갔다고 했다. 김억창도 같이 함평에 왔다.

 

9월 10일 [양력 10월 30일] <癸卯>

맑다. 몸도 노곤하고 말도 힘들 것 같아서 함평에 머물러 잤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무안의 정대청이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고을 유생도 많이 들어와 폐단된 일을 진술했다. 저녁에 도사가 들어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밤 열 시쯤에 헤어져 나갔다.

 

9월 11일 [양력 10월 31일] <甲辰>

맑다. 아침식사를 하고나서 영광으로 갔다. 도중에 신경덕을 만나 잠깐 이야기하고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한 뒤에 들어와 같이 이야기했다. 이 때 산월도 와서 보고 술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누명을 벗길 수 없었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乙巳>

바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와 한여경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에 이르렀다. 여진과 잤다.

 

9월 13일 [양력 11월 2일] <丙午>

맑다. 이중익 및 이광축도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이중익이 말을 많이 하다가 막히어서 급하게 되니 옷을 벗고서 그에게 관여하며 종일 이야기했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丁未>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과 두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戊申>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어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과 세번 관계했다.

 

9월 16일 [양력 11월 5일] <己酉>

맑다. 체찰사 일행이 고창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뒤에 장성에 이르러서야 잤다.

 

9월 17일 [양력 11월 6일] <庚戌>

맑다. 체찰사와 부찰사는 입암산성(입암산성:정주시 입암면 임암산 해발 655m)으로 가고, 나는 혼자 진원현(장성군 진원면 석전리 진원)에 이르러 진원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종사관도 왔다. 저물어서 관청 안으로 들어가니 두 조카딸이 나와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못보았던 감회를 풀고 도로 작은 정자로 나가 진원현감 및 여러 조카들과 밤들도록 같이 이야기했다.

 

9월 18일 [양력 11월 7일] <辛亥>

비가 조금 내렸다. 식사를 한 뒤에 광주에 이르러 광주목사(최철견)와 이야기했다. 비가 많이 오더니, 한밤에는 달빛이 대낮 같았다. 밤 두 시쯤에 비바람이 세게 일었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壬子>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이 와서 봤다. 진원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오후에 능성현령(이계령)이 들어와서 곳간을 봉하고 광주목사를 체찰사가 파면시켰다고 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가 와서 잤다.

 

9월 20일 [양력 11월 9일] <癸丑>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각가지 사무보는 색리들의 죄를 논란했다. 저녁나절에 광주목사를 보고 길을 떠나려 할 즈음에 명나라 사람 두 명이 이야기 하자고 청하므로 술을 먹였다. 길을 떠났으나 종일 비가 내려 멀리 갈 수가 없어 화순에 이르러 잤다.

 

9월 21일 [양력 11월 10일] <甲寅>

개다가 비오다가 했다. 일찍 능성(화순군 능주면)에 이르러 최경루에 올라가 연주산을 바라보았다. 이 고을 원이 술을 청했다. 그래서 잠깐 취하고서 헤어졌다.

 

9월 22일 [양력 11월 11일] <乙卯>

맑다. 아침에 각가지의 죄를 논란했다. 저녁나절에 나가 이양원(화순군 이양면 이양리)에 이르니, 해운판관이 먼저 와 있었다.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청하므로 그와 함께 이야 기했다. 저물어서 보성군에 이르니 몸이 몹시 고단하여 잤다.

 

9월 23일 [양력 11월 12일] <丙辰>

맑다. 머물렀다. 나라제삿날(태조의 신의왕후 한씨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9월 24일 [양력 11월 13일] <丁巳>

맑다. 일찍 떠나 병사 선거이의 집에 이르니, 선거이의 병이 매우 중태였다. 염려된다. 저물어서 낙안에 이르러 잤다.

 

9월 25일 [양력 11월 14일] <戊午>

맑다. 색리 및 선중립의 죄를 논란했다. 순천에 이르러 순천 부사와 함께 같이 이야기했다.

 

9월 26일 [양력 11월 15일] <己未>

맑다. 일이 있어 더 머물렀다. 저녁에 순천부의 사람들이 소고기와 술을 차려 놓고 나오기를 청했다. 굳이 사양했으나 부사의 간청으로 잠깐 나가 마시고서 헤어졌다.

 

9월 27일 [양력 11월 16일] <庚申>

맑다. 일찍 떠나 가서 어머니를 뵈었다.

 

9월 28일 [양력 11월 17일] <辛酉>

맑다. 남양 아저씨의 생신이라 본영으로 왔다.

 

9월 29일 [양력 11월 18일] <壬戌>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동헌으로 나가 공문에 관인을 찍었다. 종일 앉아서 사무를 봤다.

 

9월 30일 [양력 11월 19일] <癸亥>

맑다. 옷 담아 둔 농을 꺼내어 둘은 곰내로 보내고, 하나만 본영(여수)에 남겨 두었다. 저녁에 선유사의 군관 신탁(신생)이 와서 군사들을 위하여 위로연을 베풀 날짜를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