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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亂中日記 (56) -李舜臣-

카지모도 2021. 3. 26.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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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7월 (1597년 7월)

 

 

 

7월 초1일 [양력 8월 13일] <庚寅>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다. 명나라 사람 세 명이 왔다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송대립과 송득운이 함께 왔다. 안각도 와서 봤다. 저녁에 서철 및 방덕수와 그 아들이 와서 잤다. 이 날 밤 가을 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하랴! 그대로 송득운은 원수의 진에 갔다가 왔는데, 종사관 황여일이 큰 냇가에서 피리를 불렀다고 하니 놀랍고 놀랄 일이다. 오늘은 인종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7월 2일 [양력 8월 14일] <辛巳>

맑다. 아침에 변덕수가 돌아왔다. 저녁나절에 신제운과 평해에 사는 정인서가 종사관의 심부름으로 문안하러 여기 왔다. 오늘이 곧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일인데,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복을 입고 있으니 사람의 일이 어찌 이러냐!

 

7월 3일 [양력 8월 15일] <壬午>

맑다.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뼈속으로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한층 더했다. 제사에 쓸 유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저녁나절에 정읍의 군사 이량·최언환·건손 등 세 사람을 심부름 시키라고 보내왔다. 저녁나절에 장준완이 남해에서 와서 보고 남해 원의 병이 중하다고 전하였다. 몹시 민망하다. 조금 있으니 합천군수 오운이 와서 보고, 산성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원수의 진으로 가니, 황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종사관은 전적 박안의와 활을 쐈다. 이때 좌병마사의 군관이 항복한 왜놈 두 명을 잡아 왔는데, 가등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 왔다. 그 때 고령 원이 성주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다.

 

7월 4일 [양력 8월 16일] <癸未>

맑다. 종사관 황여일이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방과 류황이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러 왔다. 흥양의 량점·찬·기 등이 왔다. 변여량· 변회보· 황언기 등이 모두 벼슬했다고 와서 봤다. 변사증과 변대성 등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뿌렸다. 아침밥을 먹을 때 안극가가 와서 봤다. 어두어서 비가 많이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7월 5일 [양력 8월 17일] <甲申>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초계원이 체찰사의 종사관 남이공이 경내를 지나간다고 하면서 산성에서부터 영문을 지나갔다. 저녁나절에 변덕수가 왔다. 변존서가 마흘방으로 갔다.

 

7월 6일 [양력 8월 18일] <乙酉>

맑다. 꿈에 윤삼빙을 보았는데 나주로 귀양간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이방이 와서 봤다. 홀로 빈방에 앉았으니 그리움과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저녁에 바깥채에 나가 앉았다. 변존서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각 형제도 변흥백을 따라 왔다. 이 날 제사에 쓸 중배끼 다섯 말을 꿀에다 반죽하여 시렁에 얹었다.

 

7월 7일 [양력 8월 19일] <丙戌>

맑다. 오늘은 칠석이다. 슬픔과 그리움을 어찌하랴! 꿈에 원균과 같이 모였다. 내가 원균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자 원균이 기쁜 빛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박영남이 한산에서 와서 그 주장의 잘못으로 대신 죄 받으러 원수에게 잡혔다고 했다. 초계 현감이 햇물건을 마련하여 보내왔다. 아침에 안각 형제가 와서 봤다. 저물어서 흥양의 박응사가 와서 봤다. 심준 등이 와서 봤다. 의령현감 김전이 고령에서 와서 병마사의 잘못된 일을 많이 말했다.

 

7월 8일 [양력 8월 20일] <丁亥>

맑다. 아침에 이방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집 주인 이어해와 최태보가 와서 봤다. 변덕수가 또 왔다. 저녁에 송대립·류홍·박영남이 왔다. 송과 류 두 사람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월 9일 [양력 8월 21일] <戊子>

맑다. 내일 아들 열을 아산으로 내려 보내고자 한다. 제사에 쓸 과일을 봉하는 것을 살펴봤다. 저녁나절에 윤감·문보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열과주부 변존서 등에게 전별하고 돌아갔다. 이 날 밤 달빛이 대낮 같았다. 어버이를 생각하니, 슬퍼서 울면서 밤늦도록 잠을 못잤다.

 

7월 10일 [양력 8월 22일] <己丑>

맑다. 열과 변존서를 보내려고 앉아서 날새기를 기다렸다가 일찌기 아침밥을 먹는데 정회를 스스로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걱정이 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종사관 황여일도 와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서철이 와서 봤다. 정상명이 싸움터에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종이로써 만들기를 마쳤다. 저녁에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이 끓어 올라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7월 11일 [양력 8월 23일] <庚寅>

맑다. 열이 어떻게 갔는지 생각하고 있으니 견딜 수 없다. 더위가 너무도 심하여 걱정 뿐이다. 저녁나절에 변홍달·신제운·림중형이 와서 봤다. 홀로 빈 대청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너무도 비통하다. 종 태문과 종이가 순천으로 갔다.

 

7월 12일 [양력 8월 24일] <辛卯>

맑다. 아침에 합천이 햅쌀과 수박을 보냈다. 점심밥을 지을 적에 방응원· 현응진· 홍우공· 림영립 등이 박명현이 있는 곳에서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종 평세는 열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다. 잘 갔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러나 슬퍼서 탄식함을 어찌 말로써 하랴! 이희남이 사철쑥(더위지기,생당쑥; 입추때에 베어 말려 냉, 황달,습열,간장염 등의 한약재로 씀)백 묶음을 베어 왔다.

 

7월 13일 [양력 8월 25일] <壬辰>

맑다. 아침에 남해현령이 편지를 보내고, 음식물도 많이 보냈다고 하고, 또 싸움말(전마)을 몰고 가라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이태수·조신옥·홍대방이 와서 보고, 또 적을 토벌할 일을 말하였다. 송대립·장득홍도 왔다. 장득홍은 스스로 마련한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양식 두 말을 내주었다. 이 날 칡을 캐어 왔다. 이방도 와서 봤다. 남해 아전과 심부름꾼 두 명이 왔다.

 

7월 14일 [양력 8월 26일] <癸巳>

맑다. 이른 아침에 정상명과 종 평세·종 귀인이 짐말 두 필을 남해로 보냈다. 정상명은 싸움말(전마)을 끌고 올 일로 보낸 것이다. 새벽 꿈에 나는 체찰사와 같이 어느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쫙 깔려 있었는데 혹은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게도 했다. 아침밥을 먹을 때 문인수가 와가채(모시조개 음식)와 동아선(동아를 기름에 볶아 잣가루를 묻혀 겨자를 찍어 먹는 술안주)을 가져 왔다. 방응원· 윤선각· 현응진· 홍우공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홍이라는 사람은 제 아버지의 병으로 종군하고 싶지 않아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니 엄청 놀랍다. 오전 열시쯤에 종사관 황여일은 정인서를 보내어 문안했다. 또 김해 사람으로 왜놈에게 부역했던 김억의 편지를 보이는데, "초7일 왜선 오백 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9일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시 영도구 영도) 앞 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닿았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종사관 황여일이 군사 점호하는 곳으로 달려 나가서 황 종사관과 상의하였다. 그대로 앉아서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조금있으니 내가 타고 간 말을 홍대방더러 달려보라고 했더니 잘 달렸다. 날씨가 비올 것 같아 돌아와 집에 이르자마자 비가 마구 쏟아졌다. 밤 열시 쯤에야 맑게 개이니 달빛이 낮보다 훨씬 더 밝았다. 쌓이는 그리움을 말할 수 없다.

 

7월 15일 [양력 8월 27일] <甲午>

비가 오락가락 하다. 저녁나절에 조신옥·홍대방 등과 여기 있는 윤선각까지 아홉 명을 불러 떡을 차려 먹었다. 가장 늦게 중군 이덕필이 왔다. 저물어서 돌아갔다. 그에게서 우리 수군 스무 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분통이 터진다. 한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다는 것이다. 어두워서 비가 많이 내렸다.

 

7월 16일 [양력 8월 28일] <乙未>

비오다 걷혔다 하면서 종일 흐리고 맑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손응남을 중군(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좌병사의 긴급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갖추 다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탄식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변의정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꼬락서니가 어리석고도 용렬하다. 두멧골에 묻혀 사는 사람인지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가 보다. 이 역시 거짓없고 인정이 두터운 태도이다. 이 날 낮에 이희남에게 칼을 갈게 했더니, 너무 잘들어 괴수 맨머리로 깎을만 했다.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졌다. 아들 열이 가는 길을 많이 생각하니 씁쓰레하다. 마음 속으로만 빌 뿐이다. 저녁에 영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4일에 전 병마사의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되어 초5일에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왔다가, 7일에는 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려는데,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라 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 내어 불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일천 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 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모두 살륙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 뿐인데, 수군마저 이와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으니,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선장 이엽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손응남이 집으로 돌아갔다.

 

7월 17일 [양력 8월 29일] <丙申>

가끔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이희남을 종사관 황여일에게 보내어 세남의 말을 전했다. 저녁나절에 초계원이 벽견산성에서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대립· 류황· 류홍· 장득홍 등이 와서 보고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변대헌·정운룡· 득룡·구종 등은 초계 아전인데 어머니 쪽의 같은 파 사람들로서 와서 봤다. 큰비가 종일 내렸다. 이름을 적지 않은 사령장을 신여길이 바다 가운데서 잃어버린 일로 심문받으러 갔다. 경상순변사가 그 기록을 가져 갔다.

 

7월 18일 [양력 8월 30일] <丁酉>

맑다. 새벽에 이덕필·변홍달이 전하여 말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전라우수사 이억기·충청수사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고 했다. 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오전 열 시가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나는 송대립·류황·윤선각·방응원 현응진 림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 한치겸도 왔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7월 19일 [양력 8월 31일] <戊戌>

종일 비가 내렸다. 오는 길에 단성의 동산 산성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대로 단성현에서 잤다.

 

7월 20일 [양력 9월 1일] <己亥>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에 권문임의 조카 권이청이 와서 봤다. 단성현감도 와서 봤다. 오정때에 진주 정개산성 아래 강정에 이르니, 진주목사가 와서 봤다. 굴동(옥종면 문암리)의 이희만의 집에서 잤다.

 

7월 21일 [양력 9월 2일] <更子>

맑다.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가 군에 있고, 백성들도 많이 본업에 힘써, 혹 이른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도 하고, 혹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영등포만호 조계종 등 여나믄 명이 와서 통곡하였으며,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함께 이야기했다. 밤 세 시(사경)가 되어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7월 22일 [양력 9월 3일] <辛丑>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남해현감 박대남이 있는 곳에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싸움말을 서로 바꿀 일을 다시 이야기했다. 종 평세와 군사 한 명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니, 몸이 불편하므로 잤다.

 

7월 23일 [양력 9월 4일] <壬寅>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노량에서 했던 공문을 송대립에게 부쳐 먼저 원수부에 갖다 주게 하고, 곧 뒤따라 떠나 십오리원(곤명면 봉계리)에 이르니, 백기 배흥립의 부인이 먼저 와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잠깐 쉬었다. 진주 굴동의 전에 묵었던 곳에 이르러 잤다. 백기 배흥립도 와서 잤다.

 

7월 24일 [양력 9월 5일] <癸卯>

비가 그침없이 내렸다. 한치겸·이안인이 부찰사에게로 돌아갔다. 정씨의 종 예손과 손씨의 종이 같이 돌아갔다. 식사를 한 뒤에 이홍훈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이 정개산성에서 와서, "종사관 황여일이 정개산성에 이르렀다"고 전하고, 연해안 사정을 듣고 본대로 전하더라는 것이다. 군량 스무 말, 말 먹이 콩 스무 말, 말 대갈 일곱 벌을 가져 왔다. 이 날 저녁에 조방장 배경남이 와서 보기에 술로써 위로했다.

 

7월 25일 [양력 9월 6일] <甲辰>

저녁나절에야 맑다. 종사관 황여일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했다. 조방장 김언공이 와서 보고서는 그 길로 원수부로 갔다. 배수립이 와서 보고, 이곳 주인 이홍훈이 와서 봤다. 남해현령 박대남이 자기의 종 용산을 보내어 내일 들어오겠다고 전했다. 저녁에 가서 백기 배흥립의 병을 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했다. 걱정이다. 송득운을 보내어 황종사관에게 문안했다.

 

7월 26일 [양력 9월 7일] <乙巳>

비가 오락가락 하다. 일찍 밥을 먹고 정개산성 아래에 있는 송정 아래로 가서 종사관 황여일과 진주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날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7월 27일 [양력 9월 8일] <丙午>

종일 비가 내렸다. 이른 아침에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의 집으로 옮겨가서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동지 이천과 판관 정제가 체찰사에게서 와서 전령을 전했다.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이 동지는 배 조방장에게 가서 잤다.

 

7월 28일 [양력 9월 9일] <丁未>

비가 내렸다. 이희량이 와서 봤다. 초저녁에 동지 이천 및 진주목사와 소촌찰방 이시경이 와서 왜적과 맞싸울 대책을 논의했다. 밤에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지나서 돌아갔다. 의논한 것은 모두 계책을 돕는 일이었다.

 

7월 29일 [양력 9월 10일] <戊申>

비가 오락가락 하다. 아침에 이군거(이군거:천의 자) 영감과 함께 밥을 먹고 체찰사 앞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는데, 원수가 보낸 자들은 모두 말도 없고 또 활과 화살도 없으니, 아무 쓸 데가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저녁에 돌아올 때 배 동지와 남해현령 박대남에게 들려 봤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찰방 이시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