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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4) -채만식-

카지모도 2021. 4. 10.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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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아니라, 시집오던 날루 났어두 고작 열댓 살밖에 안 되겠수…… 저어 초봉이가 올해 몇 살이지요? 스무 살? 그렇지요”

“스물한 살이랍니다!…… 거 키만 엄부렁하니 컸지, 원 미거해서…….”

정주사는 대답을 하면서 탑삭부리 한참봉의 곰방대에다가 방바닥에 놓인 쌈지에서 담배를 재어 붙여 문다.

“아이! 나는 꼭 샘이 나서 죽겠어! 다른 집 사남매 오남매보다 더 욕심이 나요!”

“정주사 조심허슈. 저 여편네가 저리다가는 댁의 딸애기 훔쳐 오겠수, 흐흐흐흐…….”

“허허허…….”

“훔쳐 올 수만 있대문야 훔쳐라두 오겠어요…… 정말이지.”

“저엉 그러시다면야 못 본 체할 테니 훔쳐 오십시오그려, 허허허.”

“호호, 그렇지만 그건 다아 농담의 말씀이구, 내가 어디 좋은 신랑을 하나 골라서 중매를 서드려야겠어요.”

“제발 좀 그래 주십시오. 집안이 형세는 달리는데 점점 나이는 들어 가구…… 그래 우리 마누라허구 앉으면 그리잖어두 그런 걱정을 한답니다.”

“아이 그러시다뿐이겠어요!…… 과년한 규수를 둔 댁에서야 내남 없이 다아 그렇지요. 그럼 내가, 이건 지낼 말루가 아니라, 그 애기한테 꼬옥 가합한 신랑을 하나 골라 디리께요.”

“저 여편네 큰일났군…….”

장기를 딱 딱 골라 놓고 앉았던 탑삭부리 한참봉이 한마디 거드는 소리다.

“……중매 잘못 서면 뺨이 세 대야!”

“그 대신 잘 서믄 술이 석 잔이라우.”

“그런가? 그럼 술이 생기거들랑 날 주구, 뺨은 이녁이 맞구 그릴까”

“술두 뺨두 다 당신이 차지허시우. 나는 덮어놓구 중매만 잘 설 터니…… 글쎄 이 일은 다른 중매허구는 달라요. 내가 규수를 좋게 보구 반해서, 호호, 정말 반했다우. 그래서, 자청해설랑 중매를 서는 거니깐, 그렇잖어요? 정주사.”

“허허, 그거야 원 어찌 되어서 서는 중매던 간에, 가합한 자리나 하나 골라 주시오.”

“자아, 그 이얘기는 그만했으면 됐으니 인제는 어서 장기나 둡시다. 두시오, 먼점.”

탑삭부리 한참봉이 장기가 급해서 재촉이다.

“저이는 장기라면 사족을 못 써요!…… 나 잠깐 나갔다 와요. 정주사, 천천히 노시다 가시구, 그건 그렇게 알구 계서요”

“네에, 믿구 기대리지요.”

“거 참, 나갈 길이거던 장으루 둘러서 도미라두 한 마리 사다가 찜을 하던지 해서, 고서방 먹게 해주구려…… 요새 찬이 좀 어설픈 모양이더군그래”

탑삭부리 한서방은 벌써 정신은 장기판으로 가서 있고 입만 놀린다. 고서방이란 이 집에 하숙을 하고 있는 ××은행의 태수 말이다.

정주사는 도미찜 소리에 침이 꼴깍 넘어가고 시장기가 새로 드는 것 같았다.

 

 

2 생활 제일과(第一課)

 

정거장에서 들어오자면 영정(榮町)으로 갈려 드는 세거리 바른편 귀퉁이에 있는 제중당(濟衆堂)이라는 양약국이다.

차려 놓은 품새야 대처면 아무 데고 흔히 있는 평범한 양약국이요, 규모도 그다지 크지는 못하다. 그러나 제중당이라는 간판은, 주인이요 약제사요 촌사람의 웬만한 병론(病論)이면 척척 의사질까지 해내는, 박제호(朴濟浩)의 그 말대가리같이 기다란 얼굴과, 삼십부터 대머리가 훌러덩 벗겨져서 가뜩이나 긴 얼굴을 겁나게 더 길어 보이게 하는 대머리와, 데데데데하기는 해도 입담이 좋은 구변과, 그 데데거리는 말끝마다 빠트리지 않는 군가락 ‘제기할 것!’ 소리와, 팥을 가지고 앉아서라도 콩이라고 남을 삶아 넘기는 떡심과…… 이러한 것들로 더불어 십 년 이짝 이 군산 바닥에는 사람의 얼굴로 치면 마치 큼직한 점이 박혔다든가, 핼끔한 애꾸눈이라든가처럼 특수하게 인상이 박히고 선전이 되고 한, 만만찮은 가게다.

가게에는 지금 제호의 기다란 얼굴은 보이지 않고, 초봉이가 혼자 테이블을 타고 앉아서 낡은 부인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초봉이는 시방 집안일이 마음에 걸려 진득이 있을 수가 없다. 종시 돈이 변통되지 못하면 어찌하나 싶어 초조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잊고 앉아 절로 시간이 가게 하느라고 잡지의 소설 한 대문을 읽는 시늉은 하나 마음대로 정신이 쏠려지지는 않았다.

기둥에 걸린 둥근 괘종이 네시를 친다. 벌써 네신가 싶어 고개를 쳐들면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헙수룩하게 생긴 촌사람 하나가 철 이른 대팻밥모자를 벗으면서 끼웃이 들어선다.

“어서 오십시오.”

초봉이는 사뿐 일어서서 진열장 뒤로 다가 나온다. 가게 사람이 손님을 맞이하는 여느 인사지만 말소리가 하도 사근사근하면서도 뒤끝이 자지러질 듯 무령하게 사그러지는 그의 말소리가, 약사러 들어선 촌사람의 주의를 끌어 더욱 어릿거리게 한다.

초봉이의 그처럼 끝이 힘없이 스러지는 연삽한 말소리와 그리고 귀가 너무 작은 것을, 그의 부친 정주사는 그것이 단명(短命)할 상이라고 늘 혀를 차곤 한다.

말소리가 그럴 뿐 아니라 얼굴 생김새도 복성스러운 구석이 없고 청초하기만 한 것이 어디라 없이 불안스럽다.

티끌 없이 해맑은 바탕에 오뚝 날이 선 코가 우선 눈에 뜨인다. 갸름한 하장이 아래로 좁아 내려가다가 급하다 할 만치 빨랐다.

눈은 둥근 눈이지만 눈초리가 째지다가 남은 것이 있어 길어 보이고, 거기에 무엇인지 비밀이 잠긴 것 같다.

윤곽과 바탕이 이러니 자연 선도 가늘어서 들국화답게 초초하다. 그래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웬일인지 위태위태하여 부지중 안타까운 마음이 나게 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자면 청승스런 얼굴이나 그런 흠을 많이 가려 주는 것이 그의 입과 턱이다.

조그맣게 그려진 입이, 오긋하니 동근 주걱턱과 아울러 그저 볼 때도 볼 때지만 무심코 해죽이 웃을 적이면 아담스런 교태가 아낌없이 드러난다.

그는 의복이야 노상 헙수룩한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 입고 다니지만, 나이가 그럴 나이라 굵지 않은 몸집이 얼굴과 한가지로 알맞게 살이 오르고 피어나, 미상불 화장품 장사까지 겸하는 양약국에는 마침 좋은 간판감이다.

올 이월, 초봉이가 이 가게에 나와 있으면서부터 보통 약도 약이려니와 젊은 서방님네가 사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면서 항용 살 수 있는 화장품이며, 인단, 카올, 이런 것은 전보다 삼곱 사곱이나 더 팔렸다.

주인 제호는 그러한 제 이문이 있기 때문에 초봉이를 소중하게 다루기도 하려니와 또 고향이 같은 서천이요, 교분까지 있는 친구 정영배--정주사의 자녀라는 체면으로라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처지다.

그러나, 그런 관계나 저런 타산 말고라도 이쁘게 생긴 초봉이를 제호는 이뻐한다.

일곱 살 먹은 어린아이가 다리를 삐었다고, 마치 병원에 온 것처럼이나 병론을 하는 사람한테 이십 전짜리 옥도정기 한 병을 팔고 나니 가게는 다시 빈다. 늘 두고 보아도 장날이 아니면, 바로 세시 요맘 때면 언제든지 손님의 발이 뜬다.

초봉이는 도로 테이블 앞으로 가서 잡지장을 뒤지기도 내키지 않고 해서, 뒤 약장에 등을 기대고 우두커니 바깥을 내다본다.

그는 혹시 모친이 올까 하고 아침에 가게에 나오던 길로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린다. 아침을 못해먹었으니, 그새라도 혹시 양식이 생겨서 밥을 해먹었으면, 알뜰한 모친이라 점심을 내오는 체하고 벤또에다가 밥을 담아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껏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대로 굶고 있기가 십상이다.

초봉이 제 한 입이야 시장한 깐으로 하면, 그래서 먹자고 들면, 가게에 전화도 있고 하니 매식집에서 무엇이든지 청해다가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집안이 죄다 굶고 앉았는데, 저 혼자만 음식을 사먹을 생각은 염에도 나지를 않았다. 모친이 밥을 내오기를 기다리는 것도, 집에서 밥을 먹었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시름없이 섰는 동안에, 추렷한 부친의 몰골, 바느질로 허리가 굽은 모친, 배가 고파서 비실비실하는 동생들의 애처로운 꼴, 이런 것들이 자꾸만 눈앞에 얼찐거리면서 저절로 눈가가 따가워진다.

아까 옥도정기 한 병을 팔고 받은 십 전박이 두 푼이 손에 쥐어진 채 잘랑잘랑한다.

늘 집에서 밥을 굶을 때, 가게에 나와서 물건 판 돈이라도 돈을 손에 쥐어 보면 생각이 나듯이,

이 돈 이십 전이나마도 집에 보내 줄 수 있는 내 것이라면 오죽이나 좋을까 싶어, 곰곰이 손바닥이 내려다보여진다.

그는 지금 만일 계봉이든지 형주든지 동생이 배가 고파하는 얼굴로 시름없이 가게를 찾아온다면,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이 손에 쥔 이십 전을 선뜻 주어 보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나던 참이라 무심코 동생들이 혹시 가게 앞으로 지나가지나 않나 하고, 오고 가는 아이들을 유심히 본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아예 집으로 보내 주기라도 할 도리를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소심한 초봉이로, 거기까지는 남의 것을 제 마음대로 손을 댈 기운이 나지 않았다.

길 건너편 샛골목에서 행화가 나오더니 해죽이 웃고 가게로 들어선다.

“혼자 계시능구마…… 쥔나리는 어데 갔능기요”

“어서 오세요. 벌써 아침 나절에 나가시더니, 여태…….”

초봉이도, 손님이라기보다 동무처럼 마음을 놓고 웃는 낯으로 반겨 맞는다.

본시야 초봉이가 기생을 안다거나 사귄다거나 할 일이 있었을까마는 가게에서 일을 보자니까, 자연 그러한 여자들도 손님으로 접촉을 하게 되고, 그러는 동안에 그가 단골 손님이면 낯을 익히게 된다.

행화는, 처음 가게에 나오던 때부터 정해 놓고 며칠만큼씩 가루우유를 사가고 가끔 화장품도 사가고 전화도 빌려 쓰고 했는데, 그럴 때면 주인 제호가, 행화 행화 하면서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하고 하는 바람에 초봉이도 자연 그의 이름까지 알게 된 것이다.

초봉이는 몇몇 단골로 다니는 기생 가운데, 이 행화를 제일 좋아한다. 그것은 행화가 얼굴이 도렴직하니 코언저리로 기미가 살풋 앉은 것까지도 귀인성이 있고, 말소리가 영남 사투리로 구수한 것도 마음에 들지만, 다른 기생들처럼 생김새나 하는 짓이나가 빤질거리지 않고 숫두룸한 게실없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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