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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6) -채만식-

카지모도 2021. 4. 12.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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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봉이는 본 체도 않는다. 그는 윤희한테 마주 해대지 못하고서 병신스럽게 당하기만 하던 일이 새 채비로 분했다.

하기야 지지 않고 같이 들어서 다투는 날이면, 자연 주객이 갈리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는 날이면 다시 직업을 얻기도 만만치 않거니와, 얻어진대도, 지금같이 장래 보기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오늘이라도 이 집을 그만두면 매삭 이십 원이나마 벌이가 끊기니 집안이 그만큼 더 어려울 것이요, 하니 웬만하면 짐짓이라도 져주는 게 뒷일이 각다분하지 않을 형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타산이야 흥분되기 전 일이요, 일을 잡치고 난 뒤에 가서,

‘참았더라면 좋았을걸…….’

할 후횟거리지, 당장은 꼿꼿한 배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늘부터라도 그만두면 그만이지…….’

무럭무럭 치닫는 부아가 이렇게쯤 다부진 마음을 먹을 수까지도 있다. 그래서 어엿하게 고개를 쳐들고 활활 해부딪쳐 주려고까지 별렀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하지를 못했다.

초봉이는 비단 오늘 일뿐 아니라 크고 작은 일이고 간에, 누구한테든지 저 하고 싶은 대로 고집을 세운다든가, 속에 있는 말을 조백이게 해대지를 못한다. 속이야 다 우렁잇속같이 있으면서 말을 하자고 들면, 가령 그것이 억울하다든가 분한 경우라든가, 기운이 겉으로 시원시원하게 내뿜기지를 못하고 속으로만 수그러들어 목이 잠기고 눈물이 앞을 서곤 한다.

흥분이 심하면 심할수록에 그것이 더하다.

오늘 일만 해도, 그는 윤희한테 무슨 정가 막힐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버젓하게 다 해댈 말이 있는 것을 부질없이 말은 막히고서 나오지 않고, 남 보기에는 무슨 죄나 진 것같이 울기부터 한 것이다.

전화통에는 윤희가 내동댕이를 친 채로 수화기가 디룽디룽 매달려 있다.

그렇거나 말거나 다른 전화 같으면 심술로라도 내버려두겠지만, 혹시 승재가 그대로 기다리고 있을까 민망해서 얼핏 수화기를 올려 들었다.

“여보세요.”

잠긴 목을 가다듬어 겨우 소리를 내니까,

“거 웬 난리가…….”

승재의 대답이 바로 들린다.

“아녜요, 여기 아주머니가 아저씨한테서 온 전환 줄 알구…….”

“흐응! 거 대단하군.”

초봉이는 금시 노염이 사라지고, 그 대신 입과 눈이 아까처럼 혼자 웃는다.

“……저어, 로지농 칼슘 있지요.”

“네에 있어요. 보내 드릴까요”

“한 곽만…… 곧 좀…….”

“네에 시방 곧 보내 드리께요.”

“그럼 한 곽만…….”

초봉이는 전화가 끊기는 소리를 듣고도 그대로 한참이나 섰다가 겨우 돌아선다.

그는 무어라고 아무 이야기라도 좋으니 좀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럴 바이면 이편에서 전화를 걸 수도 있고, 또 전화가 끊기기 전에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그저 이야기가 하고 싶었지,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고, 모르니까 하재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언제고 전화를 끊고 나선 저 혼자만 섭섭해하는 것이다.

초봉이는 실상 승재와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다. 승재가 초봉이네 집 아랫방을 얻어서 거처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니까 둘이는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대하는 터에, 밖에 나와서 전화로 이야기를 해야만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집에서 부모네가 그것을 간섭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니…….

그러나 둘이는 집에서는 사세부득한 것말고는 서로 말이 없이 지낸다. 내외나 조심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둘이는 그러고 지낸다.

그것을 지금 초봉이더러,

“너 승재한테 맘이 있는 게로구나”

이렇게 묻는다면 초봉이는 아니라고 기를 쓰고,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뒤바꾸어, 승재더러 그 말을 물어도 역시 그럴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초봉이는 로지농 칼슘 한 곽을 꺼내다가 전표를 써서, 먼저 준비해 논 태수의 것까지 아이를 주어 배달을 하라고, 태수의 것은 이러저러한 데 있는 그의 하숙집으로 갖다 주라고 이르니까 아이놈이 연신 빈들빈들 초봉이의 얼굴을 치어다보면서,

“고상이오? ××은행 고상이오”

해쌓는 것이 아무래도 사람을 구슬리는 양이다.

“너 왜 그러니? 그이가 무얼 어쨌니”

초봉이는 머루 먹은 속이라도, 무심결에 따라 웃으면서 물어 보는 것이다.

“아녜요, 히히…….”

“저 애가 왜 저럴까”

“아녜요, 고상이 어쩔 양으루 오늘은 자기가 안 오구서 이렇게 배달을 시키니깐 말이지요……헤헤 헤헤.”

“누군데 저 애가 왜 저래”

“아-주, 조상두(초봉이) 시치미를 뚜욱 따요!”

“저 애 좀 봐요! 내가 무얼 시치미를 딴다구 그래애!”

“그럼 안 따요? 사흘에 한 번씩은 꼭 가게에 와설랑 무엇이구 사가는 고상을 조상이 몰라요? 다아 알면서…….”

“그래도 나는 모르는 걸 어떡허니? 허구많은 손님을 누가 일일이 다아 낯을 익혀 둔다더냐.”

“그래두 고상은 특별히 다르다나요! 누구 때문에 육장 와서 쓸데두 없는 것을 사가는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모르긴 왜 몰라요! 다아 조상 얼굴 볼려구 그리는데, 히히…… 척 연앨…….”

“저 애가!”

초봉이는 잘급해 소리를 지르는데, 얼굴은 절로서 화틋 단다.

하고, 일변 그렇게 듣고 생각해 보니 아닌게아니라 낯을 암직한 여러 손님 가운데 한 사람, 아리송하니 얼굴이 머리에 떠오른다.

후리후리한 몸에 차악 맞는 양복을 입고, 갸름한 얼굴이 해맑고, 코가 준수하고, 웃입술을 간드러지게 벌려 방긋 웃고, 그래서 무척 안길 성 있이 생기기는 생겼어도, 눈이 오굿한 매눈에 눈자가 몹시 표독스러워 보이는, 그 사람이 그러면 ××은행에 다니는, 그리고 탑삭부리 한참봉네 집에 기식을 하고 있다는, 또 그리고 배달하는 아이 말대로 초봉이 저를 보려고 자주 물건을 사러 가게에 온다는 그 사람인 게로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그러자 초봉이는 웬일인지 아까 첫번과는 달리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그 사람 고태수의 얼굴이 다시금 떠오르더니 그것을 요모로 조모로 뜯어보는데, 또 그러자 문득 승재와 비교가 되어지면서 비교된 결과는 생김새로든지 처지로든지 승재가 훨씬 못한 것이 단박 드러나고, 하니까는 그 다음에는 승재를 위해서 고태수한테 시기가 난다.

그래, 분개해서 고태수를 들이 미워해야 하겠는데,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가 미워지질 않고 자꾸만 더 돋보인다.

그럴 수가 있을까 보냐고 도로 또 비교를 해본다.

승재는 장차에야 버젓한 의사가 될 사람이지만, 지금은 겨우 남의 병원의 조수요, 고태수는 당장 한 사람 몫을 하고 있는 은행원이다.

생김새도 승재가 못생긴 것은 아니나, 고태수가 멀끔한 것이 매력이 있다.

승재는 고태수의 조화된 데 비해서, 아무렇게나 생긴 사람이다.

키가 훨씬 더 크고, 몸도 크고, 어깨통이 떠억 벌어졌다.

얼굴은 두툼하니 넓죽하고, 이마도 퍽 넓다. 그래서 실직하고 무게는 있어 보여도 매초롬한 고운 태는 찾으려도 없다.

얼굴은 눈퉁이며, 눈이며, 코, 입 이런 것들이 제자리는 제자리라도, 너무 울퉁불퉁하게 솟을 놈 솟고 박힐 놈 박히고 해서 조각적이기는 해도, 고태수라는 사람처럼 그린 듯 곱지는 못하다. 다만 그의 눈만은 고태수의 눈과는 문제도 안 되게 좋다. 어느 산중에 있는 깊은 호수같이 맑고도 고요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어도, 이 세상 좋은 것이라고는 다 그 눈에 가 들었는 성싶은 그런 눈이다. 그리고 이 눈으로 해서 승재의 그 아무렇게나 생긴 얼굴이 흉을 가리고 남는다.

못하거니 하고, 그럴 수가 있을까 보냐고 다시금 둘을 빗대 보던 초봉이는 승재의 눈에 이르러 흠뻑 만족을 한다.

만족을 하고 그 기분이 그대로 승재의 모습으로 옮아 가서, 그의 올라앉아 말 탄 양반 훨훨 소 탄 양반 끄덕끄덕을 하고 싶은 어깨통, 이편이 몸뚱이를 가져다가 콱 가슴에 부딪뜨리면 바위같이 움찍도 안 할 듯싶은 건장한 몸뚱이, 후련하게 뚜렷한 얼굴과 넓은 이마, 그리고 다시 그렇듯 맑고 고요한 눈,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도 생각해 보고 전체로도 생각해 보고 하노라니까, 비로소 고태수라는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잠깐 잊혀지고, 승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차악 안심이 되고 기쁘고 한다.

처지를 대놓고 보아도 실상은, 도리어 둘을 같이 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승재는 작년 시월에 서울 가서 치르고 온 의사 시험에 반은 넘겨 패스가 되었으니까, 그리고 금년 시월 시험이나, 늦어도 명년 오월 시험까지 한 번 아니면 두 번만 더 치르면, 전과목이 다 패스가 되어 옹근 의사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럴 날이면 한낱 은행원쯤 부럽지 않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초봉이는 한숨을 호 내쉬면서 가슴에다가 무심코 손을 얹는다. 안심의 표적인 것이다.

이렇듯 만족도 하고 안심도 하는데,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일변 따로, 한번 머릿속에 박혀진 고태수의 영상은 그대로 처져 있고 종시 사라지질 않는다.

그것은 마치 그의 곱다란 얼굴과 좋은 몸맵시를, 궁하고 보잘것없는 승재의 옆으로 들이대면서 자아 어떻수? 하고 비교해 보라고 느물거리는 것만 같다.

짜증이 나서 고태수한테 눈을 흘겨 준다. 그러나 빈들빈들 웃기만 하지, 물러가려고 하지 않는다.

제호가 마침 그제야 털털거리고 가게로 들어선다.

“어허, 이거 우리 초봉이가 혼자서 수고하는군. 제기할 것…….”

그는 기다란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수선을 피운다.

“……초봉이 혼자서 수고를 했어. 이놈은 어디 갔나…… 옳지, 배달 나간 거루구만? 그렇지…… 어 후-후- 더웁다. 인전 제법 더웁단 말야, 제기할 것.”

한편 떠들면서 좋아하는 양이 단단히 좋은 일이 있는 눈치다.

초봉이도 그에 섭쓸려 웃으면서, 손가방을 받아 준다.

“응? 그래, 저리 좀 내던져 주어…… 건데 초봉이가 자꾸만 저렇게 이뻐져서 저거 야단났군! 야단났어, 허허허허, 제기할 것. 멀, 이쁘면 좋지, 허허허허. 건데 말야, 응…… 지금 아주 대대적으루 존 일이 생겼단 말야. 대대적으루 응…… 그리구 우리 초봉이한테두 대대적으루 존 일이구, 허허허. 제기할 것, 인전 됐다.”

제호는 언제고 그렇지만, 오늘은 유독히 더 정신을 못 차리게 혼자 찧고 까불고 하면서 북새를 놓는다.

초봉이는 대체, 좋은 일이라면서 저렇게 떠들어 대니 무얼 가지고 저러나 싶어 속으로 적잖이 궁금했다.

제호는 초봉이가 앉은 테이블 앞에 걸상에 가서 털씬 걸터앉아 모자를 벗어 가지고 번질번질한 대머리 얼러 얼굴에 부채질을 한다.

그러다가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초봉이가 가방을 들고 섰는 것을 보고…….

“응응! 거기 있군…… 나는 또 어디다가 내버리고 왔다구. 제기할 것, 거 잘 좀 갖다가 제약실 안에 둬두라구.”

아까는 내던지라더니 이제는 또 잘 갖다 두란다.

“……그 속에 좋은 게 들었단 말야, 그 속에…… 오늘 아주 대성공이야 대성공. 건데 초봉이두 좋은 일이 있어. 시방, 시방 이야기허까? 가만 있자. 나 담배 한개 피우구, 응? 아뿔싸? 담배가 없군…… 이놈은 어디 갔누? 옳아, 배달 나갔지, 제기할 것. 빙수 한 그릇 먹었으면 조오켔다. 시방 빙수 팔까? 아직 없을 테지”

“글쎄요”

“없을 거야, 없어. 제기할 것, 이게 다아 여편네 잘못 만난 놈의 고생이야. 아, 이런 때 척 밀수나 한 그릇 타다가 주군 하면 오죽 좋아? 밤낮 그 히스테리만 부리지 말구, 응? 그렇잖아? 허허 제길할 것.”

“아주머니가 참 퍽 기대리셨어요!”

“아뿔싸!”

제호는 무릎을 칠 듯이 깨우치고는 잠시 멍하다가 뒤통수를 긁는다.

“……이거 야단났군!…… 오늘 두시에 동부인합시구 제 동무네 친정집 한갑잔치에 가기루 했었는데. 그만 깜박 잊었지!…… 안 잊었어두 보던 일이야 제쳐 놓구 오지는 못했겠지만…… 그래 나와서 무어래지”

“머, 별루…….”

초봉이는 소경사를 다 이야기할까 하다가 그만둔다.

“재랄하잖어”

“두 번이나 나오셔서, 아저씨 안 오셨느냐구…….”

“아냐! 분명 재랄을 했을 거야, 분명. 그래 재랄을 하다가 혼자 간 모양이? 그러니 이거 야단 아냐? 그놈의 성화를 어떻게 받나! 제기할 것, 돈 백 원만 얹어 주겠시니 누구 그놈의 여편네 좀 물어 가는 사람 없나? 허허 제기할 것.”

“아이머니나! 숭헌 소리두 퍽두 허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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