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그렇다면은, 밀고를 하기는 해도 일이 한꺼번에 와락 튕겨지지를 않고 수군수군하는 동안에 제가 눈치를 채도록, 그렇게 어떻게 농간을 부리는 재주가 없을까
어제로 그저께로 형보의 골똘히 궁리하고 있는 게 이것이다.
태수는 형보의 그러한 험한 보짱이야 물론 알고 있을 턱이 없다. 그는 가끔 무서운 꿈은 꾸어도 깨고 나면 종시 명랑하고 유쾌하다.
오늘 아침에는 그는 자리 속에서 잠이 애벌만 깨어 눈이 실실 감기는 것을, 초봉이가 보이지 않으니까 보고 싶어서, 여보오 하고 영감처럼 그렇게 구수하게 부르던 것이다.
초봉이는 대답을 하고 신발을 끌면서 올라와서 방으로 들어선다. 바깥은 훤해도 방 안은 아직 어슴푸레하다.
태수는 눈을 쥐어뜯고 초봉이를 올려다보면서 헤벌심 웃는다. 초봉이는 아직도 수줍음이 가시지 않아서, 태수와 얼굴이 마주치면 부끄럼을 타느라고 웃기 먼저 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태수도 웃고, 초봉이도 웃고, 이렇게 하고 나면 태수는 볼일은 만족히 끝난다. 눈앞에 초봉이가 보였고, 웃어 주었고, 그래서 태수 저도 웃었고…….
“몇 시지”
“다섯시, 반.”
“밥 지우”
“아직…….”
“헤에.”
초봉이는 벌써 열흘째나 두고 아침 저녁으로 이렇게 속으니까, 인제는 길이 들어서 아주 그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참, 여보”
초봉이가 마악 돌아서서 나오려고 하는데, 태수가 전에 없이 긴하게 불러 놓더니,
“……그런데…… 저어 거시키, 한 천 원은 있어야겠지”
태수는 밑도 끝도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초봉이는 무슨 소린지 몰라서 뚜렛뚜렛한다.
“……아따, 저어 아버지, 저어 장사하실 것 말야…….”
초봉이는 비로소 알아듣기는 했으나 그냥 웃기만 한다. 그는 애초에 일을,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태수가 그것을 해줄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심을 먹으면서 이따가 저녁을 먹는다는 것을 측량하지 않듯이 별반 괘념을 않고 있었던 참이다.
“……일러루 와서 좀 앉아요. 생각났던 길에 그거 상의나 하게…….”
태수는 머리맡에 있는 담뱃갑을 집어다가 피워 물면서 베갯머리께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초봉이는 시키는 대로 가서 앉고, 태수는 그의 무릎에다가 팔을 들어 얹는다.
“……한 천 원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떨꼬? 모자랄까”
“글쎄…….”
“글쎄라니! 우리 둘이서 상읠 해야지.”
“그래두…….”
초봉이는 사실은 이래라저래라 하고 같이서 말을 하기가 막상 거북했다.
당초에 그러한 조건으로 결혼을 했고, 그랬대서 저편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얼른 내달아 콩이야 팥이야 하는 건, 새삼스럽게 제 몸뚱어리를 놓고서 흥정을 하는 것 같이나 불쾌한 생각이 들던 것이다.
또, 천 원이라고는 하지만, 천 원이라는 액수가 초봉이한테는 막연한 숫자라, 그놈이 어느 정도의 돈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전에 듣잔즉 몇천 원을 대주겠다고 했다면서 태수는 지금 천 원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다고, 여보 처음에는 몇천 원이라고 했다더니…… 이렇게 따지자니, 그야말로 몸값 흥정의 상지가 될 판이다.
그러니, 내가 그 일에 말참견을 않는다고 대주자던 돈을 안 대줄 이치도 없는 것, 나는 모른 체하고 말려니 굳이 상의를 하고 싶으면 아버지와 둘이서 천 원이고 혹은 몇천 원이고 좋도록 귀정을 내겠지. 이렇대서 초봉이는 빠져 버리자는 것이다.
태수는 처음 혼인말을 건넬 때야, 공중 그저 그놈에 혹하기나 하라고 장사 밑천을 얼마간 대주마고 했던 것이나, 인제 문득 생각하니 그놈 거짓말을 정말로 둘러 놓아도 해롭잖은 노릇일 것 같았다.
첫째 기왕 남의 돈에 손을 대어 일을 저지른 바에야 돈이나 한 천원 더 집어낸다더라도 결국 일반일 바이면 다른 일에나 뒤를 깨끗이 해두는 게 사내자식다운 활협이니, 함직한 노릇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놓고 죽으면 제가 죽는 날 불행히 초봉이를 데리구 같이 죽지 못하더라도 초봉이는 그 끈으로 저의 부친을 의지삼아 그다지 몹쓸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이니, 그도 함직한 노릇이다.
그런데 또 보아라! 그 말을 꺼내 놓으니, 초봉이가 사양은 하면서도 저렇게 은근히 좋아하질 않느냔 말이다. 초봉이를 즐겁게 해줌은 바로 내 즐거움이거든, 이날에 천 원은 말고 만 원도 헗다! 만 원이라도 내게는 종잇조각 하나…… 흥! 만 원은 말고 백만 원을 먹었은들, 어느 누구 시체를 감히 벌할 자 있느냐? 쾌하다! 시원타!…… 오냐, 수일 간 기회를 보아서 몇천 원이고…….
이것은 물론 일이 뒤집히는 마당이면 정주사의 장사 밑천도 태수가 대어 준 것이 탄로가 날 것이고, 따라서 도로 다 뺏기게 될 것이지만, 태수는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그래두가 무어야? 우리 둘이서 얘길 해가지구…….”
태수는 초봉이의 무릎을 잡아 흔들면서 조른다.
“……응? 그래야 할 거 아냐”
“전 모르겠어요!”
초봉이는 그만 해두고 일어서서 뒷걸음질을 친다.
“이잉! 그럼 어떻게 해”
“저어, 아버지허구…… 아버지허구 상의해 보세요.”
“아아, 아버지하구…… 그건 나두 알지만 말야…….”
“그럼 됐지요, 머…….”
“그래두 우리 아씨한테 한번 상의는 해야지, 헤헤.”
“몰라요!”
아씨란 말에 질겁해서 초봉이는 얼굴이 빨개진다.
“아하하하, 그럼 아씨 아닌가”
“몰라요! 난 나갈 테에요…….”
초봉이는 뒤로 미닫이를 열고 나가려다가,
“……오늘은 국화 모종 꼭 사가지구 오세요”
“국화 모종? 그래그래, 오늘은 꼭 사가지구 오께.”
“다섯 포기만…….”
“겨우…… 한 여남은 포기 사다가 심지.”
“화분이 다섯 개뿐인걸”
“화분두 사지”
처억척 대답은 하면서도 태수는, 너는 누구더러 보라고 국화를 심자 하느냐고, 아무 내평도 모르고서 어린아이처럼 좋아만 하는 초봉이가 측은하여 다시금 얼굴이 치어다보였다.
초봉이가 부엌으로 내려간 뒤에 건넌방에서 형보가 잠이 깨었다는 통기를 하듯 쿠욱 캐액 담을 배앝더니,
“고주사 기침하셨나”
하고 소리를 지른다. 일상 하는 짓이라 태수는,
“어-”
하고 궁상맞게 대답을 한다.
형보는 속으로, 어디 이 녀석을 오늘은 좀 위협이라도 슬그머니 해주리라고 벼르면서 유카다 자락을 펄럭이면서 안방으로 건너온다.
부엌에서 형보의 음성을 듣던 초봉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오싹한다. 초봉이는 형보가 처음부터 섬뜩하더니 끝끝내 그가 싫고, 마치 커다란 구렁이라도 한 마리 건넌방에 가 사리고 있는 것만 같아 시시로 무서운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저를 타이르고, 물론 겉으로는 흔연 대접을 해왔었고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갈수록 무서움이 더하면 더했지 가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초봉이가 형보의 음흉한 속내를 눈치채거나 했던 것은 결코 아니고 다만 그의 외양이 그 중에도 퀭한 눈방울이 너무도 무서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수는 회회 감기는 자줏빛 명주 처네를 걸친 채 팔을 내뻗어 불끈 기지개를 쓴다. 형보는 물향내와 살냄새가 한데 섞여 취할 듯 이상스럽게 물큰한 규방의 냄새에 코를 사냥개처럼 벌씸거리면서 너푼 들어앉는다. 그는 이 냄새를 매일 아침같이 맡곤 하는데, 그러노라면 초봉이의 몸뚱이가 연상이 되고 하여 그 흥분이 괴로우면서도 맛이 있었다. 그는 그래서, 별로 할 이야기가 없더라도 아침이면 많이 문을 여닫아 그 냄새가 빠져 버리기 전에 안방으로 건너오곤 한다.
“나는 어제 저녁에 신흥동(유곽) 갔다 왔다, 제기.”
“그러느라구 새벽에 들어왔네그려…… 망할 것!”
“왜 망할 것야? 느이끼리 하두 지랄을 하구 그러니, 어디 견딜 수가 있더냐…… 늙두 젊두 않은 놈이 건넌방에 가 처박혀서.”
“……면 돈 안 들구 좋았지? 하하하하.”
“네라끼!…… 허허허허, 그거 원 참!”
“하하하하.”
“허! 그거 참…… 그러나저러나 간에 여보게, 태수”
형보는 부자연하다 할 만큼 농담하던 것을 쉽게 거두고서 점잖스럽게 기색을 고쳐 갖는다. 태수는 무언고 하고 형보를 바라다보면서 그 다음을 기다린다.
형보는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고는 제법 소곤소곤, 그리고 다정하게,
“다아 이건 조용한 틈이길래 하는 말이네마는, 대체 자네는 어쩔 셈으루다가 이렇게 태평세월인가? 응”
“무엇이”
태수는 첫마디에 알아듣고도, 그래서 이 사람이 왜 방정맞게 식전 마수에 재수없이 그따위 소리를 꺼낼까 보냐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그래 짐짓 못 알아들은 체하던 것이다.
“못 알아들어? 저 거시키, 소소…….”
“으응…… 쯧! 할 수 있나!”
태수는 성가신 듯 씹어 뱉는다.
“할 수 있나라께? 그래, 날 잡아잡수우 하구 그냥 앉아서 일을 당할 테란 말인가? 그 일을? 그 흉한…….”
“당하긴 왜 당해? 괜찮어, 일없어.”
“일없다? 안 당한다”
형보는 가볍게 놀란 제 기색을 얼른 가누면서,
“……아니, 그러면 혹시 어떻게 모면할 도리라두 채려 놨나…… 그렇다면야 여북 좋겠나!……그래 어떻게 무슨 묘책이 있어”
“쯧! 있다면 있구, 없다면 없구.”
태수는 심정이 상하구 귀찮아서 말대꾸가 아무렇게나 나가고 흥이 없던 것인데, 그것이 속을 모르는 형보가 보기에는 태수가 어느 구석인지 타악 믿는 데가 있어 안심을 하고서 아무 걱정을 않는 걸로만 보이던 것이다.
분명 무슨 도리가 있는 눈치다. 대체 그렇다면 요 녀석이 어디를 가서 무슨 꿍꿍이속을 부렸기에? 응 하하! 오옳지, 옳아, 그랬기가 십상이겠군…….
형보는 속으로 가만히 무릎을 쳤다.
그는 퍼뜩 탑삭부리 한참봉네 아낙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태수와 관계가 이만저만찮이 깊었던 것이며, 그런데 그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형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지라, 제 품안에서 놀던 태수를 제가 서둘러서 그처럼 장가까지 들여 줄 호기가 있는 계집이 거드면, 제 돈 몇천 원을 착 내놓아 애물의 위급을 감장시켜 주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형보는 예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제 일이 그만 낭패라, 그런 것을 모르고서 해망만 하고 있었다니 그럴 데라고는 없다.
그러나 그는 짐짓 무얼 알아맞히겠다는 듯이 고개를 깨웃깨웃, 한참이나 앉았다가,
“야 이 사람아! 그렇게 어물어물하지 말구서, 이얘길 까놓구 하게그려? 응…… 궁금해 죽겠구
먼서두……”
“무얼 그래…… 다급하면 죽어 버리는 것두 다아 수가 아닌가!…… 쥐 잡는 약이 없나? 잠자는 약이 없나…… 강물두 깊숙해서 좋구, 철둑도 선선해서 좋구.”
“지랄 마라!…… 자살두 다아 할 사람이 있지, 자넨 못 하네.”
“흥, 당하면 못 하리”
“그럴 테면 세상에 누렁옷 입구 쇠사슬 차구 똥통 둘러메구서 징역살이할 놈 없게…… 다아 자살두 제마다 못 하길래, 그 고생 그 창피 당해 가면서 징역을 살구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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