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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36)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12.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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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싫어!”

태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돌아눕는다. 그는 형보가 말하는 대로 제가 방금 누렁옷을 입고 쇠사슬을 차고 똥통을 둘러메고 징역살이를 하고 있는 꼴이, 감옥의 붉은 벽돌담을 배경으로 눈앞에 선연히 보이던 것이다.

형보는 의심이 풀리지 않은 채, 더 물어 보지는 못하구 속으로 저 혼자만 궁리가 깊어 간다.

태수는 조반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은행에 출근을 했다. 그러나 아침에 형보가 지껄이던 소리가 자꾸만 생각이 나고, 그것이 마치 식전 마수에 까마귀 우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꺼림칙했다.

그래서 온종일 마음이 좋지 않아 근래에 없이 이마를 찌푸리고 겨우 시간을 채웠는데, 네시가 다 되어 이 분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에 농산흥업회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농산흥업회사라면 태수가 위조한 소절수로 예금을 축내 주고 있는 그 세 군데 중의 한 군데이다.

농산흥업회사에서 당좌계에 있는 사람을 대달라는 전화가 왔다고 급사가 말하는 소리에 태수는 반사적으로 흠칫 놀랐다. 피는 한꺼번에 심장으로 쏟혀 들고 얼굴은 양촛빛같이 해쓱, 등과 이마에는 식은땀이 배어 올랐다.

그러나 이것은 태수의 의사와는 독립하여 다만 근육의 반사일 따름이다.

‘기어코 오늘이 왔나!’

당연한 것을 기다리고 있던 양으로, 이렇게 생각이라고 할는지 각오라고 할는지, 마음은 다뿍 시쁘듬했다. 그런만큼 (실상은 그렇기 때문에) 머릿속은 유리같이 맑고 뛰던 가슴이 이내 가라앉았다.

“나를 찾어” 

우정 장부를 걷어 치우던 손을 멈추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말로 씹어 본다. 음성은 약간 목이 갈리는 것 같았으나 그다지 유표하진 않다.

“……나를 찾더냐? 당좌곌 찾더냐”

“당좌곌 대달래요.”

“우루사이나(에잇 성가셔)! 시간두 다아 됐는데…… 왜 그린다던”

“모르겠어요, 거저 대달라구만…….”

“가만있자아!”

태수는 추움춤하면서 시계가 네시를 지나 버리기를 기다려, 급사더러 수통의 냉수를 길어 오라고 쫓아 버리고는 전화통을 집어 든다.

“네에.”

하는 대답을 따라 저편에서,

“여기는 흥업회산데요…… 우리 당좌에 조금 미상한 데가 있어서요…….”

하는 게 절박한 힐난이 아니고 정중한 상의다.

태수는 속으로 역시 그렇겠지야 하고 생각하면서 음성을 낮추어,

“네에! 아, 그러세요…… 에 또, 에- 당좌계는 시간이 다 돼서 나가구 없는데요. 무슨 일이신지요? 웬만하면 내일 아침에 일찍…….”

“네에, 그래두 괜찮지만…… 그럼 지점장두 나가셨나요”

“네에.”

“하하하!…… 그럼 내일 다시 걸겠습니다…… 머 별일이야 없겠지만, 조금 미심한 데가 있어서요.”

전화 끊는 소리를 듣고 태수도 신호를 울리고서 돌아서려니까, 마침 맞게 급사가 냉수를 가져와 준다.

태수는 냉수 한 곱뿌를 맛있게 다 들이켰다. 그러고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다. 생각이란 다른 게 아니고, 지금부터 나가서 일을 차릴 계획이다.

시방 나가면서 ‘쥐 잡는 약’을 하나만 사고, 그리고 전처럼 과실과 과자를 사서 들고, 흔연히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는 초봉이가 웃으면서 맞아 준다. 오후를 초봉이를 데리고 재미있게 놀고, 저녁 후에는 잠깐 나온다. 행화네 집을 다녀서 김씨를 찾아간다. 요행 탑삭부리가 없거들랑 두어 시간 구회를 풀어도 좋다. 그렇다. 신정이 구정만 못하다더니 역시 구정이 그립기는 한 것인가 보다.

옳아! 우리가 서로 약속한 것도 있으니까 그리하는 게 좋겠지. 만약 탑삭부리가 있으면 그야 할수 없지. 그저 혼인한 뒤에 처음이니까 수인사 겸 들른 체하고 돌아오지.

빌어먹을 것 그 여편네까지 행화까지 다 데리고 초봉이와 넷이서 죽었으면 십상 좋겠다. 그렇게 했으면 통쾌할 테지만, 괜한 욕심이고.

김씨한테 들렀다가 돌아오면서는 정종을 맛좋은 놈을 한 병 사서 들고 집으로 온다. 초봉이더러는 안주를 장만하라고 시키고 그 동안에 소절수를 농간하던 도장과 소절수첩을 없애 버린다. 없애나마나한 것이지만 기왕이니.

그러고 나서 안주가 되거들랑 초봉이를 술상머리에 앉혀 놓고서 한잔 마신다. 초봉이도 먹인다.

열두시까지만 그렇게 놀다가 자리에 눕는다. 세시만 되거든 다시 일어난다. 일어나서 비로소 초봉이를 일으켜 앉히고 실토정 이야기를 죄다 한다. 그리고 나서 같이 죽자고 한다.

초봉이가 싫다고 하면 그러거들랑, 네 속을 보느라고 그랬다고 웃으면서 안심을 시켜 잠이 들게 하지. 잠이 들거든 무어 허리띠 같은 것으로.

가만있자! 영감님 장사 밑천을 마련해 주지 못했지? 좀 안됐다. 돈 천 원이나 빼내서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조금만 돌이켜서 생각이 났어도 좋았지.

그러나 뭐, 인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면 다 됐나

아뿔싸! 이런!…… 어머니를! 어머니를 어떻게 한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를.

‘나는 도적놈이요, 못된 놈이요. 그러고도 불효한 자식!’

태수는 마침내 생각지 못했던 회심에 다들려 후- 길게 한숨을 내쉰다.

‘쥐 잡는 약’을 사서 포켓 속에 건사를 하고도 태수는 그런 것은 남의 일같이 천연스럽게 과실 바구니와 과자 꾸러미를 양편 손에다 갈라 들고 허둥허둥 집으로 달려든다.

“여보오”

그는 대문 문턱을 넘어서기가 바쁘게 초봉이를 부르면서 얼굴에는 웃음을 하나 가득 흩트린다.

결코 오늘의 최후를 짐짓 무관심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요, 절로 그래지는 것이다.

초봉이는 마침 마당에서 화분들을 벌여 놓고 흙을 장만하느라고 손에 어린아이같이 흙칠을 하고 있다. 형보도 옆에서 초봉이와 같이 흙을 주무르느라고 끙끙하고 있다.

초봉이는 발딱 일어나서 웃으면서 태수가 들고 온 과일 바구니와 과자 꾸러미를 받는다.

“고주사 오늘은 좀 늦으셨네그려”

“장주사 수고하네그려”

태수는, 무릎이 어깨까지 올라오게 쪼글트리고 앉아 있는 형보를 들여다본다.

“수고랄 게 있나!…… 거, 아주머니가 고운 손에다가 흙을 묻히구 그리시길래 내가 보기에 민망해서 지금…….”

“그럼 나두 해야지.”

태수는 팔을 걷으면서 초봉이를 돌려다보고 벙긋 웃는다. 초봉이는 손에 받았던 것을 마루에 가져다 놓고 도로 내려오다가 겨우 국화 모종을 안 사가지고 온 것을 깨우치고서 흙이 대래대래 묻은 조그마한 손을 태수한테로 내민다.

“국화 모종…….”

“아뿔싸!”

태수는 무릎을 탁 치면서 혀를 날름날름한다. 그는 그런 중에도 시방 제 앞에다가 내미는 초봉이의 손이 흙이 묻은 것까지도 어떻게나 이쁜지, 형보만 없는 데라면 꼬옥 잡아다가 조몰조몰 주물러 주고 싶었다.

“……깜박 잊었어! 어떡허나”

“차라리 내한테 시키시지”

형보가 저도 빠질세라고 한몫 거들고 나선다.

“……그 사람은 그런 심부름 시켜야 개울 건네다가 잊어버린답니다.”

“그럼 아재가 내일 오시는 길에 사다 주세요”

아재란 건 물론 형보더러 하는 말인데, 태수가 그렇게 부르라고 시켰던 것이다.

“아냐, 내일은 꼭 잊잖구서 사가지구 오께, 허허허허.”

태수는 말을 하다가 그만 꺼얼껄 웃어 버린다. 그러나 아무도 웃는 속을 몰랐고, 형보가 농담을 하는 체,

“정치게 효도할려구 드네!”

“네라끼 망할 것!”

“너무 그러지들 말게! 자네들이 너무 정분이 좋은 걸 보면 나는 괜히 심정이 나군 하데.”

“아재두 살림하시지요”

“돈두 없거니와 여편네가 있나요? 어디.”

“행화”

“행? 화…… 허허허허, 어허허허허.”

초봉이는 형보가 과히 웃어 쌓는 것이, 혹시 무슨 실수된 말을 했나 해서 귀밑이 발개진다. 태수는 형보와 마주보지 않으려고 슬쩍 돌아선다.

그때 마침 탑삭부리 한참봉네 집에 있는 계집아이가 대문 안으로 꺄웃이 들여다보면서 마당으로 들어선다.

“오오, 너 왔니”

태수가 김씨가 저를 부르러 보냈겠지야고 짐작을 하고, 그렇다면 막상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계집아이는 태수와 초봉이더러 인사를 하고 나서, 고주사나리 저녁 잡숫고 잠깐 다녀가시란다고,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고 전갈을 한다.

“오냐, 참봉나리가 그러시던”

“네에.”

계집아이는 김씨가 시킨 가늠이 있는지라 그대로 대답을 한다.

그래서 초봉이는 그저 그런가 보다고 심상히 여기고 말았을 뿐이지 깊이 유념도 하지 않았다.

실상 또 태수와 계집아이가 그렇게 꾸며 대지를 않았더라도 초봉이는, 그저 김씨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깐 오라는 것이겠지 했을 것이지 그 이상 달리 새김질을 하거나 의심을 하거나 그럴 내력이 없었다.

그러나 형보는 그렇질 않았다.

그는 오늘 저녁에 김씨가 분명코, 태수가 돈 범포낸 그 조건에 대해서 앞일 수습을 상의할 것이고, 혹은 벌써 그 동안에 돈 준비가 다 되어서 몇천 원 착 태수의 손에 쥐어 주기까지 할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다. 아까 아침에 태수가 수상한 눈치를 보이던 일을 미루어 보더라도, 역시 그게 틀림없으리라고, 달리는 더 의심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은’

‘밑질 건 없으니 칵 질러 버려라!’

형보는 마침내 혼자 물어 보고 혼자 대답하면서 연신 고개를 끄떡거렸다.

일곱시가 조금 지나서 형보는 저녁을 먹던 길로 볼일이 있다고 힝 나가더니, 여덟시가 못 되어서 도로 들어왔다. 여느때 같으면 그는 태수가 초봉이와 같이 축음기를 틀어 놓고 일변 먹어 가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으니, 오라고 청을 하거나 말거나 안방으로 덤벙 들어앉아 저도 한몫 끼였을 판이었었다.

그러나 전에 없이 얼굴빛이 해쓱하여, 기분이 좋지 않다고 건넌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불을 끄고 누워 버렸다.

태수는 저녁을 먹으면서 초봉이더러 싸전집에 잠깐 들러 보고, 마침 또 서울서 친한 친구가 왔으니까 나갔던 길에 찾아보고 올 텐데, 그러자면 자정이 지날지도 모르겠은즉 기다리지 말고 일찌감치 먼저 자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저녁 후에는 전대로 한참 재미나게 놀다가 아홉시가 되는 것을 보고 유카다를 입은 채 게다를 끌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 그는 저녁 먹을 때 초봉이더러 이르던 말을 더 이르기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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