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다! 잡념이다! 지나간 일이며 지나간 사람은 씻은 듯이 죄다 잊고, 여기로부터서 인제로부터, 새로운 생애를 북돋아 새로운 생활을 장만하자 했으면서…… 그것이 어떻게 되어서 한 결혼이든지 간에 일단 결혼을 하기는 한 것인즉, 앞으로의 생활은, 이미 결혼을 했다는 그 사실--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그 사실--을 근거로 하고서 행동을 가져야 할 것이요, 동시에 그 행동은 추궁된 동기나 미련 남은 과거에게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내 스스로가 고태수한테로 약간의 뜻이 기울었던 계제인데, 마침 그의 힘을 입어 집안이 형편을 펴게 되리라고 했기 때문에 와락 그리로 마음이 쏠려 버렸던 것이 아니냐? 그리했으면서 인제는 완전히 외간 남자인 과거의 사람에게 미련을 가짐은 크게 어리석은 짓일 뿐더러, 전부를 내맡기고 평생을 같이할, 이 남편 되는 사람에게 죄스러운 이심(二心)이 아니냐.
초봉이는 적이 개운한 마음으로, 제가 덮었던 이부자리를 걷어 치운다.
초봉이가 이렇듯 생각이 많기는 오늘이 처음인 것이 아니다. 그는 어제 새벽에도 잠이 깨자 오늘처럼 그러했고, 그저께 새벽에도 또 결혼을 하던 이튿날인 그 다음날부터 줄곧 그래 왔었다. 새로운 객관(客觀)에 무심한 낯가림이던 것이다.
사실 초봉이는 승재를 못 잊어하는 번뇌가 있기는 있으면서 그러나 이 새로운 생활환경이 불만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가지 두 가지 차차로 기쁨이 발견됨을 따라 명랑한 시간이 늘어 가고 있다. 제웅이 제가 제웅임을 모르고서, 제단 앞에서 제단의 아름다움에 취해 기뻐하는 양임에 틀림이야 없지만…….
하얀 행주치마를 노랑 저고리에 받쳐 입은 남 치마 위로 가뜬하게 두르면서, 초봉이는 옷미닫이를 조용히 열고 마루로 나선다.
바깥은 첫여름의 맑고도 새뜻한 새벽 공기가, 기다렸던 듯 얼굴에 좌악 끼치어 그 상쾌함이 이를데가 없다.
초봉이는 반사적으로 가슴에 하나 가득 숨을 들이쉬었다가 호- 길게 내뿜는다. 이어서 또 한번 두번 신선한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동안, 밤 사이 후텁지근한 방 안에서 텁텁해진 머리와 부자연하게 시달린 몸의 피로가 한꺼번에 다 씻겨 나가는 것 같았다.
문 앞 행길에서는 장사아치들이며 행인들의 잡음도 아직 들리지 않고 집은 안팎이 두루 조용하다. 태수도 그대로 자고 있고, 식모도 여섯시가 되어야 부엌으로 나온다. 건넌방에서 형보가 잠이 깨어, 쿠욱 캐액 담을 배앝으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초봉이가 마루 앞 기둥에 등을 대고 잠깐 생각하는 것 없이 생각에 잠긴 동안 날은 차차로 차차로 밝아 오다가 삽시간에 아주 훤하니 밝는다.
초봉이는 이끌리듯 신발을 걸치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밤이 아니고 밝는 새벽, 그러나 인적이 없는 정적의 틈을 타서 홀로 마당도 걷고, 화단에 손질도 해주고, 하늘도 우러러보고 하는 것이 결혼 이후로 초봉이에게는 매우 사랑스러운 세계였다.
“아이머니, 어쩌믄!”
초봉이는 마당으로 내려서면서 무심코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그만 저도 모르게 황홀해 소곤거린다.
그것은 마치, 이따가 한낮만 되면 전부 활짝 필 모란 꽃밭의 숱해 많은 꽃망울들과 같다고 할는지.
하늘에는, 갓은 맑게 개었고, 한복판으로 조그만씩 조그만씩 한 엷은 수묵색 구름 방울들이 망울 망울 수없이 많이 널려 있는 그놈 봉오리 끝이 제각기 모두 볼그레하니 연분홍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한 말로 그저 좋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휘황하고 번화스런 광경이다.
초봉이는, 고개 아픈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하늘의 모란 꽃망울들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제 꽃밭이 생각이 나서, 조르르 화단 앞으로 달려간다.
화단은 그가 혼인하기 전 집을 둘러보러 왔다가 보고서 유념한 대로, 혼인한 그 이튿날부터 손에 흙을 묻혀 가면서 추어 주고 가꾸어 주고 했었다. 그러고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손질을 해주곤 하는 참이다.
촉촉한 아침 이슬에 젖은 꽃떨기들은 모두 잎과 가지가 세차고 싱싱하다. 백일홍은 두어 놈이나 망울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채송화는 땅바닥을 깔고 누워 분홍 노랭이 빨갱이 흰 놈, 벌써 알쏭 달쏭 꽃이 피었다. 아사가오(나팔꽃)는 매준 줄을 타고 저희끼리 겨룸이나 하는 듯이 고불고불 기어 올라간다.
초봉이는 꽃포기마다 들여다보고 다니면서 밤 사이의 인사나 하는 것같이 웃어 보인다. 그는 사람한테 생소한 정을 먼저 꽃한테다가 들이던 것이다.
초봉이는 화단 옆으로 놓여 있는 댓 개나 되는 빈 화분들을 보고, 오늘은 국화 모종을 잊지 말고 꼭 사다 달래야 하겠다고 요량을 하면서 마악 돌아서는데, 방에서 태수의 음성이 들린다.
“여보오”
태수는 제법 몇십 년 같이서 늙어 온 영감이 마누라를 부르는 것처럼 아주 구성지다. 혼인하던 그날 저녁부터 그랬다.
태수가 초봉이를 이뻐하는 양은 형보더러 말하라면, 눈꼴이 시어서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는 결혼을 했으니 어디 온천 같은 데로 신혼여행을 갔을 것이지만, 만일 여러 날 동안 제 자리를 비워 놓으면, 그 동안 다른 동료가 대신 일을 맡아 볼 것이요, 그러노라면 일이 지레 탄로가 나기 쉬울 테라, 혼인날 하루만 할 수 없이 겨우 빠지고는 바로 그 이튿날부터 출근을 했다.
지점장도 며칠 쉬라고 권고했으나 그는 은행 일에 짐짓 충실한 체하고 물리쳤다.
그러나 신혼여행은 가지 못했어도 그 대신 신혼의 열흘 동안을 힘 미치는 껏 마음을 들여서 재미있게 즐겁게 지내기를 잊지 않았다.
그는 초봉이와 결혼을 하기는 하더라도 역시 전처럼 술도 먹고 행화한테도 다니고, 또 되도록이면 다른 기생도 오입을 하고 다 이럴 요량을 하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하고 나서는 그런 짓을 하나도 시행한 것이 없다.
술 한잔 먹으러 간 법 없고 행화 집도 발을 뚝 끊었다. 은행의 동료들이 붙잡고서 장가턱을 한잔 뺏어먹으려고 애를 썼어도 뺀들 피해 버렸다. 그래서 동료들이며 술친구들은 결혼이 태수를 버려 주었다고 탄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수는 그저 은행에서 시간만 마치고 나면, 곁눈질도 않고 씽하니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그래저래 곯는 것은 형보다. 그는 태수가 술을 먹으러 다니지 않으니, 달리 술을 먹을 길은 없고 아주 초올촐하다.
그는 전자에 태수가 돈 만 원을 빼둘러 가지고 도망을 가자는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시방도 미운데, 또 술을 사주지 않아서 한 가지 더 미움거리가 생겼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것만이라면 형보는 잊고 말 수도 있고 그런 대로 참을 수도 있고 하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태수를 해칠 악심도 생길 기회가 없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형보에게 무서운 자극을 주는 게 무엇이냐 하면 초봉이다.
그 마침으로 오도독 깨물어 먹기 좋게 생긴 것을 갖다가 태수가 따악 차지를 하고는 밤과 아침 저녁으로 갖은 재미를 다 보고 하는 것을 형보 저는 건탕으로 건넌방 구석에서 처박혀 끙끙 앓아가면서 듣고 보고 하기라니,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악형을 당함과 같았다.
‘조, 묘하게 생긴 조게, 갈데없이 내 것이 될 텐데!’
그는 조석으로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는다.
‘저, 원수가 얼른 후딱 떼가서 콩밥을 먹어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을 그 동안 몇 번째 했는지 모른다.
사실 그는 가만히 앉았으면 오늘이고 내일이고, 아니 이따가 저녁때쯤 태수가 경찰서로 붙잡혀 갈 테고, 붙잡혀 가는 날이면 ‘조것’은 내 것이 될 테라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도무지 하루 한시가 참기는 어려워 가는데 대체 결혼식인들 무사히 치를까 싶던 ‘원수녀석’ 태수는 이내 멀쩡하고 붙잡혀 가는 기맥이 없다.
만일 이대로 밀려 나가다가는 두세 달이 걸릴지 반년이나 일년이 더 걸릴지 누가 알며, 하니 그러다가는 형보 저는 애가 밭아 죽든지 급상한이 나서 죽든지 하고 말 것이다.
‘안 될 말이다!’
형보는 마침내 어제 그저께부터 딴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 전짜리 엽서 한 장이면 족하다. 은행으로든지 백석이나 다른 여러 곳 중 어디든지, 사분이 이만저만하고 이만저만하니 조사를 해보아라, 이렇게 엽서에다가 써서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태수 제야 아무 때 당해도 한 번 당하고 말지만 켯속이 되어먹은 것, 그러니 내일 당해도 그만이요, 모레 당해도 그만이요, 일년이나 이태 더 끌다가 당해도 매일반인 것이다.
하기야 태수가 노상 입버릇같이 죽어 버리면 고만이지야고 했으니까, 정말 자살이라도 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자살을 하기만 하면야, 붙잡혀 가서 콩밥이나 좀 먹고는 몇 해 후에 도로 나와 가지고는 제 계집을 빼앗아 갔느니 어쨌느니 하는 말썽도 씹히지 않을 것이매, 두 다리 쭈욱 뻗고 초봉이를 데리고 살 수가 있어서 좋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섣불리 밀고질을 했다가는 일이 별안간에 뒤집혀 가지고, 이놈이 어마지두 책상머리에 앉았던 채 바로 수갑을 차게 할 혐의가 없지 않으니, 일을 그저 어떻게 묘하게 제가 먼저 눈치를 채고서 얼른 자살을 해버릴 여유가 있도록, 서서히 저절로 탄로가 나야만 천 냥짜리다.
그런데 그놈 천 냥짜리를 꼭지가 물러 저절로 떨어지기를 입만 떠억 벌리고 기다리잔즉, 이건 마구 애가 말라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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