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R/B> 탁류 (62)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14. 04:52
728x90

 

 

그러하지, 지금 승재가 절박하게, 그리고 리얼하게 마음이 쏠리기는 차라리 계봉이한테다.

계봉이는 드디어 승재를 사로잡고 말았었다. 승재도 제 자신이 그렇게 된 줄을 몰랐다가, 작년 가을 계봉이가 서울로 뚝 떠난 뒤에야 제 몸뚱이가 통째로 없어진 것같이 허전한 것을 느끼고서 비로소 그것이 계봉이로 인한 탓인 줄을 알았었다. 그리하여 시방 승재를 끌어올려가는 것도 사실은 실비병원의 경영보다 계봉이의 ‘머리터럭 한 오라기’의 인력이 크던 것이다.

유씨와 정주사가 사뭇 부여잡다시피 저녁을 먹고 가라고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승재는 ‘콩나물고개’를 넘어 부랴부랴 S여학교의 야학으로 올라갔다. 벌써 다섯시 반이니 오늘새라 좀더 일잡아 갔어야 할 야학시간도 촉하거니와, 일찌거니 명님이를 찾아봤어야 할 것을 쓸데없이 정주사네게서 충그린 것이 찝찝해 못 했다.

야학이라는 건 작년 늦은봄부터 개복동과 둔뱀이의 몇몇 사람이 발론을 해가지고 S여학교의 교실을 오후와 밤에만 빌려서, 낮으로 일을 다닌다거나 놀면서도 보통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 모아 놓고 ‘기역 니은’이며 ‘일이삼사’며 ‘아이우에오’ 같은 것이라도 가르치자고 시작을 한 것인데, 마침 발기한 사람 축에 승재와 안면 있는 사람이 있어서, 승재더러도 매일 산술 한 시간씩만 맡아 보아 달라고 청을 했었다.

승재는 그때만 해도 계몽이라면 덮어놓고 큰 수가 나는 줄만 여길 적이라 첫마디에 승낙을 했고, 이내 일년 넘겨 매일 꾸준히 시간을 보아 주어는 왔었다.

승재가 학교 밑 언덕까지 당도하자 종 치는 소리가 들렸고 다 올라갔을 때에는 아이들은 벌써 교실에 모여 왁자하니 떠들고 있었다. 승재는 직원실에는 들르지 않고 바로 교실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참새 모인 대숲에 새매가 지나간 것처럼 재재거리던 소리를 뚝 그치고 제각기 천연스럽게 고개를 바로 갖는다. 아이들이라야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것도 팔십 명이나 넘더니, 스실사실 다 떨어져 나가고 시방은 열댓밖에 안 남아서 단출하다면 무척 단출하다.

승재는 급장아이를 직원실로 보내어 출석부만 가져오게 하고는 모두 오도카니 고개를 쳐들고서 기다리는 아이들의 얼굴을 휘익 한번 둘러본다.

학과를 시작하기 바로 전이면 언제고 별뜻 없이 한번 둘러보는 게 무심한 습관이었지만, 오늘은 이것이 너희들과도 마지막이니라 생각하면 그새같이 무심치가 않고,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씩하나씩 똑똑하게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새삼스럽게 모두 한심했다. 하기야 승재가 처음에 그다지 와락 당겨하던 것은 어디로 가고 명색이나마 이 야학에 흥미를 잃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작년 겨울부터서 그는 계몽이니 혹은 교육이니 한다지만 어느 경우에는 절름발이를 만드는 짓이고, 보아야 사실상 이익보다 독을 끼쳐 주는 게 아니냐고, 지극히 좁은 현실에서 얻은 협착스런 결론으로다가 막연한 회의를 하기 시작했었고, 그러기 때문에 야학 맡아 보아 주는 것도 신명이 떨어져서 도로 작파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속은 어찌 되었든, 같은 교원이며 아이들한테고 떳떳하게 내세울 이유도 없이 그만두겠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를 않아서 오늘날까지 미룸미룸 해왔던 것인데, 그러자 계제에 이번 서울로 멀리 떠나게 되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만두게 되는 참이라 마음이야 어디로 갔든 겉으로는 그리 민망할 건 없었다.

그러나 소위 학문을 시킨다는 것은 흥미가 없었어도 아이들 그들 한테 정은 적잖이 들었던만큼, 더구나 저렇게 한심스런 것들을 떼어 놓고 떠나가자면은 자못 섭섭한 회포가 없지 못했다.

아이들의 모양새라는 것은 제각기 모두 밥을 한 사발씩 드북드북 배불리 먹고 났어도 도로 시장해 보일 얼굴들이다. 햘끔한 놈, 샛노란 놈, 그 중에 그래도 새까만 놈은 영양이 좋은 편이다. 모가지와 손등과 귀밑에는 지나간 겨울에 트고 눌어붙고 한 때꼽재기가 아직도 가시잖은 놈이 거지반이다. 옷도 저희들 생김새와 잘 얼린다. 아직 솜바지저고리를 입은 놈이 있는가 하면, 어느 놈은 홑고의적삼을 서늑서늑 갈아입었고, 다 떨어진 고쿠라 양복은 제법 치렛감이다.

승재는 아이들의 가정을 한두 번씩, 혹은 병인이 있는 집은 치료를 해주느라고 드리없이 찾아 다니곤 했기 때문에 그 형편들을 낱낱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어느 아이고 얼굴을 바라다보노라면 그 애의 집안의 꼴새까지 환히 머리에 떠오른다.

개개 지붕이 새고 토담벽이 무너진 오막살이요, 그나마 옹근 한 채가 아니고 방이 둘이면 두 가구, 셋이면 세 가구로 갈라 산다. 방문을 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어두컴컴한 속에서 얼굴이 오이꽃같이 노오란 여인네의 북통 같은 배가 누워 있기 아니면, 뜨는 누룩처럼 꺼멓게 부황이 난 사내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고 앉았다.

또 어느 집은 하릴없는 도야지새끼처럼, 허리를 헌 띠 같은 것으로 동여매어 궤짝 자물쇠에다가 매달아 놓은 아기가 눈물 콧물 뒤범벅이 되어 울고 있다. 이건 양주가 다 벌이를 나간 집이다. 그 반대로, 남녀가 어린아이들과 방구석에 웅숭크리고 있는 집은 벌이가 없어 대개 하루나 이틀은 굶은 집이다.

승재는 모두 신산했지만, 더욱이 당장 굶고 앉았는 집을 찾아간 때면 차마 그대로 돌아서지를 못해, 지갑에 있는 대로 털어 놓곤 했다. 마침 지닌 것이 없으면 뒤로 돈 원이라도 변통해 보내 준다. 그뿐 아니라 온종일 굶고 있다가 추욱 처져 가지고 명색 공부랍시고 하러 온 아이들한테 호떡이나 떡이나 사서 먹이는 게 학과보다도 훨씬 더 요긴한 일과였었다.

그러느라 작년 가을 의사면허를 땄을 때 병원 주인이 사십 원을 한목 올려 주어 팔십 원이나 받는 월급이 약품값으로 이십 원 가량, 생활비로 십 원 가량 들고는 그 나머지는 고스란히 그 구멍으로 빠져 나가곤 했다. 그러나 전과 달라, 시방 와서는 그것을 기쁨과 만족으로 하지를 못하고, 하루하루 막막한 생각과 불만한 우울만 더해 갔다.

승재가 가난한 사람의 병든 것을 쫓아 다니면서, 돈도 받지 않고 치료를 해준다는 소문이 요새와서는 좁다고 해도 인구가 육만 명이 넘는 이 군산바닥에 구석구석 모르는 데 없이 고루 퍼졌고, 그래서 위급한데도 어찌하지 못하는 병자만 돌아보아 주재도 항용 열씩은 더 된다.

그 밖에 종기야 가슴아피야 하고 모여드는 사람은 이루 헬 수가 없다. 큼직한 종합병원 하나를 차리고 앉았어도 그 사람들을 골고루 만족히 치료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것을 낮에는 병원일을 보아 주고 나서 오후와 밤으로만 그 수응을 하자 하니 도저히 승재의 힘으로는 감당해 낼 재주가 없었다.

그건 그렇다고 다시, 돈 그까짓 삼사십 원을 가지고 그 숱한 배고픈 사람들을 갈라 먹이자니 마치 시장한 판에 밥알이나 한 알갱이 입에다 넣고 씹는 것 같아 간에도 차지 않았다.

대체 이 조그마한 군산바닥이 이러할 바이면 조선 전체는 어떠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승재는 기가 딱 질렸다.

단지 눈에 띄는 남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해 제 힘있는 껏 그를 도와 주고 도와 주고 하는 데서 만족하지를 않고, 그 불행한 사람들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승재로서 일단의 발육이라 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는 겨우 그 양(量)으로 눈이 갔을 뿐이지, 질(質)을 알아낼 시각(視角)엔 이르질 못했다. 따라서, 가난과 병과 무지로 해서 불행한 사람이 많은 줄까지는 알았어도, 사람이 어째서 가난하고 무지하고 병에 지고 하느냐는 것은 아직도 알지를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박한 (타고난) 휴머니즘밖에 없는 시방의 승재의 지금의 결론은 절망적이다.

그 숱해 많은 불행한 사람을 약삭빨리 한두 사람이 구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래도 눈으로 보고서 차마 못해 돈푼이나 들여서 구제니 또는 치료니 해주는 것은 결국 남을 위한다느니보다도, 우선 나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제 노릇에 지나지 못하는 일이다.

이러한 해석 끝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옳으냐고 자연 반문을 하는데, 거기서는 아무렇게도 할 수 없다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승재는 갑갑했다. 그러자 마침 계봉이로 해서 서울로만 가고 싶었다. 그런데 계제에 서울로 올라갈 기회가 생겼다.

그러니 결국 계봉이한테 끌려서, 또 한편으로는 예가 막막하니까 새로운 공기 속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지만, 승재 제 요량에는 서울로 가기만 하면 좀더 널리 그리고 좀더 효과 있게 일을 할 수가 있겠지 하는 희망도 없진 않았었다.

“자아 오늘은…….”

승재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던 얼굴을, 역시 별 의미 없이 두어 번 끄덕거리고 나서,

“……공분 고만두구, 느이허구 나허구 이야기를 한다구우.”

“네에.”

모두 좋아서 한꺼번에 대답을 한다. 내놓았던 공책이며 책을 걷어치우느라고 잠시 분주하다.

“내가 내일이면 저어 서울루 떠나는데…… 그래서 느이허구두 인전 다시 못 만나게 됐는데 말이지…….”

말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잠시 덤덤하더니, 이어 와 하고 제각기 한마디씩 지껄인다.

어째 서울로 가느냐고 짐짓 섭섭한 체하는 놈, 서울로 떠나지 말라는 놈, 언제 몇 시차로 떠나느냐고 정거장까지 배웅을 나가겠다는 놈, 저희끼리 쑥덕거리는 놈 해서 한참 요란하다.

승재는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섰다가 교편으로 교탁을 따악 친다.

“고마안 하구 조용해!”

아이들은 지껄이던 것을 한꺼번에 뚝 그치고 고개를 똑바로 쳐든다.

“……자아, 느이들 내가 부르는 대루 하나씩 하나씩 일어서서 내가 묻는 대루 다아 대답해 보아 응”

“네에.”

승재는 아이들더러 이야기를 하자고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작별하는 마당인데, 여느때처럼 토끼나 호랑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해서 어쩔까 망설이다가 문득 심심찮은 거리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저어 너, 창윤이…….”

승재가 교편을 들어 가리키면서 이름을 부르는 대로 한가운데 줄에서 열댓 살이나 먹어 보이는 야물치게 생긴 놈이 대답을 하고 발딱 일어선다.

성한 데보다는 뚫어진 데가 더 많은 검정 고쿠라 양복바지에 얼쑹덜쑹 무늬가 박힌 융샤쓰를 입고 이마에 보기 흉한 흉이 있는 아이다. 눈이 뚜렷뚜렷한 게 무척 약게 생겼다.

“……음, 창윤이 넌 이렇게 공불 해가지구서 인제 자라면 무얼 할 텐가”

승재가 천천히 묻는 말을 받아 아이는 서슴지 않고 냉큼,

“전 선생처럼 돼요.”

한다.

“나처럼? 건 왜”

“전 선생님이 좋아요.”

승재는 속으로 예라끼 쥐 같은 놈이라고 웃었다.

“그 다음, 넌”

맨 뒷줄에서 제일 대가리 큰 놈이 우뚝 일어선다. 눈만 두리두리 퀭하지 얼굴이 맺힌 데가 없고 둔해 보인다.

“……넌? 넌 공부해서 무얼 할 테야”

“네, 전 전, 조선총독부 될래요.”

아이들이 해끗해끗 돌려다보고 그 중 몇 놈은 빈들빈들 웃는다. 승재도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서,

“그래 조선 총독이 돼선 무얼 할려구”

“월급 많이 받게요.”

“월급은 얼마나”

“백 원…… 아니 그보담 더 많이요.”

“월급은 그리 많이 받아선 무얼 할 텐고”

“마구 쓰구, 그리구…….”

그 다음은 종쇠라고 하는 열두어 살이나 먹은 놈이 불려 일어섰다. 콧물이 흐르고 옷이라는 건 때가 누더기 앉고 솜뭉치가 비어 나오는 핫옷이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R/B> 탁류 (64) -채만식-  (0) 2021.06.16
<R/B> 탁류 (63) -채만식-  (0) 2021.06.15
<R/B> 탁류 (61) -채만식-  (0) 2021.06.13
<R/B> 탁류 (60) -채만식-  (0) 2021.06.12
<R/B> 탁류 (59) -채만식-  (0) 2021.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