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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61)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13.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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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양주는 다 같이 어색한 대로 반색을 하면서 승재를 맞는다. 그래 싸움하던 것은 어느덧 싹 씻은 듯이 어디로 가고 이렇게 천연을 부리니 싱거운 건 승재다.

그냥 말로만 주거니 받거니 하는 틀거리가 아니고, 철그덕 따악 살림까지 쳐부수는 게, 이 싸움 졸연찮은가 보다고 그만 엉겁결에 툭 튀어들었던 것인데, 이건 요술을 부렸는지 싹 씻은 듯이 하나도 그런 내색은 없고 둘이 다 흔연하게 인사를 하니 다뿍 긴장해서 납뛴 이편이 점직할 지경이다.

“거 어째 그리 볼 수가 없나? 이리 좀 앉게그려…… 거 원…….”

정주사는 연방 흠선을 피운다는 양이나 끙끙거리고 쩔맨다.

“좋습니다. 곧 가야 하겠어서…… 형주랑 병주랑 그새 학교엔 잘 다니나요”

승재는 이런 인사엣말을 하면서 정주사네 양주와 가게 안을 둘러본다. 병주는 어느새 눈깔사탕이나 두어 개 쥐어 넣었는지 가게에 없고 보이지 않는다.

“거 머 벌제위명이지, 공부라구 한다는 게…… 그래, 그런데 참, 자넨 작년 가을에 무엇이냐 거, 의사에 합격이 됐다구? 참 경사로운 일일세!”

정주사는 여전히 남의 사무실 고쓰카이같이 의표(衣表)가 구지레한 승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그런데 왜 이렇게 궁기가 흐르느냐고는 차마 박절히 묻지 못하고서 혼자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좋게 둘러대느라고…….

“……그러면 자네두 거 인전 병원을 설시하구서 다아 그래야 할 게 아닌가”

“네에, 그리잖어두 이번에 어쩌면…….”

“응! 이번에? 병원을 설시하게 되나? 허! 참 장헌 노릇이네!”

“머어, 된다구 해두 그리 변변찮습니다마는…….”

“원 그럴 리가 있나! 다아 도저하겠지…… 그래 설시를 하게 된다면 이 군산이렷다? 그렇지”

“군산이 아니구, 저어 서울서 어느 친구 하나가…….”

“서울다가”

“네에, 아현(阿峴)다가 어느 친구가 실비병원을 하나 내겠는데, 절더러 와서…….”

“실비병원”

정주사는 실비병원이란 소리를 다뿍 시쁘게 되뇐다. 그저 그렇지, 저 몰골에 제법 옹근 병원이라도 처억 차려 놓을 잡이가 워너니 못 되더니라고 시들해하는 속이다.

“……실비병원이든 무엇이든 아무려나 잘됐네그려!”

“아이 참, 잘됐구려!”

유씨가 남편한테 승재를 뺏기고서 말을 가로챌 기회를 여새기다가 얼핏 대꾸를 하고 나선다.

“……그럼 다아 그렇게 허기루 작정이 됐수”

“아직 작정이구 무엇이구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는 시방 의사 면허가 없으니깐, 같이 해나가는 양으로 와서 있어 달라구 그런 기별만 왔어요. 그래서 내일이나 모레쯤 올라가서 잘 상읠 한뒤에 원 어떻게 하던지…… 그래서 이번 올라가면 어쩌면 다시 내려오지 못할 것 같기두 하구, 그래서 인사두 이쭐 겸…….”

“오온! 그래서 모초로옴 모초롬 이렇게 찾어왔구려! 잊지 않구서 찾어와 주니 고맙수마는 떠난다니 섭섭해 어떡허우!…… 우리가 참, 남서방 신세두 적잖이 지구, 참…… 그러나저러나 이러구 섰을 게 아니라 일러루 좀 올라오우. 원 섭섭해서 어디…… 방을 치우께시니 우선 거기라두…….”

유씨는 너스레를 떨면서 일변 방으로 들어가서 나가동그라진 재봉틀을 바로잡아 한편 구석에 치워 놓느라 한참 분주하다. 승재는 거기 눈에 뜨이는 대로 석유상자 걸상에 가서 걸터앉고 정주사는 승재 앞으로 빈지 문턱에 가서 바짝 쪼글트리고 앉아 팔로 볼을 괸다. 그는 시방 승재가 오늘 해가 지고 밤이 깊도록 있어서, 아까 중판멘 싸움이 그대로 흐지부지했으면 한다. 이유는 달라도 승재를 잡아 두고 싶기는 유씨도 일반이다.

유씨는 승재를 생각하면 초봉이를 또한 생각하고 자못 회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승재가 인제는 버젓한 의사가 되어 병원을 내려고 서울로 떠난다는 작별인사를 하러 온 오늘 같은 날은, 일변 가슴을 부둥켜안고 싶게 지나간 일이 여러 가지로 안타깝다.

일찍이 초봉이가 승재한테로 뜻이 기우는 눈치였었고, 승재 또한 그렇게 부랴부랴 이사를 해가던 것을 보면 초봉이한테 마음이 깊었던 모양이고 했으니, 만약 저희 둘을 서로 배필을 정해 주었더라면 초봉이의 팔자도 그렇게 그르치지 않을 뿐더러 오늘날 이러한 승재를 제 남편으로 받들어 호강을 늘어지게 하고, 집안도 또한 이 사위의 덕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그 천하의 몹쓸 놈 고가한테 깜빡 속아 가지고는 그런 끔찍스런 변을 다 당하고, 필경은 자식의 신세가 그 지경이 되었으니 열 번 발등을 찍어도 시원하지가 않다.

하기야 어찌 되었으나 그 덕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혼인 전후에 돈을 적지 않게 얻어 쓴 것도 쓴 것이려니와, 초봉이가 서울로 올라가서 다달이 이십 원씩 보내 주어 그걸로 큰 힘을 보았고, 작년 가을에는 한목 오백 원이나 내려 보낸 것으로 이만큼이라도 가게를 차려 놓고서 그 끈에 연명을 하고 있으니, 그것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딸의 일생을 버려 준 것에 대면 말도 안 되게 이쪽이 크다.

그때에 그저 눈을 질끈 감고서 조금만 염량을 다르게 먹었다든지, 또 그 당장에서는 미워서 욕을 했어도, 계봉이가 말하던 대로 염탐이라도 좀 해보았든지 해설랑 고가의 청혼을 물리쳤더라면, 그새 한 이 년 집안의 고생은 더 했을망정 오늘날 와서 제 팔자 남에게 부럽지 않았을 것이고, 집안도 떳떳이 사위의 덕을 볼 것이고 그랬을 것이 아니더냔 말이다.

유씨는 이렇게 후회를 하기는 하면서도 그러나 일변 재미스러운 궁리도 없진 않다.

유씨가 승재를 애초에 초봉이의 배필로 유념을 했다가 태수가 뛰어드는 판에 퇴짜를 놓고는, 다시 계봉이를 두고 마음에 염량을 해두었던 것은 벌써 이태 전이다. 그러나 딴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계봉이가, 유씨의 말대로 하면 말만한 계집애년이 홀아비로 지내는 총각놈 승재한테를 자주 놀러도 다니고 하면서 가까이 지내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체 짐짓 눈치만 보아 왔던 것이요, 그러잖았으면야 단단히 잡도리를 해서 그걸 금했을 것은 여부도 없는 말이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 승재가 마지막 시험을 치른 결과 합격이 다 되어서 아주 옹근 의사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싹 더 마음이 당겨 마침내 혼인을 서둘러 볼 요량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년 계봉이가 못 가게 막는 것도 듣지 않고서 서울로 올라가 버리고, 또 승재도 발길을 뚝 끊다시피 다니지를 않고 해서 유씨는 적잖이 실망을 하고 있던 참이다.

그렇게 실망을 하고 있던 참인데 승재가 모처럼 찾아왔고, 찾아와서는 병원을 내기 위하여 서울로 간다고 하니 이는 진실로 일대의 서광이 아닐 수가 없던 것이다.

유씨는 그리하여 시방 승재를 좀 붙잡아 앉히고 슬금슬금 제 눈치도 떠보려니와 이편의 눈치도 보여 주고 해서, 이번에 서울로 올라가거든 계봉이와 저희끼리 그 소위 연애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것을 분명히 어울리도록 어쨌든 자주 상종도 하고 하게시리 마련을 해놀 요량인 것이다.

그래만 놓으면 뒷일은 다 절로 술술 들어 달 판이라서…….

승재는 정주사와 마주앉아서 지날 말같이 인사엣말같이 가게의 세월은 어떠하며, 매삭 수입은 어떠하며, 집안 지내는 형편은 어떠하냐고 물어 보고, 정주사는 그저 큰 것을 더 바랄 수는 없어도 가게의 수입이 쑬해서 암만은 되고, 또 재봉틀에서 들어오는 것이 있고 하니까 아무러나 지내는 간다고 별반 기일 것도 없이 대답을 해준다. 승재는 그럭저럭하면 계봉이한테라도 들은 대로 본 대로 전할 거리는 되겠거니 했다.

이야기가 일단 끝나고 난 뒤에 정주사는 혼자 하는 걱정같이, 그러나저러나 간에 내가 나대로 무엇이고 소일거리라도 마련을 해야지 원 갑갑해서…… 이런 소리를 덧들인다. 이 말은 오늘 북어를 못 사오고, 미두장에 가서 있던 것도 다 할 일이 없고 해서 심심한 탓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유씨더러 알아듣고 양해를 하라는 발명이다.

그러나 승재는 이 위에 좀더 딸의 덕을 볼 욕심으로 이번 서울로 올라가거든 초봉이한테 그런 전갈과 권념을 해달라는 속이거니 싶어, 못생긴 얼굴이 다시금 물끄러미 건너다보였다.

유씨는 승재를 방으로 모셔 들일 요량으로 바느질 벌여 놓았던 것을 죄다 걷어치우고 말끔하게 쓸어 낸 뒤에 앞치마를 두르면서 가게로 내려선다. 아직 좀 이르기는 하지만 저녁밥을 지어 대접을 하자는 것이다.

“아 글쎄, 우리 작은년은 말이우!”

유씨는 부엌으로 나가려면서 우선 한 사설 늘어놓느라고,

“……그년이 공불 한답시구 쫓아 올라가더니, 웬걸 학굔 들잖구서 아따 무어라더냐, 나는 밤낮 듣구두 잊으니, 오 참 백화점…… 백화점엘 다닌다는구려! 그년이 무슨 재랄이야, 글쎄…….”

승재는 다 알고 있는 소리지만 짐짓 몰랐던 체하는 표정을 한다.

“…… 아 글쎄, 더 높은 학굘 못 가서 육장 노래 부르듯 하던 년이, 그게 무슨 변덕이우? 머, 제 형이 뒤를 거둬 주구 하니 공불 하자믄야 조옴 좋수”

“……”

승재는 무어라고 대꾸할 말이 없어 그냥 덤덤하고 있다.

“……그년이 까부느라구 그랬을 거야, 그년이…… 그렇지만 그년이 까불긴 해두 재준 있다우. 또 제가 하려구두 들구…… 그러니깐 싹수가 없던 않은데…… 그리구 허기야 까부는 것두 다아 철들면 괜찮을 테구 하지만…….”

승재는 유씨가 그 입으로 이렇게까지 계봉이를 추는 소리를 듣느니 처음이다.

“사람 못된 것 공분 더 시켜서 무얼 해! 제 형년 허패만 빠지지!”

정주사가 옆에서 속도 모르고 중뿔난 소리를 한마디 거든다.

유씨는 쓰다고 고갯짓을 하면서 입을 삐죽삐죽,

“그년이 왜 사람이 못돼? 그년이 속이 어떻게 찼다구!…… 다아들 그년만치만 속이 찼어 보라지!”

하고 전접스럽게 꼬집어 뜯는다. 정주사는 승재 보기가 열적기는 하나 아까 싸움이 되벌어질까 봐서 더 대거리는 못 하고 노랑수염만 꼬아 붙인다.

“이건 참 긴한 부탁인데, 남서방…….”

유씨는 낯꽃을 도로 푸느라고 이윽고 만에야 다시 근사속 있이…….

“……이번에 올라가거들라컨 말이우, 그년더러 애여 그 짓 작파허구서 공부나 더 하라구 남서방이 단단히 좀 나무래기라두 허구 타일르기두 허구 다아 그래 주우. 남서방 하는 말이믄 곧잘 들을 테니깐…… 난 아주 남서방만 믿수”

“글쎄올시다, 제가 머…….”

“아니라우! 그년이 남서방을 어떻게 따르구 했다구! 그러니 잘 좀 유념해서 등한하게 여기지 말구…… 그리구 그년뿐 아니라 제 형두 서울루 떠난 지가 꼬박 이태나 됐어두 인해 어떻게 지내는 지를 알 수가 없구려! 그러니 남서방 같은 이라두 서울 가서 있으믄서 오면 가면 뒤두 보살펴 주구 하믄, 즈이두 맘이 든든할 것이구, 에미 애비두 다아 맘이 뇌구 않겠수…… 그러니 이번에 올라가거들랑 부디 좀…… 아니 머 그럴 게 아니라 이렇게 허구려? 즈이 집 방을 하나 치이래서 같이 있어두 좋지? 그랬으믄야 머 참…… 내 그럼 오늘이래두 미리서 편질 해두까”

“아, 아니올시다. 머, 다아 번폐스럽게…….”

승재는 황망히 가로막는다.

승재가 짐작하기에는 이 수다스럽고 의뭉스런 마나님이 그렇게 어쩌고저쩌고 해서 초봉이와 가까이하게 해가지고는 다 이러쿵저러쿵 둘이를 도로 비끄러매 놓자는 수작이거니 싶었다. 그러나 승재로는 천만 당치도 않은 소리다.

미상불 승재는 그것이 젊은 첫사랑이었던만큼 시방도 초봉이한테 아련한 회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초봉이의 말 아닌 운명을 매우 슬퍼했고, 그를 불쌍히 여겨 깊은 동정도 하기는 한다. 그러나 꿈에라도 그를 다시 찾아내어 옛정을 도로 누린다든가, 더욱이 그를 제 아내로 맞이한다든가 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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