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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64)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16.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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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껏 승재는 두루두루 궁리를 한 후에 이튿날 새벽같이 병원 주인 오달식이더러 서울로 가는걸 서너 달 미루고 더 있어 줄 테니 돈 이백 원만 취해 달라고 말을 해보았다. 그러나 병원 주인은 며칠 전에 승재가 서울로 가겠다고 말을 해놓고서 이태 동안만 더 있어 달라고 졸라도 듣지 않았을 때에 속으로 꽁하니 노염이 났었고, 또 석 달이나 넉 달 더 있어 주는 건 고마울 것도 없대서, 그래저래 심술을 피우느라고 한마디에 거절을 해버렸다.

승재는 십상 되겠거니 믿었던 것이 낭패가 되고 보니, 달리는 아무 변통수도 없고 해서 코가 석자나 빠졌다.

할 수 없이 책을 죄다 팔아 버리려고 헌책사 사람을 데려다가 값을 놓게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이런 군산바닥에서는 의학서류며 자연과학에 관한 서적은 사놓는대도 팔리지를 않으니까 소용이 닿지 않는다고 다뿍 비쌘 뒤에, 그래도 정 팔겠다면 한 팔십 원에나 사겠다고 배를 튕겼다.

도통 사백 권에 정가대로 치자면 근 천 원 어치도 넘는 책이다. 그래도 승재는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대로 팔십 원에 내놓았다. 그러고도 심지어 헌 책상 나부랑이며 자취하던 부둥가리까지 헌 옷벌까지 모조리 쓸어다가 팔 것 팔고 잡힐 것 잡히고 한 것이 겨우 십오원 남짓해서, 서울 올라갈 찻삯 오 원 각수를 내놓으면 도통 구십 원밖에는 변통이 못 되었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더 마련할 재주가 없었다. 그것도 사람이 좀더 주변성이 있었다면, 가령 되다가 못 될 값에 이번에 병원을 같이 해나가자고 한다는 그 사람한테 전보라도 쳐서 구처를 해보려고 했을 것이지만, 도무지 남과 여수라는 것을 해보지 못한 샌님이라 놔서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거니와, 또 생각이 났다 하더라도 병원 주인한테 한번 무렴을 본 다음이고 하여 역시 안 되려니 단념을 하고 말았기가 십상일 것이었었다.

그러고서는 하도 속이 답답하니까, 그 동안 다달이 몇 원씩이라도 저금이나 해두었더라면 하고, 아닌 후회나 했다.

할 수 없이 마음은 초조해 오고 달리는 종시 가망이 없고 하여, 그놈 구십 원이나마 손에 쥐고 허허실수로, 또 오늘 일이 여의치 못하면 뒷일 당부도 할 겸, 명님이와 작별이라도 할 겸 이렇게 찾아는 온 것이다.

승재는 가뜩이나 낯이 선 터에 명님이를 따라 눈물이 비어지는 것을 억지로 참느라고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주인양반을 좀 만나 보겠다고 떼어 놓고 통기를 했다.

주인은 내가 주인인데 하면서 웬 뚱뚱한 여자 하나가 아직 이른 태극선을 손에 들고 나서는 것도 승재한테는 의외거니와, 그의 뚱뚱한 것이며 차림새 혼란스런 데는 어쩌면 기가 탁 접질리는 것 같았다.

나이는 한 오십이나 됨직할까, 볼이 추욱 처지고 두 턱진 얼굴에 불콰하니 화색이 도는 것이며, 윤이 치르르 흐르는 모시 진솔치마를 질질 끌면서 삼칸 마루가 사뭇 그들먹하게 나서는 양은 어느 팔자 좋은 부잣집 여인네가 나들이를 나온 길인 성싶게 후덕하고 점잖아 보였다. 다만 손가락마다 싯누런 금반지가 아니면, 백금반지야 돌 박힌 반지를 그득 낀 것은 몹시 조색스럽기도 하지만, 의젓한 그 몸집이나 옷 입음새에 얼리지 않고 쌍스러워 보였다.

주인이라는 여자는 위아래로 승재를 마슬러보면서,

“누구시우? 왜 그러시우”

하고 거푸 묻는다. 도금비녀나 상호(商號) 없는 화장품 장수 대응하듯 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미상불 승재는 털면 먼지가 풀신풀신 날 듯, 구중중한 그 행색에 낡은 왕진가방까지 안고 섰는 꼴이 성가시게 떠맡기려고 졸라 댈 도금비녀 장수 같기도 십상이었었다.

“저어, 쥔…… 양반이십니까”

승재는 안 물어도 좋을 말을 다시 물어 놓는다.

“글쎄 내가 이 집 주인이란밖에요…… 사내주인은 없단 말이오. 그러니 할 말 있거던 날더러 허시우…… 어디서 오셨수”

“네, 그러면…… 저어 명님이라는 아이가 여기 와서 있는데요…….”

“명님이? 명님이”

“저어, 그저께 새루…… 저 요 우에 사는 양서방네…….”

승재는 방금 들어오면서 제 눈으로 본 아이를 생판 모르는 체하거니 하고 참으로 무섭구나 했다.

그러나 이어 주인여자의 대답을 듣고는 그런 게 아닌 줄은 알았고,

“네에, 양서방네요!…… 있지요. 홍도 말씀이시군…… 그래, 그 앨 만나러 오셨수? 일가 되시우”

“일간 아니구요…… 그 애 일루 해서 쥔…… 양반허구 무어 좀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나허구 상읠 하신다? 네에…… 그럼 당신은 누구시우”

“나는 저어 남승재라구 저기 금호병원…….”

“네에! 아아 그러시우!”

주인여자는 승재의 말이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알아듣고는 반색을 하여 갑자기 흠선을 떨면서,

“……온, 그러신 줄은 몰랐지요! 좀 올라오십시오, 어여 절러루 좀 올라가십시다…… 나두 뵙긴 첨이지만 소문은 들어서 다아 참 장허신 수고를 허신다는 양반인 줄은 알구 있답니다…… 어서 일러루…….”

승재는 주인여자의 흔감떨이에 낯이 점직해 어쩔 줄 몰라하면서 청하는 대로 안방으로 들어가서 권하는 대로 모본단 방석을 깔고 앉았다.

주인여자는, 손은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내놓는다, 재떨이를 비어 오게 한다, 부산나케 서둘다가야 겨우 자리를 잡고 앉더니, 이번에는 입에서 침이 마르게 승재를 추앙을 해젖힌다. 필시 별뜻은 없고, 구변 좋고 말 좋아하는 여자의 지날 인사가 그렇던 것이다.

아무려나 승재는 처음 생판 몰라주고서 쌩동쌩동할 때와는 달라, 이렇게 흔연 대접을 해주니, 우선 제 소간사를 말 내놓기부터 수나로울 것 같았다.

“게, 그 앤 어찌……”

주인여자는 이윽고 그 수다스런 사설을 그만 해두고 말머리를 돌려 승재더러 묻던 것이다.

“……전버텀 알음이 있던가요? 혹시 같은 한고향이라던지…….”

승재는 비로소 제 이야기를 내놓을 기회를 얻었다.

처음 병을 낫우어 주느라고 명님이를 알게 된 내력부터 시작하여, 이내 삼 년 동안이나 친누이동생같이 귀애하던 것이며, 그런데 뜻밖에 이런 데로 팔려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언짢았다는 것이며, 그래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백방으로 주선을 해보았으나, 돈이 구십 원밖에는 안되었다는 것이며, 그러니 물론 경우가 아닌 줄 알기는 알지만, 그놈 구십 원만 우선 받아 두고 그애를 도로 물러 줄 양이면 일간 서울로 올라가서 석 달 안에 실수 없이 나머지 처진 것을 보내 주겠노라고, 이렇게 조곤조곤 정성을 들여 사정 설파를 늘어 놓았다.

주인여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문대문 그러냐고, 아 그러냐고 맞장구만 연신 치고 있더니, 승재의 말이 다 끝나자 한참 만에,

“허허!”

하고 탄식인지 탄복인지 모르게 우선 한마디 해놓고는 새로 담배를 붙여 문다.

“참, 대단 장허신 노릇입니다!…… 해두…….”

주인여자는 붙인 담배를 두어 모금 빨고 나서, 또 잠시 생각하는 체하다가,

“……건 좀…… 다아 섭섭하시겠지만…… 그래 디리기가 난처합니다, 네…….”

어느 편이냐 하면, 허탕을 치기가 십상이려니 미리서 각오를 안 한 것은 아니나, 막상 이렇게 되고 보매, 승재는 신명이 떨어져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묵묵히 말이 없다.

“……다아 그래 디렸으면야 대접두 되구 하겠지만, 아 글쎄 좀 보시우? 나두 이게 좋으나 궂으나 영업이 아닌가요? 영업을 하자구 옹색한 돈을 딜여서 영업자를 구해 온 게 아녜요”

“……”

“그런 걸 영업두 미처 않구서 도루 물러 주기가 억울한데 우환중에 디린 돈두 다아 찾질 못하구서 내놓는대서야, 건 좀…… 네? 그렇잖다구요”

“네에.”

승재는 마지못해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니 여보시우, 기왕 점잖으신 터에 말씀을 하신 그 대접으루다가 내가 딜인 밑천만 한목에 치러 주시믄 두말없이 그때는 물러 디리지요.”

승재는 하도 막막해서 뒷일 상의와 부탁을 하자던 것도 잊고 덤덤히 앉아만 있다.

“그런데 여보시우”

주인여자는 뒤풀이가 미흡했던지, 또는 이야기가 더 하고 싶었던지 음성을 훨씬 풀어 가지고 근경속 있게 다시 초를 잡는다. 승재는 무엇인가 해서 고개를 쳐들고 말을 기다린다.

“……이런 건 나버텀두 다아 객적은 소리지만, 게 다아 쓸데없는 짓입넨다. 다아 괜히 그러시지…….”

“네에!…… 건 어째서”

“허어 여보시우, 시방 당신님은 그 애가 불쌍하다구, 그래서 도루 빼주시잔 요량이지요”

“불쌍…… 으음, 그렇지요!”

“그렇지요? 그런데에…… 알구 보믄 이런 데라두 와서 있는 게 차라아리, 차라리 제겐 낫습넨다!

나어요!”

“낫다구요…… 오온!”

“낫지요, 낫구말구요!”

“낫다니 그게 어디…….”

“허어! 모르시는 말씀…….”

주인여자는 볼때깃살이 털레털레하도록 고개를 흔들면서,

“……자아, 당신님두 저 애네 형편을 잘 아시겠구료? 아시지요? 별수없이 퍼언펀 굶지요? 아마 하루 한 끼 어려우리다…… 그러나, 아 세상에 글쎄 배고픈 설움 위에 더한 설움이 어딨겠수 꼬루룩 소리가 나다 못해 쓰라린 창자를 틀켜 쥐구 앉아서 눈 멀뚱멀뚱 뜨구 생배를 곯는 설움보다 더한 설움이 있답니까…… 고생하구는 제일가는 고생이구 그런 게 불쌍한 사람이지 누가 불쌍허우……? 남의 무엇은 크다구 부주깽이루다가 찔르더란 푼수루다 아 남이야 남의 시장한 창잣속 딜여다보는 게 아니니깐 배가 고픈지 어쩐지 모르지요. 그렇지만 당하는 사람은 육장으루 생배 곯기라께 진정 못 할 노릇입닌다…… 못 할 노릇일 뿐 아니라…….”

주인여자의 언변은 차차 더 열이 올라 팔을 부르걷고 승재에게로 버썩 다가앉는다.

“……게, 제엔장맞일, 사람 쳇것이, 그래 날아다니는 까막까치두 제 밥은 있는 법인데 그래 사람 명색이 생으루 굶어야 옳아요? 그버담 더한 천하에 몹쓸 죄인두 가막소에서 밥은 얻어먹는데, 죽일 놈두 멕여 죽이는 법인데, 그래 생사람이 굶어 죽어야 옳단 말씀이오? 네? 육신이 멀쩡한 사람이 눈 멀거니 뜨구 앉어서 굶어 죽어야만 옳아요? 네”

“그거야 누가 굶어 죽으라나요? 제가끔 다아, 저 거시키…….”

승재가 잠깐 더듬는 것을 주인여자는 바싹 다잡고 대들면서,

“그럼? 어떡허란 말이오? 두더지라구 흙이나 파먹구 살아요”

“두더지처럼 땅 파구, 개미처럼 짐지구 그렇게 일하면 먹을 거야 절루 생기지요.”

승재는 대답은 해도 자신이 있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그 동안 야학 아이들의 가정들을 보기 싫도록 다니면서 보아야 그들이 누구 없이 일을 하기 싫어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개개 벌이가 없어서 놀고 있기가 아니면 병든 사람인 줄을 그는 역력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렇다면 시방 이 여자의 말이 옳다 해야 하겠는데, 승재는 결단코 항복을 않는다. 제 자신이 지닌 바 ‘인간의 기준’과 ‘사실’이 어그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 ‘인간의 기준’이란 건 제가 몸소 현실을 손으로 파헤치고서 캐낸 수확이 아니라, 남이 마련한 결론만 눈으로 모방해 가지고는 그것이 바로 제 것인 양, 만능인 양, 든든히 믿고서 되돌려다 볼 생각도 않는 ‘우상’일 따름인 것이다.

결국 승재는 그래서 시초 모를 결론만 떠받고 둔전거리는 셈이요, 그러니 저는 암만 큰소리를 해도 그게 무지(無智)지 별수없는 것이었었다.

“말두 마시우!”

주인여자는 결을 내어 떠든 것이 점직했던지 헤벌씸 웃으면서 뒤로 물러앉는다.

“……다아 몹쓸 것들두 없잖어 있어 호강하자구 딸자식을 논다니루 내놓는 년놈두 있구, 애편을 하느라고 청루나 술집에나 팔아먹는 수두 있긴 합디다마는, 그래도 열에 아홉은 같이 앉어 굶다못해 그 짓입넨다. 나는 이런 장사를 여러 해 한 덕에 그 속으루는 뚫어지게 알구 있다우. 배고픈 호랭이가 원님을 알어보나요? 굶어 죽기 아니면 도둑질인데…… 아 참 여보시우, 그래 당신님 생각에는 이런 데 와 있느니 도둑질이 낫다구 생각하시우”

“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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