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가 낡었단 말이지요”
“알어맞히니 그건 용해!”
“그렇지만 걱정 말아요. 그렇게 안타깝게 구두가 신구 싶으믄 아무 때구 양화부에 가서 한 켤레 집어 신으믄 고만이니…….”
“그러느니 내가 저기 일류 양화점에 가서 아주 썩 ‘모당’으루 한 켤레 마춰 주까”
“흥! 시에미가 오래 살믄 머? 자수물통에 빠져 죽는다구…… 우리 아저씨 씨두 그런 소리가 나올 입이 있었나”
계봉이는 형보더러 별로 아저씨라고 하는 법이 없고, 어쩌다가 비꼬아 줄 때나 씨자 하나를 더붙여서 ‘아저씨 씨’라고 한다.
계봉이가 아무리 그렇게 업신여기고 놀려 주고 해도 형보는, 그러나 그저 속없는 놈처럼 허허 웃고 그대로 받아 준다.
계봉이는 아무 때고 그저 어린 듯이, 철이 없는 듯이, 형보와 함부로 덤비고 시시덕거리고 장난을 하고 하기를 예사로 한다. 이것은 그를 형부(兄夫)로 대접한다거나 나이 어린 처제답게 허물없어하고 따르고 하는 정이거나 그런 것은 물론 아니고, 계봉이는 단지 동물원에 가서 곰이나 원숭이를 집적거려 주고 놀려 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형용부터 괴물로 생긴 형보를 재미삼아 놀려먹고 장난을 하고 하던 것이다. 그를 지극히 경멸하며 속으로 반감을 품은 것은 물론이지만.
가령, 그새까지는 그다지 다니고 싶어 자발을 하던 기술 방면의 전문학교를 의학전문이고 약학전문이고 맘대로 다닐 기회를 만났으면서도, 또 그 목적으로다가 서울로 올라왔으면서도 그것을 아낌없이 밀어 내던지고서 백화점의 월급 삼십 원짜리 숍걸로 나선 것만 하더라도, 그 지경이 된 형을 뜯어먹고, 그따위 인간 형보에게 빌붙어서 공부를 하는 게 창피했기 때문이다.
“여보시우, 우리 여왕나리님…….”
형보가 다시 지분덕거리는 것을, 계봉이는 구두를 신으면서,
“여왕두 나린가? 무식한 백성 같으니라구!…… 할 말 있거든 빨리 해요.”
“그러지 말구, 내가 처제 구두 한 켤레 못 해줄 사람인가…… 이따가 글러루 갈 테니 같이 가서 썩 멋지게 한 켤레 마쳐 신어요.”
“걱정 말래두! 내 일 내가 어련히 알어서 하까 뵈”
“하아따! 괜헌 고집 쓰지 말구…… 내 이따가 아홉시 파할 때쯤 해서 가께, 잉”
“어딜 와…… 괜히 왔다만 봐라, 미친놈이라구 순살 안 불러 대나.”
“흐흐, 거 재미있지! 구두 사준다구 순사 불러 대구…… 그래 어디 모처럼 유치장이나 하룻밤 구경할까”
“괜히 빈말루 알구서…… 와서 얼찐거리구 말이나 붙이구 해봐? 담박…….”
계봉이는 쏘아 주면서 대문간으로 나가 버린다. 초봉이는 울고 떼쓰는 송희도 달랠 생각을 잊고서, 둘이서 수작하는 양을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고 돌아앉는다.
형보는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배포 있이 쭌둑쭌둑하는데, 계봉이는 그 떡심을 받아 내다 못해 꼬장꼬장한 딴 성미를 부리고 마는 것이 그게 장차에 환을 볼 장본인 것만 같았다.
강강한 놈과 눅진거리는 두 놈이 마주 자꾸 부딪치면, 우선 보매는 강강한 놈이 이겨 내는 것 같지만, 그러는 동안에 속으로 곯아 필경 끝장에 가서는 작신 부지러지고, 그래서 눅진거리는 놈한테 잡치고 말 것이었었다.
초봉이는 그게 걱정이다. 그러니 이왕 그럴 테거든 계봉이도 그 발딱하는 성미를 부리지 말고서 차라리 마주 끝까지 떡심 있이 바워 내기나 했으면 한다.
구두를 사주마 하거든, 오냐 사다오, 말로라도 이렇게 받아넘기고, 백화점으로 찾아간다거든, 오냐 오너라, 우리 동무들한테 구경거리 한턱 쓰는 셈이니 기다릴게 제발 좀 오너라, 이렇게 받아넘기고 했으면, 그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위태로워 조심스럽기는 하겠지만 그게 오히려 뒤가 든든할 것 같았다.
계봉이가 나가는 뒤태를, 입을 헤벌리고 앉아 멀거니 바라보던 형보는 이윽고 끙 하면서 고의춤을 움켜쥐고 안방으로 들어온다.
“히히, 히히, 참 좋게 생겼어, 히히.”
초봉이는 그게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는 했어도 짐짓 모르는 체 더 지껄이지 못하게 하느라고 식모를 불러 들인다. 형보는 식모가 들어와서 밥자리를 훔치고 밥상을 들어내 가기가 바쁘게 털썩 초봉이 앞에 주저앉아,
“히히히…….”
하고 그 웃음을 그대로 웃는다. 초봉이는 잔뜩 눈을 흘기다가,
“미쳤나! 이건 왜 이 모양새야? 꼴 보아 줄 수 없네!”
“히히, 조오탄 말야! 응? 아주 아주…….”
“무엇이 좋다구 시방 이 지랄이야”
“꼬옥 잘 익은 수밀도야! 그렇지”
“비껴나! 보기 싫은 게…….”
“비어 물면 물이 주울줄 쏟아질 것 같구…….”
형보는 싯 들여마시다가 침을 한 덤벙이 지르르 흘린다. 그놈을 손등으로 쓱 씻는 게 더 그럴 듯 하다.
“……흐벅진 게! 아이구 흐흐, 열아홉 살! 마침 조올 때지!”
“아, 네가 저엉 이러기냐”
“헤에따! 무얼 다아…… 옛날에 요임금 같은 성현두 아황 여영 두 아우 형젤 데리구 살았다는데, 히히.”
사납게 쏘아보고 있던 초봉이는 이를 악물면서 발끈 주먹을 쥐어 형보의 앙가슴을 미어지라고 내지른다.
“아이쿠!”
형보는 뒤로 나가동그라져 가슴을 우리다가 초봉이가 다시 달려들려고 벼르는 몸짓을 보고 대굴대굴 윗목으로 굴러 달아나서 오꼼 일어나 앉는다.
“헤헤헤헤.”
형보는 그만 것에는 골을 내지 않는다.
초봉이는 무엇 집어던질 것을 찾느라고 휘휘 둘러본다.
“헤헤헤헤, 안 그래 안 그래.”
“다시두 그따위 소릴 할 테야”
“아니 안 그러께…… 히히.”
“다시두 그따위 소릴 했다만 봐라! 죽여 버릴 테니…….”
무심코 초봉이는 이 말을 씹어 뱉다가 제 말에 제가 혹해서 눈을 번쩍 뜬다.
죽일 생각이 나서 죽인다고 한 게 아닌데, 흔히 욕 끝에 나오는 소린데 막상 죽인다고 해놓고 들으니, 아닌게아니라 귀에 솔깃이 당기면서, 정말 죽여 버렸으면 싶은 생각이 솟아나던 것이다.
이것은 초봉이에게 대하여 일변 무서운, 그러나 퍽도 신기한 발견이었었다.
초봉이가 소피를 보러 가느라고 송희를 내려놓고 나가니까 아직도 떼가 덜 가라앉은 참이라 도로 와 하고 울음을 내놓는다.
“조 배라먹을 게, 또 빼액 운다!”
형보는 눈을 흘기면서 혀를 찬다. 초봉이가 없는 새라 제 맘대로 아이를 미워해도 좋았던 것이다.
“……에이 듣기 싫여! 조 배라먹을 것 잡아가는 귀신은 없나”
형보는 아이한테다 주먹질을 하면서 눈을 부릅뜬다. 무서워서 울음을 그치라는 것인데, 아이는 겁을 내어 더 자지러지게 운다.
“……조게 꼭 에미년을 닮아서 소갈찌두 조 모양이야…….”
형보는 휘휘 둘러보다가 마침 앞문 앞으로 내려다놓은 경대 위에 있는 빗솔을 집어서 아이한테 쥐어 준다.
“……옜다, 요거나 처먹구 재랄이나 해라, 배라먹을 것아!”
송희는 미식미식 울음을 그치고 형보를 말긋말긋 올려다보다가 손에 쥔 빗솔을 슬며시 입으로 가지고 간다.
칫솔 쓰던 것을, 빗을 치고 살쩍을 쓸고 해서 터럭 틈새기에 비듬이야 기름때야 머리터럭이야가 꼬작꼬작 들이 끼었는데, 그놈을 입에다가 넣고 빨았으니 맛이 고약할밖에.
송희는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대로 입에 물고 야긋야긋 씹는다. 꼬장물이 시꺼멓게 넘쳐서 턱 아래로 질질 흘러내린다.
“……쌍통 묘오하다! 어이구 쌔원해라! 거저 빼액빽 울기나 좋아하구, 무엇이구 주동아리에다가 틀어 넣기나 좋아하구, 그러면 다아 그런 맛두 보는 법이니라!”
형보는 제 말대로 속이 시원해서 연신 욕을 씹어 뱉는다.
“……맛이 고수하냐? 천하 배라먹을 것! 허천백이 삼신이더냐…… 대체 조게 어느 놈의 종잘꾸? 응…… 뉘 놈의 종잘 생판 멕여 길르느라구 내가 요렇게 활활 화풀이두 못 하구 성활 먹는고 기가 맥혀서, 내 원…….”
욕을 먹을 줄 모르는 송희는 아무 상관 없이 저만 재미가 나서 그 찝질한 빗솔을 연신 씹고 논다.
“……조게 뒤어만 졌으면 내가 춤을 한바탕 덩실덩실 추겠구만서두…… 무어 소리 없이 흔적 없이 감짝같이 멕여서 죽여 버릴 약은 없나”
초봉이가 마루로 올라서는 기척을 듣고 형보는 시침을 뚜욱 떼고 외면을 한다.
“아-니, 이 애가!”
초봉이는 방으로 들어서다가 질겁해서 빗솔을 와락 뺏어 들더니 형보를 잔뜩 노려본다. 송희는 싫다고 떼를 쓰고 방바닥에 가 나가동그라진다.
“……아이가 이런 걸 쥐어다가 빨아먹어두 못 본 체하구 있어”
“뺏으면 또 울라구”
“인정머리없는 녀석!”
“아냐, 아이들이라껀 그렇게 아무것이구 잘 먹어야 몸이 실한 법이야.”
“듣기 싫여! 수언 도척이 같은 녀석아!”
“제기! 인전 자식이 성가신 게로군!…… 그렇거들랑 남이나 내줄 것이지, 저럴 일이 아닌데…….”
“이 녀석아, 그게 내가 널더러 할 소리지 네가 할 소리더냐? 그 녀석이 술척스럽게 사람 여럿 굳히겠네!”
“괜히, 자식이 구찮을 양이면 아따, 염려 말게…… 내가 동냥하러 온 중놈의 바랑 속에다가라두 집어넣어 주께시니.”
“이 녀석아, 내가 네 속 모르는 줄 아느냐…… 네 맘보짱이 어떤지 다아 알구 있단다…… 공중나 안 놓칠려구 네 자식인 체하지? 흥! 소리 없이 죽여 버리구 싶어두 날 놓칠까 봐서 못 하지 네 뱃속을 내가 모르는 줄 알구”
“알긴 개 ×× 알아? 아마 자네두 아직두 뉘 자식인지 똑똑히 모르니까는 자식이 원수 같은가 버이! 그렇지만 난 소중한 내 자식일세.”
“얌체는 좋아!”
“세상에 모듬쇠 자식의 에미라껀 저래 못쓴다는 거야!”
“무엇이 어째”
모듬쇠 자식의 어미란 소리에, 초봉이는 분이 있는 대로 복받쳐올라, 몸부림을 치면서 목청껏 외친다. 그러나 그 다음 말은 가슴에서 칵 막히고 숨길만 가쁘다. 어느결에 눈물이 촬촬 쏟아진다.
“이놈! 두구 보자!”
이것은 단순히 입에 붙은 엄포나 분한 끝에 발악만인 것이 아니라, 마침내 형보를 죽이겠다는 결심이 뚜렷이 가슴속에 들어차기 시작한 표적이요, 그 선고라고 할 수가 있던 것이다.
사실 초봉이는 송희나 계봉이는 말고서 저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자살이 아니면 저절로 밭아 죽었지 형보한테 끝끝내 배겨 낼 수가 없이 되고 만 형편이었었다.
초봉이는 작년 가을 형보와 같이 살기 시작한 그날부터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잃어버린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칠 줄을 모르는 형보의 정력에 잡쳐 몸이 또한 말이 아니게 시들었다. 여느때 예삿일로 다투게 되면은, 형보는 기껏해야 빈정거리기나 하고 미운 소리나 하고 하지 웬만해서는 그저 바보처럼 지고 만다. 발길로 걷어채고 등감을 질리고 하는 것쯤 아주 심상히 여기고 달게 받는다. 낮의 형보는 그리하여 늙은 수캐처럼 만만하고 순하다.
그러나 만일 초봉이가, 드리없는 그의 ‘밤의 요구’에 단 한 번이라도 불응을 하고 보면, 단박 두 눈을 벌컥 뒤집어쓰고 성난 야수와 같이 날뛴다. 꼬집어 뜯고 물어 떼고 하는 건 예사요, 걸핏하면 옆에서 고이 자는 송희를 쥐어박지르고 잡아 내동댕이를 치곤 한다. 그래도 안 들으면 칼을 뽑아 들고 송희게로 초봉이게로 겨누면서 헤번덕거린다.
필경 초봉이는 지고 말아, 이를 갈면서도 항복을 한다.
이것은, 그런데 형보의 본디 성질만으로 그러던 것이 아니고, 따라서 처음부터 그러던 것도 아니고, 차라리 초봉이 제가 부지중 그런 버릇을 길러 준 것이라 할 수가 있었다.
초봉이는 맨 처음 형보와 더불어 밤을 같이 할 때부터 승강을 하고 표독스럽게 굴고 했었고, 한데 그놈을 억지로 굴복시키자니 형보는 자연 ‘사나운 수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초봉이는 물론 징그럽고 싫기도 했지만, 일변 그것을 형보한테 대한 앙갚음이거니 하고 우정 그러기도 했던 것인데,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떠했느냐 하면 필경 초봉이 제 자신만 더 큰 해를 보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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