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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68)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20.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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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포스런 완력다짐 끝에 따르는 계집의 굴복, 그것에서 형보는 차차로 한 개의 독립한 흥분을 즐겼고, 그것이 쌓여서 미구에는 일종의 사디즘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초봉이는 절망이 마음을 잡쳐 놓듯이 건강도 또한 말할 수 없이 쇠해졌다.

병 주고 약 주더란 푼수로, 형보는 간유 등속에 강장제하며 한약으로도 좋다는 보제는 골고루 지어다가 제 손수 달여서 먹이고 하기는 해도 종시 초봉이의 피로와 쇠약을 막아 내지는 못했다.

불과 반년 남짓한 동안이나 초봉이는 아주 볼썽이 없이 바스러졌다. 볼은 깎아 낸 듯 홀쭉하니 그늘이 지고, 눈가로는 푸른 테가 드러났다. 살결은 기름기가 밭고 탄력이 빠져서 낡은 양피(羊皮)같이 시들부들 버슬버슬해졌다. 사지에 맥이 없이 노곤한 게 밤이고 낮이고 눌 자리만 뵌다.

이렇게 생명이 생리적으로도 좀먹어 들어가는 줄을 초봉이는 저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다가 못 할 값에 형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도록 부스대 볼 생각은 아예 먹지도 않는다. 근거도 없는 단념을, 돌이켜 캐보려고는 않고 운명이거니 하고서 내던져 두던 것이다.

작년 겨울 그날 밤에 형보더러 두고 보자고 무슨 큰 앙갚음이나 할 듯이 옹글진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그 소리를 하던 그 당장에 벌써 별수없거니 하고 단념부터 했었은즉 말할 것도 없다.

결국은 두루 절망뿐이다. 절망 가운데서 빤히 내다보이는 얼마 안 남은 목숨을 지탱하고 있기는 괴롭고 지리했다. 그러니 차라리 일찌감치 죽어 버리고나 싶었다. 죽어만 버리면 만사가 다 편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와락 죽지 못한 것은 송희 때문이다. 소중한 송희를 혼자 두고 나만 편하자고 죽어 버리다니 안 될 말인 것이다.

그래 막막하여 어쩔 바를 몰랐는데, 계제에 문득 동생 계봉이에게다 송희를 맡기면 내나 다름없이 잘 가축하여 기르겠거니, 따라서 나는 마음을 놓고 죽을 수가 있겠거니 하는 ‘슬픈 안심’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요, 형보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이상 역시 못 할 노릇이라고 그 ‘슬픈 안심’조차 단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거기서 또 마침 한 줄기의 희망은 뻗치어, 형보를 죽이고서, (죽여 버리고서) 내가 죽으면 후환도 없으려니와 나도 편안하리라는 ‘만족한 계획’이 얻어졌던 것이다. 물론 형보를 죽인다면야 제가 죽자던 이유가 절로 소멸되는 것이니까, 가령 형벌을 받는다든지 도망을 간다든지 이러기로 생각을 돌리는 게 당연한 조리겠지만, 그러나 초봉이는 그처럼 둘러 생각을 할 줄은 모른다. 그저 기왕 죽는 길이니 후환마저 없으라고, 형보를 죽이고서 죽는다는 것뿐이다.

형보는 그리하여, 잠자코 있어도 초봉이의 손에 죽을 신순데, 게다가 입을 모질게 놀려 분까지 돋우어 주었으니, 만약 오늘이라도 어떠한 거조가 난다면 그건 제가 지레 명을 재촉한 노릇이라 하겠다.

 

××백화점 맨 아래층의 화장품 매장이다.

위와 안팎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진열장을 뒤쪽 한편만 벽을 의지삼고 좌우와 앞으로 빙 둘러 쌓아 놓은 게 우선 시원하고 정갈스러워 눈에 선뜻 뜨인다.

진열장 속과 위로는, 형상이 모두 각각이요 색채가 아룽이다룽이기는 하지만 제각기 용기(容器)의 본새랄지 곽의 의장(意匠)이랄지가, 어느것 할 것 없이 섬세하고 아담한 게 여자의 감각을 곧잘 모방한 화장품들이 좀 칙칙하다 하리만큼 그득 들이 쌓였다.

두 평은 됨직한 진열장 둘레 안에는 그들이 팔고 있는 화장품 못지않게 맵시 말숙말숙한 숍걸이 넷, 모두 그 또래 그 또래들이다.

계봉이가 있고, 얼굴 둥그스름하니 예쁘장스럽게 생긴 싱글로 깎아올린 단발쟁이가 있고, 코가 오뚝하니 눈도 오꼼 입도 오꼼한 오꼼이가 있고, 얇디얇은 얼굴에다가 주근깨를 과히 발라 놓은 레지가 찰그랑거리고 앉았고…….

이 가운데 양복 끼끗하게 입고 얼굴 거무테테 함부로 우툴두툴한 사내꼭지가 한 놈, 감히 들어앉아 있음은 매우 참월하다 하겠다. 그러나 남은 화초밭의 괴석이라고 시새움에 밉게 볼는지는 몰라도, 당자는 검인(檢印)의 스탬프를 손에 쥐고, 물건 싸개지의 봉인딱지에다가 주임이라는 제 권위를 꾸욱꾹 찍느라 버티고 있는 맥이다.

아침 아홉시가 조금 지났고, 문을 방금 연 참이라 손님이라고는 뒷짐지고 이리 끼웃 저리 어릿, 구경 온 시골 사람 몇이지 헤성헤성하다.

약속한 건 아니지만 손님이 없으니까 모두 레지 앞으로 모여 선다.

“계봉이 이따가 키네마 안 갈늬”

영화를 아직까지는 연애보다도 더 좋다고 주장하는 오꼼이가 계봉이를 꾀던 것이다.

“글쎄…… 썩 좋은 거라믄…….”

계봉이는 싫지도 않지만 내키지도 않아서 그쯤 대답을 하는데 오꼼이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을 레지의 주근깨가 냉큼 내달아,

“저 계집앤 영화라믄 왜 저렇게 죽구 못살까”

하고 미운 소리를 한다.

“남 참견은! 이년아, 누가 너처럼 밤낮 괴타분하게 소설만 읽구 있더냐”

“흥! 소설 읽는 취미를 갖는 건 버젓한 교양이란다!”

“헌데 좀 저급해!”

계봉이가 도로 나서서 주근깨를 찝쩍이던 것이다.

“어째서 이년아, 소설 읽는 게 저급하더냐”

“소설 읽는 게 저급하다나? 이 사람 오핼세!”

“그럼 무엇이 저급하니”

“읽는 소설이…….”

“어쩌니 내가 읽는 소설이 저급하니”

“국지관이 소설이 저급하잖구 『×××』이 저급하잖구…… 그런 것두 예술 축에 끼나”

“예술은 다아 무엇 말라비틀어진 게야? 소설이믄 거저 소설이지…….”

“하하하하, 옳아, 네 말이 옳다. 그래도 『추월색』이나 『유충렬전』을 안 읽으니 그건 신통하다!”

“저년이 버르쟁이 없이, 사람 막 놀려!”

“그게 신통해서, 네 교양 점수 육십 점은 주마, 낙제나 면하라구, 응…… 그리구 너는…….”

계봉이는 오꼼이를 손으로 찔벅거리면서 남자 어른들 음성을 흉내내어,

“……거 아무리 근대적 감각을 향락하기 위해서 그런다구 하더래두 계집아이가 영활 너무 보러 다니며는 뒤통수에 불자(不字)가 붙는 법이다, 응? 알았어? 불량소녀…….”

“걱정을 말아, 이 계집애야!”

“요놈!”

깩 지르는 소리가 무심결에 너무 커서 주임이 주의하라는 뜻으로 빙긋 웃으니까 계봉이는 돌아서서 입을 막는다. 오꼼이와 주근깨가 쌔원한 김에 재그르르 웃는다.

“무얼들 그래”

물건을 파느라고 이야기 참례를 못 했던 단발쟁이가 이리로 오면서, 혹시 제가 웃음거리가 된 것인가 하고, 뚜렛뚜렛한다.

“그리구 참, 넌 무어냐”

계봉이가 또 나서서 단발쟁이의 팔을 잡아 끈다.

“무어라니”

“저 애들 둘은, 하난 문학소녀구, 또 하난 영화광이구, 그런데 넌 무어냔 말이다…… 연애? 그렇지”

“내 온!…… 넌 무어냐…… 너버틈 말해 봐라!”

“그래 그래.”

“옳아, 제가 먼점 말해예지.”

오꼼이와 주근깨가 한꺼번에 들고 나서고, 단발쟁이가 계봉이를 붙잡으면서 따진다.

“네가 옳게 연애하지…… 연애편지가 마구 쏟아지구…….”

“여드름바가지가 있구…….”

“소장변호사 영감 계시구…….”

“하쿠라이 귀공자가 있구…….”

“대답해라!”

“그 중 누구냐”

“아무튼 연애파는 연애파 갈데없지”

오꼼이와 주근깨와 단발쟁이가 서로가람 계봉이를 말대답도 못 하게 몰아 대는 것이다.

“여드름바가지가 오늘두 하마 올 시간인데…….”

“소장변호사 영감께선 그새 또 몇 장이나 왔듸”

“하하, 편지 첫끝에다가 연애법 제 몇 조라군 안 썼던”

“가만있어, 내 말을 들어…….”

계봉이는 겨우 손을 저어 제지를 시켜 놓고는,

“……난 피해자야, 피해자…….”

모두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고 뚜렛뚜렛한다. 계봉이는 다시 남자 어른 목소리로,

“땅 진 날 밖엘 나오지 않느냐? 자동차가 옆으루 지나가질 않았느냐? 흙탕물을 끼얹질 않았느냐? 옷에 흙탕물이 묻었겠다…… 그와 마찬가지루 헴 헴, 여드름바가지나 변호사나리나 하쿠라이 귀공자나 그 축들이 어쩌구어쩌구 해서 내가 제군들한테 연애파라구 중상을 받는 것두 즉 말하면 그런 피해란 말야, 응…… 나는 아무 상관두 없는데 자동차가 흙탕물을 끼얹어 옷을 버려준 것처럼, 그게 모두 여드름바가지니 변호사니 하쿠라이 귀공자니 하는 것들이 무어냐 하면은, 땅 진 날 남의 새옷에다가 흙탕물을 끼얹고 달아나는 ‘처벌할 수 없는’ 깽들이란 말이야. 그러니깐 제군들두 조심을 해! 잘못하면 약간 흙탕물이 아니라, 바루 바퀴에 치여서 죽거나 병신이 되거나 하기 쉬우니깐…… 알아들어? 아는 사람 손들엇!”

계봉이 저까지 해서 모두 재그르르 웃는다. 주임도 무어라고 간섭을 못 하고서 히죽히죽 웃는다.

“그럼 대체 넌 무엇이냐…… 말을 그렇게 능청맞게 잘하니, 약장수냐”

“구세군 전도빤”

“무성영화 변사”

“나? 난 본시 행동파시다, 행동파…….”

“행동파라니”

계봉이의 말에 주근깨가 먼저 따들고 나선다.

“행동파 몰라? 사람이 행동하는 거 몰라? 소설은 많이 읽어서 현대적인 체하믄서두 깜깜하구나!”

“아, 이년아, 그럼 누군 행동하잖구서 밤낮 우두커니 앉었기만 한다더냐”

“이 사람, 행동이라니깐 머, 밥 먹구 더블유시 다니구 하품하구 그런 행동인 줄 아나”

“그럼 그건 행동 아니구 지랄이더냐”

“그런 건 개나 도야지나 그런 짐승들두 할 줄 안다네.”

마침 주임이 계봉이의 전화를 받아서 넘겨 준다. 계봉이는 전화통에 입을 대면서 바로,

“언니우”

한다. 어쩌다가 형 초봉이가 전화를 거는 외에는 통히 전화라고는 오는 데가 없기 때문에 계봉이는 언제고 그러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뜻밖에,

“나야, 나…….”

하면서 우렁우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 왔다.

승재가 전화를 걸던 것인데, 계봉이는 승재와는 전화가 처음이라 목소리를 언뜻 분간하지 못했었다.

“나라니, 내가 누구예요”

“남서방이야!”

“아이머니!…… 난 누구란다구!”

계봉이는 깜짝 반가워서 주위를 꺼리지 않고 반색을 한다. 등뒤에서는 오꼼이 주근깨 단발쟁이가 서로 치어다보고 웃으면서 눈짓을 한다.

“……언제 왔수”

“오긴 그저께 아침에 당도했는데…….”

“그러구서 여태 시침을 뚜욱 따구 있었어? 내, 온!”

“미안허우. 좀 어수선해서…… 그런데 내가 글러루 찾아가두 좋겠지만…….”

“아냐, 내가 가께. 어디? 아현”

“응 저어…….”

승재는 마포로 가는 전차를 타고 오다가 아현고개 정류장에서 내려서 신촌 나가는 길로 한참 오노라면 바른편 길 옆으로 낡은 이층집이 있고 ‘아현실비의원’이라는 간판이 붙었다고 노순을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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