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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69)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2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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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시 반이나 일곱시까지 대가마고 하고서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마침 대기하고 섰던 세 동무가 일제히 공격을 한다.

“또 하나 생겼구나”

“누구냐”

“그건 자동차 아니냐? 흙탕물 끼얹는…….”

마지막의 단발쟁이의 말에 모두 자지러져 웃고, 계봉이도 같이서 웃는다.

스무 살 안팎의 한참 피어나는 계집아이들이 넷이나 한데 모여 재깔거리고, 그러다가는 탄력 있는 웃음이 대그르르 맑게 구르고, 침침해도 명랑하기란 바깥에 가득 내리는 오월의 햇빛과도 바꾸지 않겠다.

이윽고 웃음이 그치자 여럿은 계봉이를 다시 몰아 댄다.

“얘 이년아, 그러구서두 입때 시침을 따구 있어”

“누구냐? 대라!”

“저년이 뚱딴지 같은 년이 의뭉해서…….”

“그게 행동파가 하는 짓이냐”

“개나 도야지두 연애를 하기는 한다더라”

“웃구 섰지만 말구서 바른 대루 대라!”

“인전 제가 할 말이 있어야지!”

“아니 여보게들…….”

공격이 너끔한 틈에 계봉이는 비로소 말대꾸를 하고 나선다.

“……대체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구서 그러나”

“누군 무얼 누구야? 네년의 리베지.”

주근깨가 윽박질러 주는 말이다.

“리베”

“그럼!”

“우리 산지기다, 헴…….”

또 모두들 허리를 잡고 웃는다.

“대체 어떻게 생긴 동물이냐? 구경이나 한번 시키렴”

단발쟁이가 웃음엣말같이 하기는 해도 퍽 궁금한 눈치다.

“구경했다간 느이들 뒤로 벌떡 나가동그라진다!”

“그렇게 잘났니”

“아-니, 안팎이 모두 고색이 창연해서.”

“망할 계집애! 누가 그게 그리 대단해서 태클할까 봐”

“너 가질늬”

“일없어!”

“행동파 연앤 다르구나? 리베를 키네마 입장권 한 장 선사하듯 동무한테 내주구…… 그게 행동파 특색이냐”

오꼼이가 그것도 영화에 껴른 버릇이라 비유를 한다는 게 역시 거기 근리한 말을 쓴다.

“지당한 말일세! 궐씨(厥氏)가 너무 행동이 낡구두 분명치가 못해서…….”

“그럼 그 사람이 사람이 아니구서 네 말대루 하믄 그치가 도야진가 보구나”

“가깝지!”

“저년 보게!…… 내 인제 일를걸”

“파쇼라두 좋구 또 하다못해 너처럼 영광이래두, 아무튼 현대적 호흡이 통한 행동이 있어야 말이지! 거저 법이나 먹구, 매달려서 로보트처럼 일이나 허구, 생식(生殖)이나 허구, 그리군 혹시 한다는 게 고색이 창연한 짓이나 하구 있구…….”

“어느 회사 사무원인 게루구나”

“명색이 의사라네!”

“하주! 여드름바가지나 변호사나 하쿠라이 귀공잘 눈두 안 떠볼 만하구나!”

“얘들아! 호랭이두 제 말 하믄 온다더니, 왔다 왔다, 저기…….”

주근깨가 뜅기는 소리에 모두 문간을 돌려다본다. 아닌게아니라 여드름바가지가 어릿어릿 이편으로 걸어오고 있다.

얼굴에 여드름이 다닥다닥 솟았대서 생긴 별명이다. 모표를 보면 ××고보 학생인데 학교 갈 시간에 백화점으로 연애(?)를 하러 오는 걸 보면 온전치 못한 것은 분명하다.

나이는 다직해야 열아홉 아니면 그 아래다. 어린애 푼수다.

그는 지나간 삼월에 ‘아몬 파파야’를 한번 사가더니 그날부터 아침 아홉시 반을 정각삼아 이내 일참을 해 내려왔다. 그것도 처음에는 그런 줄 저런 줄 몰랐다가 얼마 후에야 단발쟁이가 비로소 발견을 했었고, 다시 며칠이 지나서는 계봉이가 과녁인 것까지 드러났다.

그는 화장품 매장 앞에 서서 얼찐거리다가 계봉이가 대응을 해주면 무엇이고 한 가지 사가지고 가되, 혹시 다른 여자가 나서면 이것저것 뒤지다가는 그냥 돌아서 버리곤 하던 것이다. 그래 그 눈치를 안 뒤로부터는 다른 여자들은 우정 피하고서 계봉이한테다가 민다.

계봉이는 역시 마다고 않고 처억척 대응을 하면서 (대응이라야 물론 지극히 간단한 것이지만) 슬금슬금 구슬려 주곤 하기도 한다. 그 덕에 여드름바가지는 화장품 매장에다가 적지 않은 심심파적과 이야깃거리를 매일같이 끼쳐 주던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계봉이는 웃던 끝이라 얌전을 내느라고 한참 만에 진열장 앞으로 다가가면서 여점원답게 상냥하게 마중을 한다.

여드름바가지는 아까 들어올 때 벌써 반은 붉었던 얼굴을 드디어 완전히 빨갛게 달궈 가지고 힐끔 계봉이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도로 숙인다. 여기까지는 그새와 같고 아무 이상이 없다. 그 다음 그는 양복 포켓 속에다가 한 손을 넣고서 이상스럽게 전보다 더 어물어물한다.

이윽고 포켓에 손을 꿴 채 어릿어릿하면서, 진열장 속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한다. 계봉이는 그가 돌아가는 대로 안에서 따라 돌고 있고, 나머지 세 여자는 대체 오늘은 무엇을 사는가 재미삼아 기다린다.

여드름바가지는 이 귀퉁이에서 저 귀퉁이까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더니 되짚어 가운데께로 올듯하다가 말고서 손가락으로 진열장 유리 위를 짚어 보인다. 으레 입 대신 손가락질을 하는 게 맨 첨 오던 날부터 하던 버릇이다.

계봉이가, 그가 짚는 대로 들여다보니, 이십오 원이나 받는 ‘코티’의 향수다.

계봉이는 이 도련님 아무거나 되는 대로 짚은 것이 멋몰랐습니다고 우스워 죽겠는 것을 참아 가면서 향수를 꺼내 준다.

여드름바가지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물건을 받아 들고 한참 서서 레테르를 읽는 체하다가 계봉이를 치어다본다. 이건 값이 얼마냔 뜻이다.

“이십오 원입니다.”

여드름바가지는 움칫하더니 그래도 부스럭부스럭 십 원짜리 석 장을 꺼내어 향수병에다가 얹어내민다. 언제든지 십 전짜리 비누 한 개를 사도 빳빳한 십 원짜리만 내놓는 터라 그놈이 석 장이 나왔다고 의아할 것은 없다.

“고맙습니다!”

계봉이는 향수와 돈을 받아 들고 레지로 오면서 눈을 찌긋째긋한다. 동무들 모두 웃고 싶어서 입이 옴츠러진다.

계봉이는 향수를 제 곽에 담고 싸고 해서 검인을 맡아 주근깨가 주는 거스름돈과 표를 얹어다가 내주면서,

“고맙습니다!”

하고 한번 더 고개를 까딱한다.

여드름바가지는 먼저보다 더 떨리는 손을 내밀어 덥석 받아 들고 이내 돌아선다.

“안녕히 가십시오!”

계봉이는 등뒤에다가 인사를 하면서 동무들한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얼굴을 돌린다.

그러자 마침 단발쟁이가 기다렸던 듯이 오르르 달려오더니 여드름바가지가 서서 있던 진열장 위로 또 한층 올려논 진열대 밑에서 조그마해도 볼록한 꽃봉투 하나를 쑥 뽑아 들고 돌아선다. 나머지 두 여자는 손뼉이라도 칠 체세다.

계봉이는 그것이 여드름바가지가 저한테 주는 양으로 거기다가 놓고 간 편진 줄은 생각할 것도 없이 대번 알아챘다.

와락, 단발쟁이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 쥔 계봉이는 이어 몸을 돌이키면서 여드름바가지를 찾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학생”

부르는 소리에 방금 댓 걸음밖에 안 간 여드름바가지는 흠칠 하고 그대로 멈춰 선다.

“학생, 날 좀 보세요!”

보란다고 정말 보기만 하라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드름바가지는 겨우 몸을 돌리고 서서 어릿어릿한다.

“일러루 좀 오세요”

계봉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연덕스런 얼굴로 손을 까분다. 여드름바가지는 비실비실 진열장 앞으로 가까이 와서 고개를 숙이고 선다.

“이 편지 우체통에다가 넣어 디리까요”

계봉이는 뒤로 감추어 가지고 있던 편지를 내밀어 보인다. 앞뒤에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것을 계봉이도 비로소 보았다.

여드름바가지는 학교에서 선생님께 꾸지람을 들을 때처럼 두 발을 모으고 고개를 깊이 떨어뜨리고 서서 꼼짝도 않는다. 두 귀밑때기가 유난히 더 새빨갛다.

“우표딱지야 한 장 빌려 디려두 좋지만, 주소두 안 쓰구 성명두 없구 그래서요…….”

계봉이는 한 팔을 진열장 위에다 짚어 오도카니 턱을 괴고 편지를 앞뒤로 되작되작 이상하담 하듯 한다. 등뒤에서는 동무들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느라고 킥킥거린다. 마침 딴 손님이 없고 조용한 때기에망정이지 큰 구경거리가 생길 뻔했다.

“자아, 이거 갖다가 주소 성명 잘 쓰구, 우표딱진 사서 요기다가 똑바루 붙이구, 그래 가지구서 우체통에다가 자알 집어넣으세요, 네”

여드름바가지는 편지를 주는 줄 알고 손을 쳐들다가 오믈뜨린다.

“아, 이런 데다가 내버리구 가시믄 편지가 마요이코가 돼서 저 혼자 울잖어요”

이번에는 편지를 내밀어 주어도 모르고 섰다.

“자요, 이거 가지구 가세요.”

코앞에다가 바싹 들여대 주니까 채듯 받아 움크려 쥐고 씽하니 달아나 버린다.

맘껏 소리를 내어 대굴대굴 굴러 가면서라도 웃을 것을 차마 조심들을 하느라 모두 애를 쓴다.

 

17 노동(老童) ‘훈련일기(訓戀日記)’

 

종일 마음이 들떴던 계봉이는 여섯시가 되자 주임을 엎어 삶아서 쉽사리 수유를 타가지고 이내 백화점을 나섰다. 시방 가면 아무래도 제 시간까지 돌아오게 되지는 못할 테라고 지레 시간이 새로워서, 그러자니 형 초봉이가 걱정하고 기다릴 것이 민망은 했으나 집에 잠깐 들렀다가 도로 나오기보다 승재게를 갈 마음이 더 급했다.

승재가 일러준 대로 짐작대고 간 것이 미상불 수월하게 찾아낼 수가 있었다.

계봉이는 급한 마음을 누르는 재미에 집을 둘러보고 하면서 우정 천천히 서둔다.

명색 병원이라면서 생철지붕에다가 낡은 목제 이층인 것이 계봉이가 생각하던 병원의 위풍과 아주 딴판이고, 우선 집 생김새부터 궁상이 질질 흘렀다. 그러나 막상 당하여 보고서 예상 어그러진 것이 섭섭하기보다도, 여느 혼란스런 병원집이 아니요, 역시 승재 그 사람인 듯이 이런 낡고 빈약한 집이던 것이 그의 체취가 스미는 것 같아 오히려 정답고 구수했다.

‘십오일부터 병을 보아 드립니다.’

대단 장황스런 설명을, 분명 승재의 필적으로 굵다랗게 양지에다가 써서 붙인 것을 계봉이는 곰곰이 바라보면서 승재다운 곰상이라고 혼자 미소를 했다.

사개 틀린 유리 밀창을 드르릉 열기가 바쁘게 클로로 냄새가 함뿍 풍기는 게, 겨우 그래도 병원인가 싶었다. 현관 안에 들어서니 바로 왼쪽으로 변죽 달린 반창이 있고 그 앞에다가 ‘진찰 무료’라고 쓴 목패를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거기가 수부(受付)다.

복도 하나가 짤막하게 뻗어 들어가다가 그 끝은 좁다란 층계를 타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중간께로 바른편에 가서 간유리창이 닫혔고 그 위에는 ‘진찰실’이라고 거기 역시 아직 먹자국이 싱싱한 팻조각이 가로로 붙었다.

겉은 하잘것없어도 내부는 둘러볼수록 페인트며 벽의 양회며 바닥의 양탄자며 모두 새것이고 깨끔했다.

아무 인기척이 없고 괴괴했다. 수부의 창구멍을 똑똑 쳐보아도 대응이 없다.

무어라고 찾아야 할까 싶어서 망설이고 섰는데 진찰실의 문이 야단스럽게 열리더니 고개 하나가 나온다. 승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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