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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66)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18.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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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재나 있었으면, 예라 모르겠다고 오늘 하루 비어 때리고서 잡아 앞참을 세우고 하다못해 창경원이라도 갔을 것을 하고 생각하니, 하마 올라왔기 쉬운데 어찌 소식이 없는가 해서 궁금하다.

“다라라 다라라.”

‘그루미 선데이’를, 그러나 침울한 게 아니고 명랑하게 부르면서 샛문을 열고 마루로 나선다.

“언니이, 나 다녀와요오.”

“오냐, 늦잖었니”

대답을 하면서 초봉이가 안방 앞미닫이를 열다가 황홀하여 눈을 흡뜬다.

“……아이구! 저 애가!”

“왜애…… 하하하하, 좋잖우”

계봉이는 한 손으로 치마폭을 가볍게 치켜 잡고 리듬을 두어 빙그르르 돌아서 형이 문턱을 짚고 앉아 올려다보고 웃는 앞에 가 나풋 선다.

“……날이 하두 좋길래 호살 좀 하구 싶어서…… 하하하, 좋지? 언니.”

“좋다! 다아 잘 맞구 잘 쌘다.”

초봉이도 흔연히 같이서 좋아한다. 그러나 그 좋아 보이는 동생의 옷치장이며 무성한 몸매를 곰곰이 바라다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윽고 한 가닥 수심이 피어오른다.

계봉이는 본시 숙성하기도 하지만, 인제는 나이 벌써 열아홉이라 몸이 빈틈없이 골고루 다 발육이 되었다.

돌려세워 놓고 보면 팡파짐하니 동근 골반 아래로 쪼옥쪽 곧은 두 다리가 비단양말이 터질 듯 통통하다. 그 두 다리가 어떻게도 실하게 땅을 디디고 섰는지 등뒤에서 느닷없이 칵 떠밀어야 꿈쩍도 않을 것 같다. 어깨도 무슨 유도꾼처럼 네모가 진 것은 아니나 묵지근한 게 퍽 실팍해 보인다.

안으로 옥지 않은 가슴은 유방이 차차 보풀어오르느라고 알아보게 불룩하다.

키는 초봉이와 마주서면 이마 위로 한 치는 솟는다. 그 키가 탐스런 제 체격에 잘 어울린다. 얼굴은 어렸을 때 양편 볼때기로 추욱 처졌던 군살이 다 가시고 전체로 균형이 잡혀서 두릿하다.

그러한 얼굴이 분이나 연지 기운이 없이 제 혈색 그대로요, 요새 봄볕에 약간 그을러 가무룻한게 오히려 더 건강해 보인다. 눈은 타기가 없고 총명하나, 자라도 심술은 가시잖는다.

하하하, 마음 턱 놓고 웃는 입과 잇속은 어렸을 적보다도 더 시원하다.

이 활달하니 개방적인 웃음과, 입이 아무고 무엇이고 다 용납을 하여 사람이 헤플 것 같으면서도 고집 센 콧대와 심술 든 눈이 좀처럼 몸을 붙이기 어렵게시리 옹글지고 맺힌 데가 있어, 결국 그 두 가지의 상극된 품격을 조화를 시킨다.

아무튼 전체로 이렇게 건강하고 균형이 잡혀 훠언한 몸매라 그는 어느 구석 오밀조밀하니 이쁘장스럽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 그저 좋고 탐지어 개중에도 여럿이 있는 데서 떼어 놓고 보면은 선뜻 눈에 들곤 한다.

초봉이는 이렇게 탐스럽고 좋게 생긴 동생을 둔 것이, 보고 있노라면 볼수록 좋았다. 좋은 데 겨워 혼자만 보기가 아깝고 남한테 두루 자랑을 하고 싶다. 그래서 언제든지 계봉이와 같이서 거리를 나가기를 좋아한다.

형보가 못 나가게 고시랑거리니까 자주 출입은 못 하지만, 간혹 계봉이도 놀고 하는 날 둘이서 나란히 거리를 걷노라면 젊은 사내들은 물론이요, 늙수그름한 여인네들도 곧잘 계봉이를 눈여겨 보곤 한다. 그러다가는 둘을 지나쳐 놓고 나서,

“아이! 그 색시 좋게두 생겼다!”

이런 칭찬을 개개들 한다.

그럴라치면, 초봉이는 동생을 마구 들쳐 업고 우줄거리고 싶게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동생이 그처럼 자랑스럽고 좋기 때문에 일변 걱정도 조만치가 않다.

초봉이가 보기에는 계봉이의 말하는 것이며 생각하는 것이며가 도무지 계집애다운 구석이 없고 방자스럽기만 했다.

언젠가도 아우형제가 앉아서 여자의 정조라는 것을 놓고 서로 우기는데, 초봉이는 요컨대 여자란 것은 정조가 생명과 같이 소중하고 그러니까 한번 정조를 더럽히기 시작하면은 그 여자는 버려진 인생이라고 쓰디쓴 제 체험으로부터 우러난 소리를 하던 것이나, 계봉이는 그와 정반대의 의견이었었다.

즉 정조는 생리의 한 수단이지 결단코 생명의 주재자(主宰者)가 아니요, 그러니까 정조의 순결

성이란 건 상대적인 것이어서, 한 여자가 가령 열 번을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그 열 번이 번번이 다 정조적일 수가 있는 것이요, 그리고 설사 어떠한 여자가 생활의 과정상 불가항력이나 또는 본의가 아닌 기회에 정조를 온전히 하지 못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생의 실권(失權)’을 선고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이었었다.

이것이 제 형을 연구재료삼아서 얻은 계봉이의 주장이었고, 그런데 초봉이는 동생의 그렇듯 외람한 소견을 그것이 바로 행동의 기준인가 하고는, 저 애가 저러다가 분명코 무슨 일을 저지르지 싶어 가슴이 더럭했었다.

차라리 학교나 다녔으면 그래도 더얼 마음이 조이겠는데, 그다지 하고 싶어하던 공부면서 무슨 변덕으로 남자들이 덕실덕실한 백화점을 굳이 다니고 있으니 마치 어린아이가 우물가에서 놀고 있는 것처럼 위태위태해서 볼 수가 없다.

그런데다가 올 봄으로 접어들어 완구히 성숙한 계봉이의 몸뚱이를 버엉떼엥하면서 힐끗힐끗하

는 형보의 눈길!

그 눈치를 알아챈 초봉이는 계봉이가 아무 철 없이 어린애처럼 형보와 함부로 장난을 하고 농지거리를 하고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사뭇 감수를 하게시리 가슴이 떨리곤 해서, 그래 근심이요 걱정이던 것이다.

계봉이가 마악 대뜰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얼굴에다가 밥알을 대래대래 쥐어 바른 송희가 엄마를 밀어 젖히고,

“암마이!”

부르면서 께꾸- 하듯이 내다보고 좋아한다. 송희는 계봉이를 무척 따른다.

“어이구, 우리 송흰가!”

계봉이는 수선을 피우면서 우르르 달려들어 두 팔을 쩌억 벌린다.

“……아, 이건 무어야! 점잖은 사람이! 밥알을 사뭇…….”

“암마이.”

송희는 위로 두 개와 아래로 세 개가 뾰족하게 솟은 젖니를 하얗게 드러내면서 벙싯 웃고 계봉이 한테 덤쑥 안긴다.

“얘야, 저 새옷 모두 드렌다!”

형이 방색을 해도 계봉이는 상관 않고,

“괜찮어요, 괜찮어요!”

하면서 겅중겅중 우줄거린다.

“그치? 송희야”

“응.”

송희는 좋아라고 같이서 우줄우줄 뛰고, 계봉이는 쪽쪽 입을 맞춰준다.

“그까짓 옷이 젤인가? 우리 송희가 젤이지. 그치”

“응.”

“그런데 엄만 괘앤히 시방 그러지”

“응.”

“하하하하, 이건 막둥인가? 대답만 응 응 그러게…….”

“응.”

송희가 계봉이를 잘 따르고 계봉이도 송희를 귀애할 뿐더러 끔찍 소중히 하는 줄을 초봉이는 진작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나, 시방 저희 둘이서 재미나게 노는 양을 곰곰이 보고 있노라니까 어디선지 모르게 문득,

‘내가 없더래도 너희끼리…….’

이런 생각이 나던 것이다.

“얘, 계봉아”

“으응”

계봉이는 해뜩 돌아서서 형 앞으로 오고, 송희는 ‘암마이’가 시방 밖으로 나갈 참인 줄 알기 때문에 안고 나가 주지 않고 엄마한테 떼어 놀까 봐서 고개를 파묻고 달라붙는다.

“나 없어두 괜찮겠구나”

초봉이는 속은 어떠한 감회로 용솟음이 쳐도 웃는 낯으로 지나는 말같이 묻는다.

“언니 없어두? 우리 송희 말이지”

“응.”

“그으럼!”

계봉이는 미처 형의 눈치를 못 알아채고서 연신 수선을 피우느라고,

“……그치? 송희야”

“응.”

“엄마 없어두 아마이허구 맘마 먹구, 코 하구, 잉”

“응.”

“하하하아, 이거 봐요, 글쎄…….”

계봉이는 좋아라고 웃고 돌아서다가, 아뿔싸! 속으로 혀를 찬다. 초봉이가 만족해 웃어도 형용할 수 없이 암담한 빛이 얼굴에 가득 가렸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나는 인제 고만하고 죽어도 뒷근심은 없겠지, 이런 단념의 슬픈 안심이었었다.

“어이구 언니두!…… 누가 정말루 그랬나 머…… 우리 송희가 엄마가 없으믄 어떡허라구 그래!”

계봉이는 얼른 이렇게 둘러대면서 철이 없는 체 짐짓 송희와 장난을 친다.

“……그치? 송희야”

“응.”

“저어, 어디 놀러 가려믄 송희 데리구 같이 가예지”

“응.”

“이거 봐요!…… 그런데 괜히 엄마가 송흴 띠어 놓구 혼자만 창경원 갈 양으로 그러지? 응? 송희야”

“응.”

계봉이는 수선을 피우면서도, 일변 형의 기색을 살피느라고 애를 쓴다.

초봉이는 눈치 빠른 계봉이가 벌써 속을 알아차리고 황망하여 짐짓 저러거니 생각하면 동기간의 살뜰한 정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배어들어 눈가가 아리다.

쿠욱 캐액 가래를 들이켜고 내뱉고 하면서, 변소에 갔던 형보가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이 형보가 막상 저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음을 생각할 때 초봉이의 그 슬픈 안심은 그나마 여지없이 바스러지고 만다.

형보가 저렇게 살아 있는 이상, 가령 내가 죽고 없어진대야 죽은 나는 편할지 몰라도, 뒤에 남은 계봉이와 송희가 형보에게 환을 보게 될 테니 그건 내 고생을 애먼 그 애들한테다 전장시키는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계봉이는 아이가 똑똑하기도 하고, 또 경우가 좀 다르기는 하니까 나같이 문문하게 형보의 손아귀에 옭혀들지 않는다고는 할지 모르지만, 형보란 위인이 엉뚱하게 음험하고 악독한 인간인 걸, 장차 어떻게 무슨 짓을 저지르라고 그 애들을 두어 두고서 죽음의 길로 피해 가다니 그건 무가내하로 안 될 말이다.

‘그러니 나는 잘살기는 고사하고 죽자 해도 죽지도 못하는 인생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막막하여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허어, 오늘은 어째 여왕님께서 이대지 넉장을…….”

형보는 고의춤을 훑으려 잡고 마룻전에 댈롱 걸터앉으면서 계봉이한테 농을 건넨다.

“시종무관은 무얼 하구 있는 거야? 여왕님 거동에 신발두 참겨 놀 줄 모르구서…….”

계봉이가 형보의 툭 불거진 곱사등에다 대고 의젓이 나무라는 것을 형보는 굽신 받아,

“네에, 거저 죽을 때라 그랬습니다, 끙…….”

하면서 저편께로 있는 계봉이의 굽 낮은 구두를 집어다가 디딤돌 위에 나란히 놓아 준다.

“……자아 인전 어서 신읍시구 어서 거동합시지요”

“거동이나마나 시종무관이거들랑 구둘 좀 닦아 놓는 게 아니라 저건 무어람!”

“허어! 그건 죽여두 못 해!”

“그럼 담박 면직이다!”

“얘야! 쓰잘디없이 지껄이지 말구 갈 디나 가거라! 괜히 씩둑꺽둑…….”

초봉이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음성을 모질게 동생더러 지천을 한다.

“내애 아, 온, 내. 여왕님을 이렇게 몰아셀 디가 있더람! 그치? 송희야.”

“응.”

“하하하하, 우리 송희가 젤이다!…… 아 글쎄 요것이…….”

계봉이는 송희를 입을 쪼옥 맞춰 주고는 형한테다 내려놓는다. 송희는 안 떨어지려고 납작 달라붙다가 그래도 어거지로 떼어 놓으니까는 발버둥을 치면서 떼를 쓴다. 계봉이는 못 잊어서 돌려다보고 얼러 주고 달래 주고 하면서 겨우 대뜰로 내려선다.

“여왕님이 호사가 혼란하긴 한데 안 된 게 하나 있군”

형보가 구두를 신는 계봉이를 토옹통한 다리와 퍼진 허리 밑을 눈으로 더듬고 있다가 한마디 뚱기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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