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봉이가 온 것을 본 승재는 히죽 얼굴을 흐트리고,
“으응! 왔구먼!”
하면서 이 사람으로서는 격에 맞지 않게 급히 달려나온다. 마음이 다뿍 죄었던 판이라 반가움에 겨워, 저도 모르게 그래졌던 것이겠다.
승재는 맞닥뜨리 싶게 계봉이게로 바로 달려들더니 쭈적 멈춰 서서는 그 다음에는 어쩔 바를 몰라하다가 요행 계봉이가 내밀어 주는 손을 덤쑥 잡는다.
둘이는 다 같이 정열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쳐 두근거리는 채 눈과 눈이 서로 맞는다. 말은 없고, 또 필요치도 않다. 숨소리만 높다.
이윽고 더 참지 못한 계봉이가 상큼 마룻전으로 올라서면서 승재의 가슴을 안고 안겨 든다. 그것이 봄의 암사슴같이 발랄한 몸짓이라면 마주 덤쑥 어깨를 그러안고 지그시 죄는 승재는 우직한 곰이라 하겠다.
드디어, 그러나 곧 두 입술과 입술은 빈틈도 없이 맞닿는다.
심장과 심장으로부터 야생의 말과 같이 거칠게 뛰고 솟치던 정열은, 그리하여 흐를 바를 찾음으로써 순간에 포근히 순화(醇化)가 된다.
병아리는 알에서 까놓으면 바로 모이를 쫄 줄 안다. 미리서 배운 것은 아니다.
승재 같은 숫보기 무대가 다들리면 포옹을 할 줄 알고 키스를 할 줄 아는 것도 언제 구경인들 했을까마는, 그러니 알에서 갓 나온 병아리가 이내 모이를 쪼아 먹는 재주와 다름이 없는 그런 재줄 게다.
안에는 물론 저희 둘 외에 아무도 없으니까 단출해서 좋다 하겠지만, 혹시 밖에서 누가 문이나 드르릉 열고 들어서든지 했으면 피차 무색할 노릇이다. 하기야 계봉이의 모친 유씨가 이것을 목도했다면 대단히 만족을 했을 것이다. 병원이라는 게 어찌 꼬락서니가 이러냐고 장히 못마땅해서 이맛살을 찌푸리기는 했겠지만…….
그리고 또 초봉이가 보았더라도 기뻐했을 것이다. 가령 그 둘이 모르게 돌아서서 저 혼자 눈물을 흘릴 값에, 동생 계봉이가 승재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을, 또 승재 그 사람이 동생 계봉이를 사랑하게 된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지 않질 못했을 것이고, 부랴부랴 서둘러서 결혼 예식을 치르도록 두루 마련도 했을 것이다.
암만해도 계집아이란 다른 겐지, 계봉이는 모로 비스듬히 외면을 하고 서서 저고리 고름을 야긋야긋 씹는다. 귀밑때기가 아직도 알아보게 붉다. 오히려 사내꼭지라서 승재가 부끄럼을 타지 않는다.
“절러루 들어가지? 응”
“몰랏!”
“저거.”
승재는 신발장 안에 새로 그득히 사둔 끌신을 한 켤레 꺼내다가 계봉이 앞에 놓아 주고서 어깨를 가만히 짚는다.
“자아, 구두 벗구 이거 신구서…….”
“몰라 몰라! 난 갈래.”
“저거! 누가 메랬나”
“해해해.”
계봉이는 구두를 마룻바닥에다가 훌렁훌렁 벗어 내던지고 끌신을 꿰는 둥 마는 둥, 쪼루루 복도를 달려 진찰실 앞에 가 서더니 해뜩 돌려다보면서,
“여기”
한다.
“응.”
궁상맞게 눈을 끔쩍 고개를 꾸뻑,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 승재는 계봉이가 야단스럽게 벗어 내던진 구두를 집어 한편으로 가지런히 놓는다.
계봉이는 진찰실로 들어서다가 천천히 따라오고 있는 승재를 또 해뜩 돌려다보더니 문을 타악 닫아 버린다. 승재가 문을 열래도 안에서 계봉이가 꼭 잡고 안 놓는다.
“문 열어요, 잉? 나두 들어가게…….”
“안 돼, 못 들온다누!”
“거 야단났게? 그럼 어떡허나”
“잘못했다구 그래예지.”
“잘못”
“응.”
“무얼 잘못했나”
“저어…….”
“응.”
“저어, 몰라 몰라!”
“저거! 그럼 자, 잘못했-습-니-다-”
“하하하하아!”
승재는 문이 열리는 대로 진찰실 안으로 들어선다.
너댓 평이나 됨직한 방인데, 차리기는 다 제대로 차려 놓았다.
검정 양탄자를 덮은 진찰 침대, 책장, 기구장, 치료탁, 문서탁, 세면대, 가스 다 제자리에 놓이고,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새것들이다.
계봉이는 문서탁 앞에 의사 몫으로 놓인 회전의자에 걸터앉아 두 발을 대롱대롱한다. 승재는 멀찍이 있는 걸상을 끌고 와서 탁자 모서리로 계봉이 옆에 다가앉는다.
둘이는 서로 말끄러미 들여다본다. 무엇이 우스운지는 제 자신들도 모르면서 자꾸 싱긋벙긋 웃는다.
“그래…….”
“응!”
둘이는 아무 뜻도 없는 말을 이윽고 한마디씩 하고 나서는 또 마주보고 웃는다.
“보지 말아요! 자꾸만…….”
저도 보면서 계봉이는 이쁜 지천을 한다.
“보믄 못쓰나”
“응.”
“거 야단났게…… 헤.”
“하하아!”
“좀 점잖어진 줄 알았더니 입때두 장난꾸레기루구면”
“몰랏!”
“인전 죄꼼 점잖어야지”
“왜”
“어룬이 될 테니깐…….”
“어룬이”
“응, 오늘 절반은 됐구…….”
“하하하…… 그리구”
“그리구 인제, 응”
“응.”
“그리구 인제, 우리 저어…….”
더듬으면서 승재는 탁자 위에서 철필대를 가지고 노는 계봉이의 손을 꼬옥 덮어 쥔다.
“……인제 결혼하믄, 헤에…….”
“겨얼혼”
말을 그대로 받아 되뇌면서 잡힌 손을 슬며시 잡아당기는 계봉이의 얼굴은 더 장난꾸러기같이 빈들빈들하기는 해도 결코 장난이 아닌 만만찮은 기색이 완연히 드러난다.
“……누가 결혼한댔수”
승재의 눈 끄먹거리는 얼굴을 빠아꼼 들여다보고 있다가 지성으로 묻는 것이다.
승재는 그만 뒤통수를 긁고 싶은 상호다.
“그럼 이게, 오늘 아까…… 장난으로 그랬나”
승재가 비슬비슬 떠듬떠듬하는 것을, 계봉이는 냉큼 받아,
“장난? 누가 또 장난이랬수”
그러나 그럴수록 어쩐 영문인지를 몰라 얼떨떨한 건 승재다.
결혼이라니까 펄쩍 뛰더니, 그럼 시방 이게 연애가 장난이냐니까 더 야단이다. 그런 법도 있나
결혼 안 할 연애가 장난이 아니라? 장난 아니라 연애를 하면서 결혼은 안 한다
승재는 암만 눈을 끔적거리고 머리를 흔들고 해도 모를 소리요,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아 종작을 할 수가 없다.
“나 좀 봐요, 응”
이번에는 계봉이가 저라서 승재의 손을 끌어다가 두 손으로 꽈악 쥐고 조물조물한다. 말소리도 은근하다.
“……남서방두, 아이 참, 남서방이라구 해선 못쓰지! 뭐라구 하나…… 남선생”
“선생은 무슨 선생! 그냥 그대루 남서방 좋지.”
“그래두우…… 오 참, 못써 안 돼, 하하하하…… 정말 산지기 같아서 안 돼!”
“산지기”
“하하하!…… 아따, 아까 아침에 절러루 전화 걸잖었수”
“응.”
“동무들한테 들켰다우. 그래 누구냐길래 우리 산지기라구 그랬더니, 하하하하…….”
“거 좋군, 산지기…… 허허허.”
“가만있자…… 아이이, 무어라구 불루? 응”
“승재…….”
“승? 재…… 승재 씨, 그래…… 건 더 어색한걸”
“아따, 부르는 거야 좀 아무려믄 어떻나? 되는 대로 할 거지, 그렇잖어”
“그럼 인제 좋은 말 알아낼 때까지만 그대루 남서방이라구 부르께? 응”
“응, 그거 좋아.”
“그거 그러구. 자아, 내 이야기 자세 들우? 응”
“응.”
“저어 남서방이 말이지, 날 좋아하지요”
“좋아-하느냐구”
“응, 아따 저어 사-랑-하는 거.”
“으응, 그래서……”
“글쎄, 남서방 날 사랑하지요”
“건 물어 뭘 하나! 새삼스럽게…….”
“그렇지…… 응, 그리구 나두 남서방 사랑허구…… 나, 남서방 사랑하는 줄 알지요”
“응.”
“그렇지…… 그럼 고만 아니우? 남서방이 날 사랑하구, 내가 남서방 사랑하구, 그게 연애 아니우”
“응.”
“그러니깐 그러믄 충분하구, 충분하니깐 만족해야 않어우…… 결혼은 달라요!”
“어떻게”
“연앤 정열허구 정열허구가 만나서 하는 게임이구, 그러니깐 연앤 아마추어 셈이구…… 그런데 결혼은 프로페셔널, 직업인 셈이구…….”
“그럴까! 온…….”
“그러니깐 이를테면 학문허구 직업허구처럼 다르지…… 누가 꼭 취직하자구만 공불 허우”
승재는 모를 소리요, 결혼이 약속 안 되는 정열은 암만해도 불안코 미흡한 것이었었다.
앞으로 승재의 소견이 어느만큼 트일는지 그것은 미지수이나, 또 계봉이가 장차 어떻게 해서 둘 사이의 이 ‘세기(世紀)의 차이’를 조화라도 시켜 낼는지야 또한 기약하기 어려운 일이나, 시방 당장 보기에는 승재의 주제에 계봉이 같은 계집아이란 게 도시 과분한가 싶다.
흥이 떨어져 가지고 앉아 있는 승재를 방긋방긋 들여다보고 있던 계봉이는 의자에서 발딱 일어서더니 뒤로 돌아가서 두 팔을 승재의 어깨 너머로 얹고 등에다 몸을 싣는다.
승재는 양편으로 계봉이의 손을 끌어다가 제 가슴에 포개 잡고 다독다독 다독거린다.
“남서바앙”
바로 귓바퀴에서 정다운 억양이 소곤거린다.
“응”
“노였수”
“아-니.”
“왜 지레 낙심을 해가지군 이럴까? 응? 남서방…… 대답 좀 해봐요!”
“응.”
“내가 언제 결혼을 않는다구 그랬나…… 결혼한단 말을 안 했다구만 그랬지.”
“……”
“그러니깐 시방은 이렇게…….”
보드라운 볼이 수염 끝 비죽비죽 솟은 승재의 볼을 비비면서 음성은 한결 콧소리다.
“……이렇게 꼬옥 좋아허구, 좋아하니깐 좋잖우? 그리구 결혼은 인제 두구 봐서 응? 이 말 잘 들어요. 연애란 건 원칙적으룬 결혼이란 목적지루 발전해 나가는 본능을 가졌으니깐…… 그러니깐 우리두 무사하게 목적지까지 당도하믄 결혼이 되는 거구, 또 중간에 고장이 생기던지 하는 날이믄 결혼을 못 하는 거구…… 그렇잖우”
“그거야 물론…….”
“거 봐요, 글쎄, 아 내가 낼이라두 갑재기 죽어 버리던지 하믄 그것두 결혼 못 하게 되는 거 아니우”
“숭헌 소릴!”
“하하하…… 그리구 또, 이 담에라두 내가 남서방이 싫여나믄…… 꼭 싫여나지 말란 법은 없잖우? 응”
“글쎄…….”
“글쎄가 아냐! 글쎄가 아니구, 그러니깐 싫여나믄 결혼 못 하는 거 아니우? 둘 중에 하나가 싫여두 결혼을 하나”
“그야 안 되겠지…….”
“거 봐요!…… 그렇지? 그리구 또…….”
“또오”
승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이 맑게 웃는다. 시무룩했던 것이 적이 가셨다. 실상 알고 보니 그리 대단스런 조건도 아니던 것이다.
서편 유리창 위께로 다 넘은 저녁 햇살이 가물가물 들이비친다. 변화라고 하자면 오직 그것뿐, 방 안은 두 사람을 위해 종시 단출하고 조용하다.
계봉이는 승재가 무엇이 또 있느냐고 고개를 돌려 재우쳐 묻는 눈만 탐탁하여 들여다보다가 웃고 대답을 않는다.
노상 오늘 처음은 아니라도 사심 없고 산중의 깊은 호수 같아 만년 파문이 일지 않으리 싶게 고요한 눈이다.
이 눈이 소중하여, 계봉이는 장차 남서방도 마음이 변해서 나를 마다고 하지 말랄 법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하기가, 실상 또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지만, 한갓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계집아이 티를 하느라 로맨스런 본능이랄까, 차마 그 말을 하기가 아까웠던 것이다. 그러했지, 눈이 좋대서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믿는 것도 아니요, 그뿐더러 아직은 영원한 사랑을 투정할 마음도 준비되어 있질 않다.
“아이 참, 그런데 말이우…….”
계봉이는 도로 제자리로 와서 앉으면서 다른 말로 이야기를 돌린다.
“……그새 좀 발육이 된 줄 알았더니 이내 그 대중이우”
“무엇이”
승재는 언뜻 알아듣지 못하고 끄덕끄덕한다.
“이 짓 말이우, 이 병원…… 글쎄 아무 소용 없대두 무슨 고집일꾸”
“소용이 없는 줄은 나두 알긴 아는데…….”
“알아요? 어이꾸 마구 제법이구려! 하하하……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다아 알았수? 나한테 강을 좀 해봐요.”
“별것 있나? 가난한 사람두 하두 많구, 병든 사람두 많구 해서, 머…….”
“안 되겠단 말이지요”
“응…… 세상의 인간이 통째루 가난병이 든 것 같아! 그놈 가난병 때문에 모두 환장들을 해서 사방에서 더러운 농이 질질 흐르구…… 에이! 모두 추악하구…….”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게 어디 그 사람네 죈가, 머…….”
“죄”
“누가 글쎄 가난허구 싶어서 가난하냔 말이우!”
“가난한 거야 제가 가난한 건데 어떡허나”
“글쎄 제가 가난허구 싶어서 가난한 사람이 어딨수”
“그거야 사람마다 제가끔 부자루 살구 싶긴 하겠지…….”
“부자루 사는 건 몰라두 시방 가난한 사람네가 그닥지 가난하던 않을 텐데 분배가 공평털 않어서 그렇다우.”
“분배? 분배가 공평털 않다구”
승재는 그 말의 촉감이 선뜻 그럴싸하니 감칠맛이 있어서 연신 고개를 꺄웃꺄웃 입으로 거푸 뇐다. 그러나 지금의 승재로는 책을 표제만 보는 것 같아 그놈이 가진 매력에 구미는 잔뜩 당겨도
읽지 않은 책인지라 그 표제에 알맞은 내용을 오붓이 한입에 삼키기 좋도록 알아내는 수는 없었다.
사전에서 떨어져 나온 몇 장의 책장처럼 두서도 없고 빈약한 계봉이의 ‘분배론’은 승재를 입맛이나 나게 했지 머리로 들어간 것은 없고 혼란만 했다.
“선생님이 있어야겠수, 하하하.”
계봉이는 그 이상 깊이 들어가서 완전히 설명을 할 자신이 없어 이내 동곳을 빼고 만다.
“선생님? 글쎄…… 난 이런 생각을 하구 있는데…….”
“무얼? 어떻게”
“큰 화학실험실을 하나 가지구서…….”
“그건 무얼 하게”
“연구…….”
“연구”
“공기 속에 무진장으루 들어 있는 원소를 잡아 가지구…….”
“응.”
“아주 값이 헐한 영양물이라던지 옷감이라던지 무엇이구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건 다아 맨들어 내는 그런…….”
“내, 온!…… 아, 인조견이 암만 헐해두 헐벗는 사람이 수두룩한 건 못 보우”
“시방보다 더 헐하게…… 옷 한 벌에 일 전이나 이 전씩 받을 걸루 맨들어 내지”
“그건 공상 이상이니깐 고만둬요! 고만두구 자아, 이 짓이 소용 없는 줄 알았으믄서 왜 또 시작은 해요”
“그래두 눈으루 보군 차마 그냥 있을 수가 있어야지!…… 별반 소용이 없구 기껏해야 내 맘 하나 질겁자는 노릇인 줄 알긴 알면서두…….”
“난 몰라요! 결혼하자믄서 날 무얼루 멕여 살릴 텐구…… 쫄쫄 가난하게 사는 거 나 싫여! 나두 몰라! 머…….”
계봉이는 응석하듯 쌀쌀 어깨를 내두른다. 승재는 그게 굴져서 히죽이 웃으면서,
“괜찮어. 이 병원만 가지구두 그리구 인심 써가면서라두 돈은 벌자면 벌 수 있으니깐 머, 넉넉해.”
“난 몰라! 저 거시키, 우리집 못 봐요? 가난 핑계 대구서 얌체없이 자식이나 팔아먹구, 파렴치!”
계봉이는 입에 소태를 문 듯이 쓰게 내뱉는다.
승재는 마침 생각이 나서 올라오던 그 전날 계봉이네 집 가게에 잠깐 들렀었다고 (정주사 내외가 싸움질하던 것은 빼놓고) 본 대로 들은 대로 대강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럭저럭하면 먹고 살아는 가겠더라고 제 의견도 붙여 말했다.
그러나 계봉이는 형의 소청으로 제가 부탁 편지를 하기는 했지만, 실상 제 소위 ‘파렴치’한 저의 집과는 이미 마음으로 절연을 했던 터라, 그네가 잘산다건 못산다건 아무 주의도 흥미도 끌리지를 않았고, 제 형 초봉이한테 전갈이나 해줄 거리로 귓결에 대강 들어 두기나 한다.
계봉이한테는 차라리, 명님이를 몸값 갚아 주고서 데려다가 간호부 견습을 시키겠다고 하는 그 간호부란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나두 좀 하는 샘이 가만히 났다. 이것은 그러나, 승재 옆에 명님이라는 계집아이가 있게 되는 것을 노상 텃세하고 시새워하고 해서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담담한 것은 아니지만…….
집안과 이미 그러해서 마음으로 절연을 한 계봉이는, 그네가 못 살아가고 있으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설혹 잘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장차에 그네와 생활의 교섭을 갖는다거나 더욱이 결혼 전에 장성한 계집아이로서의 몸 의탁을 한다거나 할 의사는 조금도 갖고 있지를 않았다.
그러고 보니 비록 총명도 하고 다부져 독립자행할 자신과 자긍을 가진 계집아이기는 해도, 때로는 고아답게 몸의 허전함과 그 몸의 허전한 데서 우러나는 명일(明日)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런 것을 가지고 비관을 하거나 하지를 않고 늘 무엇이 어때서 그럴까 보냐고 싹싹 몽시려 버리고 무시를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제 자신 주의를 하고 않는 여부 없이, 이십 안팎의 계집아이로 결혼과 생활에 대한 명일에의 불안이 노상 없다는 것은 오히려 빈말일 것이다.
하기야 형 초봉이가 동기간의 살뜰한 우애로 끔찍이 위해 주기는 하나, 초봉이 제 자신부터 앞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니 거기다가 어떠한 기대를 두어 둘 형편도 못 되거니와 되고 안 되고 간에 아예 그리할 생각조차 먹질 않는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그대로 몸을 의탁해서 있는 것도 결백지 않다 하여 제 먹을 벌이를 제가 하느라 직업을 가지기까지 한 터이니…….
그런데 지금 가진 직업이라는 게 그다지 투철해서 다 자란 계집아이 하나의 앞뒷일을 안심코 보장할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를 못하고 기껏해야 소일거리 푼수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남과도 달라, 일반으로 남들이 그러하듯이 결혼이라는 가장 안전해 보이는 ‘직업’을 방궈 일찌감치 몸 감장을 할 유념이나 할 것이지만, 승재가 결혼 소리를 내놓는다고 오히려 지천을 하던 것이 아니냐.
계봉이는 결단코, 지레 결혼에로 도피도 하지 않고, 가정이나 남한테 구구히 의탁도 하지 않고 다만 혼자서 젊은 기쁨을 자유롭게 생활하고 싶고, 그것을 변하려고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의 한 방편으로서 직업을 실하게 갖자니까 기술이 그립던 것이다.
“나두 간호부, 응”
계봉이는 숫제 손바닥을 내밀고 사탕이라도 조르듯 한다.
“간호부”
승재는 계봉이가 바륵바륵 웃으면서 그러는 것이 장난엣말인 줄 알고 저도 웃기만 한다.
“왜? 난 못쓰우”
“못쓸 건 없지만…….”
“그런데 왜”
“하필 간호부꼬”
“해해…… 그럼 약제사? 또오, 의사? 더 좋지 머…… 낼바틈이라두 오께시니 배워 줘요, 응”
“안 돼, 소용 없어.”
“왜”
“인제 얼마 안 있어서 시험이 없어지는데, 머…… 그래두…….”
“어쩌나!”
“그래두 우리 계봉인 걱정 없어.”
“정말”
“그으럼!”
“어떻게”
“어느 의학전문이나 또오, 약학전문이나 들어갈 시험준빌 하라구.”
계봉이는 좋아서 금세 입이 벌어지다가 말고 한참 승재를 바라보더니,
“싫다누!”
해버린다.
“싫다니”
“싫여!”
“내가 공부시켜 줘두 챙피한가? 액색한가”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왜…… 응”
“싫여!”
“대체 왜 싫대누”
“공부시켜 주는 의리가 연애나 결혼을 간섭할 테니깐…….”
계봉이는 여전히 웃으면서 승재의 낯꽃을 본다. 승재는 어처구니가 없다고 실소를 하려다가 도리어 입이 뚜우 나온다.
“쓰잘디없는 소리 말아요. 아무련들 내가 머 그만 공부 못 시켜 줄 사람인가? 내가 공부 좀 시켜준 값으루 결혼 억지루 하잴까…… 오온!”
“남서방은 다아 그렇다지만, 내가 그렇덜 못하믄 어떡허나? 결혼은 할 수가 없는데 결혼으루라두 갚어야 할 의리라믄”
“혼동할 필욘 없어.”
“필요야 없는 줄 알지만 이론보다두 실지가 더 명령적인 걸 어떡허나”
마침 전등이 힘없이 들어와서 켜진다. 아직 긴치 않은 광선이다. 그래도 승재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선다.
“자, 그건 숙제루 둬두구서…… 나허구 여기서 우선 저녁이나 먹더라구”
“글쎄…….”
“무얼 대접하나? 이런 아가씰 상밥집으루 모시구 갈 순 없구, 헤.”
“상밥? 여관두 안 정했수”
“여관은 별것 있나! 더 지저분하지…… 병원 뒤루 조선집이 한 채 따른 게 있어서 자취를 할까허구 아직 상밥을 먹구 있지.”
“그 궁상 좀 인전 고만둬요! 자췬 무어구 상밥은 무어야!”
“그렇거들랑 계봉이가 좀 와서 있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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