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평토제
흰 옷을 입은 집사자들이, 옻칠을 한 제기에 높이 괴어 올린 제수들을 조심스
럽게 받쳐들고, 청암부인의 신주를 모신 영좌 앞의 제상에 공손히 진찬한다. 살
감이 살아 생전에 받는 밥상과는 달리 다리가 휘엇하니 길고 상면이 높은 제상
은 마치 허공에 소슬하게 걸린 선반 같았다. 그 검은 상에 나무 그릇의 둥근 굽
닿는 소리가 명부의 음향으로 울린다. 솜씨를 다하여 굄새를 뽐낸 음식과 과일
들을 얼른 보아 무슨 잔칫날의 큰상이나 다를 바 없는데, 이미 유명을 달리한
혼백을 위한 음식이라 그러한가, 그 위에는 적막한 기운이 감돈다.
"나 죽은 다음에는 동네 사람들을 후히 먹이라."
고 했던 청암부인은
"이제 나 죽고 나서 제사가 돌아오거든 모쪼록 음식을 걸게 하여 아끼지 말고,
술도 많이 빚고, 떡도 많이 허고, 도야지도 잡어서, 그 하루 너나없이 온 동네
가 다 재미나고 풍족하게 노나 먹도록 해 주어라. 슬피 울어 곡소리 진동허게
허는 대신, 내 제삿날이 흥겹고 좋은 날이 되도록 부디 성심을 기울여 다오."
하고 말했었다. 그 말씀이 없었다고 모친의 제사를 어찌 소홀히 할까마는, 자별
했던 그 분부를 잊지 않고 새겨들은 이기채는, 제물을 정성스럽고 융숭하게 장
만하도록 일렀다. 오늘은 삼우제라 기제사는 아니었으나, 그래서 오히려 이기채
의 마음은 더 서럽고 애통한 것인지도 몰랐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하여도 옆에
서 숨쉬며 살아 계시던 어머니를, 춥고 어두운 땅 속에 무정하게 매장하고, 산
사람들은 살았다고 걸음을 돌려 집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죽음이 무엇이길래,
이런 무도를 당연하다 한단 말인가. 그러니 바람 부는 빈 산의 낯설고 캄캄한
구덩이에 홀로 누운 망인이 비록 무감한 시신이라 하나, 그 버려짐이 어찌 편안
할 리가 있으리오. 더욱이 일생 동안 깃들어 있던 그 몸을 한순간에 떠난 넋은
이제 어디에다 혼신을 맡기어 의빙할 것인가. 만일 망인의 혼백이 잠시라도 의
지할 곳을 얻지 못하여 방황하게 한다면 이는 참으로 송구스러운 일인지라, 상
제는 장지에서 돌아오는 그날부터 초우, 재우, 삼우의 제사를 극진히 지내어 영
혼을 위로하고 안정하게 하여 드리는 것이다. 이기채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검푸른 어둠 속에서 얼음을 깬 시린물로 목욕 재계를 하고는, 뼛속까지 끼치는
한기를 오히려 더하게 하는 베옷 굴건 제복을 갖추고, 초췌하게 여윈 등을 구부
린 채 두 손을 맞잡고 영좌 앞에 섰을 때, 온밤 내내 검은 물 밑바닥같이 고여
있던 어둠은 서서히 그 거대한 몸을 뒤채며 청동빛 비늘로 깨어나고 있었다. 그
때 축관 이헌의는 집사자들을 낮은 소리로 지휘하여, 영좌 앞에 수저를 받치는 접
시 시접과 술잔 받치는 제기 잔반을 챙겨 놓고, 서좌쪽에는 소,과,포, 동우 쪽에
는 혜를 소리 안나게 진설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 따로 놓인 작은 향상 한가운
데 향로를 올리고, 그 오른쪽에는 주전자,제주,잔반,퇴주 그릇을 제반에 받쳐
놓아 두었다. 그 사이 어둠은 어느새 푸르스름하게 기화하여, 구름이 회색으로
덮인 박천의 천공으로 흩어져 빨려들어가고, 그 흐린 하늘은 젖은 새벽 숨을 배
앝고 있었다. 그 숨에서는 푸른 인광이 돋았다. 하늘은 천지의 어둠을 깊이 들
이마시어 거두어들이고, 대신 청린의 새벽을 배앝아 숨을 갈아 쉬는 것이다. 그
숨이 닿는 지상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부윰하게 눈을 뜬다. 날이 밝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제는 기제사와는 달리 이렇게 날이 밝으려 할 때 잡수니. 진설을 마
친 축은 두 손으로 공손히 신주 모신 궤의 뚜껑독개를 열었다. 명부의 어둠인
가, 검은 옻칠을 한 궤의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나무패에 흰 칠을 한 신주가
마치 소복을 한 혼백의 자태같이 나타났다. 현비유인경주김씨신주 한가운데 도
렷하게 씌어진 글씨의 왼쪽에는 나지막이 작은 글씨로 효자기채봉사 라고 혼백
을 받들 듯이 씌어져 있었으나, 그런 글자 몇 낱으로 어찌 감히 유혼이 외로이
갇혀 있는 나무패 속의 적막한 세월을 위로하여 드릴 수 있으리. 아이고오, 아
이고오. 이기채는 고개를 조아리고 선 채로 애곡하였다.
"이제 강신이니, 잠시 곡을 그치라."
는 축의 만류에도, 흐르는 눈물이 베옷에 떨어지는 이기채는 영좌 앞으로 나아
가 흐느끼면서 분향을 하고 꿇어앉았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낮은 연기는 간절
한 향기로 자욱하게 번지면서 제상의 다리를 감고, 어루만져 더듬으며, 휜 명주
로 덮은 영좌의 교의 위로 푸르게 어리어 흩어진다. 무릇 세상의 만물 가운데 그
형체나 빛깔이나 소리보다도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빨리 가는 것은 향기라 하
였으니, 제사에 향을 사르는 까닭은, 멀고 먼 저승까지 이승에서 갈 수 있는 것
은 오직 향기뿐이어서. 그리고 그 먼 기슭에 바로 가서 순식간에 닿을 수 있는
것은 향기뿐이어서라고 하였다. 향기는 저승의 기슭으로 가서 혼백을 불러 이승
으로 모시고 온다. 부디 오소서. 이 향기를 따라, 오소서. 이기채는 비읍한다.
예부터 향기는 신을 감동시키는 일이 많았다 하는데. 신라 경덕왕 19년 경자 사
월 초하루에는, 하늘에 해가 둘이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심히 괴이하고 근심이 되어 왕이 일관에게 물은즉
"연승을 청하가, 꽃을 뿌려 부처님께 공양하는 산화공덕을 하면 제사가 되리이
다."
하매, 그날로 조원전에 단을 정결히 뭇고, 왕께서 친히 청양루에 나오시어 인연
있는 스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었다. 마침내 월명사가 제단의 남쪽 언덕길로 가
고 있는 것을 보고,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하늘에 계하라."
명하니, 월명사가 여쭙되
"신은 중이오나 또한 화랑으로, 겨우 향가만 알 뿐이요, 범창에는 능하지 못
합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이미 그대에게 시키려 하였으니 향가라도 좋다."
하여, 월명사는 왕명에 따라 도속가를 지어 제단에 바쳤다.
오날 이의 산화 블라
보보삷온 곶아 너은
고든 마삼의 명 브리악
미륵좌주 뫼서라아
오늘 이에 산화가를 불러
숫구쳐 하늘에 올리는 꽃이여 너는
곧은 마음에 명령을 받들어
미륵보살을 모셔라
청랑한 음성은 가락을 싣고 구름을 꿰뚫어 하늘 높이 날았다. 이리하자 그 이
상한 태양 하나는 사라지고, 하늘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왕은 노래와
꽃으로 변괴를 물리친 월명사를 가상히 여기고, 좋은 차 한 봉지와 맑은 수정
염주 백여덟 개를 하사하고 치화하였다. 욕계육천 가운데 넛째 하늘은 도솔천은
이 지상에서 대관절 얼마나 까마득히 먼 곳인가. 그것도 짐작만으로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죽어도 인간이 지닌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영혼들이 간다는 하늘, 욕
계 일천 팔만 유순 삼백이십만 리를 지나, 그보다는 조금 수행이 된 사람들의
영혼이 간다는 하늘, 육계 이천 십육만 유순육백사십만 리를 지나고 또, 육신의
번민을 버리지는 못하면서도 그 번민을 벗으려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죽
어서 간다는 하늘. 욕계 삼천 삼십삼만 유순 천삼백이십만 리를 지나면, 비로소
거기 육계 사천 도솔천이 있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미륵의 정토라 하였다. 땅
위에서 삼십삼만 유순, 천삼백이십만 리를 와야만 당도하는 그 도솔천은 참으로
수행한 영혼들만이 가는 곳으로서 가여운 중생들을 제도하는 일을 맡고 있다 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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