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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44)

카지모도 2024. 6. 24.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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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정신만 간추리면 되었지."

"사람은 자네 말대로 물질이라, 물질을 매개로 의사를 표현허고 형식을 취해서

내면을 흩어지지 않게 걷어 담는 것 아닌가."

"형식이라는 그릇이 없어도 저절로 뭉친 기운이 있어야 그것이 참정신이지, 그

렇게 허울에 기대지 않고는 지탱할 수 없는 알맹이라면, 그것은 좁쌀이나, 띠

끌, 아니면 연기 같은 허상이겄지요, 혹 그러다가 절차나 형식은 거창해서 엄청

나고 빈틈없지만 실인즉 그 그릇 속에는 한줌 먼지밖에 쥘 것이 없는 경우도 많

으리다. 일찍이 옛날에 성왕들은, 장사 지내는 예절에 관해서 법을 제정할 적

에, 시의는 홀겹 세 벌이면 살이 썩기에 충분하고, 관목은 세 치 두께로 뼈가 썩

기에 충분하며, 묘혈의 깊이는 지하수에 닿지 않을 정도면 족하고, 봉문은 그저

냄새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만 도도록이 하면 된다 하여, 그 이상 무

덤에 공력을 들이고 치장하는 것은 금했다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죽은 사람

을 장사 지낸 뒤에는 오랫동안 상복을 입고 쇠약해질 정도로 슬퍼하는 것을 금

하며, 죽은 이를 묻고 나면 곧 생업으로 돌아와 밭 갈고 베를 짜라 했잖습니까.

옛날 요 임금은, 북쪽의 팔적을 교화시키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어 공산북쪽 기

슭에 장사 지냈는데, 시의와 이불은 세 벌에 불과했고, 거친 곡목의 관을 쓴데

다가, 엉클어진 칡넝쿨로 관을 묶어 하관한 뒤, 무덤은 구덩이에 흙을 덮기만

했지 봉분조차 없었소. 그렇게 장사를 다 지낸 다음에는 지나가는 소와 말도 그

위를 밝고 다녔다 헙니다. 그뿐이요? 순 임금 역시 서쪽의 칠용을 교화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죽어서 남기의 저작거리에 장사를 지낼 적에, 시의와 이불은 감

고 덮은 세 벌뿐이었고, 세월이 가고 해와 달이 바뀌어도 그 성왕들의 도는 다

함이 없이 밝게 누리를 비추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모두 천자라는 귀하신 신분

이었고, 온 천하를 다 차지하는 부를 누리셨으니, 어찌 쓸 재물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여 이와 같이 험하게 장사 지내는 법을 썼겠습니까? 그 뜻을 헤아려야지

요.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관 위에 덧관을 호화로운 나무로 짜서 씌우고, 매장

은 반드시 땅을 크게 파고 하며, 죽은 사람의 옷과 이불도 호화롭고 찬란하게

여러 겹 만들어 입히고 덮고, 봉분도 동산만 하게 커야 한다고 주장하니, 고관

대작이나 양반이 아니고서야 어찌 무서워서 죽을 수나 있겠습니까? 집안 재물을

거의 다 써야만 땅 속에 묻힐 수 있을 터인즉."

"자네 말대로라면, 오늘날의 상례가 어찌 고래로부터 하루 이틀 내려온 것도 아

니고 누백년, 누천 년씩 이어져 범절로 자리를 잡았겠는가. 옳은 일이 아닌데?"

"그 풍습을 행하는 사람들이, 자기네 풍속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까닭이겠지요.

옛날 월나라 동쪽에 한 나라가 있었느데, 그 사람들은 맏아들을 낳으면 잡아먹

으면서 아우한테 좋다는 뜻으로 의제라 부르고, 아버지가 죽으면 그 어머니까지

업어다가 버리면서 귀신의 처와는 함께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니, 이것은 위에

서 다스리는 사람이 그것을 옳다고 하고, 아래 백성들은 전통이요 풍속이라고

생각해서 권장하고 지켜 왔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허나 아무리 좋은 금덩어리도 모양을 만들어야 제대로 쓸 수가 있고, 천 년을

가도 만 년을 가도 변함이 없을 고귀한 정신이라도 일단은 몸이라는 옷을 입어

야 거기에 담겨 온전한 빛을 낼 수 있는 법. 만일 몸 없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

은 유령이요, 정신 없는 몸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고깃덩어리 아니겠는가. 이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라.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어느 쪽이라도 불구지. 지

나치게 재물·공력을 많이 들여 가산이 피폐해질 정도로 장사를 지낸다 하면 그

것은 폐습이겠지만, 가령 죽은 개 한 마리 묻는 것이나 한가지로 사람 죽은 몸

뚱이를 함부로 내다버린다면, 그것은 죽은 사람만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아니

라. 곧 산 사람도 그처럼 하찮게 대해 버리고, 거기다가 아무 가책을 느끼지 않

는 세상이 되고 말 것이네. 시신을 지극히 공경해서 존엄하게 모시는 것은, 죽

음을 헛되이 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일 것이야."

이헌의는 침중하게 말했고, 징의는 입을 꽉 다문 채 듣고 있었다.

"쓰던 물건 한 토막도 마음 가서 아끼던 것은 다를진대, 살아 지극히 아끼던 사

람이라면 어찌 죽었다고 함부로 할 수가 있겠는가. 죽은 시신을 백정것 소 다루

듯 하는 사람이라면, 그 시신이 살었을 때라고 존중하게 대했을까. 하잘것없는

완두콩만 봐도 그렇지. 그 조그만 식물에도 사는 이치가 있으니, 콩이 생겨날

때 콩깍지가 먼저 생기지 않던다. 사실 콩까지는 수확하고 나면 버려져 아궁이

에 불을 때고 마는 것이지마는, 씨앗이요 열매인 콩 '알맹이'는 콩'깍지'가 없

으면 애초에 생겨날 수도 없고, 클수도 없고, 익을 수도, 거둘 수도 없는 법이

네. 깍지는 허울이요, 외피요, 형식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곧 실해야만 그

곳에서 실한 콩을 살찌을 수 있는 게야. 벌레 먹고 썩은 깍지가 어떻게 탐스러

운 콩을 보호할 수가 있겠는가. 거기다가 하물며 아예 생겨나지도 않은, 혹은

없는 깍지라면 콩 또한 어디에 고투리를 기대고, 태반을 삼아? 눈을 붙일 자리

조차 아예 없는 것이지."

"깍지는 멀쩡하고 그럴싸한데 납작하게 속이 빈 것도 있습니다."

"있기야 하지, 허나 그런 것이 대종을 이루는 것은 아닌즉, 천지의 들판에 콩밭

이 있어 수확을 할 때, 대개는 이치대로 여물어 거두게 되나 그 중에는 더러 예

외도 있는 법 아니라고? 그 예외의 예를 들어 들어 대개의 순리를 공박하는 것

은, 군자의 할 일이 아니잖은가. 콩깍지를 버리려면 반드시 먼저 그 깍지 속에

서 성장해야 하고, 법식을 떠나려면 반드시 먼저 법식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법이라. 자네는 운필의 묘를 누구보다 잘 아니, 욕이선난, 힘 안 들이며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루는 것을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어렵게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용필이 간단 정결하게 되려면 무수한 연습 속에 반드시 용필에 공

들이는 공부부터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

"허나, 종신토록 그 법식에 메이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요. 처음에는 아무리 그

를 엄수해서 연습에 골몰한다 해도 궁극에는 법식을 떠나 자유자재로 변화 무궁

해야만, 잎사귀 하나를 그리거나 점 하나를 찍더라도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달

라지는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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