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이헌의에게 징의는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두
사람 다 서른 몇 살로, 돌아보면 어제 같은 나이였다. 금의 사람으로, 자는 자
단이요, 호를 황화노인이라 한 왕정균은, 생후 얼마 안되어 글을 보고는 열일곱
자를 스스로 알았고, 일곱 살에는 능히 시를 지었다는 소문이다. 그는 거동과
용모가 아름답고 훌륭한데다가 담소를 즐거워하였으며, 문을 지어 말하고 싶은
바를 잘 나타냈다 하는데, 산수, 고목, 죽석의 그림에, 당대에 따를 자 없이 빼
어났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은 신품이었다. 타고난 재능에다, 송의 문호주
를 종으로 삼아 밤낮으로 붓이 닳도록 대를 그리던 황화노인은
"항상 등불 아래 대나무 가지를 비추어, 그 그림자를 모사하여 참모양을 그리었
다."
고 하였다. 천지는 거대한 연지에 어둠을 캄캄하게 담아 깊고 깊어지는 밤, 어
둠보다 더 검은 대밭에 서서 홀로 주홍의 등롱을 들어올려 그 불빛에 가지와 댓
잎을 비추어 보는 황하노인의 등불이 후인 징의의 가슴에 홀연 당기어져, 그도
또한 대나무 아래 밤이면 섰던 것이다. 달무리 같은 주홍의 불무리가 번지어 스
며드는 대숲에서 그저 먹빛으로 웅크리어 뭉처 있던 마디와 가지와 이파리들이
문득 적막하게 드러날 때, 징의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그 그림자를 오래오래 바
라보며 서있곤 하였다. 일등분염. 한 개의 등불을 백, 천 등에 당기면 어두운
것이 다 밝게 된다고 말한 사람은 유마거사였던가. 징의는 황하노인의 법을 배
워 이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어둠 속에 등불을 들고 서 있는 마음의 모습은 그
대로 체감되었던 것이다. 시율에 심엄하고 칠언장시에 더욱 용하며 서화로 일세
의 경지를 이룬 황하노인이 세상을 떠난 것은 바로 미흔일곱이었으니. 몇 살부
터 그는 '노인'이란 칭호를 쓰기 시작했던 것이까.
"비교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이를 생가하면, 이렇게 칠순에 이르러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은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요."
징의는 이헌의의 노안을 빗기어 서안을 바라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징
의보다 오륙 년 연장인 이헌의가 듣기에 미안할 말일 수도 있는 탓이었다. 문중
에 청암부인 상사가 있고, 시절은 수상하여 어수선하지만, 그래도 정월은 다가
와 내일 모레가 설이어서 이헌의의 사랑에 들른 징의는 마침 묵죽에 이야기가
번져, 한동안 이런 저런 말을 나눈 끝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징의에게는 이헌
의가 문장이라기보다는 한 마을에 한 조상의 핏줄을 받고 나눈 둥종으로서, 칠
십 년이 되도록 서로 허물없이 살고 있는 당내친이었지만, 그 성품이나 생각,
행동은 완연하게 달랐다.
"사람은 살어서 죽은 다음 일까지 다 해 놓는 것이라. 한 번 숨 떨어져 죽으면
그만이지. 그 죽은 구신이 또 무슨 영험이 있고 원한이 남어서 산 사람이나 똑
같이 어떤 세상을 또 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죽어서 혼백이 어디로 갈 것인
가는, 만일에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요, 그 사람이 살어서 생전에 어떻게 해 나
왔는다를 곰곰이 짚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일 겝니다. 살어 있을 때 온 정신을
다 쏟아 해 놓은 일이 결국은 그 사람의 죽음 다음을 비춰 주는 게지요. 그러
니, 살아 있는 동안 어찌 살 것인가를 생각해야지. 죽어 버리면 인간은 한낱 물
질로 돌아가 썩어서 흙이 되고 물이 되는 것. 그 죽은 시체를 위해 온갖 절차를
갖추고 성대히 상례를 치르는 것은 아마 허위에 불과한 일일 게요, 아니면 살아
남은 사람들이 저 자신의 심정을 위로하기 위한 놀이든지."
징의는 청암부인의 초종 장례를 두고 빗대어 말했다.
"그러니까, 아까 자네. 황하노인 이야기에, 한 개의 등불에서 도 다른 등불로
불이 옮기어져 어둠을 밝히는 유마의 말도 있었지마는, 사람의 정신이란 것이
그와 마찬가지 아닌가. 그 정신을 모두어 갊아 잘 간추리자고 하는 일이 어찌
헛짓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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