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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4권 (42)

카지모도 2024. 6. 22.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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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파적으로 대나 한 폭 치고, 배운 글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글씨를 쓰

는 것이지, 아는 것도 없고 깨친 바도 없는데 남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밀고 들어와 화선지를 펼지는 사람이 생기고, 그가 선서자라

는 소문이 인근에 널리 퍼지면서 문중에서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의 서화 한

점 얻기를 원하게 되었지만, 막상 그 자신은 족자 하나 반듯하게 걸어 놓을 자

리도 없을 만큼 살림이 곤궁하였다. 강보에 싸인 유아를 면하지 못했을 때 불운

하게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숙부의 손에 맡기어져 자라난 그가, 타고난 필재는

참으로 남 다른 데가 있었다. 문중의 사숙에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 하

늘 천 따지,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외우고 쓰는데, 처음에는 해서를 힘써

익히었고, 동몽선습, 통감으로 들어가면서는 행서를 넉넉히 쓸 수 있었다. 그리

고 칠언절구로 시를 짓는 것부터 배우던 글이 문장을 지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는, 벌써 사서삼경, 사기, 당송문, 당률로 진도가 나가 있었고, 글씨는 이들을

초서로 쓸 만하였다. 가난하였으나 징의에게 험한 일은 시키지 않았던 숙부가

사숙에만큼은 지성을 보여 빠지지 않도록 보내고, 동몽교관 훈장이 징의의 필재

에 놀라 크게 탄복하면서, 날로 변하는 그 글씨의 체본을 다른 학동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다만 늘 아쉬운 것은 종이가 귀하고 먹이 벗어, 아주 어려서는 손

가락으로 방바닥에 글씨를 쓰고, 조금 자라서는 사금파리로 마당이나 고샅이나

앉은 자리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소년이 되어서는 풀뿌리를 개울에 씻어 붓

대신 물을 찍어 바위에 서화의 시늉을 해보았다. 모으고 모은 돈으로 붓을 한

자루 사면 너무나 열심히 써 보니 금방 모지랑봇이 되어 버려 그 값을 당해 낼

수가 없는지라, 칡뿌리를 돌멩이로 터럭같이 곱게 찧어 갈근필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 그런 중에 어느덧 열아홉이 된 징의는, 사람을 데려다가 어디 앉힐만한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한채, 이백면의 남평에 순홍안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게 되었다. 푸른 비단필 같은 요천이 눈부시게 휜 모래톱을 데불고 길게 마

을을 안고 흐르는 남평의 남, 북으로는 탁 트인 들판이어서, 신랑 징의는 우선

눈이 새로웠다. 그리고그 광활한 들판에 홍자색으로 물결치고 있는 풀이 뜻밖에

도 '쪽'인 것을 알고는

"아하."

가슴속에 궁청빛 쪽물이 얼음같이 선명하게 끼치며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깊은

신음 소리 같은 감탄은 오래 지워지지 않고 속에 남아, 그 이후에도 언제나 마

음이 답답해지면 걸릴 것 없이 아득하게 트여 넘실거리던 쪽풀의 평원, 남평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럴 때의 '쪽들'은 홍자색 풀빛이 아니라 이미 푸를 대로 푸

르러 남의 심연을 시리게 드러낸 물빛으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극락세계를 상징

한다는 이 쪽물을 제대로 내려면 손이 칠백 번이나 가야 한다던가. 매해 육칠월

이면 그 두꺼운 잎새를 따서 남색 물을 얻는 이 쪽풀은, 말복에는 잎 빛이 변하

므로 얼음 곁에 놓아야 하는데. 부녀가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강구해야 할 치가

와 가정의 살림살이에 관한 실용, 생활의 슬기를 모아 적은 책, 규합총서에는

"쪽을 돌로 갈아서 얼음을 넣어 물들인다."

하였다. 그러니 어찌 쪽빛이 시리지 않을 수 있으리오.

"얼음이 저 벽령의 청람을 완성시키듯, 가난이 오히려 내 한 생애를 도와 무엇

인가를 이루어 줄 것이다."

고 그는 생각하였다. 남평은 일찍이 단종 때 경기도 양성형감으로 있던 백산공

안귀행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단종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백파방 여원치 아래 산밑에 숨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이므로, 그가

오백여 년 전에 이 무을로 들어온 입향조였다. 끝간 데 보이지 않는 들판에 봄

이 오면 저절로 쪽이 돋아나 이윽고 무성하게 어우러지며 아마득히 넘실거리는

것에서 이름을 얻어

"남평."

이라 한 이쪽들 마을에는'남전사우'라 부르는 사당이 있었다. 거기에는 마을의

풍습을 바로잡고 어질게 이끌어온 사현의 위패가 모셔져 사람들의 숭앙을 받

고 있었는데

"중국의 남전 여씨사적을 본떠 사당 이름을 그리 지었다."

하였다. 이 여씨형제들이 만든 향약이, 곧 조선 중엽 이후에 널리 시행되던 향

약의 모체를 이루었으니, 조그만 고을의 어진 형제들이 머리까지 큰 덕을 끼쳐

사람 사는 행실의 본이 된 것이다. 그 현자들이 살던 고을에도 쪽이 많았던가

보다. 중원 땅, 남전현이라. 이제 거리와 세월을 달리하여 조선의 남방, 사람이

살 만한 마을에 '남평'이 있고 여기 쪽풀이 들판을 이루어 무성한 것이 어찌 우

연한 일이라고만 하겠는가. 백산공 안귀행이 이곳에 정착한 이래, 오직 학문에

만 전념하고 유학을 숭상하여 청빈을 자랑 삼은 까닭에, 글을 읽은 이외에는 스

스로 먹을 양식과 땔감을 구하는 정도의 생활에도 방도가 어려운지라, 그 후손

들은 가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런 중에도 마을의 풍습을 바로 세우고 사람으

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품격과 정신을 옳게 가르치고자 심혈을 기울인 정민공

송현수, 백산공 안귀행, 풍계공 안경달, 백계공 안재도, 네 분을 중국 남전의

여씨형제와  같은 향학의 사현이라 하여, 이 사당을 세우고는 그 뜻을 기린 것

이다. 이끼가 돋아난 사당을 오랜 세월 에워싸고 우거진 노송들과, 입향조가 심

었음직한 오백 년생 느티나무 노거수의 구름 같은 아름드리가, 낙은 지붕의 한

없는 빈궁을 남루하지 않게 품으로 두르며 다둑거리는 이곳에, 징의는 그대로

몇 년을 눌러 있었다. 청년기를 그곳에서 보내고는 자박자박 걷는 아들 기학을

데불고 아내 남평댁과 함께 다시 매안으로 돌아온 그는 남평양반, 남평 아재,

남평 할아버지, 하고 불리던 택호를 훗날 그냥 자신의 아호로 삼아 '남평'이라

하였다. 별로 말이 없고 차가운 듯한 남평댁이 쪽물 내는 솜씨는 도저히 남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는데, 징의는 그네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겹물을 들여

서 드디어 빛깔이 궁구에 이른 무명으로 지은 두건을 유건대신 쓰고 지내었다.

그리고 한때는, 검은 먹이 아닌 쪽물로, 푸른 빛이 너무나 깊고 시려서 오히려

푸른 줄 모르는, 기상이 검푸르게 뻗친 남죽을 쳐 보기도 하였다. 소동파가 어

느날 홀연 흥이 일어 한 폭 대를 치고자 하였으나, 마침 옆에 묵이 없는지라,

붉은 선홍색 경면주사를 찍어 대를 친 것이 주죽의 시초라고도 하지만, 꼭이 그

것을 흉내내 보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징의에게서는 푸릇한 쪽빛

이 피부와 옷갈피로 배어 나오는 것 같은 독특한 기색이 있었다. 마치 속에 쪽

을 머금고 있기나 한 것처럼. 이제는 그의 나이도 어느덧 칠십에 이르러 극노인

이 되었으나, 작은 체수에 마른 몸으로 카랑카랑하게 앉아 여전히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는데, 젊은 날에는 밤이면 홀로 등롱을 들고 나가 마당에 서 있는 대

나무의 그림자를 골똘히 비추어 보며, 그 모양을 여러 번 본떠서 그리곤 했었

다. 시초에 묵죽은 서촉의 명가에 오대이씨 이부인이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던

가. 그네의 남편은 무인이어서 항상 전장에 나가 있으므로 늘 근심스러운 마음

이 떠나지 않아 울읍한 나날을 보내면서 떠들썩하고 화려한 것을 멀리한 채, 달

이 뜬 밤이면 혼자 일어나 앉아 영창에 비치는 흰 달빛을 바라볼 때, 솨스르윽,

잎 갈리는 소리에 죽영이 그린 듯 선연하니, 부인은 문득 붓을 적시어 창호지에

그대로 그림자를 모사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아 영창을 보면 고적하면서도 맑은

생의와 정취가 지금까지 서화에 없던 경지가 있어,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채색을 버리고 묵죽을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징의 는 등

불을 들고 어둠 속의 대나무 아래 서 있었으니,

"내가 황화노인의 흉내를 좀 내보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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