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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4)

카지모도 2024. 9. 9. 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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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매화 핀 언덕이면 더욱 좋으리

 

"다 되야가는 거잉가?"

만동이는 시퍼렇게 얼어붙은 달빛이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무덤에 붙어 구

부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백단이한테 묻는다. 그 목소리도 얼어 있다. 몸뚱이

는 결결이 속까지 얼어들어 한기를 이기지 못하겠는데, 이마에만은 진땀이 소름같

이 돋아난다. 진땀은 배짓이 돋으면서 그대로 얼어, 이마가 썬득썬득 시리다. 그

의 손은 이미 아까부터 푸르딩딩 남의 손이 다 되어 버렸는데 손가락은 마디마

디 툭, 툭, 부러져 떨어지게 곱아서 더 흙을 만지기에 아슬아슬하다. 그것은 추

운 탓도 있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속이 떨리는 탓이 더 켰다. 바깥에

서 끼치는 엄동의 추위는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두려움에 비하면 오히려 별

것 아니었다. 백단이는 그런 만동이에게 대답 대신, 헐어 낸 무덤 옆구리 흙을

차곡차곡 채워 넣는다. 생흙이 아니고 한 번 뒤집혔다가 봉분을 만드느라고 밟

아 다진 흙인지라 아무래도 찰기가 없는데, 그나마 헐어 냈던 흙을 맨살로 혹한

에 내놓았다가 도로 집어 넣는 것이라, 도무지 마음같이 얼른 일이 끝나지지 않

았다. 그렇다고 대강 해 둘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배고픈 밤여우는 단단하기

바위 같은 봉분도 주둥이로 후벼 파서 못된 짓을 하는데, 이처럼 한 번 자리가

난 무덤이야 덤벼들지 못하랴. 뼈다귀를 도둑맞기는 일도 아닌 일이었다. 뿐 아

니라 누가 봐도 감쪽 같게 일을 해치우려면, 다른 것은 몰라도 무덤 주변에 흙

무더기가 흩어져 있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한 번 헐어 낸 것은 무엇이든지 원

래대로 해 놓기 쉽지 않아서, 백단이는 구멍 속에 발을 집어 넣어 꾹, 꾹, 밟다

가 또 손으로 다지다가, 만동이 보고도 밟으라고 하였다. 만동이는 백지에 싼 아

비 홍술의 뼈를 투장하여 집어 넣은 무덤 옆구리 구멍에 오른발을 들이밀 때,

그만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있는 힘껏 다리를 홱 잡아채는 것만 같아 등골

이 오싹하였다. 그리고 온몸이 휘청하여 일른 그 발을 뽑아 내고 말았다.

"아이고, 나는 못허겄네."

"원 저런, 아 머이 무섭다고 그러시오? 압씨(아버지) 유골인디."

"긍게 말이여."

"따땃허게 꽉꽉 밟어서 바람 못 들으가게 해야지 무단히 허성허성 버그러지게

해 노먼, 여시가 달라들어서."

"어이 참, 그만허소."

"꽃각시맹이로 이뿌게만 생게 갖꼬는. 이리 나오시오. 어디 바아, 내가 허게. 압

씨도 아들이 밟어디링 거이 낫제 요렇게 메느리가 밟능 거이 낫겄소? 앙 그리

여?"

백단이라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본디 제 남정의 성정을 아는데다, 그

자신도 무서움이 전신에 끼쳐 자꾸만 속이 후드르르 떨리는데, 같이 질리면 그

공포를 이겨내기 힘들 것만 같아서, 그네는 일부러 대담하게 덤비며 농담빛을

띄우는 것이었다. 독아지의 얼음이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하다가 점점 그 동그

라미를 좁히며 한가운데로 얼어들 듯이, 정월 대보름 밤의 시린 달빛은 마치 목

에 씌우는 큰칼처럼, 만동이와 백단이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아이고, 저 달은 없는 거이 낫겄네. 하도 훤헝게 기양 대낮맹이어 갖꼬 누가 보

까도 싶으고오."

어째 무엇이 더 무서워 보였다. 달빛이 비친 곳은 시리게 시퍼렇고, 응달진 곳은

차라리 칠흑같이 어두운 것보다 더 음산한 귀기로 그림자를 시커멓게 드리우고

있어. 둥글 둥글, 여기저기 둥근 몸을 누인 무덤의 봉분들이며, 우뚝 우뚝 몸을

세운 비석들, 그리고 그 비석 옆의 호석들이 소나무 쓸어내리는 달빛과 바람 소

리 속에 귀신처럼 서 있는 것들은, 이렇게 굳이 그 발치 아래 남의 부인 묘를

파헤치고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보기 오금이 붙을 일인데, 이처럼 밀장을 하

고 있는 두 사람으로서야.

"뵈기는 누가 본다고 그리여? 아 누가 멋 헐라고 이 오밤중에 꺼덕꺼덕 산소를

오겄소? 밝은 날 다 두고."

"그래도 사람 일을 누가 앙가? 왜 자꼬 뒤꼭지가 캥게서."

"잡아땡기는 것 같소?"

"하이고. 효도가 쉬운 지 아능게비?"

"에러운 지 아는 사램이 야물게 잘히여."

만동이는 백단이 옆에 쭈그리고 앉고, 백단이는 만동이 대신 봉분을 메워 나갔

다. 무당 서방은 헐 지 아능 거이 없네이. 피리 불고 장고 치고 잽이 노릇허는

것배끼는. 아이고 참, 또 있기는 있그만. 주막에 나가면 아조 새악씨들이 사죽을

못쓰게 만드는 재주 있네. 그재주가 있어. 당골들이 본대 투장을 잘 안헝가잉?

그렇게 다들 멩당 옆구리 따고는 쑤시고 들으가는 거이제. 들으가능가아 딜이보

내능 거잉가아. 하이간에 그렇게 밀어너서 양반허고 한 묏동에 동좌석허고 너냐

나냐 누웠잉게, 멩당 기운도 어쩠든지 받을 거 아니라고? 그래서 당골네 자식들

은 너나없이 모다 곱상허니 생김새 매꼼매꼼 허잖이여? 고곳들이 팔천, 사천 백

정보다 못헌 신분이지만, 또 아조 묘허게 양반들하고 무릎 맞치고 귓속말 나누

는 일 많허고, 궁중에도 드나들고. 그게 다 멩당 같이 쓴 덕 아니겄어?그것들이

양반을 상대험서 보고 들은 거이 있어 놔서 입으로는 면무식헌디다가, 복채도

수얼찮게 받고 그렁게로, 에미 당골들은 지 자식들을 쪽 빼입헤 내놓제 또. 인물

훤허고 기생오래비매이로 태깔 고운디다가, 타고난 거이 그거인디 또 지가 일생

허는 짓이 그거이라, 가락 한나는 아조 누가 따러갈 사램이 없잖응게비? 당골

자식이라는 거이. 이쁘장허니 사람 홀리게 생긴 얼굴에 노래 잘 불르고, 춤 잘

추고, 헌헌 일 않는 손에 간드러지게 장고 치고, 피리 불고, 애간장이 녹지, 녹아.

그렁게 술집 새악씨고 기생이고, 당골 자식한테는 안 녹을 재주가 없제. 아 그렇

게 녹이는 재주 자르르 헌 사람 앞에 어뜬 귀신이라고 안 녹겄어? 벨 수 없제.

그러다가 나이 차먼 장개가서 무당 서방이 되는 거인디, 장개갔다고 그 태깔이

없어지겄능가? 더허먼 더했제. 아조 물이 올라서. 그렁게 그런 손으로는 못 들고

망치 들고 그런 일은 못허제. 더군다나 머 소 몰고 쟁기질 허능 거이나 꽹이 들

고 어쩐 일 허능 것은 넘으 일이제. 넘으 일이여. 백단이가 비오리네 주막에 들

렀을 때,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터부룩한 텁석

부리와 가녈가녈하게 생긴 상대가 둘이 앉아 그런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는 것을

듣고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었다. 그 무당 서방인 만동이는 아낙인 백단

이보다 더 마음이 여려, 지금도 이런 정화에 먼저 어쩌지를 못하고 자꾸 백단이

뒤로 숨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백단이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는 그것

을 크게 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아닌게 아니

라 저 검은 소나무 둥치 저쪽에서 누가 몰래 숨어 번뜩이는 눈으로 이쪽을 노려

보는 것도 같고, 저 즐비한 무덤무덤의 봉분들과 비석, 호석들 뒤쪽에서 불쑥 누

군가 몸을 솟구쳐 휙 덮칠 것도 같은 으스스함이 등골을 지나갔다. 날아가게 지

붕을 씌우거나 틀어올린 장식을 한 비석들은, 얼핏얼핏, 그렇지 않은 줄 번연히

알고 있는데도 꼭 구척 장신 우뚝우쭉한 사람들처럼 보여, 무심코 눈을 들었다

가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게 하였다.

"휘유우."

당골네는 그때마다 한숨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들켜서는 안된다. 그러먼 끝쟁

이여, 절대로 안되야. 이 산둥의 신명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실은 살아 있는

이기채였다. 그 이기채의 서슬 푸른 문중이었다. 아까부터 만동이의 뒤꼭지를 할

퀴려고 손톱을 세우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지하의 유호들이 아니라, 꼭 뒤에

서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이기채의 눈빛이었다. 휙휙 도깨비불 나는 무덤들

위로 그 눈빛이 인으로 번뜩이는 환영에 만동이는 후드르르 어깨가 떨렸다.

"꼭 누가 보고 있는 것맹이여, 왜 이런디야."

그러나,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은 이기채의 눈빛이 아니라 바로 춘복이의 눈빛이

었으니. 누군가 보고 있는 것만 같아 쭈삣주삣 켕기는 만동이의 뒤꼭지를 아까

부터 춘복이는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들이 멋을 헐라고 저리까. 무덤에

찰삭 달라붙은 만동이와 백단이의 구부린 몸둥이를 발견한 순간, 춘복이는 제가

먼저 놀라 숨소리를 죽이고 얼른 시커먼 소나무 둥치 뒤족으로 몸을 숨겼다.

"무신 발소리 안 났어?"

만동이가 백단이한테 다급하게 물은 것도 그 순간이었다.

"매급시 그래 쌓지 마시오. 무단히 일만 더디제"

"아니, 꼭 무신 소리가 저벅저벅 난 것맹이라."

"꼭 애들맹이로 왜 그리여?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안 딛킨디."

옆사람한테도 겨우 들릴락말락한 그 음성이 춘복이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춘복이가 몸을 숨기고 있는 소나무는 청암부인 무덤에서 몇 걸음 안되는 뒤편이

었으므로, 그 둘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는 얼마든지 복 수가 있었다. 거기다 마침

달빛은 또 얼마나 푸르고 밝은가. 그러나 어둠은 그만큼 더욱 어둡고 검어서 묵

지를 덮은 것 같아, 나무 둥치 그림자에 숨은 춘복이를 들키지 않게 감춰 주고

있었다. 춘복이는 아까 거멍굴 뒷동산 무산의 봉우리에 올라, 떠오르는 보름달의

가느다란 금실 같은 눈썹을 맨 먼저 보고

"달 봤다아."

창자가 터져 나가게 소리를 지르며 두손을 하늘로 번쩍 쳐들고는, 있는 힘을 다

하여 다시 한 번 목청껏 외쳤다.

"달 봤다아아아."

그 소리는 하도 우렁차고 벽력 같아, 함께 다 맞으러 무산에 올랐던 거멍굴의

오물조물한 푸네기와 붙이들이 그만 깜짝 놀라 춘복이를 돌아볼 지경이었다. 공

배 내외, 평순네와 평순이, 그리고 택주네 들이며 대장장이 금생이, 만동이, 백단

이, 말고도 달 맞으러는 올라왔지만 생각같이 쉽게 뜨지 않는 달을 잠시 젖혀두

고 다른 이야기에 헛눈을 팔고 있던 사람들이, 이 오장을 토해 내는 것 같은, 흡

사 미친 사람 비명과도 같은 소리에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가 왜 저런다냐. 교옹장허네 기양. 달 잡어먹을랑게비이."

공배네가 반은 놀라고 반은 어이가 없어, 공배 한 번 보고 춘복이 한 번 쳐다보

며 실소를 했다. 춘복이의 고함 소리는 온 무산을 울리고, 무산 너머 주름주름

물결 같이 검푸르고 연푸른 산등성이들을 넘어서, 골골이 메아리로 번져 나갔다.

이윽고 동산 위에 멧방석보다, 방죽보다, 청호 저수지보다 더 크고 싯누런 달이

붉으스레 붉덕물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떠오를 때. 춘복이는 그 달덩어리의 거대

한 몸체와, 그 몸체를 가득 채운 달빛의 뒤챔과, 무서운 힘으로 자신을 빨아들이

는 흡인의 기운에 맞서, 오히려 제 온몸의 손끝과 발끝, 머리꼭지 정수리의 실핏

줄 끄터머리까지 터져 버리도록 가득 차게 달빛을 빨아들여 흡월하면서, 이달이

작은아씨려니. 이 싸움이 바로 작은아씨와 나의 기운 싸움이려니. 져서는 안된

다. 절대로. 안된다. 부르짖었다. 그것은 단순한 작은아씨, 그냥 강실이가 아니라,

지금껏 대대손손 내려오고 내려오던 그네 선조의 혼들이 승천하고, 녹아들고, 그

혼의 투명한 불꽃들이 하나 모이고 둘 모여 드디어는 거대한 광명 덩어리로 눈

부시게 어리어서 어두운 밤 상공에 둥두렷이 떠올랐는데, 이제 어인 일로 황토

흙탕 뒤집힌 것처럼, 저렇게 알 수 없는 분노와 혼돈과 아우성, 그리고 격랑으로

어둡게 술렁이며, 뒤채며, 빛의 싯누렇고 싯붉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달이

었다. 그러니까 강실이는 그 혼자 도려낸 듯 떨어져 나와 따로 선 누구가 아니

라, 그 달 속에 서 있는 한 처녀, 그러나 달과 그 처녀가 도무지 서로 구분되지

않게 뒤엉키어 녹아든 형상으로, 두려우면서도 기어이 그것을 삼켜 버려야 할

어떤 절박함을 춘복이한테 덮어씌우고 있었다. 덮어씌우다니. 그것은 맞는 말이

아니었다. 강실이는 그에게 한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실이가

거기 있다는 것, 매안의 원뜸 솟을대문 아래 그 집의 지친으로 어여쁘게 돋아나

꿈결같이 그림같이 살고 있다는 것, 아니 그런 말이 아니어도 어쨌든지 강실이

가 '있다'는 사실이 춘복이한테는 지금 엄청난 강박으로 덮어씌워지고 있었다.

오로지 그 존재 자체가 강박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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