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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6권 (5)

카지모도 2024. 9. 1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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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봤다아"

그것은 싸우는 소리였다. 그는 남모르게 혼자서 사력을 다한 승부를 달에 걸고,

단말마 같은 비명을 토하며, 또 그달을 들이마시며, 진땀이 나도록 달과 싸웠다.

그러는 중 어느결에 만동이와 백단이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은 솟아

오른 달을 보며 소원을 빌거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춘복이한테만 귀띔

을 하고는 일찌거니 고리배미 비오리한테로 간 옹구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도 별반 마음이 쓰이지 않을 만큼, 달맞이는 흥겨워졌다.

"인자 고리배미로 풍물 귀경 가야제. 시절도 이런디 무슨 풍물인가만. 이럴수록

이 진탕 한 번 노는 것도 좋온 일이제. 체찡맹이로 깍 차갖꼬 있는 속도 좀 내

레갈 거이고. 안 그러먼 참말로 죽어 불제, 숨이 맥혀 어찌 살어. 가자. 자아, 가

들 보자, 가들 바."

공배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우세두세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춘복이

는 어렵지 않게 슬쩍 뒤로 처져 몇 걸음 느리게 걷다가, 고리배미로 가는 대신,

이씨 문중 도선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온몸에 들이마신 달을 터져

나가게 머금은 채, 그는 도선산의 입구에서부터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흡월하던

그마음으로, 산의 기운과, 거기 밀밀히 서 있는 적송의 검푸른 머리며 붉은 몸통

이 뿜어 내는 기운을 들이마셨다. 서리 같은 달밤에 승천하는 붉은 용의 비늘이

달빛을 받아 교교하게 빛나는 적송은, 솔바람 시린 소리를 겨울 한공에 씻어내

며 이씨 문중 조상 선조들의 산소 유택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적송 수풀 이쪽

에 산지기 집이 달빛의 너울에 덮이어 잠들어 있고, 그보다 더 위쪽으로는 제각

기 우람한 용마루를 차가운 밤 하늘에 솟구쳐 치올리고 있었다. 시제 묘사때면

매안의 문종 사람들은 물론이요, 인근에 나가 있던 이들, 그리고 멀리 출타하여

일을 보거나 자리를 옮겨 살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모여 와, 검은 갓 쓰고 흰 도

포 입고 구름같이 무리로 서서 삼백 명 사백 명씩 헌헌장부들이 조상의 선영에

제사하는 광경은, 그럴 조상 모시지 못한 상민이나 무세한 사람들을 압도하기

마련이어서,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은근히 새암도 났는데. 제각은 그 큰

제사를 준비하는 제청이니, 규모 또한 여염집과는 비교도 안되게 장엄하여 솟을

대문에 골기와 지붕, 그리고 두리기둥들이 가본 일 없는 대궐을 상상하게 하였

다. 다만 대궐과 다르다면 단청이나 주칠이 없이 소복한 듯 본색만을 그대로 드

러낸 나무들이 소슬하니 엄숙하다는 점일 것이다. 춘복이는 이 제각의 솟을대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달을 들이삼킬 때와 같은 공력과 기세로

그 장중하고도 삼엄하고 한없이 높아 보여서 감히 다가설 수 없는 제각, 신명들

의 귀기가 마당과 댓돌과 마루와 방, 방, 그리고 대청이며 기둥, 지붕의 기왓장

하나에까지 결결이 골골이 서슬을 세우고 스며들어 있는 제각을, 한 숨에 빨아

들이려 하였다. 제각은 곧 무산 위에 뜨던 그 달이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보다 더 실감나는 구체의 기운이라고나 할까. 여그 서리신 이씨 문중 대대 조상

신명님들, 이 춘복이란 놈 우습다 허지 마시고 오늘 밤에 사우로 맞어 주십시오.

저는 본래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타고난 것도 없는 천하 불상놈이올

습니다. 허나 이런 놈도 한 번 살어 보고 싶은 시상은 있어서 뜻을 갖꼬 맘을

갖꼬 주먹을 쥐어 보는디요. 나, 이씨 조상 신명님들 따님 하나 훔칠랍니다. 주

시오. 저 하나 주시오. 이씨 조상님들은 이 따님말고라도 대대 후손 열두 집안

수수백천 자손들이 꽃 같고 달 같어서 꽃밭맹이로 흐드러져 피어날 거잉게, 이

꽃한 송이 저한테 주시오. 내가 오늘 그 꽃 훔치로, 꺾으로 갈랑게, 나한테 감응

허사 이씨 조상님들 기운 좀 주십시오. 여러 신명님들한테는 수수만만 꽃송이

중에 하나겄지만, 지는 이꽃 한 송이가 지 전부요. 내 한세상으 전부요. 저한테

주시기라우. 상놈 손자 한 놈 보시기요. 백옥 같은 이씨 조상님들 깨끗허고 높은

덕에 검불 같고 티끌 같은 흠절이 찍히는 거이겄지만, 저 높은 디서 뜨는 달도

자세 보면 얼룩얼룩 얼룩이 많습디다. 그거이 머이겄능교. 그거이 다 흠절 아닝

교. 시컴시컴 얼룩배기 달 속도 무단히 그렁 거는 아닐 거이요. 그렇게 얼룩 있

고 멍들었어도 달이 어디 꼬물만치라도 그것 때미 어둡등교. 그께잇 거 데불고

도 천지에 휘황 찬란, 캄캄헌 밤에 그만치 큰 광명이 어디 다시 있겄습니까. 강

물이 크먼 요강 싯친 물 한 박적 다 씰어 안고 흘러가도 흠 하나 티 하나 표 안

내고 바다로 가디끼, 이놈 하나 상놈 사우 후손으로 끼여들어도 이씨 조상님들

광영에는 아무 누가 없일 거인디요. 허나 이놈 춘복이는, 비록 그 요강 싯친 물

일랑가는 모리겄지마는, 그 강물에 뛰어들어 바로 강물 되는 거이라요. 요강물이

강물 되는 일인디 지가 어찌 그일을 안허겄능기요. 살페 줍소사. 부디 살페 주옵

소사. 저 해원 조께 시케 주옵소다. 춘복이는 두 발을 땅에 꽉 붙여 엉버티고 서

서, 교교한 겨울 달빛을 받고 있는 제각을 쏘아보며 주문처럼 이 말을 되었다.

그리고 그 집채를, 집채에 서린 신명의 기운을 물 마시듯 한 모금 한 모금씩 들

이마시며 흡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일을 도모하기 전에 웬일인지 이 도

선산에를 먼저 와야 할 것만 같았었다. 비록 문서 없이 순서도 없이 끼여드는

일이었지만, 그의 내심에는 이 도선산 신명들의 기를 받아 자신에게 자신감을

북돋워 주고 싶었으며, 그 기와 맞서 한바탕 겨루지 않고는 설령 어떤 절호의

순간이 기회로 부닥쳐온다 해도, 이쪽이 지레 놀라고 눌리어 솔아 버릴 수도 있

는 일이라. 그는 가장 두려우면서도 결국은 선망이 되는 도손산 산소들을 찾아

온 것이었다. 그는 제각 앞에서 발을 옮겨 둥시르르한 봉분들이 보름달보다 더

크고 더 겁나 보이는 곳으로 성큼 들어섰다. 절대로 기가 죽어서는 안된다. 나도

인자 이 집안의 사우가 될 거잉게. 멩색 없고 문서 없어도 나는 이 집안으 사우

가 될 거잉게. 베폭 찢는 소리로 휘이잉 날카롭게 허공을 가르던 바람은 비석의

잔등이를 회초리롤 후려치고, 푸르게 멍든 달빛은 그 매 맞은 자리를 차가운 손

으로 쓸어 내렸다. 당대의 명재상이었던 영의정의 손자로서 남원의 매안으로 내

려와 입향 우거허여 자리를 잡은 뒤,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없이 많은 명인달사

를 내고 대창 창성하였던 이씨 문중 도선산, 몇 백 년의 세월이 우뚝우뚝 비석

으로 남겨진 무덤에는, 종일품 의정부 좌찬성, 정이품 의정부 우참찬, 자헌대부

홍문과 대제학, 중이품 가선대부 하헌부 대사헌, 정삼품 당상과 승정원 도승지,

동부승지, 당하관 통례원 좌통례, 혼문관 직제학의 이름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다 더듬을 수 없는 그 비석들의 후면에 적한 글귀들은 하나같이 그 인품의 온

후,강직, 절제와 충의, 효심, 그리고 고매한 학덕과 경세의 업적을 적고 있었다.

청빈한 성품과 근면 검소한 생활이 보는 사람에게 저절로 감화를 주어 따르는

이 많았다는 구절이며, 어질고 자애로운 풍모와 깊은 학덕이 아름다워, 그 한평

생 살아온 자취가 훗날의 자손에게 가히 본이 되리라는 조상들.

"공은 점점 자랄수록 학문을 닦는 일에 지성을 다하여 박학 다식한데다가, 예의

범절이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부모를 섬기되 진정을 바치니, 누구라도 공의 이름

을 들으면 멀리서라도 한 번 찾아와 뵈옵고자 하였도다."

"공은 지극히 검박하여 그 밥상에 세가지 이상의 반찬을 놓지 않았으며, 백성을

아끼기 친자식같이 하는지라, 가는 고을마다 송덕비를 세우고자 백성들이 원하

였다."

"공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비범하여 같은 무리 속에 홀로 뛰어남이 가히 햇빛

을 받는 흰 학과 같았다."

"공은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 하므로, 벼슬을 버리고 곧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였으나 상께서 그 인재를 아깝게 생각하여 한사코 허락하지 않으시다가, 공의

소청이 하도 간곡한지라 남원의 이웃 고을 장흥부사를 임명하여, 나라일과 부모

섬기는 일을 같이 하도록 배려하시었다. 그러던 중 부친의 병환이 더욱 깊어져,

공의 효성 어린 간호에도 차도를 보이지 않은 채 홀연 영영 돌아가시니 이때 공

의 나이 삼십오 세였다. 이에 조종에서는 공의 부친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공의 부르짖어 슬퍼하는 모습은 차마 사람이 볼수 없었으나 인생이 덧없는 것을

공인들 어찌할 수 있었으랴. 이에 공은 곧 부친의 산소 옆에 조그마한 여막을

짓고 이곳에 거처하면서,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받들고 섬

기어 삼 년간을 지내니, 풀로 엮은 초막에 그의 초췌한 형상이 이루 말할 수 없

었으나, 그런 중에도 집에 계신 어머니를 또한 지극한 정성으로 살펴 드리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

은 대사성, 직제학, 관찰사, 대사헌의 벼슬을 하였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후에

공의 모친이 또 세상을 하직하여 운명하신 후에도, 밤낮으로 여막에서 기거하며

눈물로 상을 하직하여 운명하신 후에도, 밤낮으로 여막에서 기거하며 눈물로 시

묘하기를 꼭 부친 때와 다름없이 하였다." 그 비석 위에도 달빛은 내려 얼어붙는

다. 그토록 지극하신 효성으로 부모 혼백 섬기기를 다한 조상은, 바로 몇 걸음

아래 종산 발치, 이제 막 지하에 묻힌 후손 종부 청암부인의 무덤 옆구리 헐리

어 소리 없이 능욕당하는 것을, 다만 지켜만 보고 있을 뿐, 그 무엇을 해 줄 수

있으리. 천만 가지 송덕이 글자로 새겨져 있다 해도 단 한 자 읽을 수 없는 춘

복이는, 비문 읽을 생각이야 애초에 없었지만, 그것을 하나하나 읽는 대신 통으

로 들이삼키어 그 기를 온몸 속에 흡입하여 삼투시키려 하였다. 도선산을 다 돌

고 무덤마다 절을 하며 종산으로 내려왔을 때, 그는 놀랍게도 청암부인의 묘서

에서 만동이와 백단이를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도 보아 버린 것이다. 춘복이는 야릇한 호기심과 흥분으로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숨죽이어 지켜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그들을 얕보는 비웃음

이라기보다, 자신이 용틀임으로 머금고 있는 소원과 꼭 같은 소원을 안고, 이 가

문에 뼈다귀를 섞으려 하는 그들에게서 어이없고 묘한 동류의식을 느끼면서 비

어져 나온 웃음이었다. 그 모양은 가련하고 어리석어 보였다. 절실하면 절실할수

록 그만큼 더 우습게 보이는 것은 웬일이었을까. 그 자신의 모습을 또 누군가

있어, 어디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그 또한 춘복이와 같은 느낌을 가질 것인가.

"그런다고 되야?"

하는 미소를 목젖으로 넘기고는 아까보다, 만동이 내외를 발견하기 전보다는 훨

씬 가라앉은 심정으로 춘복이는 종산을 빠져 나와, 드디어 매안으로 가기 시작

했던 것이다.

"자가 누구여?"

마침 소피를 하러 마당 귀퉁이 소매동 옆으로 나왔던 산지기 박달이는,괴춤을

추켜올리다 말고 흠칫 놀라, 지금 막 저희집 수숫대 울바자를 스쳐 지나가는 시

커먼 장정을 돌아보았다. 얼결에 보았어도 이씨 문중 사람은 아닌데, 누가 무엇

하러 이 밤중에 칼바람을 맞받으며 남의 종산에 올라갔다 오는 것일까. 박달이

는 얼른 삽작문 바깥으로 나섰다.

"누구여?"

몇 걸음 지나쳐 저만큼 가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누구냥게?"

박달이는 서른 중반을 넘어선 사람으로, 먼저 죽은 아비의 뒤를 이어 이씨 문중

선산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성깔이 칼칼하고 고집이 단단하여 어려서부터 '박달

방맹이'같다고 별명을 들었는데, 생김새도 야물고 몸이 날렵한 사내였다. 안 그

래도 누가 감히 그 서슬이 무서워 이씨 문중 선산에는 함부로 못 들어갔지만,

박달이가 산을 지키면서는 더욱 조심이 되어, 아무리 땔나무가 없어도 그 산중

으로는 걸음을 놓지 못했다. 해마다 쌓이는 낙엽이 썩지도 않고 그 위에 또 쌓

여도, 삭정이 마른 가지가 나무마다 생겨나서 그것만 꺾어다 불을 때도 엄동의

추위를 웬만큼은 녹일수 있을지라도, 저절로 떨어지는 도토리 상수리를 한 바가

지만 주워와도 몇 끼 식량은 넉넉히 할 것만 같아도, 사람들은 그 선산을 넘보

지 못했다. 만일에 누군가 정히 참지 못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아궁이에 땔나무

라도 한 짐 긁어 넣으려고 그 산에 몰래 들어갔다가, 요행히 들키지 않는다면야

귀신이 도왔다고 할 것이요, 만일 여의치 않아서 히뜩 그 옷자락만 들켰다 하면,

어디서 보고 있다 나타났는지, 방망이로 맨다듬잇돌 내려치는 소리를 새되게 지

르는 고함 소리에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만일 순순히 긁은 나무

나 꺾은 나무를 내놓고 백 배 빌면 혹 모르겠거니와, 에라 모르겠다, 등에다 나

뭇짐 진 채 달아나려 했다가는, 여지없이 뒤통수 까지게 후려패는 몽둥이 찜질

에 나가떨어지면서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박달이는 참으로 박달방망이보다 더

매서웠다. 그런 박달이한테 춘복이가 걸린 것이다. 그러자 춘복이는 깊이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조금도 무슨 기미를 눈치채이지 않게.

그냥 어디 이웃에 마실 나왔다 가는 것처럼. 아니면 대보름 밤이니 달마중하러

온 것처럼.

"저요."

"춘복이?"

"이예에. 진지 잡샀능교?"

"시방이 언젠디 진지를 잡사? 근디 자네 어디를 갔다 옹가?"

"달구경 좀 허니라고요."

"달? 무신 달구경을 이렇게 먼 디 끄장 와서 히여? 그것도 혼자. 어디가서 허고

오는디?"

"아 여그 종산으로 도선산으로 휘이 한 바꾸 돌았그만이요."

"으잉?"

"내가 언지부텀, 여그 한 번 꼭 와서 참배 한 번 해야겄다, 속으로만 벨르고 벨

르고 했는디요. 머 나는 어매도 아배도 모르는 천하 불상놈이라 어디 부모 묏동

이라고 찾어가서 엎어져 얼해 볼 만헌 디도 없고. 머 그 욱에 할애비가 있어서

성묘 한번이라도 해 본 일도 없고. 그거이 그렇게 늘 서럽드만요. 나 같은 놈이

야 나 내지른 어매 아배 덕이라고는 머리크락만치도 본 일 없는디, 그래도 요만

치라도 한 몫은 혀게 큰 것은 다 매안 문중 덕분 아닝교. 내가 암만 소가지 사

납고 물불 잘 못 개린다고 그렁 것도 모르겄소? 속으로는 다 감지덕지, 결초보

은 은혜를 갚을라고 맘을 먹제."

"그런디?"

"청암마님 산소에 갔다 왔소. 시방"

"거그 멋 헐라고?"

박달이의 귀가 어둠 속에서도 쭝긋 일어서는 것이 보인다. 박달이는 평소에도

바짝 긴장하거나 또 그렇게 해 보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두 귀를 쭝긋 에쉈다.

움직이는 귀였다. "작년 시안 동짓달에 그 마님 돌아가시고는, 나 참, 부모 잃은

설움은 안 저꺼 봤잉게 모리겄고, 내 그렇게 설운 일, 살다가 첨이요. 그렇게도

허퉁허고 허망헙디다."

박달이는 아까보다 기세가 누구러져 춘복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는

"그야 그렇제."

한숨 섞은 맞장구도 쳐 주었다. 춘복이의 머리 속에는, 지금도 거기 봉분 옆구리

에 달라붙어 진땀이 번지는 이마를 소맷자락으로 씻으며 무덤 헐어 낸 자리를

메구고 있을 만동이 내외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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