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죄의 날개
"삼국유사에 고기를 빌려 적은 글이 있습니다."
"고기...라면."
"단군고기를 말하는 것이지요. 단군본기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국조
단군의 사적을 기록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이올시다."
"...그렇습니까."
고개를 주억이는 강호의 눈매에 순간 울연한 기색이 지나간다.
(소위 선각 지식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과연 무엇을 배우려고 동경
까지 갔던가.)
하는 생각이 파고든 것이다.
"그 고기의 일절은 그렇습니다."
도환이 천왕문 바닥에 돌멩이 조각으로 일필휘지 달필의 글씨를 써가며 일
러준 구절들은 처음 보는 풍경처럼 신기하고도 명료했다.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란 이가 있어, 자주 천하를 생각하고, 사람이 사
는 세상을 탐구하였는데. 아버지가 그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을 내려다보
니, 가이 홍익인간이라,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 세 개를 환웅에게 주어 인간의 세계를 다스리도록 하
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 곧 지금의(고려) 묘향산에
있는 신단수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한다.
그리고 이 분은 환웅대왕이라고 이른다.
그는 바람과 비와 구름,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
벌, 선악 등을 비롯하여 인간의 삶에 관한 삼백육십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널리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범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늘 신웅, 즉 환웅에게 빌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에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삼칠일 곧 스무하룻날을 기하며, 백 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얻게 되리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어둠 속에서 묵묵히 견디더니.
곰은 끝내 잘 참아서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지키고 삼가야 할 바
를 잘하지 못해서 결국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신단수 아래서 아기 배기
를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환영으로 변해서 사람 모습을 하고 그와 혼인했더니, 이
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한 것이다.
단군 왕검은 당고가 즉위한 지 오십 년인 경인년에 평양성(고려의 서경)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또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이곳을 궁홀산이라고도 하고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단군 왕검은 여기서 천오백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이에 단군은
황해도 구월산 밑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
신이 되니. 나이는 일천구백 팔 세였다고 한다.
"즉, 하느님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품고 태백산에 내려
와서, 단군을 낳고, 단군이 우리 나라를 개국하였다는 것이지요."
태백산은 크고 하얀 산, 한밝뫼이며, 여기서 한은 절대자, 진리, 크다, 넓다
는 뜻이지요. 그리고 흰 것은 태양 광명을 나타내는데. 이 글자가 들어가는
산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산의 구실을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늘을 향해 제의를 올리거나, 혹은 제단이 있는 신성한
산에는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태백산이라는 명칭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특정한 산에만 고정된
고유명사가 아니라, 비슷한 뜻과 발음을 가진 채 인문을 따라 이동하는 특
징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태백산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지금의 묘향산'이라고 해서 묘
향산을 가리키고, 현재는 우리나라 강원도 황지에도 있으며, 중국 북경 서
쪽 대행산맥에도 있고요, 일본 구주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태백산이라
는 명칭은 우리 민족이 쓴 일반명사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글자의 뜻과 기능을 비롯하여 역사적인 사실이나 단군신화에 나타
난 묘사들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이 태백산은 백두산을 가리킨 말이 확실
합니다.
민족의 성산이며,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내려와 신시를 건설하고 하늘과
대좌한 성스러운 땅. 백두산. 아들을 낳은 산.
도환이 돌멩이 조각을 놓고 흙 묻은 손가락 끝을 비빈다.
"김씨의 아들은 김씨고, 이씨의 아들은 이씨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닌가.
"그렇지요."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고, 개의 아들은 갭니다."
자못 단호한 도환의 어조에 강호가 웃는다.
"그렇다면, 하늘의 아들은 하늘이겠지요?"
강호를 응시하는 도환의 눈빛이 깊다.
"하늘은 한얼입니다. 한얼은 큰얼, 큰넋, 큰정신을 이르는 말이올시다."
예전에 발해나라 대야발이 지은 단기고사에 보면
"아득한 옛적 태고시에 한얼사람 신인 한배께서 널리 인간을 유익하게 할
홍익인간의 얼을 가지고, 삼신산인 한밝산에 내려왔다. 그리하여 한밝산을
중심으로 살던 삼천 부락의 백성들에게 한얼님을 가르쳐 알게 하고, 잘 살
게 하였다. 한배께서 백성들을 교화시킬적에 항상 한얼 이치와, 한얼 길을
밝힌 천부경과, 세 한얼 말씀을 가르쳐 알게 함과 동시에, 그 삼천단부로
하여금 한얼을 숭배하고, 조상을 공경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세 가지 뿌리
사상을 가지게 하였다."
고 씌어 있나니.
"한배검은 왕검의 다른 이름인데, 단군이란 이 한배검 한 분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배달나라의 모든 임금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단군 조선의 임금은 모두 마흔일곱 분이었는데, 제일대 단군은 한배
검이요, 제이대 단군은 부루, 제삼대 단군은 가륵...그리고 제사십칠대 단군
은 고열가, 라고 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강호가 놀란다.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단군 임금은 그저 막연히 한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요.
입속으로 삼켜 버리는 뒷말이 그의 목에 걸린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단군이 산신 되시던 나이를 천구백팔 세라 한 것은,
그 단군 조선 임금님들 사십칠 대 나이를 모두 합한 것인가요?"
"무방한 생각이시리다. 헌데 북애의 규원사화를 보면, 단군 각 임금의 재위
햇수는 모두 합쳐 천백구십오 년 이라 되어있고, 다른 책들에는 사십칠
대 단군들의 임금 노릇한 햇수가 도합 천사십팔 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처럼 자세히 기록으로 남을 때는 반드시 무슨 근거가 있겠지요?"
"당연한 말씀이올시다. 아, 저, 정조 시대에 펴낸 춘관통고에 이광제가 단
종 임금께 드리는 글도 실려 있잖습니까아."
그 글에 하였으되.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당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사오나, 참으로 오
래된 것만은 사실이옵니다. 그 삼성당의 북쪽 벽에는 단인천제, 동쪽 벽에
는 단웅천왕, 서쪽 벽에는 단군부왕, 삼신을 나누어 모시고 오랫동안 제사
를 올려 왔사오며, 이 삼성당의 산 아래를 성당마을(성당리), 또 그 동쪽
땅을 당장경이라고 하옵니다."
"아니, 삼국유사에 나온 구월산 당장경이 실제로 있단 말씀입니까?"
놀란 강호의 어조를 받으며 도환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우리 배달 민족과 나라의 첫 아버지시요, 스승이시며 임금이신 분이 단군
왕검 한배검이신데, 조선 왕조 태종의 분부에 따라 엮은 동국사략에도 씌
어 있기를, 동방에 처음 임금이 없더니 한얼 사람이 한밝산 밝달(배달:단)
의 나무 아래 내려오시거늘, 나라 사람들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고 나라 이
름을 조선이라 하매, 이분이 단군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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