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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권 (30)

카지모도 2025. 5. 10.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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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 단군.

그가 즉 제석의 손자라고 도환은 말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삼국유사 '고조선 왕검조선'편에 일연스님

이 주를 달아 명기해 놓은 사실입니다."

석유환인 위제석야

옛날에 환인이 계시오매 제석을 이르는 말씀이다.

"아하, 그렇군요."

열쇠 소리 같은 이 구절에 강호가 탄성을 내며, 요점을 정리하는 학생처럼

손가락 하나를 들어 허공에 점찍는 시늉을 하더니, 한 마디 한 마디 외우

듯 짚는다.

"환인은 한얼이요, 지금 말로는 하늘인데. 환인이 제석이라면 이는 수미산

꼭대기 도리천의 임금이시란 뜻입니다. 그런즉 선견성에 있어 사천왕과 삼

십삼천을 통솔하면서, 부처의 법을 지키고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보호

하며,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하는 하늘의 임금이니. 환인은 즉 하느님이시란

말이지요?"

도환이 뿌듯한 마음을 더 참지 못하고 합창한 두 손을 힘껏 깍지 끼어 붙

움킨 주먹으로 만들면서 흔들어 기쁘다는 표시를 한다.

"불교 하늘의 계보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겠지요?"

웃음을 띄우며 한 자락 깔아 넣는 강호의 말은, 유가의 자제로서 능히 할

수 있는 언지인지라, 도환은 조금도 고깝지 않았다.

"그것이 실제냐 아니냐, 역사냐 허구냐, 내 종교냐 네 종교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논쟁이라고 봅니다. 오직 여기서 우리가 깊이 취할 바는,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상징의 핵심이며,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

을 깨닫고, 깨치고, 배울 것인가, 그리하여 드디어는 어떻게 '나'를 찾고,

'우리'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씀이지요."

"천제 환인께서, 인간세상에 내려가 나라를 세우기 원하는 아드님 환웅에

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하늘의 아들이신 징표를 삼았고, 이 환웅이 아들

을 낳았으매, 단군은 곧 하늘이시지요. 국조가 하늘이시니, 그의 자손들인

우리 조선의 백성 하나 하나 역시 또 분명한 하늘이 아니리요?"

인내천.

사람이 곧 하늘이다.

문득 강호의 뇌리에 이 말이 떠오른다.

그것도 더듬어 얽어 보면 필연코 이와 무슨 연관이 있으리라.

우리 민족 사상의 밑뿌리 한 가닥이 설풋 드러나 잡힐 듯하다.

"환웅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오는 과정은 어느 나라의 개국신화보다 평화적

이고 건설적입니다. 대개 경천 최상의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것은, 그가

무슨 죄를 지어 더 이상 천상에 머물 수 없게 되었을 때 일방적으로 쫓겨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지상은 가혹한 유배지, 혹은 형벌의 땅,

감옥, 하늘만 못한 곳으로서 저주스러운 곳인데. 우리 단군 신화에 있어서

는 환웅이 지상에 하늘을 세우겠다는 서원을 품고 하느님의 아들이 내려온

것인즉, 문자 그대로 그것이 지상 천국아닙니까? 그러니 조선이 곧 하늘이

지요."

끝마디를 똑똑 자르면서 힘주어 말하는 도환의 얼굴이 비장하다.

"지금은 비록 그 하늘이 구름에 덮여 있지만."

제석천이 그 아들인 사천왕에게 온갖 장엄구를 주어 지상을 허락하매 인간

세의 중생들을 다스리는 구도가, 천제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천부인 세 개

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니 단군을 낳아

"일 (조)은 아침(조)부터 밝게 되는 나라."

'아침밝' 조선을 개국하시는 구도에 절묘하게도 부합되는 것에 강호가 다시

한번 경탄한다.

"하늘정신을 품고 이 몸에 삶을 경영하는 현상도 그와 구도가 꼭 같지 않

습니까? 정신은 하늘이요, 한얼이며, 몸은 땅. 하늘이 땅에 깃들어서 그 자

식으로 작업을 낳습니다. 수행이나 노력이나 행위나 짓들은 모두 내 몸의

자식들, 나아가 내 생의 자식들이지요."

강호의 뇌벽을 치며 한 생각이 도낏날처럼 뽀개고 들어온다.

그의 몸이 이상한 희열의 충격에 떨린다.

식은땀이 돋는 것 같기도 하다.

인식의 황홀경.

"아 왜 당골네가 굿을 할 때도 보면 제석 본풀이가 꼭 있지 않아요? 모천,

부천에 대한 중생들의 두렵고 그리운 공경과 자식인 중생들에 대한 제석천

의 엄격한 연민, 자애, 보살핌이 거기에도 치렁치렁 얽혀 있는 것이 보입니

다."

잠시 말을 끊은 도환이 큰 숨을 머금는다.

"제석신앙을 받는 데 남달랐던 고려 왕실에서는 태조 대부터 제석천을 모

신 내제석원과 외제석원을 창건하고 수시로 임금이 행차하여 설경을 들었

습니다. 후대에서도 임금이 환후 있으면 제석원으로 이어해서 정양했고요.

물론 많은 재를 개설하여 지극한 정성을 바쳤습니다."

고려 왕실과 제석신앙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단적으

로 보여 주는 것은, 우선 왕이 제석원에 납시었던 기록이라고 했다.

그것은 태조 왕건의 즉위 이후 정종, 성종, 덕종을 거쳐 공양왕에 이르기까

지 물경 이백여 회에 달하였다.

"헌데 참 재미있는 사실이 발견되드구만요. 국운이 융창하던 임금 성대에

는 제석원 도량을 자주 열어 왕의 걸음이 잦았는데, 국운이 쇠미하던 충선

왕 이후부터는 내리 오 대에 걸쳐, 꺼져가는 등잔불의 마지막 불빛처럼 가

까스로 겨우겨우 가랑가랑, 한 번씩밖에 못 갔습니다. 그래도 충목왕은 세

번을 납시었지만."

역사 속으로 잠기어 사라져 버린 고려 임금들의 시호를 도환은 마치 자신

의 족보에 적힌 조상들의 휘자나, 아니면 가까운 대소가의 어른들 함자를

대듯이, 스스럼없고 친근하게 부른다.

"고려 시대에 팔만대장경을 주조할 때, 반드시 왕이 제사를 지내면서 읽은

제문이 있지요."

그것은 '천신기고문'이었다.

"이상한 점이 없으십니까?"

도환이 수수께끼를 하는 소년처럼 발그레 웃음을 깨물고 묻는다.

이번에도 강호는 답을 알아맞힐 것이기 때문이다.

"천신보다 높은 것은 부처와 보살인데, 불법을 새기는 대장경을 주조하면

서, 의당 부처와 보살한테 직접 아뢰어 고유하지 않고, 왜, 그보다 낮은 위

치의 천신에게 기도를 고하였을까요?"

도환이 무릎을 친다.

"과시..."

어쩌면 이대도록 이 젊은이는 맑고 깊은가. 무엇이든지 저기 비추이면 물

살의 그림자 하나 접히지 않은 영지로 받아들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

은 지혜의 물밑에 가라 앉힐 것만 같다.

천신기고문이라는 말 한 마디를 듣고 읽어 낸 대답이 저만할진대.

하지만 도환은 일부러 별 내색을 안하려는 노인처럼 시치미를 떼고 이른

다.

"여기서 기도하여 고하는 천신은 바로 사천왕과 제석천왕입니다. 불교의

위상으로 볼 때, 사천왕과 제석천을 비롯한 뭇천신들은 불, 보살의 법을 보

호하는 보호신장들이지요. 그러니까 부처의 법이 있고 진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이 하늘들이 와서 그 법과 진리를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대장경은

불법 아닙니까. 대장경 있는 곳에는 사천왕과 제석천이 오시겠지요? 그러

매, 그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보호신장들에게 고하는 것이에요."

"또 하나. 그만큼 사천왕과 제석천은 인간계와 관계가 깊어 친숙하고도 미

더워 그러는 면도 있을 법한데요."

"그렇지요."

"반갑기도 할 것 같고."

오래간만이라서 한바탕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릴 만치 정겹게 어우러드는

하늘의 왕, 사천왕천의 임금들. 이 천왕들이 오시는데 백성들이 어찌 제사

를 올리지 않으리.

할아버지 하늘, 제석천.

아버지 하늘, 사천왕천.

그 말에 눈물 밴 체온이 돈다.

아들 하늘, 사바 예토, 중생의 땅, 서러운 조선.

목이 메인다.

강호가 고개를 떨군다.

떨어뜨린 그의 눈에, 우람한 함선 같은 사천왕의 군화 신발 혜가 들어온다.

그리고 그 발밑에 짓밟힌 조물.

"그런데 스님, 저 사천왕 존위들의 발아래 짓밟힌, 저것들은 무엇인가요?

조그만 저것."

강호가 문득 이제서야 눈에 뜨이는 조물을 가리킨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사천왕의 위세와 기상과, 그냥 외형적인 겉에다만 치장

하여 장식을 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닦음의 세계를 외적인 상징물로 위엄

있게 표현하여 들고 있는 온갖 장엄구들에 치어서, 얼른 보이지도 않았는

데, 크기는 그저 어른의 손가락 끝에서 팔굽까지 주욱 벋은 만하다 할까.

기껏해야 자가웃 정도 되는 것들이었다.

"아, 정말 경이롭군요."

강호가 그만 흥분을 참지 못한다.

"그것은, 악귀들입니다."

"악귀들이라고요?"

반문하는 강호의 눈이 어느새 그것들이 몇 개인가 세어 보고 있었다.

사천왕의 나룻배만한 신발 혜 밑에 쓰러지고, 엎어지고, 오똑하니 꿇고 앉

은 악귀들은 모두 여덟이었다.

저것을 여덟 '개'라고 해야 할지, 여덟 '마리'라고 해야 할지, 여덟 '사람'이

라고 해야 할지 몰라, 강호는 다만 '여덟'이라고 헤아린다.

사천왕의 동, 남, 서, 북 존위마다 다리는 둘이요, 발도 둘인데 앉은 자세를

한 형상의 한쪽 다리는 저마다 수직으로 곧게 내리고, 다른 한쪽 다리는

제기를 찰 때처럼 비스듬히 꺾어들고 있었다.

도환이 말한 악귀들은 제각기 다른 모양이었지만, 그 곧게 내린 다리의 발

아래 짓밟힌 것들은 우지끈 등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찍, 배가 터져 버

릴 것처럼 보였으며, 꺾은 다리 아래 짓눌린 것들은 마치 거대한 우주의

기둥을 온몸으로 떠받들어 어깨에 메고 있는 것처럼 힘겹게 보였다.

"본디는 사천왕이 저 발 아래 악귀를 짓밟거나 짓누르고 있지는 않았을 겁

니다. 아마 사천왕의 부하 권속들인 팔부신장들을 거느렸을 거예요. 손에다

비파나 칼이나 용과 보주 혹은 당과 탑 같은 장엄지물들을 든 것처럼. 그

런데 후대로 오면서, 인간들에게 죄악에 대한 경각심을 구체적으로 일깨우

기 위해 저런 형상들을 지어 보여 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변형이지요."

"그런데 왜 내린 다리 아래것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들어올린 다리 아래것

은 악귀가 사천왕의 다리를 받들고 있을까요?"

죄질에 따라 형벌이 다른가요.

"이것은 경전에도 없고 참고할 문헌에도 없는 말씀입니다만, 소승의 생각

에는, 저 사천왕의 두 다리가 힘, 즉 수행력을 상징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

니다. 다리는 걸어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제석천과 아수라가 한날 한시도

서로 평화를 유지해 본일이 없듯이, 선과 악은 그것이 생긴 이래 단 한번

도 사이 좋아 본 일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이 인간의 한 몸에 들어

있는 생각과 행동 중에서, 인간 이하의 성질이 부뚜질하여 치솟을 때는, 그

것을 자제하고자 하는 인내력이 힘차게 내리밟는 자세로 저렇게 나타났을

것이요, 인간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성품은 그 힘을 더욱 강건하게 북

돋아 받들면서 높이 치켜올리고자 하는 자세로, 저처럼 들어올리는 모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후대로 오면서 본뜻보다는 중생들을 경계하고 가르치기 위

한 갖가지 직접적인 형상으로 바뀌었으리라.

범련사의 사천왕은 네 존위 모두 오른발로는 악귀의 등과 허리를 밟고 있

었으며, 왼발은 허공에 들리어 악귀가 떠받치고 있었다.

"이는 사찰마다 다를 수도 있습니다."

동방지국천왕의 오른쪽 발 아래 꽉 밟힌 악귀는, 누런 민대머리에 남색 칠

한 두 눈을 질끈 감고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송곳니가 뻗쳐 나온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데, 뾰족한 두 귀때기에는 검푸른 뿔이 돋아 험상궂어 보인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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