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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권 (32)

카지모도 2025. 5. 12.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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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람에 동정이 딸려 와 흰 목이 드러난다.

그 여인의 모습에 강호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너무나도 조그맣고 아름답고 차가우면서도 단단하고 애처롭게 후벼파듯 관

능적이며 매서웠기 때문이었다.

한번 보면 누구에게도 말 못하면서 사무쳐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조

물을 빚은 이는 누구일까.

여인의 앞모습은, 죄의 당당함이었다.

저 여인을 빚은 이는, 마음에 저 죄를 품은 이가 분명하리라.

평생에 드러낼 수 없으나 단 한 번 저렇게 사천왕의 발 아래, 자신의 죄를

다하여 한 점 넋을 새겨 놓고, 여인 대신 저 자신이 세세생생 어깨가 짓무

르도록 사천왕의 다리를 메고 있으리라는, 장인의 다짐이 아니고서야, 어찌

저와 같은 조물을 지을 수 있으리.

저만한 죄라면, 얼마나 찬란할 것이냐.

강호는 가슴이 떨린다.

그러나 여인의 옆모습은 한없이 고적하였다.

고즈넉이 숙인 고개에, 앙가슴을 부르쥔 것 같은 손은 천 년이나 만 년이

나 회한을 다할 길이 없어 빈 가슴을 누르고 있는 모습을 비치고, 둥그렇

게 꿇은 무릎이 다소곳하면서도 허전하다.

"앞모습은 죄의 당당함이요, 옆모습은 죄의 고적함이로군요."

강호가 저도 모르게 탄식한다.

"소승이 전라남도 고흥의 능가사 사천왕을 친견할 때, 그 발 아래 여인상

이 잊혀지지 않아 본뜬 것입니다. 조형 화상을 그대로 그려 왔지요."

강호는 저도 모르게 여인에게로 빨려든다.

"그렇다면 스님께서 이를 손수 빚고 채색하여 그리셨습니까?"

라고는 차마 묻지 못한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토록 고운 여인이 무슨 죄를 지었으리까."

그 어떤 훼손도 없을 것만 같은 여인의 기개와 자태와 가여움이 살속으로

저며들어 강호가 묻는다.

"아마도 음녀일 것입니다."

강호는 소스라치는 눈빛으로 도환을 번쩍 쳐다본다.

"여인이 죄 지어 벌을 받는다면 음행 아니겠습니까?"

"설마, 저대도록 고운 이가..."

"저만큼 고우면 죄 안 지을 수 없을 겝니다."

강호도 도환도 모두 묵묵히 입을 다물고 여인을 내려다본다.

"저 여인이 속눈썹 하나 꼼지락 움질이지 않고도 벌써 이 생사람 두 남자

를 한눈에 사로잡았는데, 어찌 그 동안 죄를 짓지 않았겠습니까."

허허허.

도환이 웃자, 강호도 그만 실소를 하고 만다.

"제가 돌아다녀 본 바로는, 우리나라 조선조 후기의 사천왕상 모신 천왕문

에 여인이 있는 곳은 딱 두 군데.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와 전라남도 고흥

능가사뿐이었습니다."

"선운사에도?"

"그곳의 여인은 또 다른 모습이지요."

"아하."

"이 다음에, 동백꽃 필 때 꼭 한번 가 보십시오."

잊을 수 없으실 겁니다.

도환은 혼자서만 짐작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 미소는 강호에게 선운사 사천왕의 발아래 짓놓인 여인 하나를 점등시킨다.

그리고는, 다시 침묵하다.

그러다가 이윽고 말을 덧붙인다.

"이렇게 사천왕 발밑에 악귀로 사람이 등장한 것은, 조선조 숙종 임금 대

부터랍니다. 임진왜란이 지나가고 인간살이가 안정되면서 풍속이 문란해지

자, 이런 형상들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강호의 귀에 그런 말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뜻밖에도, 이 조그만 여인, 음녀의 조형을 보면서 강호는 강실

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닮은 데도 없는데, 왜 저렇게 닮았을까.

속으로 머리를 흔들었지만, 강실이가 어느결에 이 사천왕의 발아래 무릎

꿇고 앉은 여인의 몸을 빌어 그 안에 스며들면서, 꼭 저 모양을 하고 앉는

것이 보여, 강호는, 내가 왜 이러는가, 당치않은 연상에 당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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