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3. 9

카지모도 2016. 6. 24.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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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8 1993. 9. 1 (수)


비 때문에 맘껏 뽐내지 못하였던 무더위가 뒤늦게 억울하였던지 안간힘을 쓴다.


이동새마을 도서관에서 이름없는 작가의 '씻김굿'이라는 소설을 빌렸는데 도무지 수준미달.

다른 소설의 아류가 되어 줄거리를 이끌어 가기에 급급한 저급의 소설.


또다시, 때때로 때때로.

그리웁고녀.

기억의 냄새여.

야외교장, 벌건 황토에 몸을 엎드려 각개훈련을 받던 어느 산등성의 흙의 냄새 또한.

점호를 받고 문득 바라보던 어둔 새벽 하늘, 들녁의 냄새 또한.


17009 1993. 9. 2 (목)


'새롭게 하소서'

딱 부러지게 똑똑하여 장래가 유망하였던 여성, 결혼을 한달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한다.

목 아래로는 꼼짝도 할수 없는 철저한 불구의 몸.

그러나 하나님이 있음으로 그 여인은 결코 절망하지 아니 하였다.

생명을 감사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였다.

입으로 봉을 물어 타자기를 두드려 시를 써 시인으로 데뷔하고, 입으로 붓을 물어 그림을 그려서 세계구족화가회의의 정회원이 되었다.

그녀의 삶에 있어서 바라는 바는 오직 하나. 자신을 돌보아줄 봉사자가 끊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 다른 것을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옆에서 거들어주는 사람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몸뚱이를 갖고서.


17010 1993. 9. 3 (금)


그제의 '새롭게 하소서'의 여인과 비교하면 어제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한 사람들은 가득하게 축복받은 사람들.

남편은 음악교수고 부인은 복음성가 가수.

아이들과 부르는 찬양의 노랫소리가 가정에 넘친다.

밝은 햇살 가득한 이들의 삶에도 하나님이 계시고 그제의 그 여인의 삶에도 하나님이 계신다.


문득 생각한다.

피조물의식, 나는 누군가에게 지음을 받았다는 의식.

질그릇, 어떤 것은 귀히 쓰이고 어떤 것은 천히 쓰인다.

그것에 대하여 지음받은 질그릇이 무슨 할말이 있는가.

엿장수 마음데로인 것을.

그러나 그 분은 엿장수가 아니다. 뜻이 있는 절대자인 것.


피조물의식을 갖는게 신앙의 첩경이다.


17011 1993. 9. 4 (토)


계절의 바뀜은 급작스레 찾아온다.

일본 규슈에 상륙하여 일본열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빠져나간 태풍의 영향으로 날씨가 소슬하다.


여자라는 개념의 피조물의식이라는건 어떠할까.

성스럽고 고상하고 순결하고 아가페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그 뒤에 숨어있는 것은 관능이다.

관능이 배제된 어떤 여성다움도 그건 이미 여성다움이 아니다.

여자에 비추인 남자라는 피조물 역시 마찬가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근본은 바로 관능에도 있는 것.

그러므로 아프락사스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인가.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명백하게 남성으로 선언된 신은...

창조주의 하나의 개념도 하나의 관능일까.


17012 1993. 9. 5 (일)


스필버그 스타일의 영화 '후크'

피터 팬은 로빈 윌리암스, 제임스 후크 선장은 더스틴 호프만, 쥴리아 로버츠가 요정 팅커벨.

옛날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뉴욕 사업가가 된 어른 피터팬.

아이디어는 단순하지만 특수촬영의 효과로 환상적인 영상을 펼친다.


그러나 내게 있는 진짜 피터팬은 이런 종류가 아니다.

나의 기억 창고 속, 먼지 덮인 설합을 열면 그곳에서 진짜배기 피터 팬이 방긋 눈을 뜬다.

월트 디즈니의 피터 팬.

달 밝은 런던의 밤하늘 빅벤 시계탑을 배경으로 요정 팅커 벨의 금가루가 궤적을 그리며 하늘을 나는 피터 팬, 웬디, 죤...


그 만화 영화를 보고나서 나의 마음은 몇 달동안이나 심하게 앓았었는데.

총천연색 영상의 그 환상은.

아름다움의 실체였고, 그 아름다운 영상의 세계가 있음으로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호젓한 정능의 방에서 나는 즐겼던 것이다.

셀로판 종이에다가 물감을 칠하여 햇빛에 투과되어 비추인 색색의 그림자가 마치 코닥칼라의 영화필름처럼 나를 황홀하게 하였었고.

밀짚모자 테에서 얻은 영화필름은 내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고, 그 브라운의 색감은 언제나 나를 설레이게 하였었지.


그 때 나는 밤마다 끙끙 앓으면서 꿈을 꾸었다.

피터팬 피터팬, 팅거벨 팅거벨을 찾아서.


그 후에도 나는 월트 디즈니의 피터 팬을 또 보았다.

그러나 옛날의 피터 팬은 그대로 서랍 속에 갇혀 있는채 다시 보는 피터팬은 옛날의 피터팬은 아니었다.


다만 그리웁고녀!

기억의 틈, 그 서랍 속으로 들어가.

지금은 낯선 골목-그러나 기억 속의 낯익은 골목으로 접어들어.

냄새를 맡고프다. 만나 보고프다.

아, 나의 창고 그것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냄새가 담겨있는 설합들이 있다.


호젓하고 음습하기도 한, 고즈넉하기 그지없는 그 정적의 세계.

나의 잃어버린 古城-


17013 1993. 9. 6 (월)


맑은 날씨의 일요일.

쌍안경으로 보면 멀리 방파제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보인다.

낚시들을 하고 텐트를 치고 둘러앉아서들 고스톱을 치는지 술들을 마시는지.

말하자면 일요일의 여가라는건 저렇게 보내는 것이 정석이라고 하는 듯한데 나의 일요일과는 너무 다르다.


김석원 감독의 썩 괜찮은 국산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시골의 국민학교의 교실을 완벽하게 지배하고있는 어린 군주 엄석대.

서울서 전학 온 한병태의 엄석대에 대한 도전은 무모한 짓이었다.

한병태는 엄석대에게 굴종함으로써 단 열매를 맛볼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굴종의 기억이 하나의 가시로 남아서 그는 성장한다.


부당한 폭력 앞에서의 굴종.

이것은 바로 내게도 해당되는, 나의 자의식을 이루고있는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는다.

정능의 어린 시절, 임상규라는 아이.

고등학교시절의, 군대에서의, 직장에서의, 핏줄에서의.

무릇 기하.


부당함에 맞서지 못하는 그것.

비겁한 스스로를 인식하는 괴로움.


17014 1993. 9. 7 (화)


아침저녁은 선듯하다.

한낮에 햇볕은 아직 뜨겁지만.

지금의 귀한 햇빛은 곡식을 영글게 하고 과일을 달게 만든단다.

릴케의 시처럼.


17015 1993. 9. 8 (수)


6년여전.

어느날 갑자기 나를 사로잡았던 신비한 힘.

그 힘에 감싸여 있을 때의 그 몽롱한 상태의 감각을 나는 생생하게 회억해 낼수가 있다.

그 신비한 힘은 얼마동안이나 내게 머물러 있었던가.

한 여섯달쯤 될까.


시나브로 일상 속에 용해되어 이제 형해화된 관념으로만 남아있는 그 신비한 힘.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식했을 때 나타나는 힘.

나의 하나님이여.

다시 한번 나를 도우소서.


17016 1993. 9. 9 (목)


하나님에 취한 사람. 프란치스코.

하나님의 광대, 하나님의 노리개.

프란치스코.

빈곤이란 황홀한 도취이고 복종이란 엑스터시의 기쁨이다.


英이 SEA SOUND 공연 성황리 마치다.


그런데 俊이는 몸이 뜨겁게 아프다.


17018 1993. 9. 11 (토)


불면의 암시, 그 심리의 오랏줄.

밤새 꿈과 생시의 갈림길에서 그 심리의 오랏줄에 묶인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새벽3시.

무거운 머리통을 이고 부엌에 나가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찬송가의 테이프를 돌게 한다.

곧 이어지는 순서는 배변인데 그 또한 여의치 않다.


붕긋붕긋 솟아라 아랫배여.

새벽공기 청량한 산소를 호흡하며 삐걱거리는 뼈마디를 윤활시키는 새벽의 운동은.

쓰잘데없는 짓거리이다. 게으른 기계여.


절제,

박약이라는 이름의 너 의지여.


17019 1993. 9. 12 (일)


2공장 100톤 크레인 LOAD CELL 관계로 토요일 오전 업자에게 호통을 치며 방방 뛴다.


등산하듯 올라가는 100톤 크레인의 운전실. 정글과 같은 구조물을 헤치며 고소공포증으로 다리를 후들거리며 내려다 보는 지상의 아득함.


오후 돌아와 마루에 앉은채 장 자크 아노감독의 '불을 찾아서'보다.

'베어'에 비하여는 썩 괜찮은 영화.

구석기시대의 리얼리즘.


英이 어제 영남지역 미생물학과 학술 단합대회.

俊이는 彦이랑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할머니께 가서 잤다.

이런 俊이가 기쁘고 기쁘다.


17020 1993. 9. 13 (월)


일요일의 사무실.

현업의 관리자들은 나름대로 현장이 걱정스러워 나온 경우이겠지만 나의 경우는 형식주의의 출근이다.


어두워지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어간다.

편한 잠, 그리고 오랜 잠.

그 수면의 긴 복도에는 꿈들이 주저리 주저리 널려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천착해 보려 마음을 먹지만.

그런다고 내 꿈을 속속들이 이해할수 있겠으며 또한 그것들을 뜻데로 관리할수 있겠는가.


월요일.

가을 대기를 느끼지만 잔서는 아직 여름의 여운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17021 1993. 9. 14 (화)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으로 대법원장 사임, 검찰총장 사임.

김영삼의 개혁바람은 식을줄 모른다.

김영삼의 그 개혁의 칼춤이 아무런 복선없는 청청한 칼이어야 한다.


내 방.

간밤 비뿌려 축축한 대기의 냄새를 맡으며 나의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17022 1993. 9. 15 (수)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은 나이를 먹어서야 실감이 난다.

일주일이며 일개월이며 일년들.

군대말년 제대를 기다리는 그 1년과 지금의 1년의 길이는 결코 같지 아니하다.

콩알과 수박의 부피 차이.


이렇게 가속되는 시간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인간은 점점 급속도로 늙어가고 죽는 것.

네 젊었을 때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전도서의 말씀과 시편 곳곳에서 토로하는 인생의 덧없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청년이 아니다.

늙음을 의식할때만이 그 오의를 이해할수 있다.


17023 1993. 9. 16 (목)


절제없음을 恨함.

위장이 빵빵하도록 밥을 쑤셔 넣는다.

입맛이 당기면 뱃속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는 복부팽만감으로 숨을 씩씩거리며 거북해 한다.

절제없음.

미련이여! 통재로다.


도장시설의 방지시설 입고.

기천만원의 제품인데 조잡하기 그지없다.

한일환경 백사장에게 전화하였더니 그 친구 曰.

"쓰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지 않느냐?"

有口無言일 밖에!

이 나라 관료주의는 아직 요원할 뿐이다.


17024 1993. 9. 17 (금)


후덥지근한 날씨.

늘 여름은 후렴부분이 극성스럽다.

퇴근 무렵에는 빗방울 듣는다.


어머니께 가다.

彦이는 독서실에 가서 매일 새벽 1시나 되어서야 돌아 온다고.

彦이는 공부하는 체질인가 보다.


어머니, 형수와 이런저런 얘기들 나눈다.

종교, 신앙, 아버지....

어머니와 형수에게 피력한 무교회주의의 나의 예수.

그 예수는 나의 온 존재로 껴안는 개념인가.

위선과 허영은 분명아니건만.


교회란.

교회문화를 저어하는 것과 우찌무라간죠...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를까.


이제 늙고 왜소한 내 어머니...


아침 화장실 사용의 러시 아워.

세 부자녀의 출근과 등교.

내가 늦잠을 자버리면 혼잡하기 그지없다.

J의 교통정리가 필요 하건만.


17027 1993. 9. 20 (월)


존 아미엘 감독, 리처드 기어, 조디 포스터, 제임스 얼 죤스 출연한 '서머스비'

늘 동경해 오던 행복한 삶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으로서 기꺼이 교수형을 당하는 사나이.

남북전쟁후 남부의 농장을 배경으로 한 로맨티시즘.


로브 라이너 감독, 톰 크루즈, 잭 니콜슨, 데미 무어 출연의 '어 퓨 굿맨'

보수와 국수주의적 신념의 아집에 갇혀있는 사나이 제셒 대령, 열린 사고의 개방적인 변호사 톰 크루즈.

현실에서도 우리는 제셒대령을 여기저기서 볼수가 있다.

나 자신의 내부에도 제셒대령이 있는가하면 톰 크루즈 역시 존재한다.

법정 드라마의 재미.


꿈- 외계인에 사로잪힌 노예다. 나와 회사사람들.

제도, 전통, 순치되고 훈련되고 또는 세뇌되고...

광신이 되고.. 반면 웬지 싫고 역겹고 거부하여 증오하여 도전하고 쓰러지는...


월요일.

마음을 풍성하게 하소서.


17028 1993. 9. 21 (화)


아침저녁의 서늘함과 한낮의 텁텁한 무더위.

월요일의 회사는 요지경.

야 야 야들아. 바쁜 사람은 바쁜대로 살고, 한가한 사람은 노는대로 사아안다-


이동도서관에서 빌린 고원정의 대하소설 '빙벽'.

푹 빠져 읽고 있다.


가족.

서로에게 요구만 하고 베풂이 없다면 필경 충돌하게 마련.

이윽고는 눈이 벌개서 상대에게서 무엇을 빼앗고자 손톱을 세운다.

이런 J를 발견하고는 으스스한 소름이 돋는데.

이것은 역으로도 성립될 터.


새벽. 뱃고동 소리.

도우소서 이 荒凉한 관계.

주님.


17029 1993. 9. 22 (수)


이른바 GNP가 늘고 국민의식이 제고될수록 번지는 집단 이기주의.

끼리끼리 뭉처서 집단을 만든다.

한 집단에 속한 사람들끼리도 또 다른 집단 개념에서는 서로 적이 되기도 한다.

그 집단은 이익집단이다.

이익이라는 것은 죄다 유물론적이다.

모두 돈에 관련된 것이다.


NIMBY- NOT IN MY BACK YARD.

자본주의의 얼굴은 결코 이쁜 얼굴이 아니다.


17030 1993. 9. 23 (목)


조선소에 예술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FAT 진수이다.

수천톤의 거대한 쇳덩어리가 사뿐히 춤추듯 미끄러져 바다에 담기는 과정은 가슴 조이는 긴장을 동반한 뭉클한 감동이다.

SB-400 진수.

중국의 선주감독은 손을 내밀며 '콘그레츄레이션'을 연발한다.

KC원대리는 의외로 애를 많이 쓰고 있다.


추석이 임박하고, 이제 9월도 저물어 가는데 한낮의 무더위는 좀 심한 편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더위가 곡식을 영글게 하고 과일을 익게 한다.


17032 1993. 9. 25 (토)


옐친은 의회와 대립하여 강권을 행사한다.

서방국가와 협력하여 군을 장악하고 의회를 해산하여 내년 6월 조기 대통령선거를 하겠다고.

쏘련- 엄청난 변화.

불과 수년전만 해도 낫과 망치가 그려진 쏘련 국기는 금기의 그림이었는데.

그 쏘련기와 중공의 오성홍기가 회사의 게양되고, 중공국가가 울리는 가운데 중국배를 진수하고..


이제 통일이라는 말이 조금도 낯설지 않다.

통일은 닥아오고 있다.

통일.

그것은 내 지극히 사적인 의식 속에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북을 생각할 때 내 의식의 연고지는 오직 아버지 한사람에게 귀결되는 것.

그 아버지가 살아계실 가능성은 없지만.

한 사람의 슈에토 코뮤니스트에 불과한 아버지.

그 아버지의 행적을, 삶의 궤적을 흔적이나마 찾아 볼수 있을런가.


가을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라는데.

나의 그리운 사람은.

그 추상의 의미가 이제 실체의 아픔으로 닥아오는 아버지가 있었구나.


17033 1993. 9. 26 (일)


토요일 오후, 소주를 마시면서 俊이와 마루에 앉아서 英이 SEA SOUND 공연 녹화한 비디오를 본다.

젊음의 아름다움, 젊음은 눈부시게 어여쁘다.

그 어여쁜 젊음들이 더구나 음악을 하고 있다.

어찌 떨기 떨기 꽃들이 아니랴.

英이는 피아노에 플롯에 키보드로 반주를 전담하고 2부에서는 노래를 부른다.

I'LL BE THERE-

가창력도 뛰어나거니와 노래부르는 포즈도 어찌 그리 매력적인지.


彦이 와서 俊이와 제 방에서 밤샘 공부하고 늦잠 자는 일요일 아침.

나는 가을 뒷산을 오르려 한다.


17034 1993. 9. 27 (월)


산의 적요함, 그 적요 속에서 가만히 귀 귀울이면 온갖 산 것들의 부스럭거림이 들린다.

그런데 그 적요의 바로 코 밑까지 벌건 흙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고층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산을 오를때마다 못마땅한데.


곽재구의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읽는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히트 처서 그런지 그런 형식을 빌은 책이다.

일종의 문예 기행문.


여행- 낯선 고장, 한반도의 곳곳, 같은 모국어를 쓰는 그곳에는 또한 갖가지 사연들이 있고.

가을. 그리움, 여행...


부자유한 일상속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떠나지 못한다.

낯선 곳에서의 일상의 신변사의 생소한 경험은 불편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져 버리는 벌레습성...


그러나 진정 떠나고 싶다.

훌훌 털어버리고, 터벅터벅 낯선 남도의 어느 황톳길을 걷다가,하늘과 능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렇게 느끼고 싶다. 익숙치 않은 것들을.


17035 1993. 9. 28 (화)


내일부터 추석 연휴.

옛날 흰옷 입고 고상한 정신으로 맞이하였던 조선 백성의 명절.

이제는 천민자본주의의 속물시민들이 되어서 자동차를 타고서 길이 미어터지게 고향으로 향할 것이다.

그런데 속물인 그들에게는 고향이 있는데 더 지독한 속물인 내게는 그것이 없다.

어린 날의 이미지야 왜 없을까마는 그것이 고향의 이미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가위-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피붙이, 조상, 무덤..

피붙이들 옹기종기...

사무치게 그리운 그림.


17036 1993. 9. 29 (수)


연휴 전일의 어수선함.

선물 꾸러미들이 오가고, 구두표들이 슬쩍슬쩍 서랍 속으로 건내어 진다.

받는 쪽에서는 명절의 좋은 풍속이로다 하겠지만 납품업체 외주업체등 주는 입장에서는 구매부서, 영업부서, 생산부서등을 돌아다니며 '어휴, 끔찍한 명절이로다'할 것이다.


휘뿌윰하게 연휴의 첫날 밝는다.


온유와 평정과 의연함.

그리고 중심.

두 손 모두어 잡는다.


17037 1993. 9. 30 (목)


연휴 첫날, 잠시 시내나가 금강제화에서 티켓으로 가방 하나를 구입하고 돌아오는데 어찌 그리 무덥던지 땀에 옷이 쩍쩍 달라붙는다.


종일 고원정의 장편소설 '빙벽'에 빠져있다.

9권중 7권을 읽는중.

고원정은 남성적인 작가이다.

전체주의, 군사문화.

순치되고 아부하는 무리들.

또는 저항하여 무모한 도전을 꾀하는 무리들.


추석날 새벽.

'빙벽'과 연관된 꿈의 터널을 지나 깨어 일어난다.

목욕하고 여명의 바다를 내려다 본다.

비는 그쳤는데 하늘은 맑지 않다.


사도신경.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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