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47 1993. 7. 2 (금)
하고 싶은 것만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여자, 스물일곱의 늦깎이로 무용을 시작하여 세계적인 무용가가 된 여자, 하와이의 볼캐노의 정글 속에서 혼자 살아 갈수 있는 여자, 라즈니쉬의 제자였다는 여자, 홍신자.
그녀의 '자유를 위한 변명'을 읽는다.
그녀는 완벽한 자유를 획득하였을까?
묻건데, 홍신자여.
그대는 그 볼캐노의 정글 속에서 그대 일상의 디테일로부터도 완벽한 자유를 획득하였는가.
신선이 되지는 않았을게 아니냐.
똥누고, 생리대를 갈고, 섹스의 충동에 꿈틀대며, 혹은 모기의 비상음을 증오하면서...
그대는 정녕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였을 것 아니냐.
그대의 EGO는 언제라도 버릴 준비가 되어있느냐.
라즈니쉬가 이루어 보여 주는 자유는 예컨데 또 하나의 EGO라는 훈장이 아니더냐.
이토록 장황하게 푸념하는 까닭은 그 녀가 정말로 부럽기 때문이다.
英이, 새벽같이 묵직한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다.
英아, 산의 너그러운 웃음을 안고 오너라.
俊이 오늘부터 시험.
고개숙인 새벽.
내 EGO의 정체는.
16948 1993. 7. 3 (토)
장마는 한걸음 성큼 물러섰다.
바람 불어 한결 개운한 날씨.
英이의 지리산 산행 택일은 잘 한 것이다.
어제 천황봉에 올랐을 것이고, 오늘은 그 꿈의 능선 거대한 지리산을 걷고있을 것이다.
지리산- 언젠가 나도 그 거대한 품에 안겨 걸을수 있을까.
홍신자라는 여자의 치열한 삶.
굴레를 벗어 던지기 위한 구도의 길.
어떻게 그 여자는 그 구도의 길과 생활인의 길을 동시에 걸을수가 있었을까.
그녀가 획득하였다는 그 자유는 진짜배기 자유였을까.
16949 1993. 7. 4 (일)
어머니께 가다.
고여있는 물, 거기에는 기운차게 헤엄치는 잉어 한 마리 살고 있지를 않다.
과거의 유령만이 서성거리는가.
상승을 포기한 새, 날고자 하지 않는 새는 이미 새가 아니다.
어머니- 도식화된 관계의 의미만을 되씹는 칠십 훨씬 넘은 늙은이는 아픈 내 어머니다.
나는 자식의 눈으로서,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숨 찬 실존의 터널을 거쳐온 존재로서, 사십을 훨씬 넘은 사내의 눈으로서 어머니를 바라본다.
슬프고 아픈 나의 노파.
내 안에 있는 신선이여.
빼어 난 산수 속에 몸을 잠그고, 성염의 계절 그 푸르른 오르가즘의 함성에 휩싸인채 흐르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차거운 맥주의 거품을 마시는 신선 신선이여.
나는 이토록 자유치 못하는데, 내 안의 신선은 일락의 맥주를 마시는 것이다.
나의 주님은 어떤 도그마가 아니다.
어떤 윤리의 형식도 아니다.
그 분은 말씀하신다.
너 상헌아 자유하라고.
16950 1993. 7. 5 (월)
장마는 그친 것인지, 잠시의 소강상태인지.
英이의 지리산행은 날자를 그야말로 절묘하게 잡은 것이다.
푹푹 찌는 무더위도 아니고.
일요일 사무실 나가다.
꼬맹이 Sh씨 곁에 꺾다리 P상무 가 DOCK SIDE에 서서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그 되바라진 Sh씨의 독선적 포즈가 역겨워 회사를 빠져 나온다.
꿈- 안개낀 황톳길.
월요일 새벽, 목욕을 한후 화창한 7월의 바다를 내려다 본다.
오늘 英이 돌아오고 SB-398 예비 시운전.
16951 1993. 7. 6 (화)
월요일, 이제 노골적인 태업의 양상을 띠는 현장.
P상무는 이꼴 저꼴 보기 싫은 김에 내게다 잔득 일거리만 맡겨 놓고 시운전 승선하여 떠나 버린다.
맥그리거 HATCH COVER SYSTEM의 현물을 보려고 TUG BOAT타고 5부두로 가는 중의 부산항- 너무나 더러운 바닷물.
파도 너머 보이는 영도의 형상은 곳곳에 기형의 혹처럼 아파트가 솟아있고, 봉래산은 주변머리를 바짝 치깎인채 정수리 부근에만 푸른 빛을 띠고 있고 바다는 이토록 오염되어 있다.
얼마전 가 보았던 일본 사세보의 쓰지 중공업의 안벽.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바닷속에는 고기떼가 한가롭게 노닐고 있는 그 중공업 공장의 주변은 무슨 해변의 휴양지같은 풍경이었는데.
우리나라의 도시는 지금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후회할 것이다.
창조하신 자연에 대하여.
英이 어제 돌아오기로 하였으나 9시경 제 엄마에게 전화.
당초 계획은 천황봉-뱀사골-남해의 코스였으나, 내처 노고단까지 종주하였다고.
전라도 땅에서 전해오는 딸네미의 그 목소리는 씩씩하였다고.
지리산- 그 넓은 마음, 하나님이 만드신 그 자연의 마음을 얻어 돌아오너라.
신과의 교감.
도그마로서가 아닌 자연의 텔레파시.
16952 1993. 7. 7 (수)
일본소설 '挽歌'를 읽는다.
1940년대의 일본 젊은이들의 심리.
일본 작가들은 심리묘사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젊은 딸네미에 대한 노심초사는 진부한 부모짜리의 하릴없는 기우.
건강하고 씩씩하고 건전하게 英이는 돌아오다.
제 어미에게 들려주는 지리산 얘기.
재잘재잘.
16956 1993. 7. 11 (일)
SB-402의 진수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CEREMONY 순서만 남겨놓고 있는데, 선주사 사장이라는 사람은 김해공항의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착륙치 못하고 회항하는 바람에 참석할수 없다고, 진수를 연기해 버린다.
몰상식을 넘어선 파렴치의 부르조아이다.
오렌지족이라는 괴상망칙한 젊은이들.
지난밤 청와대의 지시로 한밤중 급습한 압구정동의 고급 쌀롱.
이상한 패션의 옷차림을 한 머슴애 계집애들.
한달 용돈이 3백,4백만원이고 승용자는 볼보2000이 보통이라나.
미처버린 헤돈의 사생아들.
16957 1993. 7. 12 (월)
기능직사원은 태업하고 관리직 사원들만으로 SB-402 진수작업을 한다.
전문 일꾼이 아닌 삼십여명의 높고 낮은 직급의 관리직 사원들은 오합지졸일시 분명하지만 그래도 힘들게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다.
진송회관에서 늦은 점심들과 맥주들을 먹고 마신다.
정호기과장의 천성적인 명랑함.
7월의 일요일은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나의 영혼을 돌봄은 이토록 미약하다.
강인한 욕망, 그것이 의지를 창출한다.
그런데 내게는 영혼의 고양을 향한, 하나님을 획득하고자하는 욕망이 결핍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쩌면 예정에 의한 것이 아닐수도 있다.
그 분을 향한 열정, 그 욕망으로서 그 분의 사랑을 쟁취할수도 있을 것이다.
또 월요일, 안개 안개 자욱한 안개.
16958 1993. 7. 13 (화)
JS봉이 이끄는 노조는 강경 일변도.
JS봉은 전 조합원을 휘어잡고 일사불란하게 이끌어 단결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잔업이 없으니 수입이 줄어드는 그것이 내부의 불만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회사측은 이런 불만이 단결을 깨뜨리는 상황을 노리고 짐짓 의연한척 느긋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변함없는 일사불란함에 어제부터 초조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작업자들을 족치고, 감시하고, 처벌하라고 노사문제에 있어서는 구조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현업 관리자들을 들볶기 시작한다.
월요일은 이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아득한 기분인데.
장마는 비를 쏟았다가 습기찬 무더위를 만들었다가 아침저녁으로는 짙은 안개 뭉치를 뭉게뭉게 뱉어내고 있다.
英이 지리산 사진들.
내 딸의 젊음이 어찌 어여쁘지 않으랴.
16959 1993. 7. 14 (수)
나는 아예 현장을 나가려 하지 않는다.
현장 사람들, 관리자나 근로자를 대할적 마다의 곤혹스러움이 싫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의 어느 쪽도 편들 수 없는, 언행에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은 말할수 없이 피곤한 노릇이다.
관리자들이라고 해서 사주에 대한 피해의식이 없을리 없으므로.
일본 호까이도 남쪽 서해안, 지진과 해일로 수백명 사망하였다고.
장마, 장마.
여름의 오르가즘은 장마에 덜미가 잡혀서 내습 유보중.
16960 1993. 7. 15 (목)
한낮에는 멀쩡하던 날씨가 퇴근 무렵 돌연 폭우가 내리 붓는다.
모두들 자신의 승용차로 휙휙 지나가는데 나는 한참을 오지않는 113번, 101-1번 버스를 기다리며 바짓가랑이가 폭삭 젖은채 서 있다.
정녕 승용차가 아쉬운 순간이었다.
목요일 아침.
비는 개이고 나는 고개를 숙여 두 손을 맞잡는다.
16961 1993. 7. 16 (금)
생산관리 소위원회.
대우조선, 대동조선, 타코마, 대동, 신아등에서 온 부차장들과 연구소의 KK철실장, KG대씨등 회의실에 둘러 앉다.
뜬 구름 잡는 얘기들.
똑같은 주제로서 몇탕씩 우려먹는 연구소, 그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는 머리 나쁜 사람들이 모였지만, 정곡을 밝혀 찌르지 않는 나의 교활 역시 그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회의마치고 6시경 하리 횟집으로.
생선회와 소주를 접대하고 노래방.
60넘은 김근철실장 까지 목청을 돋군다.
손님들 태종대호텔 묵게하고 JS영 과장, PY범과 함께 마무리 맥주를 마신다.
흐린 날씨이지만 비 듣을 기색은 없다.
16962 1993. 7. 17 (토)
'새롭게 하소서'
호스피스들의 간증.
죽어가는 환자들.
복수가 차서 누울수 없는 환자는 한번 누워보는 것이 죽기전의 소원이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병원의 천사 호스피스.
그들의 헌신과 봉사는 바로 그 환자들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함으로써의 결과일 뿐이다.
환자가 죽고나면 그 환자의 육체적인 통증부위가 그대로 호스피스의 육체의 고통으로 옮겨온다는 신비한 사실.
그리고 그들은 옮겨온 그 통증이 없어지지 말기를 기도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통증이 바로 사랑임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수 있는 능력.
나는 이 능력에 있어서는 진실로 유아와 같다.
16963 1993. 7. 18 (일)
침대에서의 게으름으로 아슴아슴 찾아오는 졸음.
아니면 TV- 드라마에 콧등이 시큰거리다가, 연예인들의 말장난과 엎어지고 자빠지는 모습에 낄낄거리다가, 때로 J와 俊이에게 도무지 남편이나 아비라는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피에로같은 몸짓이나 해보이다가.
이런 것들이 내 휴일, 집구석에서의 요즈음 행태이다.
정신은, 또 그 위의 영혼은 짐짓 "아니다, 이게 아니다. 나의 여가는 이런게 아니다"라고 하는데도.
아아, 이런 무위의 몸짓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당나귀를 당나귀의 정신으로서만 지배코자하는 의도는 내게는 결코 없음을 자부하고 있건만.
당나귀의 등허리에 채찍을 날리는 나의 자아는 이제 어디에 숨어있단 말인가.
노쇠한 정신, 늙는다는게 긴장을 거부하고 안일함에 몸을 맡긴다는 얘기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내 속에 있어서, 내가 그를 느낄수 있는 무엇은 결단코 그럴수없다고 항변하여.
나는 분열한다.
뵈는 것과 뵈지 않는 것으로.
꿈, 꿈 역시 이토록 진부하다.
TV의 화면이 칼라가 되었다가 흑백이 되었다가...
기도드리는.
시편1편.
16964 1993. 7. 19 (월)
TV영화, 'ACT OF LOVE' 우리말 제목은 '사랑의 총구'.
사고로 중상을 입어 목 아랫부분이 모두 망가져 버려 괴로워하는 형의 관자노리에 총을 발사해 안락사시킨 동생.
법정에 선 그가 1급살인이냐 무죄냐의 재판을 받는다.
폴란드 후손, 결속된 가족의 전통, 그 가정의 일원으로서의 가치관이, 미국이라는 사회적 가치판단을 기다리는 것이다.
안락사- 폴란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간적인 품위를 잃고서 괴로운 육신의 고통을 감당할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을 ,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를 죽일 수밖에 없는 산 사람의 의무와 같은 고통.
월요일, 모처럼 푸른 하늘 자락이 보이고, 신선한 바람 한줄기 불고 있다.
16965 1993. 7. 20 (화)
'객주 9'와 '만가'를 반납하고 에릭 시걸의 '하버드 동창생'과 '현대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빌리다.
거기에는 이문열의 수상작인 '시인과 도둑'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단편 역시 이문열적인 서걱거림이 여실하고, 그 문학상의 심사위원의 면면에는 하근찬이라는 작가가 끼어있어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
현장, 5시만 되면 어김없이 모여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상황은 여전하지만 그들의 전열은 많이 흐트러져 있다.
俊이 오늘부터 방학.
어제와 오늘은 가을처럼 선선하다.
기도.
그 분, 내 안에 계시는 그 분.
16966 1993. 7. 21 (수)
며칠째 선선한 바람이 불고 태양은 흡사 계절을 잊은 듯 그 열기를 숨긴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 것이냐.
삼복의 계절에 가을의 선선함을 느끼는 피부는 금새 의식을 작용하여 가을의 감상을 낳게 한다.
문화의 색깔에게 환경의 중요함, 그 중에서도 기후의 영향력은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대동조선 J부장 방문.
대동조선 내부적인 문제로서 안전무 사망후의 갈등구조로 부문별 생산성 문제를 규명키 위한 자료 요청.
俊이 방학.
방학중의 생활 원칙.
TV는 자네와 아무런 상관없는 물건이네.
아침에는 적어도 6시까지는 기상일세.
모든 방학숙제는 초장에 조져버려야 하네.
방학중에 게으른 당나귀를 단연 채찍으로 길들이지 않으면 그 당나귀라는 놈이 자네를 가지고 놀걸세.
16967 1993. 7. 22 (목)
현대문학상 후보작에서 오히려 수상작보다 마음을 치는 소설들을 만날 수 있다.
내가 들어서고 싶은 소설의 세계는?
내 소설의 대문이 삐걱하고 열리면..
안개가 자욱할까? 어스름의 어두움일까?
바람이 불어야 한다.
실루엣의 저택.
자, 얘깃거리, 이야기의 세상으로.
픽션이면서 결코 픽션이 아닌 그 세상.
어린 시절, 소설의 공기를 호흡했던 기억이 있으며 그 기억을 나는 사랑한다.
KH호 과장과 늦도록 마시다.
12시 넘어 귀가.
주님, 그 분의 영향력.
그 은은한 감싸임.
나는 그 감싸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16968 1993. 7. 23 (금)
노조의 잔업거부, 일과중의 태업으로 인한 손실금액을 산출.
부풀려서 27억으로 산출한다.
작성하는 나도 조금 우습다.
어제의 협상은 다소 긍정적인 무엇이 도출된 모양이다.
TV의 다큐멘타리 '요즈음 사람들'
처녀 버스 운전기사.
음악을 사랑하여 첼로의 레슨을 받으며 음악가를 꿈꾸고 있다.
뚱뚱한 몸매의 진솔한 말씨의 노처녀.
음악전공이 부잣집 딸네미의 혼숫감 정도로 생각하는 치들과는 격이 다른 진실하며 농밀한 진짜의 음악애호이다.
며칠째 가을 날씨.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태하지 않다.
그렇다.
16969 1993. 7. 24 (토)
한수산의 '사슬과 날개'를 읽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의 감동을 경험한 사람이 나 뿐이 아니었구나.
달콤하고 나른하면서도 격렬한 아름다움이 있고, 천국과 지옥의 야누스의 얼굴도 있으며, 성스러움과 퇴폐가 기묘한 조화를 만들고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세계.
일본에서는 그의 묘지에 끊임없이 참배객이 이어지고, 그의 탄생지는 그를 상품으로 한 관광지가 되어 있다고.
한수산이 얘기하고자 하는 다자이 오사무는 그에게 어떤 사슬이고 어떤 날개였는지.
CBS 늙은 목사의간증.
폣병과 중독된 자위행위를 벗어나고자 금강산 입산하여 어느 토굴 속 스승을 만나 성령의 불꽃을 받는다.
중독된 자위행위.
역시.
토요일.
바람불고 흐린 하늘.
전혀 여름같지가 않다.
16970 1993. 7. 25 (일)
토요일.
늦도록 GJ도 와 바둑을 두며 노사협상회의중인 P상무 가 마치고 나오기를 기다린다.
늦은 시각,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들어서는 P상무 .
결렬이다.
그동안 오불관언인 사장과 앞 뒤없이 날뛰는 위원장 사이를 쫓아 다니면서 어떻게든 타결하여 보려고 애 쓴 그에게는 위원장에 대한 배신감이 꽤 큰 모양이다.
쟁의신고, 고소 고발등 험한 소리도 서슴치 않는다.
일요일 새벽, 목욕하여 정신을 추스린다.
16971 1993. 7. 26 (월)
일요일, 사무실 들렀으나 그곳은 휑뎅그레 비어 있을 뿐이다.
俊이 아령 사려고 시내 나간다.
문우당 서점 들러 사고 싶은 책들에 눈도장을 찍어 둔다.
'나의 문화 유적 답사기'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한권, 박노해의 최근 시집, 그런데 일고 싶었던 '로자 룩셈부르그'는 눈에 띠지 않는다.
국제시장.
구석구석 살이의 현장에는 온갖 상품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옷가지, 가죽제품, 모자, 등산용구, 안경, 공구, 문구, 운동구, 완구, 가방, 음반, 전자제품....
살이에는 이토록 많은 물건들이 필요한 것이고, 이 물건들이 들고 나는 그것이 바로 경제이다.
저녁 무렵.
俊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워서.
네게는 아버지가 있다고, 그래서 너는 푸르러야 한다고...
16973 1993. 7. 28 (수)
노사협상- 실익은 멀리 둔 채 명분만이 앞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서로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 것이 협상일진데, 결국 서로에 대해서 갖고있는 감정과 선입관과의 협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회사측에서는 상대의 감정적인 발언에 발끈하여 쟁의발생 신고.
P상무 는 사장과 위원장 사이를 필사적으로 좁혀 보려고 저토록 애를 쓰고 있건만.
퇴근하여 모처럼 직원들과 회식.
아시아나 항공의 목포행 비행기.
산을 들이받고 추락.
60여명 사망하고 40여명은 생존하였다.
비행기가 추락하였는데 멀쩡하게 살아 난 사람들.
카오스 이론.
어떤 혼돈의 상황에서도 작용하는 법칙이 있다는.
16975 1993. 7. 30 (금)
종일 비 쏟아지다.
빗 속에서 소형조선소의 사람들 20여명 몰려온다.
옛 건설부 사무실에 대형 테이블을 붙여 놓고 음료와 다과를 준비시켜, 기획실에서 회사소개 차트를 빌려 걸어 놓고, 이른바 앞서 가는 조선소로서의 관리교육이라는걸 행한다.
선박연구소 KK철 실장과 GG대씨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자리이다.
오후 마치고나서 고마워하는 GG대씨의 뷔페 회식 초대를 간곡하게 물리친다.
태풍 퓌마는 일로 북상중에 있다고 하고 노동부 들어간 P상무 는 돌아오지 않고 있어, 조기 H부장과 조선 Y부장은 대기 상태이나 나는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요즘 유행하는 MAGIC EYE라는 그림들.
두 눈의 초점을 어긋나게 하고 한참을 주시하면 슬며시 떠오르는 입체적인 그림.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이런 현상과 방법을 알고 있어서 혼자 즐기고 있던 터.
천장의 무늬들을 떠오르게 하여 입체의 현란한 그림을 즐기고 있었고 남들은 이런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유행이다.
태풍은 지나갔는지.
평온한 바다와 하늘.
하리 방파제- 밤새 고기잡고 새벽 포구로 줄지어 들어오는 고깃배들.
야근하여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어떤 어부 가장.
16976 1993. 7. 31 (토)
휴가 전일.
늦은 시각, 결국 노동위원회에 가서 노사협상 타결되다.
기세를 죽이고 결국 백기를 들고 싸인을 한 위원장 JS봉.
무경험의 무모함으로 회사나 노조원은 큰 대가를 치루었다.
태풍 퍼시는 바람 한점 흘리지 않고 비껴가고, 파란 하늘에 태양이 이글거리는 본격적인 더위.
바야흐로 여름은 기지개를 켠다.
어쨌든 느긋한 한가함이다. 오늘부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