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93. 8

카지모도 2016. 6. 2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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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7 1993. 8. 1 (일)


휴가 첫날의 게으름.


다자이 오사무.

<가을, 잠자리 투명하다>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

쓰가루, 아이모리... 가나기.

<나는 열아홉에 그의 '사양'을 처음 읽었고 그리고 스물 넷에 그를 떠났습니다>

<태어나서 미안해요>

다자이 오사무가 살았던 거리가 있다. 그곳은 소설의 거리 가나기...


초저녁부터 누워 잠들다.

꿈- 안사장등 회사사람들, 테니스, 활쏘기.

여비가 떨어진 서울거리, 손철수, 목욕탕.

나선 곳이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서울 거리거리와 서울 사람사람들...

오랜 수면만큼, 그간의 회색수면의 미진함을 청산한다.


휴가 이틀째.

새벽 목욕을하고 겨울나그네를 듣고 시편을 읽는다.

두 손을 모은다.


밖은 아개가 자욱하다.


16979 1993. 8. 3 (화)


어제 英이와 둘이서 시내를 돌아 다닌다.

국제시장, 지하상가를 돌면서 내 옷가지와 俊이 옷가지와 책 몇권을 사고, 만두를 먹고 수박덩이와 빵과 맥주를 사가지고 돌아온다.

커뮤니케이션- 아무리 가차운 제 핏줄끼리라도 부딪쳐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英이를 많이 이해하였고 英이 또한 아빠를 많이 이해하였을 것이다.

말없이 마음을 읽어내는 이심전심이란 도닦는 스님들이나 가능하다.


비디오 '환생'을 보다.

흑백의 과거영상과 현재의 칼라영상으로 컨트라스트를 이루며 정교하게 만든 추리극.

환생-허황된 주제이지만 드라마의 재미는 쏠쏠하다.


16980 1993. 8. 4 (수)


어제 J와 태종대를 걷는다.

넓적다리를 드러내고 어깨를 노출시켜 벌거 벗다시피 한 옷차림의 젊은이들.

순환도로 가에는 서울 인천 전남등 번호판이 붙은 차량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그런 젊음 속을 중늙은이 가시버시는 호젓이 걷는다.

비는 이슬처럼 흩뿌리고.


태종대를 나서서 둘이서는 시내로 나간다.

용문각 중국집 마주앉아서 양장피와 고량주를 마시고, 俊이 5KG 아령을 겨우 구하여 돌아온다.

俊이에게 5KG의 아령은 너무 무거울텐데.


유홍준 '나의 문화 유적 답사기'

우리나라 국토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들.

그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은 알아보는 눈에게만 보인다.


늙어서 J와 함께 우리나라 산하 여기저기를 슬슬 돌아 다니는 행복한 상상.

돌과 나무와 탑과 절- 그 사연을 알고 아름다움을 깨달을수 있도록 안목을 길러야 함을 느끼게 하는 이 책은 참으로 좋은 책이다.


16981 1993. 8. 5 (목)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흠뻑 빨려들어간다.

해박한 지식과 훌륭한 글솜씨.

문화유산에 대한 열정과 인간적인 성실함이 깃들어 있는 글들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나는 늘 여행을 꿈꾸고 있는데 여행에서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낯선 고장에 대한 호기심, 낯선 풍광 속에 그저 잠기고 싶다는 소녀적 센티멘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적인 호기심과 깊은 심미안을 가지고 그 낯선 대상에 접근할 때 여행의 재미는 진정 빛을 발할 것이다.


정조시대 '유한전'이라는 문인이 石農 金光國의 수장품에 붙였다는 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말인가.


이 명언은 내 부박해 빠진 신앙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 모든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오의를 볼수 있을 것이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5일 휴가후 첫출근의 새벽.

간밤 꿈 속에서는 온갖 골동품들이 등장하였다.


16982 1993. 8. 6 (금)


휴가 끝난후의 첫날.

아니나 다를까, 이제부터 공정을 다그치기 시작한다.


올 더위는 아직까지 복병으로 어디에 숨어 있는지, 흡사 가을날씨같은 아침저녁.


英이 자동차 면허 필기시험.

제 시간에 대지 못하여 시험을 치루지 못하였다고.

수산대학에서 덕포 시험장까지 2시간30분이 걸렸다나.

J와 같이 걱정하는바 "누굴 닮아서 저토록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지?"

혹은 또 미역국을 먹고 제 딴에는 부끄러워서 거짓뿌렁을 하는 것인지.


16983 1993. 8. 7 (토)


기능직 사원의 임금사정.

너무 오래 P/C 앞에 앉아 있었더니 늦은 오후가 되자 눈의 극심한 피로.

작년부터의 급격한 老眼 현상의 주범중 하나는 바로 P/C 의 모니터일 것이다.

작업을 마치고난 사무실에는 모두 퇴근하여 아무도 없다.

허겁지겁 택시타고 돌아온다.

가야 할 시간 빈 곳에 홀로 남아 있을 때의 그 이상스런 초조감.

무섭기도 하고.


내일이면 이른 네번째 어머니 생신.

오늘 저녁 내 식솔들 끌고 뵈려한다.


새벽, 목욕을 마치고 베토벤의 첼로소나타를 얹는다.

언제 들어도 정겨운 1번.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는 깊이가 있다기보다는 정다웁다.


아우성치는 바람소리.

고개를 숙인다.


16984 1993. 8. 8 (일)


비 추근추근 내리는 토요일.


저녁 어머니께.

이제 호호 할머니가 되어 주저리 주저리 엮어 내시는 옛 얘기들.

노파.

어머니.

세월은 갔지만 옛말은 남아....


일요일, 비는 그쳤지만 날씨는 흐리다.


16986 1993. 8. 10 (화)


A급 태풍 로빈.

밤새 으르렁거리고 나는 비몽사몽을 헤맨다.

회색 睡眠.

비바람 소리에 깨어 일어난 머리 속은 한없이 무겁다.

화장실에 들어 앉아 있으려니까 정전이 되어 버린다.

암흑의 공간, 거센 태풍의 몸짓.

목욕탕에 촛불 켜 목욕한다.


도무지 밖의 태풍상황을 알수 없는 답답함.

몇번이나 부탁하였는데 라디오 하나 제대로 배려못하는 俊이에게 신경질을 부리니까 녀석 또한 아비에게 맞고함을 지른다.


일상사의 디테일은 이토록 답답하고 아득한데 태풍은 천군만마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달려온다.


16987 1993. 8. 11 (수)


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면서 땅위로 기어 오르려는 바다.

늠실거리며 솟구치더니 거세게 외판을 때리는 괴력의 파도.

깊은 곳 누군가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살아있는 짐승들.

바람은 이미 바람이 아니고 마구 휘둘러대는 미친년의 머리카락이다.

빗줄기는 채찍이 되어 우의를 뒤집어 쓰고 빼꼼히 노출된 얼굴과 안경을 때린다.

안벽의 FENDER에 찢어질 듯 비벼대는 TUG BOAT의 외판은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댄다.

태풍은 그렇게 한바탕 카니발을 벌인다.


태풍 로빈은 10시를 고비로 동해로 빠져 나간다.

오후 들자 거짓말같은 고요함이 천지를 지배한다.


이제부터 늦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16988 1993. 8. 12 (목)


태풍으로 날라간 2공장 내업공장의 지붕이 민가의 지붕을 덮쳐서 파손되고 방진망들은 온통 찢겨 너덜너덜.

다소의 태풍 피해가 발생하였다.


짖푸른 하늘에서 태양은 이글이글.

여름은 이제서야 얼굴을 내밀었다.

현장은 저토록 더웁지만 그러나 냉방이 잘 된 사무실은 춥기까지 하다.


김동리, 손소희, 서영은의 삼각구도를 생각한다.

남녀관계를 아무리 고상한 정신적인 것으로 치장을 할지라도 그 근원의 본질은 성적인 것이다.

이렇게 단정지은 사람은 내가 아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고령의 나이에 소녀를 사랑하여 자살하고 괴테의 노년의 사랑...

그것 역시 성적인 것 이상 그 무엇도 아니다.


16989 1993. 8. 13 (금)


英이 2학년 1학기 성적, 여전히 형편없다.

문제는 학점이 아니다.

각성이 없는 그 사고방식, 공부에 대한 자극을 느끼지 않는 그 사고방식이 문제이다.

부모의 잔소리를 고집스레 거부하는 英이.

제 인생에 대하여 어떠한 확고한 신념도 갖고있는 것이 아니면서.

그냥 기타치고 노래부르며 히히덕거리는 즐거움만이 지배하는 대학생활.


김영삼식 기습.

금융실명제.


또 비 내린다.


16990 1993. 8. 14 (토)


후덥지근한 날.

HB대, NS호의 을종 인사위원회.

총무부장의 독선은 제 상전 Sh씨를 닮아 자심하거니와, 총무상무나 다른 위원들의 병신스러움이 돋보이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俊이는 오늘, 미국에서 나온 지석이 아버지가 데리고 지석이와 함께 서생으로 캠핑을 떠난다.

비가 그쳐 다행이다.


금융실명제.

무슨 혁명이라도 난 듯이 법석인데 나와 같은 프로레타리아들이야 무슨 아랑곳일까.


16993 1993. 8. 17 (화)


俊이 돌아오다.

조금 살갗을 태운건가.

2박3일을 바닷가에서 보냈으면서 도무지 재잘댈줄 모르는 아들 녀석.

즐거웠기는 하였던 모양인데.


며칠전 노가리 가시에 찔린 손가락.

이런 것이 생인손인지.

요만한 아픔- 죽기 전에 한번 누워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환자의 아픔도 있는데 요따위 생인손의 아픔에 쩔쩔매는 어린애.


오늘 J의 생일.

어느덧 오십고개를 함께 걷고있는 아내.

해로하게 하소서.

감사와 기쁨과 긍정의 여생을 주소서.


또 비 흩뿌리는 아침.

올 여름은 참 무던히도 비가 내린다.


내 방에 앉아 기도.


16994 1993. 8. 18 (수)


출근길에는 비 내리다가 한낮에는 폭염.


부서장회의에서 오가는 대화는 유치한 수준의 정치만담.


위원장 JS봉 내 책상옆 찾아와 재심의키로 한 HB도, JS봉 선처를 호소한다.


J의 생일.

모처럼 J, 아이들과 외식의 저녁을 먹는다.

하리 횟집.


생머리 단정하게 빗고, 반듯한 이마에 선연한 눈썹, 자그마한 입술과 커다란 눈망울의 英이는 이토록 어여쁘고.

사춘기의 괴퍅함 까지도 어딘가 비범해 보이고 마른것 같지만 강단있어 보이는 俊이.

이를 감사하지 않을텐가.


16996 1993. 8. 20 (금)


한일환경 공장장 들어오다.

실용성없는 비산먼지 방지시설.

이것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법정비품이다.

이 따위에 몇천만원을 투자해야 하는데 문민정부에서도 이런 형식적인 관료주의가 횡행하고 있다니.

황산성이라는 환경처장관은 폼만 잡을줄 알았지 무능하기 짝이 없다.


부산, 특히 영도지역 버스의 횡포.

배차시간은 중구난방이고 난폭운전에 불친절.

일본에서는 정류장마다 시간표까지 붙어있는데.


비는 개이다.


16997 1993. 8. 21 (토)


SB-385 공시운전 마치다.

잔말공사는 계속되는 궂은 날씨 때문에 질척거리기만 하다.


꿈- WS규, PS곤 , JN영 , KH근 .

서면의 어느 다방, 구석자리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국민학생 또레의 깡패가 제 자리라고 우기는데 나는 나이를 믿고 그를 점잖게 나무란다.

그는 복수에 불타는 증오의 눈길로 나를 흘기고는 딴 자리의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나를 노려본다.

성규등 친구들이 나와서 둘러앉아있으나 나는 잔득 겁에 질려있다.

그런데 그 꼬마 깡패녀석이 내게 다가와 칼을 꺼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순간 돌연 비몽사몽의 꿈 속에 무엇이 번쩍 하고 스친다.


번개.

곧 우르릉하는 천둥소리.

새벽4시다.

또 비가 쏟아지고 있다.


목욕을 하고.

베란다 창문넘어 회색바다가 자욱히 누워있다.

토마스 아 캠피스를 소리내어 읽으며 바람소리 빗소리 파묻힌채 고개를 숙인다.


"사악한 욕정에서 나를 구해 주시고, 내 마음의 온갖 무절제한 감정에서 벗어나도록 치료해 주소서" -토마스 아 캠피스-


16998 1993. 8. 22 (일)


꿈-

무슨 제삿날인데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와 주희 주영이등 사촌동생들도 와 있다.

부엌에서는 함안댁과 애순이가 제사음식을 만들고.

이윽고 제사가 끝났다.

갑자기 장면은 쇠락한 보생의원이다.

그리고 어머니.

천장에는 거미줄이 가득하고 마루는 삐걱거린다.

나는 아랫방으로 들어서는데 어둡고 음산한 방구석 침대 위에 어머니가 여윈 모습으로 누워있다.

나는 어머니에게 몸을 굽히고 어머니는 내게 입을 맞춘다.

그런데 어머니의 숨결에서는 시취가 역겹게 풍기고 있다.

나는 양팔로 종이장처럼 가벼운 어머니를 들어 올린다.

아랫방으로 사촌동생들이 들어오자 내게 안긴 어머니는 명랑하게 말한다.

"얘들아. 우리 어디가서 맛있는거 사먹으면서 기분 좀 내자"

조금전 시취를 풍기던 어머니가 아니다.


어제 대입 수학능력시험 해설집 사서 俊이에게 준다.

이제부터 출제방식이 바뀌어 암기위주가 아닌 논리,사고,추리력에 중점을 둔다는 출제방향은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이 과연 俊이에게는 유리한가 불리한가.

이것이 문제로다.


16999 1993. 8. 23 (월)


일요일의 사무실.

오후 GJ도와 바둑.

하수끼리의 대국은 호승심만이 기승을 부리는 형편없는 바둑.


오후 돌아와 마루에 앉아서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창너머 바다를 바라본다.


만일 저 창너머로 바다가 아니라 우람한 산이 보인다면 어떨까.

산과 바다, 바다와 산.

樂山知者 樂海勇者.


그러나 느끼건데 산은 긍정의 정서이고 바다는 허무의 정서다.

어쩌면 그 이미지는 바다는 방기하여 자기를 내다 버리는 것이고 산은 자기를 찾아주는 무엇..

산을 즐겨야겠다.


英이는 친구와 수영장.

俊이가 한달 내 끄적인 방학숙제라는게 고작 16절지 4장 분량이다.

방학초에 그토록 당부하였건만.


비는 개이고, 월요일이다.

두 손 모두어 잡는다.


17000 1993. 8. 24 (화)


17000일, 끝자리가 천단위로 딱 끊어지는 날.

나날이 창조되는 삶과 나날이 소모되는 삶이 있을진데.

사람의 일생이란 변증법이 아니다.

나는 오늘 일만칠천일째를 살고 있다.


英이는 어제부터 개강하였으나 9월6일 공연준비랍시고 어제부터의 귀가시간은 10시다.

2학기부터 심기일전의 의지를 말로서는 과시하지만 부모에게 하는 임기응변의 약속이 아니기를.


장모님 고혈압 통원치료중.

이제 앞의 세대는 쇠락하고 있다.


늦여름은 숨가쁘게 마지막 고개를 넘고있다.

어제가 처서.


17001 1993. 8. 25 (수)


PS곤 , KH근 , JN영 이 만나서 대취.

PS곤 은 가게를 그만두고 대만에 촬영 다녀와 지리산에 묵새겼다하고, JN영 은 초읍 어느 학원의 부원장으로 부임하고, KH근 은 나름대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그러나 술마시며 부리는 객기들은 너나 나나 모두 다소는 유치하고 자기과시적 측면 또한 없지 아니하다.


사십을 훨씬 넘어선 늙다리들의 자의식은 감정을 방탕하게 하는가.


17003 1993. 8. 27 (금)


어제도 온종일 비내리다.

강우량 120 MM, 정말 올 여름은 쉴새없이 비가 내리누나.


俊이 개학하여 이틀째 등고.

英이는 SEA SOUND 공연 연습으로 매일 10시 넘어 귀가.


아이들, 내 아이들.

무언가 잘 되어야 할텐데....

무언가.. 무언가... 그 모호한 추상의 그림들.

무언가, 무언가라니.

이토록 철학부재의 아비짜리, 신념없는 부모짜리.

그저 두 손 싹싹 부비며 염불하는 기복신앙의 노친네.

비옵니다. 비옵니다. 그저 내 새끼들 잘 되게 하소서.. 잘 되게 하소서..


아, 모처럼 맑게 갠 하늘.

햇살 찬란하다.


17004 1993. 8. 28 (토)


F/D 수리공사를 집행한 화신기업의 370만원 기성처리문제.

좀 찜찜하였으나 P상무 도 AGREE하여 결재를 올렸더니, 웬걸 Sh씨의 호통.

그 화통같은 고함소리는 이 곳에서 녹을 얻어먹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혼비백산 하게 마련.

전무실에 불려가 호되게 당하다. 인격을 깡그리 짓밟히는 욕지거리와 함께.


17006 1993. 8. 30 (월)


일요일, 늦여름의 열기.

오전 잠시 사무실 들렀다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 빌려 돌아오다.


마루에 앉아서 소주를 홀짝이며 보는 드라큐라.

코폴라답지 않은 졸작이다.

운명에 거역하는 증오의 화신으로서 드라큐라를 만들었 좋았을 터인데 군더더기가 너무 많고, 흡혈이라는 관념론에 너무 얽매여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찬 마루에 등을 붙이고 누워서 눈을 감는다.

창 밖에서 틈입하는 숲의 냄새.


기억의 숲을 헤치면.

그 곳에서 잃어버린 보석처럼 진귀한 냄새들을 찾아낼수 있다.

정능의 어느 골목.

한밤중의 술레잡기, 땅에 엎드려 숨어 있으면서 맡았던 흙냄새의 향그로움을 맡는다.

모기장 속을 들추고 들어가면 모기장 특유의 석유비슷한 냄새와 그 안온한 잠자리의 느낌도 하나의 냄새로서 맡을수 있다,

아아, 기억. 기억들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어서 그 보석같았던 순간순간들을 냄새로서 끄집어 내어 모자이크를 만들어 내 생명을 다시 찬란하게 인식할수 있었으면.


월요일 새벽.

개짖는 소리, 덤프트럭의 부르릉거리는 소리.

가만히 귀 기울이면 정적 속에는 무수한 소리들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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