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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38)

공배는 휘적하게 일어나며 공배네한테 말했다. 밤바람이 어둡고 습한 자락을 쓸며 거멍굴 틈바구니마다 들어차, 벌써 바깥은 짓눌리게 검었다. 웬만하면 구름이 있어도 달빛을 아주 막지는 못하여 희미하게나마 발밑에 비추어질 보름 근처련만, 성난 구름장이 얼마나 두텁고 무겁길래, 이렇게 달 없는 밤보다 더 캄캄할까. 공배는 이 어둠 속에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쓸어 내리는 낯바닥에 눈물이 번진다. 애민 놈 저테 베락맞는다드니 니가 그짝 났구나. 아 왜 허도 안헌 투장을 너보고 했을랑가도 모른다고 무작정 끄집어야 했다냐. 당골네 푸네기 저테 섰다가 무단히 너부텀 잽힌 거인디, 모난 독(돌)이라 정을 맞은 거이냐 어쩌냐 시방. 모질게도 내리쳐서 병신되야 불지 알고 내가 기양 애간장이 다 녹아 부렀그..

혼불 7권 (37)

이제 오늘 밤 삼경이면 영영 살어서는 다시 보기 힘들지도 모르는 것으로 황아장수 뒤 딸리어 보내야 하는 여식을 두고, 시집가면 낫는단말 당키나 한 일인가. 차라리 강실이가 문중에서 몰매를 맞고 덕석말이 피투성이가 되는 한이 있어도, 온 동네 조리를 돌며 귀때기에 화살을 꽂은 채 회술레를 당하는 한이 있어도, 어미가 저 불쌍한 새끼를 끼고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러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만 같았다. 상처는 싸매면 되고, 수치와 모욕은 견디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 기구하게 찢어내는 생이별이라니. 아무리 달래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비도의 경위가 뱃 속의 아이처럼 짐작조차 못하게 감추어져, 길 아닌 길로 일생 동안 강실이를 헤매게 할 그 까닭을 끝내 어미는 모르는 채, 오직 쫓아내듯 멀리 아주 보내..

혼불 7권 (36)

그러므로 "자식은 어린아이 때 잘 가르쳐야 하고, 부녀자는 처음 시집왔을 때 잘 가르쳐야 한다."고도 그는 말하였다. 그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말이었다 . "투기를 잘하는 부인은 집안에 있는 첩을 투기할 뿐만 아니라, 남이 첩을 두었다는 말만 들어도 그의 부인을 대신하여 투기를 하니, 어찌 그리도 방약무인, 기고만장한가." 예로부터 포악하고 독살스러운 여인은 얼마든지 있었던 모양인지, 이덕무는 경계를 멈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성이 나서 그 노여움을 죄 없는 아들딸한테 옮겨, 마구 때리고 쥐어박고, 그릇을 내어던져 부수고, 창호를 찢어 뜯어내는 등, 거칠고 사나운 행동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악독한 부녀자가 아니고 무엇이랴." "성품이 악독한 부녀자는, 시아버지나 시어머..

혼불 7권 (35)

"하이고오, 오지랖도 넓구라. 삼천 리가 좁겄네. 삼생을 넘나들게. 참내. 나 좀 보시겨. 전생 이생 내생이 머 그렇게 복잡헌 거인지 아능게빈디, 내 눈에 다 뵈이는 거이여, 그게. 왜 그런지 알어? 부모는 내 전생이고 이 몸뗑이는 나 사는 이생이고요잉? 내생은 바로 자식이여. 자식. 그렇게 생각허먼 간단허잖에에? 긍게 그, 좀 낫겄는 내생을 봉출이한테서 보라 그 말이여, 내 말은." 옹구네는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아낙이었다. 눈동자 검은 알맹이가 데구르르 구를 때마다 거기 사물이 부딪쳐, 딱, 수리를 내거나, 가느소롬 눈꼬리 좁히며 깎은 손톱 낚싯바늘을 세우면, 남의 눈에 좀체로 뜨이지 않을 속내 비늘까지도 착, 낚아챌 수 있는 것이 옹구네라고나 할까. 그런 그네의 성정머리를 아는지라 이쪽 사람이..

혼불 7권 (34)

10. 이 피를 갚으리라.  피걸레가 다 되어 널부러진 만동이와 백단이를 질질질 끌어내 솟을 대문 바깥에다 동댕이치고는, 왕소금을 쫙 뿌려 버린 노복들이 어금니 무겁게 돌아서는 이기채의 사랑마당에, 두 사람 끄집힌 핏자국이 대빗자루로 쓸고 간 자국처럼 음산하고 쓸쓸한 기운으로 차갑게 남았다. 흐린 날이 저무는 잿빛 땅거미를 빨아들이는 탓인가, 그 참혹한 자취는 마치 검은 비명의 갈포가 갈갈이 찢긴 흔적인 양 귀살스러운 흑적색을 띠고 있었다. 넋이 나가 우두망찰, 정신이 공중에 뜬 아랫것들이 아직도 질린 낯색을 거두지 못한 채 두 손을 맞잡은 그대로 식은땀을 쥐고만 있는데 "멋들 히여? 후딱후딱 치우제. 수악허그만." 구부정한 안서방이 헛간에서 사납게 닳아진 대빗자루를 찾아들고 나와, 얼른 달려들라는 ..

혼불 7권 (33)

그런데 방에서 나온 것은 여자가 아닌가. "아는 사램일 거이요." "아는 사람? 누구간디?" 공배네는 다소 안심을 한 듯 마당이랄 것도 없는 마당으로 그제서야 들어선다. 그러나 황아장수는, 아까 누구냐고 댓바람에 묻는 소리 들을 때보다 더 화들짝 놀라, 마중이나 하듯이 이만큼 고샅께까지 밀고 나와 공배네 들어서는 걸음을 막는다. "아이고, 나는 또 누구라고?" 가까이 다가온 황아장수 아낙을 알아본 공배네가 팔짱을 꽂아 끼며 이제 아주 마음을 놓은 소리로 말한다. "근디 웬일이여? 여그서 자고 갈라고 들옹 거잉가?" "어차피 어디서 자든 나는 매마찬가징게로. 아는 집이라 기양." "빌어먹을 노무 예펜네." "잉?" "아니 자개말고 옹구네 말이여. 나그네끄장 있는 년이 집 비우고 그 지랄을 허고 헐레벌레..

혼불 7권 (32)

바싹 눈을 구멍에 들이대고 유심히 유심히 방안을 더듬어 보자니까, 어두워서 무엇이 보여야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사람 형상 분명헌 것이 나란히 누워는 있지만, 자세히는 안 보여. 방안에 자던 사람이 무심코 눈을 뜨고 보았더라면 놀라서 소리를 지르드레, 먹장 같은 어둠 속 문짝에서 시어머니 눈알만 번들번들, 용을 쓰고 기어이 이 비밀 실마리를 캐내고 말겠다는 눈빛이니 그랬겄지, 그 눈에 불을 쓰고 살펴보았더니만, 이건 참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네. 이게 웬일이라냐. 며느리는 자기 품에 전실자식을 안고 자고, 제 자식을 내팽개쳐 문간에서 꼬부린 잠을 자고 있지 않는가. 그걸 누가 믿어? "내가 잘못 봤을 테지. 바꿔 봤을 테지." 허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도 절대로 잘못 본 것이 아니었어. 몇 번이나 고..

혼불 7권 (31)

어느 하루 아무 까닭도 없이 앓기 시작하던 애기엄마가 끝내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말았구나.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한하리요. "니가 인제 나중에 얼마나 울라고 그렇게 웃냐." 귀신이 시기를 했던 모양이지. 그래서 옛날부텀도 복이 너무 차면 쏟아진다고, 항상 어느 한 구석은 허름한 듯 부족한 듯 모자라게 두어야 한다 했니라. 천석꾼 만석꾼 부잣집에서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대궐마냥 덩실하니 짓는 거야 당연할 일이겠지만, 대문만은 집채 규모에 당치않게 허술하거나 아담 조그맣게 세웠고, 작명을 할 때 또한 사방 팔방이 복으로만 복으로만 숨통이 막힐 만큼 꽉 차게 짓지는 않는단다. 지나치면 터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든. 그리서 부부 금슬이 유난히 좋아 떨어질 줄을 모르면 예전 어른..

혼불 7권 (30)

9. 암눈비앗  일월성신 천지신명이시여. 이런 세상이 있으리이까. 귀신은 밝으시어 모르는 일 없다 하옵더이다. 내 어찌 살리이까. 내 이제 어찌 살아야 하오리아까.  세상에 나서 집 바깥이라고는 동네 새암터에도 나가 본 일 없으리만큼, 살구나무 토담 안에 숨은 듯 있는 듯 감추어져, 아침 이내 아지랑이 아옥하게 어리는 숨결로 자라온 작은아씨, 지나가는 눈빛조차 함부로 쏘이지 않은 부들의 속털같이 여리고 가벼웁고 흰 몸 애기씨, 가장 멀리 간 나들이라면 오로지 대문 밖 한울타리나 다름 없었던 큰집이 다였던 강실이는, 지금 비 먹은 구름이 달빛을 무겁게 삼킨 음 이월 밤의 명치끝이 결리어 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 가슴뼈 아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 명치. 명문이라고도 하고 심와라고도 하는 이 급소..

혼불 7권 (29)

만동이 백단이는 죽은 사람 멩당 쓰니라고 애썼지만, 나는 산 사람 멩당을 시방 썼제. 좌춘복이 우강실이로 내가 청룡 백호를 삼고, 인자 두고 봐라, 우리 집 안방 아랫목이 연화도수 멩당자리 꽃 벌디끼 벌어지게 허고 말 거잉게. 내 손아구 양손에다 동아줄 칭칭 매서. 내 허란 대로 느그는 살 수밖이 없도록이 맨들고 말랑게. 그럴라고 내가, 지 발로 걸어나가는 시앗을 꽃가매 태우디끼 등짝에 다 뫼셔서 업어온 거이여. 시앗? 그렇제. 시앗이제. 니가 내 서방인디, 저년은 시앗이제 그럼. 비록 느그가 찬물 갖춰 육리 올리고 귀영머리 마주 푼대도 순서는 순서여. 나는 절대로 내 밥 안 뺏길 텡게. 춘복이 너, 열 지집 거나리는 것은 내가 너를 호걸로 쳐서 바 준다고 해도, 내 밥그릇에 밥 덜어낼 생각은 꿈에도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