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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8)

강실이를 눕히며 오류골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이야 물론 그 끔찍 참변의 "태맥."이란 소리 들었을 때 이미 다 글러 버린 것이었지만, 새끼 낳은 어미의짐승 같은 본능으로, 어떻게든, 이 다 떨어진 치맛자락으로 가리고 감추어서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무마해 볼 수는 없을까, 가련한 방책을 찾아보려 한 것이 사실이었다. 반가의 부녀로 이러한 일 당하여서 더러운 목숨 부지해 보겠다고 눈알 굴리는 것이, 능욕보다 더 욕된 일인 것을 그네가 모를 리 있으리야. 비록 반가의 여인 아니라 할지라도, 조선의 강토가 난 아녀자, 노류장화 창기라면 모르겠거니와 그 어느 누구라서 몸을 더럽히고 살기를 꿈꾸리오. 더욱이나 이처럼 서릿발 돋는 가문에서 아직 시집도 안 간 규방의 처녀로, 종조모 상중에 아이를 배었다니. 아이를..

혼불 7권 (7)

사랑에서 허락이 내려, 청암부인을 모시어 배행하고 온 것이 바로 부인의 청암 친정댁에 누대로 세습되어 내려오는 씨종의 씨, 사노 순구, 안서방이었다. 그의 어미는 평생에 아들 셋과 딸 일곱을 낳아 상전에게 바쳤는데, 안서방은 그네의 아홉번째 소생으로, 무엇보다 그 성품이 정직하여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의 눈을 기이는 일이 없었다.그리고 부지런하였다. "내, 가장 믿을 만한 종을 너한테 주노니, 부모의 정 한 점을 떼어 다숩게 지니고 가거라. 너도 잘 알겠지만, 종이란 종모법에 의해서 그 신분이 어미를 따라가는 것 아니냐? 허니, 네가 순구를 잘 눈여겨 보고 있다가 너한테 공이 많거든, 노비 아닌 양민의 처자를 애써 구해서 짝을 지어 주면, 그 자식 대에는 면천을 할 수 있으리라." "명심하겠습니다." 청암..

혼불 7권 (6)

2. 죄 많으신 그대  "작은아씨." 드디어 제방에 오른 안서방네가 그만 두말 더 할 것도 없이 덮쳐들어 강실이 허리를 휘어감고 쓰러지자, 강실이는 검불 하나 꺾이듯 안서방네 팔에 허리가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등뒤에서 또아리 감아안고, 그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쏟았다. 찐득하고 뜨거운 눈물이었다. 오죽허시겄소. 오죽이나 허시겄소. 그렇지만 생목숨인디. 아아, 죄 많으신 생목숨인디. 너무나 가엾고, 애처롭고, 그러나 도무지 비천한 자신의 처지로는 무엇 하나 어떻게도 해 줄 힘도 없어 한없이 안타까운 강실이를 부여안은 안서방네는, 오직, 그네의 목숨만은 어떻게든 건져야 한다고 믿어. 절대로 이 팔을 풀지 않으리라. 족쇄로 조이는 것이었다. 혼비하여 달려온 끝이라 제 정..

혼불 7권 (5)

"그런데 순간 장군이 깜짝 놀랐지. 아무리 불빛 아래지만, 나비보다 고운 눈썹 위의 희고 맑은 이마에 칼자국이 날카롭고 선명하게 드러나 섬찟했거든. 아니 누가 이런 못된 짓을 했단 말이요. 아깝고 참혹해라. 연유를 말해 보시오." 장군이 칼자국 까닭을 물었다. "저는 잘 모르는 일이오나, 저의 유모 말씀이, 어느 하루, 해 저무는 봄날, 버들이 푸르고 꾀꼬리 울어 꽃이 피는가 구경을 하려고, 등에다 저를 업고 대문 밖에 나섰다가, 웬 스님 한 분을 만나셨더랍니다. 그 스님이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포대기에 싸인 애기 저를 일부러 들여다보며, 이 아이가 장차 자라서, 나라를 구한 장상의 아내가 될 것이니 곱게 잘 기르라, 하시더랍니다. 황송하고 기꺼워서 유모가 합장하고 서 있자니, 웬 무장 하나가 스..

혼불 7권 (4)

그런데 그 머리 땋은 모양새나 댕기 물린 맵시, 그리고 낭자머니 비녀 지른 뒷태는 사람마다 달랐으며, 다른 만큼 흉도 되고 허물도 되고, 태깔이 하도 기품 있고 고와서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망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하였다. "사람은 누구라도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실해야 한다. " "살고 난 뒷자리도 마찬가지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앞에서 보면 그럴듯해도 돌아선 뒷태가 이상하게 무너진 듯 허전한 사람은, 그 인생이 미덥고 실하지 못하다. "고도 하였다. 앞모습은 꾸밀 수도 있으마 뒷모습만큼은 타고난다는 뜻도 있으리라. "사람 귀천은 뒤꼭지에 달려 있느니." "뒷모습은 숨길 수가 없다. " 또 그렇게도 말했다. 이는 관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상이 불여후상이라."고 하여, 사람의..

혼불 7권 (3)

"네가 다시는 똑같은 일로 두 번 말을 안 들을 자신이 있을 때까지 남이 알까 두려우니, 이 골방에서, 문도 열지 말고 옴짝도 말고 틀어앉어 곰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봐라. 과연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를. 사람이 사소한 일을 우습게 알면 결국 큰일을 그르치게 되는 법이다. 네가 이 버릇 하나 바로잡지 못하면서 자식을 낳아 기른다면 영웅 호걸 효자 열녀는 그만두고 삼동네 천덕꾸러기 만들기 딱 알맞지. 또 네 손에 밥 얻어먹고 옷 얻어입는 네 남편은 무엇이 되리요." 며느리는 선비가 머리에 정자관을 높이 세워 받쳐 쓰듯이,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며 버선 두 짝을 겹쳐 꿰어 거꾸로 쓰고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버릇만은 고쳐졌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의 우직하고 민첩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인지, 그 뒤로..

혼불 7권 (2)

"아니, 너, 그 치맛자락 좀 들어올려 봐라." 기겁을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 발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라자, 새각시는 아무 생각 없이 두 손으로 다홍치마 양자락을 잡고 버선발이 드러나게 들어올렸다. "너 그게 버선이냐 쌀자루냐." 외씨같이 좁고 곱게, 흰 이처럼 드러나야 할 새각시 수줍은 버선발은 아닌게 아니라 펑퍼짐하고 야문 데 없이 헤벌어져 있었다. 그나마 수눅을 서로 왼쪽 오른쪽 뒤바꾸어 신고 있었으니. "아이고, 나, 이런 일이 어떻게 있다냐. 너 그러고 어디 가서, 이 집 며느리요오,입도 뻥끗 하지 마라. 대관절 너 어느 것 어느 댁에서 살다가 시집온 애기씨냐아. 응? 내가 아무래도 큰 실수 했는가 보다. 성씨 보고, 가문 보고, 집안간에 오가는 말 나무랄 데가 없어서 흔연 성례했더니만, ..

혼불 7권 (1)

혼불 7권  1. 검은 너울  "무릇 남자가 여자 같은 기질이 많으면 혹은 간사하고 혹은 연약해서 요사스러운 짓을 많이 하고, 여자가 남자 같은 기질이 많으면 혹은 사납고 혹은 잔인해서 일찍 과부가 되는 사람이 많아, 본디의 음양 풍수가 서로 뒤집히고, 명수가 각각 어그러지기 쉽다고 했느니." 그것이 어느 해 정초였던가, 청암부인은 큰방에 그득히 모여 않은 문중의 부인들과 담소하며 그렇게 말했었다. 며느리 율촌댁이 담옥색 명주 저고리에 물 고운 남빛 끝동을 달아 자주 고름 길게 늘인데다 농남색 치마를 전아하게 부풀리고 단정히 앉아 시어머니 청암부인을 가까이 모신 좌우에 담황색 저고리, 등록색 치마, 진자주 깃 고름에 삼회장 저고리, 짙고 푸른 치마에 담청색 은은한 저고리며 북청색 치마에 녹두 저고리, ..

혼불 6권 (52. 完)

"다 해도 죽인다는 말은 마시오. 부모 말이 문서라는데.""문서 아니면 저년이 살어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만 알고 나만 알고 감쪽같이 숨겨질 일이라면 나도 귀신을 꾀어서라도 감추어 보고 싶지마는, 그렇게 될 일이 아니잖은가 말이오. 벌서 우리말고도 진의원이 아는데다, 그 입은 또 어떻게든지 막어 본다 허드라도 저 배를 어쩔 것인가. 저 배를"거기까지 말하던 기응이, 다시 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가누지 못하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갑자기 아까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처참한 배신감에 휩사인 그의 턱이 덜덜 떨린다. 그의 전신을 뒤집으며 어오르는 것이 증오인지. 억울함인지, 원통함인지, 그는 가릴 수가 없었다. 그 뒤범벅을 모조리 뒤집어쓰고도 다른 말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오욕스러움이 기응을 사로..

혼불 6권 (51)

""앵두네?"기표는 칼침 꽂는 음성으로 안서방네 말을 다잡아 되받았다."갔다가 기양 저물엇그만이요.""참 한가한 사람이로구만. 오늘 저녁에 집안 우환이 있었는가 보든데. 무슨 정신에 아랫몰까지 마실을 다닐 수 있는고? 암만 종이라고 심정 스는 것이 그래 가지고서야."기표는 못박는 소리를 뱉었다. 그럴 것까지는 없었으나 일부러 그처럼 모진 말을 한 것은, 혹 그 말을 듣고 욱성이 치밀어 억울한 김에 어떤 엉뚱한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린 일침이었다. 아무래도 안서방네 기색이 어디 한들한들 마실 갔다 오는 사람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또 안서방네는 그렇게 밤 이슥한 시각에 삼경이 가깝도록 놀러 다니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는 처지여서 기표는 내심 수상쩍게 생각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