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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30)

카지모도 2024. 12. 18.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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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암눈비앗

 

일월성신 천지신명이시여.

이런 세상이 있으리이까.

귀신은 밝으시어 모르는 일 없다 하옵더이다.

내 어찌 살리이까.

내 이제 어찌 살아야 하오리아까.

 

세상에 나서 집 바깥이라고는 동네 새암터에도 나가 본 일 없으리만큼, 살구

나무 토담 안에 숨은 듯 있는 듯 감추어져, 아침 이내 아지랑이 아옥하게 어리

는 숨결로 자라온 작은아씨, 지나가는 눈빛조차 함부로 쏘이지 않은 부들의 속

털같이 여리고 가벼웁고 흰 몸 애기씨, 가장 멀리 간 나들이라면 오로지 대문

밖 한울타리나 다름 없었던 큰집이 다였던 강실이는, 지금 비 먹은 구름이 달빛

을 무겁게 삼킨 음 이월 밤의 명치끝이 결리어 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

가슴뼈 아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 명치. 명문이라고도 하고 심와라고

도 하는 이 급소의 복심에, 거꾸로 박힌 뼈다귀처럼 결리는 숨을 강실이는 토하

지도 삭이지도 못하며 참고 있는 것이다.

대관절 이곳은 어디일까.

어둠 속에 눈을 뜬 강실이한테 무참히 끼쳐든 것은 생전 처음 맞닥뜨린 낯설

음의 스산하고 살천스러운 기운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마셔 본 일 없었던 서투른 공기가, 들다 만 먹물처럼 서걱

서걱 스산하게 떠 있는 방 천장과 바람벽 구석지는 음충들이 뭉친 현상으로 얼

룩이 져 시커먼데.

이불도 낯설고 베개도 낯설다.

그리고 옆에서 들리는 숨소리도 낯설었다.

그것은 어머니 오류골댁의 것이 아니었다.

봄에는 봄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가을과 겨울에는 또 그 철대로 오류골댁한

테서는, 늘 낯익어 저절로 번지는 어머니만의 어머니 냄새가 묻어나 강실이를

에워싸고 있었다.

묵은 겨울의 삭은 잿빛 주저리를 벗기며 한쪽부터 수줍게 트이는 봄빛이, 아

직은 얼른 나서지 못한 채 처마끝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초가지붕 짚시울에

엉겨 있던 눈이 녹아 탐방 탐방 떨어지는 물 소리를 신호로, 오류골댁은 겨우내

덮었던 이불과 요의 호청을 뜯어 칼칼히 빨아 냈다.

먼 데 산 줄기와 굽이를 담채 붓갈피로 지우면서 누가 눈치 못체게 다가온 봄

이 이제는 가차이 노적봉에까지 스미어, 솔빛이며, 나뭇잎 다 깎아 버렸던 삭모

의 겨울가지 날카로운 끄트머리에 아슴한 연두 물빛 돌면, 간짓대 받쳐 세운 빨

랫줄에는 두두두둑, 투둑, 물방울 떨어지는 호청이 희고 눈부신 휘장처럼 펼쳐져

널리었다.

"봄은, 먼 산에 아지랑이 언덕 위에 풀빛으로도 오지마는 부지런한 아낙네의

호청 빨래 정갈하고 한가로운 낙수 소리로 오느니."

한사 남평 이징의는, 이른봄의 얇은 종이 같은 박지 햇볕을 함뿍 빨아들여 온

마당 가득히 하얗게 채우는 호청을 부시게 바라보며, 남평댁한테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이불이란 본시 꿈을 덮고 자는 것이라. 옷보다 곱고 깨끗해야지. 단정한 조선

으 부인들은 반상간에 일생동안 남편과 자식들 꿈자리 보살피는 것을, 무엇하고

도 바꿀 수 없는 소명으로 알고, 정성되이 챙기며 살아오잖어? 깨끗한 잠이 깨

끗한 꿈을 부르거든. 대저 꿈이란 형체도 잡히지 않는 것이 몸 사는 생시를 지

배한단 말이야. 그러니, 꿈자리 사납게 하는 것이 바로 악덕 아니라고?"

그렇게 말한 일도 있었다.

더러운 잠, 더러운 꿈.

구겨진 잠, 구져진 꿈.

그런 사특의 못되고 나쁜 꿈과 잠을 몰아내려고, 검정 무명 이불에도 깃은 그

리 선홍으로 붉으며, 베갯모의 모란과 국화 매화 까치 무늬는 그리 벙글어지고,

구름에 노니는 홍학은 흐르듯 날아가게 수놓는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공들여 꿰맨 이부자리도 겨울울 나고 나면 풀기 눅어 후줄근해

지고 만다. 그 때묻어 눅눅해진 무명의 올과 올 사이를 바늘같이 차갑게 찌르는

이른 봄의 개울물, 얼음 섞인 춘수로 헹구어 내는 손가락은 물에 불고 시려서

붉었다.

그런 날의 오류골댁한테는 개운하고 맑은 물내가 났었다.

긴 긴 겨울의 찌든 때를 흐르는 봄물에 말끔히 다 씻어내고 온몸에 새 물 머

금은 무명천 냄새도.

그러다가 오월 단오 초닷새가 성큼, 싱그러운 초목이 물살로 풀리어 천지에

넘실거리며 일렁일렁일 무렵, 초여름 방죽가에 모독모독 무더기로 무리져서, 초

록 칼잎 가운데 꽃대를 뽑아 올려 피어나는 연노랑 나울진 꽃, 투명한 창호의

화사하고도 연연 그윽한 자태라니.

설 추석이 연중에 가장 큰 명절이지만 양기가 천지에 가득 찬 날이라 그 못지

않은 가절이 단오날이었다. 수리 천중절 수릿날이라 하는 이날이면, 동네 남자들

은 모래밭에 씨름대회를 하고, 여자들은 하늘 높이 그네뛰기를 하여 온퉁 흥겹

고 즐거운 중에 무엇보다,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흥건히 적시어 감아내던 어머

니의 검은 머릿단에서 풍겨 오던 향기. 무어라고 하기 어려운.

"자, 강실아, 이리 오니라."

오류골댁은 창포 뿌리 깎은 비녀 끝에 새빨간 주사를 꼭 찍어 강실이 귀밑에

다 곱게 꽂아 주고는, 기응의 상투에도 아담하게 꽂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

흰뿌리 창포비녀를 자신의 낭자머리 동그란 쪽에도 꽂았는데.

주사는 벽사라,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치는 육방정계광물이니, 이 창포잠 꼭

지에 찍힌 붉은 점 선명한 빛깔이, 일년 횡액과 온갖 못된 작해를 막아 주기 바

라는 습속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검은빛이 많이 바래어 윤기가 가시었지만, 어머니 오류골댁 머릿결

에 감돌던 오월은 신비로웠다. 강실이가 아직 나이 어린 계집아이였을 적, 단오

날의 물머리에서 풍기던 창포 향기와 주사의 신괴한 방향이 문득 강실이의 명치

를 친다. 주사의 냄새가 이상하게도 은밀히 남모르는 어둠을 품고 있었기 때문

일까.

불길한 것을 모두 없애 버린다는 뜻으로 주사 글씨 벽사문을 지어 문위에 붙

이던 '천중적부' 부적은 일신의 몸에 침노하는 병도 모두 물리쳐 준다고 하였건만.

가내 화평 수호의 부적을 붙이고 난 오류골댁은 마당에 조랑조랑 다닥다닥 꽃

핀 듯이 열린 앵두를 따서 앵두화채를 만들었고, 앵두편과 증편을 쪄 큰댁에 보

낸 다음 손님들한테 대접하며 웃고 놀았다.

"단오날 정오에 캔 약쑥 익모추가 제일 좋지. 약효가 그만이라."

하며 들에 나가 어울려 캐 온 약쑥과 익모초를 헛간 옆구리 그늘에다 널어 말리

던 어머니. 오류골댁 손과 저고리 배래 그리고 치마폭에서는 쌉싸하고 상긋한

풀내가 났다 .

익모초.

암눈비앗.

이름 그대로 부인들, 특히나 산모와 어머니를 이롭게 하는 이 월년생 초본 두

해살이 풀은 네모난 줄기와 부드러운 순, 꽃, 잎, 열매 모두 하나도 버릴 것 없

이 약으로 쓰이었다.

침침하여 어두운 눈을 밝게 해 주고, 여인의 경맥을 조절해 주며, 피를 활발히

돌게 하며 정혈을 돕는데다가 부종에 잘 듣고, 만성맹장염이나 유방의 염증, 그

리고 대하증과 신장 이뇨에 유용하게 쓰이는 이 익모초는, 젖몸살과 산전산후혈

자궁출혈 자궁수축 같은 부인병에 없어서는 안되는 약재였다.

또 이는 여인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며, 이 약을 환으로 지어 장복하면, 생리

불순으로 아기 가지지 못한 부인이 임신을 하게 된다 하였다.

꽃에 꿀이 많아 벌떼들이 잉잉거리며 하루 종일 맴도는 꿀풀이면서도 그 생즙

은 독하리만큼 썼다. 오죽해야 '익모초 쓴맛'이라 하리. 그러나 그 쓴맛이 밥맛을

끌어당기니 묘한 일이어서, 한여름 폭염에 시달리느라고 입맛이 떨어지면 기응

은 확독에다 시퍼렇게 찧어낸 익모초 생즙을 한 대접씩 벌컥벌컥 마시곤 하였다.

"유월 유두날 익모초를 먹으면 더위를 안 탄단다. "

습기가 많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들판이나 밭두둑 혹은 울타리밑, 가리지 않고

우불하게 자라는 익모초를 뽑아 찧어 오류골댁은 동글동글 끝도 없이 환을 짓곤

하였다. 녹두알만씩 한 환약을 만들어 두는 것이다. 또 익모초즙을 불에 달여 엿

처럼 만들어 먹기도 했었다.

그래서 여름날의 무명옷 올 사이로는 익모초 진초록 쓴맛이 쌉쏘롬히 배어들

어, 오류골댁이 소매를 들어올리거나 슥 옆으로 지나칠 때, 또 가까이 다가 앉을

때면 냇내처럼 그 쓴내가 흩어졌다.

익모...

그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에이어 강실이는 우욱 치미는 울음을 삼킨다. 무

성하게 자라난 기둥줄기에 길죽길죽 붙은 잎사귀들의 잎꼭지 겨드랑이마다 층층

으로 몇 개씩 돌려 달린 홍자색 꽃. 그 꽃 이름 익모초 암눈비앗이 아니라, 그러

다만

"익모."

라는 말이 그토록 그네를 에이게 하였던 것이다.

오뉴월의 조선 천지 그 어느 곳에나 흔하디 흔하게 우거지는 풀포기 한자락은

그 타고난 성분으로 세상의 산부와 어머니들을 이롭게 하건마는, 남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이날까지 자라며 무엇 하나 어머니한테 이로운 일 해 드리지 못한 태,

이제 이다지도 참혹 극통한 못을 깊이 깊이 박고는, 차마 뒤도 제대로 돌아볼

수 없는 불효 여식이 되어 이제는 영영 어머니 냄새를 여의고 만 강실이 가슴

밑바닥이 쩌억 벌어진다.

아아.

동굴의 아가리같이 벌어지는 가슴뼈가 숨도 못 쉬게 아파와 손으로 누르면서,

옆으로 좀 돌아누우면 그나마 덜할까, 아물려 보려 하였으나, 그네한테는 이미

그만한 힘이 없었다.

어머니.

비명 대신 부르짖어 부르는 이름은 어머니였다.

나 좀 잡어 주어요.

제 가슴 벌어진 아가리, 나락의 아득한 검은 구덩이로 까무러지려는

제몸을 버팅기며 강실이는 어머니를 간절히 부른다. 어머니의 넝쿨이 그네를 휘

감아 붙잡아 주기 탄원한다.

"강실아, 내가 옛날이야기 하나 해 주랴?"

그것이 언제쯤이었던가.

저무는 어느 날 저녁 등잔불 밝힐 무렵, 모녀 마주앉아 심지를 고르며 들려

주던 오류골댁 음성에 강실이는 안간힘으로 매달린다.

"전에 전에 말이다. "

어떤 사람이 있었더란다.

홀어머니 한 분 모시고 그날 그날 순박하게 살아가는 총각이, 아침이면 산에

가 나무 해 오고,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새끼 꼬면서 그럭저럭 살림살이 따숩

게 일구어갔더래. 동네 마실도 댕김서. 품앗이도 허고. 그러다 보니 이엉 올린

곳간에다 나름대로 먹을 만치 양식 가마니도 들여놓고, 엄동설한에도 땔나무 걱

정은 안허게 허리 펴고 살게 되었겄다. 이제는 장가를 가야겄지? 얌전허고 마음

씨 고운 처자한테로.

그래 하루는 참말로 장가를 들었구나. 동네 사람이 건넛마을까지 가서 중신

애비 노릇 잘하고 데려온 큰애기였대. 얼굴도 투덕투덕 볼 만한데다가 부지런한

큰애기라, 시집와서도 달랑달랑 쉬잖허고 몸을 놀려 논 매고 밭 매고 삼시 세

끼 지극공양 더운 진지 해 드리니, 시어머니 마음에 참 마땅허셨더란다.

부녀자 행실로 그만하면 삼강오륜이 다 쓸데없고 여교 명감이 무색한 것이지

무어.

더더욱이나 이쁜 며느리 이쁜 짓 허느라고 시집온 지 한 해 만에, 애터지게

할 것도 없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터억 순산했다지 뭐냐.

예전에 들은 말인데 어떤 누가 그랬다더라.

허는 짓마다 그렇게 하래도 생각이 안 나서 못하게끔 미운 짓만 골라 골라 가

며 하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하도 미움을 받는지라 제 딴에도 서러웠던지 기껏

궁리를 해서 이쁨을 좀 받아 보려고 꾸민 노릇이, 아이고, 우스워라,으스름 달밤

에 삿갓을 들러 쓰고 헛간 모퉁이에서 불쑥 나서며, 시어머니한테 허는 말이

"이래도 안 이뻐라우?"

히히히.

혀를 내밀고 웃으니, 사람이 얼마나 놀랬겄느냐.

마침 콩타작을 할 때였던가, 마당에 자빠진 도리깨를 집어들고 헛간으로 들어

가려던 시어머니가 그냥 간이 떨어질 뻔해서 겁김에

"에라이, 망종아."

하고는 삿갓에 대고 도리깨를 내리쳐 벼락을 냈다는구나.

사람이 이쁜 짓 허기가 그렇게 어려운 법이니라. 이쁨받기도 어려운 일이고,

그런데 이 각시는 그렇게 옴쏙옴쏙 밥 먹는 것까지 이뻤던가부드라. 수북 수북

히 꼬깔 봉우리로 퍼다 먹는 숟가락질이 아까운 게 아니라. 그레 복숟가락으로

뵈이더래.

"사람 사는 복이 이런 것이로구나."

애기아버지가 된 총각이 하도 좋아서 나무 하러 갈라고 지게를 지다말고 그만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다 얼굴을 묻고 혼자 웃었단다. 아무도 못 보게. 행여라도

누가 보면 복 달어날까 봐. 귀신이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웃은 것이 죄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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