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별똥별
"긍게 아들 둬야네, 아들. 아들이 효자가 많에. 만고에 심쳉이 같은 효녀도 없는
것은 아닌디."
"머 엄동 시안에 객광시럽게 잉어 먹고 잪다, 죽순 먹고 잪다, 그러는 노부모 봉
양헌 이얘기? 나 맨날 그른 이얘기 들으먼 웃음이 나오등만. 충신 날라먼 나라
가 어지러야고, 효자가 날라먼 부모가 노망을 해야겄드랑게. 거 어디 맨정신 갖
꼬야 북풍한설 때 아닌 눈 속으서 그렁거 잡어다 도라, 캐 오니라, 허겄다고? 망
령이 나서 물색 없이 보채는 부모가 있어야 죽고 살고 해다 디리는 자식도 생기
제. 심봉사만 해도 그거이 어디 보통 속없는 늙은이여?"
"그게 아니라, 한겨울 잉어 죽순도 쉽든 않지마는 그보담 더 알짜 효자는 따로
있제."
"무신?"
"다리 놔 준 효자."
"아, 순창 한다리?"
"하아. 원래 거그 옹천골 냇물에는 다리가 없었다그덩. 기양 물이여. 냇갈. 그렁
게 누구라도 그 물을 건넬라면 보선 빼고 정갱이 걷고 징검 징검 맨발로 건네얀
단 말이여. 근디 시방은 넓적넓적헌 독이 여러 개 조옥 백혔지, 그게 바로 한 효
자가 논 다리, 한다리여. 한 백 년 되얐지 아매."
"그 동안에 큰물 한번도 안 났었등게비? 떠내리가도 안허고 시방끄장 그대로 있
게."
"아, 효심이 박은 독인디? 지심에 가 백힌 뿌랭이를 비 조께 온다고 뽑을 수 있
간디?"
"앗다 그리여이. 그렁게 한씨 성 효자가 논 다리라고 한다랑가?"
"아니제. 그거는 찰 한짜 한다리라. 차다, 그말이여. 춥다."
"추워? 추운 다리여, 긍게?"
"그것도 다 사연이 있어. 내력 없는 이름이 어디 었겄능가?"
딸내미 앵두가 바가지에 담아 내온 찐 강냉이를 낱알로 뜯어 한 개씩 입 속에
던져 놓으며 임서방이 말했다. 멍석에 웅긋중긋 앉은 사람들 머리 위로 앵앵거
리며 날아들던 물것들이, 매캐한 생쑥 모깃불에 쫒기어 밀려난다. 머리가 벗어지
게 약오른 여름 해의 긴긴 뙤약볕 아래 살이 익어 벌겋게 타도록 엎드려 일하다
가, 그 해가 서산 노적봉 너머로 넘어가면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일어서, 저무는
밭머리와 논두렁에 자우룩이 내려앉는 땅거미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럴
때면, 어스름에 잠겨드는 저녁 지붕 위로 솔가지 때는 푸른 연기가 이내같이 흩
어져 오르고, 주황의 아궁이에서 탁, 타닥, 불꽃튀는 소리가 고샅에까지 들리는
데, 그 소리에 놀란 듯 흰 박꽃이 깜짝깜짝 피어났다. 울타리에서 딴 호박나물에
가지 쪄서 무친 보시기 놓고, 풋고추 숭숭 썰어 양념한 간장으로 보리밥 한 그
릇을 비벼 먹은 뒤, 털럭거리는 부채 하나 손에 들고는 으레 임서방네 마당으로
마실을 오는 것은, 아랫몰에 사는 타성 몇집의 정해진 일거리였다. 여름에는 밤
이 짧고 낮일이 고되어서 그저 잠이 보약이지마는,
"나는 귀가 보배고 다리가 재산이라."
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답게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는지 오밀조밀 알고 있
는 이야기가 많았고, 또 한가지를 들으면 마치 제 눈으로 열 가지를 직접 본 것
같이 실갑나게 말하는 것이 그의 큰 재주인 임서방네 멍석에 둘러앉아, 두어 땀
노는 재미도 단 밥맛 못지 않았다.
"대갓집 사랑에는 이얘기 해 주고 밥값허는 식객도 있다든디, 자네도 어디가서
밥 굶든 안허겄네. 외나 쌀밥 줄래 보리밥 줄래 그러제."
사람들은 간혹 그런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임서방은 저와 제 식솔들의 목구멍을
먹여 살리는 일에는 오직 자기 손과 다리만을 믿었다.
"그런 소리 말어라. 사당패 지집이냐, 재주로 밥을 얻어먹게? 재주는 기양 재주
고. 그걸로 너와 나 모다 질거우면 다 된 거이제. 밥은 일을 해서 먹고 살어야 실
헌 거이여. 다리품 한 걸음에 밥 한 숟구락, 다리품 두 걸음에 밥 두 숟구락. 틀
려 본 일이 없어, 그 계산이. 하늘이 쪼개져도 발 개고 앉어서는 내 목구녁에 풀
칠 못허는 거잉게."
그래서 그는 제 발 떼지 않고 공으로 얻은 것도 없었지만, 그 대신 무단히 헛걸
음을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 다리가 재산이라고 할 만하였다.
"저 순창 옹천골, 옥천동이라고도 허지. 거그 한씨 효자가 살었는디 마음이 천심
이여. 에레서부텀도 부모라면 지극 봉양을 허고 챙기는디, 하룻날은 즈그 아부지
가 득병을 해서 얼마 있다 기양 죽어 번졌네. 늙도 젊도 안헌 불로불소지년의
즈그 어머이를 냉게 놓고 돌아가세 부렀어. 느닷없이 혼자 되야뿐 즈그 어머이
가 적막 강산에 절벽을 앞에 논 사람맹이로 시름없이 하루하루 지내는디, 저그
저 옹천골서 서쪽으로 광주, 담양 가는 쪽에 강천사란 절이 있어, 계곡이 구비구
비 아조 조오체, 그 절에 중이 어찌 언제부턴가 즈그 어머이를 보고 댕긴단 말
이여. 보러와. 꽃 피는 봄이고, 비 오는 여름이고, 낙엽 지는 가을이고. 등에다
바랑지고 오는디, 강천사서 옹천골을 올라면 꼭 그 냇물을 건네야네이. 발 벗고.
그거이 삼시에는 갠찮지만, 동지 섣달 엄동 설한에 올 적으는 그 물 건네기가
어디 쉬운 일잉가. 다리가 없잉게. 물은 건네야겄고, 벨 수 없이 보선 벗고, 바지
걷고, 칼로 싹 비어 내게 아푼 찬물에 맨발 당구고는 철벅철벅 건네얄 거 아니
라고? 발이 얼어 붙제, 얼어붙어. 그렁게 밤중에 그러고 와. 그럴 때 효자가 못
본 디끼 자는 디끼 기철을 안 내고 가만히 있으면, 중이 즈그 어머이를 보듬고
는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와들와들 떰서 아이고, 추워라, 아이고, 추워라. 그러고,
즈그 어머이는 중의 다리가 몸에 다먼 얼음뎅이맹이로 시렁게는, 아이고, 차구
라, 차이고, 차구라, 서럽게 그래. 이 소리를 들은 효자가 곰곰이 생각다가 아무
도 모르게 하룻밤에 한 개씩 그 무겁고 큰 독을 업어다가 징검다리를 놨제. 중
이 댕기기 쉬우라고, 찬 물에 보선 빼고 발 적시는 일 없게 댕기라고, 마른 발로
오라고. 중의 발이 시리먼 즈그 어머이 설움이 시링게. 그래서 그걸 한다리라고
그래. 지금도 그렇게 불러."
"하, 거 참."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깃불을 헤집어 곰방대에 담뱃불을 붙이던 어서방이 말끝을
찼다.
"그게 효불효교네 그려. 즈그 어머이한테는 그런 눈물 나는 효가 없겄고, 즈그
아부지한테는 또 그런 야속한 불효가 없겄는디?"
그 말에 임서방은 대답 대신 웃으면서 다 뜯어먹은 강냉이 깡탱이를 강아지한테
던져 주었다. 실속 없는 먹이를 냉큼 물고 꼬랑지를 흔들며, 누가 빼앗기나 하는
것처럼 울타리 밑으로 달아난 강아지는, 어둠 속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붉은 좁
쌀꽃이 까칠하게 돋아 핀 여뀌풀 더미 아래로 가, 무슨 고기 껴다귀 가지고 놀
듯이 주둥이를 흙바닥에 비비며 뒹굴었다. 그 옆에는 저녁에 피어나는 분꽃이
아까울 것 없이 흐드러져, 분홍 꽃은 먹물 머금은 검은 빛으로 더욱 어둡고, 흰
꽃은 하도 희어 얼핏 섬찟하기조차 한데, 그것은 캄캄한 밤의 한 귀퉁이가 흰
너울을 쓰고 있는 것같이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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