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804

혼불 7권 (18)

벌써 몇 번이나 물은 말이었지만 그때마다 강실이는 눈감은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에미가 남이냐. 니가 살인 죄인이 되었다 허드라도 나는 에미고, 너는 내 새끼지, 에미한테도 말 못허는 그 속이 오죽이나 상했으면 사람이 이 지경이 된단 말이냐.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을 나는 모르고, 그저 니가 약헌가, 약헌가만 했었지. 언제부텀 무슨 일이 생겨서 누구허고 어쨌는지, 이 세상에 나라도 알고 있으면 니가 좀 덜 무섭지 않겄냐. 아가." 오류골댁의 눈물 맺힌 말에, 강실이는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혹시 이 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싶어 오류골댁은 숨을 죽이고 강실이 입시울을 더듬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실이는 들이쉰 숨을 여리고 길게 내뿜을 뿐, 입을 끝내 열지는 않았다..

혼불 7권 (17)

"굴건 제복에 베옷 입은 상주가 거상중에 몽둥이 찜질 같은, 아니할 일 하고 나면,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남의 말도 무서운 것이고, 돌아가신 백모님께 도리도 아닌즉 체통을 잃지 마십시오." 흉억이 무너지는 이기채를 부축하여 사랑 축대로 오르던 기표는, 펀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 한 가닥에 번쩍 눈을 빛냈다. 그리고 마루에 웅크린 뼈다귀 보자기를 쏘아보았다. "형님, 이 투장은 저놈의 소행이 아니올시다." "아니라니?" "다른 놈 짓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산지기 박달이가 대보름날 밤에 제 눈으로 저놈을 산소에서, 산소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지 않어? 저놈 주동이로도 거기 다녀오는 길이라 이실직고했다 허고." "그래도 아닙니다. 무릇 투장이란, 제 발복하고자 제 부모와 조부모 유골을 남의 명당 산소..

혼불 7권 (16)

애간장 바튼 공배네가, 꼭 이럴 것 같아 아예 말을 꺼내지 않으려다, 미우네 고우네 해도 저 여편네는 혹 까닭을 알 수도 있겠지 싶어 물었던 것인데, 옹구네는 팽돌아진 음성으로 말끝마다 콱콱 대갈을 박았다. 심정대로라면 이 총중에도 제 방석 넓히려고 대갈마치 휘두르는 저 따위 화냥년하고 더 이상 대거리할 것 없이, 그냥 원뜸으로 줄달음 놓아 올아가 보고 싶었지만, 필경 어마어마한 치죄가 벌어질 것이 분명한 이 정황에 무엇 무르고 끼여들었다가 날벼락맞을까 겁이 나서, 공배네는 입을 그만 다물어 버린 채 돌아섰다. 왜? 더 물어 보제. 무겁게 돌아서는 공배네 됫등허리 묵은 잿빛 남루한 잔등이를 훌기어 꼬나 보던 옹구네는, 니가 머이나 된지 알었드니 앙 껏도 아니제? 아닝 거 알었제? 긍게 인자보톰은 ..

혼불 7권 (15)

4. 흉  "몰라?" 공배네가 흰 눈을 깎아 뜨며 옹구네를 꼬아보았다. "아 부모 같은 성님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안다요?" 옹구네 목소리에도 비꼬인 가시가 박혀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녀르 예펜네, 적거이 꼭 무신 일이 있제. 내가 너를 어디 하루 이틀 저꺼 봤냐? 니 낯빤대기 속눈썹 꼬랑지 한나 까딱만 해도, 벰연헌지 일 있는지 다 알제 짐작을 못허께미 시침을 띠여? 띠기를. 시방 허는 짓 탯거리가 벌세 이 일 사단을 아조 모르든 않는 뽄샌디. 저 지랄을 허고 주데이 철벽을 딱 허고 자빠졌네이. 바로 조금 전, 바람 소리가 나게 우우 거멍굴로 들이 닥친 원뜸의 머슴, 종, 장정들이 춘복이 농막을 뒤집어 한바탕 소란스럽게 엎어치는 소리가 나더니, 무슨 죄 지어도 단단히 지은 놈 끌어가듯이 에워싸..

혼불 7권 (14)

그때 기표는 "뺨맞고 잘못했단 말 들으면 무엇합니까. 당헌 다음에 덕석말이 한다해도, 한 번 당해 버린 일은 물린 수 없는 것. 저런 놈한테 무단히 방심했다 허 찔리지 말고 미리 단속하셔야 헐 겁니다."하고 했었는데, 이렇게 당할 줄이야. 이기채는 분노로 와들와들 온몸이 떨리면서 자꾸만 속에서 식은 땀이 났다. 화기가 치솟아 불길이 뻗치는 것이 아니라 웬일인지 겉으로는 뇌성을 치게 호령 소리를 지르지만, 추운 사람처럼 오한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무슨 일이 있는게야?" 동계어른 문장 이헌의가 흰 수염이 성성하게 일어선 채로 들어온다. 노복의 전갈을 받고 급히 나선 걸음이라 숨이 차는데도, 고를 겨를이 없는 물음이다. 이헌의의 뒤를 좇아 기응이 핼쓱한 얼굴로 나타났다. 누렇게 뜨다 못해 질린 자리는..

혼불 7권 (13)

"가진 놈이 겁도 나제, 머, 서 발 장대 휘둘러야 걸리는 게 없는대, 세상 천지에 머이 무서서 걱젱이여? 걱젱이. 내가아." "아 왜 없어? 옹구네 목숨이 있고, 몸뎅이가 있고, 마음이 있고, 인생이 있는디. 거그다가 자식끄장 매달고 있음서. 그보돔 큰 거 머, 멋갖꼬 잡어서 그리여?" "호성암에 댕게왔소? 부체님 말씀이네." "온 세상이 다 있어도 나 없으먼 쇠용없고, 내가 있으먼, 내 인생이 바로 온 세상이여 . 가진 것 없다고 넘의 것 욕심 내지 말고, 욕심 내다 헛발 딛지 말어. 인생살이 외줄타기 목숨은 한 가닥인디, 외나무다리 건너가다 뒤퉁그러져 그 잘난 뼉다구 박살나까 싶응게." 못 다 맬 밭 다 맬라다가 금봉채를 잃고 간다아 황아장사 다 죽었냐 금봉채는 내 사 줌세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고오..

혼불 7권 (12)

그가 아직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 청암부인이 손바닥에 옹이가 박이도록 쌀을 씻어 죽을 쑤며, 여러 해 시병 봉양하였으니, 이제 죽이라면 웬만한 것은 어지간히 가늠할 만큼, 맛에서나 솜씨에서나 남다르게 되었는데, 죽은 재료를 준비하고 손질 갈무리하는 데서부터도 손이 많이 가고, 쑤는 과정 또한 아주 정성스러워야만 했다. 거가대족 집안의 가주 종손이 상용 음식으로, 다른 것은 밀어내어 마다하고 다만 죽을 찾을 뿐이지라, 그것은 이미 '죽'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고, 그 마련을 결코 소홀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무슨 죽 무슨 죽, 하여도 흰죽 쑤기가 제일 어려웠다. "쌀만 싯쳐서 물 많이 붓고 폭폭 오래 끓이먼 되제, 흰죽이 머이 그리 에럽다요?" 킨녜는 그렇게 말했다가 안서방네한테 한 소리를 들었..

혼불 7권 (11)

3. 발각  궤털 허옇게 곤두선 박달이 두 귀가 바싹 질린 두려움을 가까스로 견디느라고 쭝긋쭝긋 움죽거린다. 꿇고 앉은 무릎 위에 얹힌 그의 힘줄 불거진 손이 후들후들 떨린다. 그 떨리는 것을 가누려고 저도 모르게 무릎을 움켜쥐니, 무릎까지 사시나무마냥 떨리었다. 놀란 머리터럭이 불불불 갈기처럼 일어선 박달이의 낯빛은 노랗게 질리다 못해 흙빛으로 잦아들었다. 고개를 푹 꺾어 떨어뜨린 그의 목덜미에 이기채의 대침 같은 시선이 날카롭게 꽂힌다. "무슨 일이냐?" 큰사랑 목외 장지 위칸에 고꾸라지며 엎드린 박달이를, 이기채와 함께 쏘아보던 기표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는 본디 성품도 그러했지만, 특히 아랫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와 음성을 얼음을 씻어내리듯 냉엄하였다. "저어... 저, 저." 바로 보고 앉지도..

혼불 7권 (10)

"죄송합니다." "웬일로 네가 죄송헐 때가 다 있구나?"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미욱하고 생각이 짧았어요." 효원은 음성을 공순히 하며 수그린 이마를 더욱 수그린다. "사람이 그러면 큰일난다, 큰일나. 일에 아무리 연유가 있고 절박할 때라도 순서를 먼저 챙겨야지. 순서 뒤바뀌면 사람 노릇 거꾸로 허고 마는 법이야. 순서. 알었느냐? 네 평생에 다시 안 볼 사람이라도 그렇게는 못허고, 지나가는 걸인 대우도 그렇게는 헐 수 없는 것인데, 소의 시짜 붙은 네 부모 동기 숙질간에 그게 어디 당키나 한 행위야? 민촌것도 그리는 안헌다. 내가 도대체 너희 시숙모를 무슨 낯으로 대하며 네 종시매를 내가 어떻게 얼굴 들고 보겄냐,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어째 순순히 모두 다 잘못했다니,..

혼불 7권 (9)

기응은 양 주먹으로 방바닥을 받치고 앉은 채 고개를 떨구어 꺾으며 울부짖음 같은 한숨을 토한다. 답답한 것은 기표가 아니라 기응이었다. 기표는 이미 그 민첩하고 놀라운 찰지로 이번 사단의 내막을 꿰뚫어본 것이 분명한데, 다만 그의 심증을 당사자 기응의 실토로 확인하려 조이는 것일 케고, 기응은 필사적으로 버팅기며 거기 걸리지 않으려고 마지막 뒷걸음을 쳐 보는 형국이었다. "누구는 속이 없고 짐작이 없어? 진작부터 강실이 행태가 여늬 사람같지 않아 괴이쩍게 여겼지만, 내, 말을 안했지, 어젯밤에 마당에서 벌린 괴이쩍은 무슨 말 들었을 것이야. 오늘 아침 동트기 전 아무 사람 이목 없을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소문 없이 수습해 보려고 이리로 오던 길에 내가 또 그 꼴을 봤으니, 여기 무슨 변명이 먹혀?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