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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7권 (25)

7. 푸른 발톱  밤이 더욱 깊어진 한고비, 안서방네가 보퉁이를 보듬고 주춤주춤 뒤따르는 고샅길은, 발부리로 더듬어 간신히 한 걸음씩 나갈 만큼 어두웠다. 구름만 두텁지 않았으면 달이 있는 밤이라 이보다는 걷기에 나았을 것이지만 오늘 밤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비 먹은 구름이 스산하게 두꺼웠다. "작은아씨." 어둠 속에서 안서방네는 강실이를 부르며 보퉁이를 건네준다. 이제는 강실이 혼자 가야 한다. 묵묵히 그것을 받아드는 강실이 손이 검불처럼 힘이 없어 휘청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하였다. 이 기운으로 어뜨케 단 한 발이나마 낯선 넘의 길을 디디시꼬잉. "부디 몸조심 허시기요." 업어다 디릴 수만 있다먼 얼매나 좋으까. 천리라도 만리라도 내가 따러갈 수만 있는 형편이라먼, 산을 넘고 물을 건네도 내가 ..

혼불 7권 (24)

"이것은 치마 저고리 각각 두 감씩 든 것이고, 이것은." 보퉁이를 안서방네 앞으로 밀며 효원은 아까 가락지와 향갑 노리개를 싸두었던 붉은 비단 보자기를 보퉁이 위에 얹는다. "펴보면 아실 것이네. 누구 눈에 안 띄게 얼른 갖다 드리게." 안서방네는 그러나 그 보퉁이와 보자기에 손을 못 댄다. 심중이 시방 오죽허시리요. 아매 아거이 당신 혼수로 갖고 오신 옷감 패물들잉게빈디, 덤뿍 덜어서 띠여 주시능갑다. 범연허신 새아씨, 시앗을 보먼 질가에 돌부체도 돌아앉는다등만, 도량아 하해와 같드래도 이런 꼴 당허고는 속 안 씨릴 수 없을 거인디, 이것 저것 속상헌 흉허물은 다 덮어 부리시고 우선 사람 살리울 일부터 앞세워 생각하기가 어찌 쉬울꼬. 아이고, 내가 당최 송구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르겄구나. "긴요하게..

혼불 7권 (23)

6. 내 다시 오거든  방이 깊어 효원은 윗목 반닫이 속에 깊숙이 넣어둔 상자를 꺼낸다. 대접의 주둥이를 서로 맞물려 포개 놓은 것만한 이 상자는 , 마치 제사에 쓸 밤을 친 것 같은 모양인에, 윗면과 바닥면은 편편히 깎이고 배는 볼록 나왔다가 다시 아래로 홀쭉하니 빨려 들어간 팔각형이었다. 몸통의 사다리꼴 면면마다 가위표로 복판을 갈라 쪽빛 당홍 노랑 녹색 종이를 바르고, 그 한가운데 청 홍 황의 삼색 빛깔 굽이치는 태극모양이며 검은 날개 당초문처럼 펼친 박쥐를 정교하게 오려 붙인 상자는, 곽종이로 만든 것이다. 효원이 그 상자 뚜껑을 열자, 연분홍 갑사 바른 안쪽이 볼그롬한 뺨을 수줍게 드러낸다. 아른아른 비치는 무늬는 봄날의 아지랑이 같다. "상자는 겉모습도 예뻐야 하지만, 열어서 안쪽이 고와야..

혼불 7권 (22)

귀신을 데리고 노는 당골네 무당이 뼉다구 하나를 가지고 못 놀으랴, 오냐, 좋다. 나는 엊저녁 꿈으로 바서 성헌 다리로 이 대문 빠져 나가기는 틀린 모양인디, 운 좋으먼 둘다 살고, 재수 없으먼 내가 죽든 저 사람이 죽든 하나는 죽을 것이다. 나 죽는 건 섧잖으나, 죽기 전에 한판 놀아 보도 못허고 죽어서야 어디 죽은 원혼 날망제 씻겨 주는 굿판의 당골네 백단이라고 헐 수가 있겄느냐. 기왕에 이렇게 된 일, 다 들켜서 덕석말이 맞어 죽을 일만 남었겄그만, 말을 해도 맞고 안해도 맞을 것 아니냐. 말허먼 죄 있응게 때리고, 말 안허면 말허라고 때리고. 내가 어디 우리 시아부니 뼉다구 갖꼬 한 번 놀아 보끄나? 사실은 간이 타서 말라붙게 무서운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늦추어 보려고, 백단이는 자꾸만, 신 내리라..

혼불 7권 (21)

"죄진 놈이 죽는 것은 아니할 말로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지. 저러다 만일 억울하고 원통한 분기를 못 이긴 증손이 그대로 성질이 북받쳐 기색을 해 버리면 어쩔꼬." 그러다 자칫 절명할 수도 있는 일이어서, 남평 이징의는 "남 잡다가 나 잡기 쉬운즉, 남을 놓아 주어야 나도 놓여 날 것이데. 저토록 탱천하게 노여우니 큰일이로다." 혀를 찼다. 그런 염려가 들 만큼 이기채의 분노는 하늘을 쪼개게 치솟아 있었고, 그 분노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기력은 쇠하여 있었다. 이 와중에, 내일이 오마던 날인 황아장수가 어찌 다른 때보다 하루를 앞당겨 매안으로 올라오다가, 이 뜻밖의 정경에 놀라서, 원뜸의 종가로 얼른 올라갈 염을 못 내고 우선 아랫몰 임서방네 집으로 들어갔다. "죽을 일을 헝 거이제 살..

혼불 7권 (20)

검은 구름이 퍼렇게 물들어 번진 하늘이 나지막하면서도 아득하게 광목필처럼, 거멍굴 근심바우 너머 무산 날맹이 저쪽 어딘가로 음울 스산한 자락을 드리운 아래, 홍술은 임종할 때 모습 그대로, 일흔 남은 머리털을 허이옇게 흐트러 난발하고 서 있었다. 마른 장작같이 여위어 불거진 광대뼈와 훌쭉하니 꺼진 뺨에 북어껍질로 말라붙은 거죽이며, 핏기 가신 입술을 반이나 벌린 입 속에서 적막 음산하게 새어 나오는 검은 어둠. 홍술은 시푸레한 무명옷을 입고 맨발을 벗은 채 발가락을 갈퀴처럼 오그리고, 백단이네 사립문간에 서 있었다. 제멋대로 자라나 어우러진 대나무로 울을 두른 뒤안에서 수와아아 음습한 바람 소리가 밀리며 홍술이를 씻어 내리는데, 백단이는 마침 손에 흰 종이꽃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서는 중이었다. 누군가의..

혼불 7권 (19)

5. 어쩌꼬잉  거멍굴이 한판 뒤집히어 소란스러운 중에도, 문복하러 온 고리배미 아낙 하나가 아까부터 백단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주인 없는 방에서 혼자 무릎을 바짝 가슴에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그네는 뾰족하니 야윈 턱을 제 무릎에 한참이나 얹었다가, 기웃 고개를 틀어 바깥쪽을 내다보기도 하고, 손가락 끝을 튕기며 검정 물들인 무명 치맛자락에 묻은 검불인지 티끌인지를 떨어내기도 하였다 그 행색은 남루하고, 기색은 초조해 보인다. 그렇지만 백단이는 냉큼 들어오지 않았고, 금생이네 성냥간에서 들리는 것인가, 놀란 개 짖는 소리만 숨이 넘어갔다. "언제 외겼소이?" 얼만큼이나 지났을까. 마당에서 구시렁구시렁 궁얼거리는 말수리가 나도니, 만동이와 귀남이는 뒤안으로 돌아가는 기척이고, 벌컥 지게문이 열..

혼불 7권 (18)

벌써 몇 번이나 물은 말이었지만 그때마다 강실이는 눈감은 속눈썹만 파르르 떨 뿐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에미가 남이냐. 니가 살인 죄인이 되었다 허드라도 나는 에미고, 너는 내 새끼지, 에미한테도 말 못허는 그 속이 오죽이나 상했으면 사람이 이 지경이 된단 말이냐.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을 나는 모르고, 그저 니가 약헌가, 약헌가만 했었지. 언제부텀 무슨 일이 생겨서 누구허고 어쨌는지, 이 세상에 나라도 알고 있으면 니가 좀 덜 무섭지 않겄냐. 아가." 오류골댁의 눈물 맺힌 말에, 강실이는 큰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혹시 이 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싶어 오류골댁은 숨을 죽이고 강실이 입시울을 더듬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실이는 들이쉰 숨을 여리고 길게 내뿜을 뿐, 입을 끝내 열지는 않았다..

혼불 7권 (17)

"굴건 제복에 베옷 입은 상주가 거상중에 몽둥이 찜질 같은, 아니할 일 하고 나면, 까닭이야 어찌 되었든 남의 말도 무서운 것이고, 돌아가신 백모님께 도리도 아닌즉 체통을 잃지 마십시오." 흉억이 무너지는 이기채를 부축하여 사랑 축대로 오르던 기표는, 펀득 뇌리에 스치는 생각 한 가닥에 번쩍 눈을 빛냈다. 그리고 마루에 웅크린 뼈다귀 보자기를 쏘아보았다. "형님, 이 투장은 저놈의 소행이 아니올시다." "아니라니?" "다른 놈 짓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산지기 박달이가 대보름날 밤에 제 눈으로 저놈을 산소에서, 산소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지 않어? 저놈 주동이로도 거기 다녀오는 길이라 이실직고했다 허고." "그래도 아닙니다. 무릇 투장이란, 제 발복하고자 제 부모와 조부모 유골을 남의 명당 산소..

혼불 7권 (16)

애간장 바튼 공배네가, 꼭 이럴 것 같아 아예 말을 꺼내지 않으려다, 미우네 고우네 해도 저 여편네는 혹 까닭을 알 수도 있겠지 싶어 물었던 것인데, 옹구네는 팽돌아진 음성으로 말끝마다 콱콱 대갈을 박았다. 심정대로라면 이 총중에도 제 방석 넓히려고 대갈마치 휘두르는 저 따위 화냥년하고 더 이상 대거리할 것 없이, 그냥 원뜸으로 줄달음 놓아 올아가 보고 싶었지만, 필경 어마어마한 치죄가 벌어질 것이 분명한 이 정황에 무엇 무르고 끼여들었다가 날벼락맞을까 겁이 나서, 공배네는 입을 그만 다물어 버린 채 돌아섰다. 왜? 더 물어 보제. 무겁게 돌아서는 공배네 됫등허리 묵은 잿빛 남루한 잔등이를 훌기어 꼬나 보던 옹구네는, 니가 머이나 된지 알었드니 앙 껏도 아니제? 아닝 거 알었제? 긍게 인자보톰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