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23

혼불 5권 (2)

우주 천리가 이럴진데, 한 나라의 운명이나 사람의 일생도 이에서 다를 것이 없을게다. 그래서 천자문 뒤풀이에도 자시생천 하늘 천, 축시생지 따 지, 인기인 사람 인, 하지 않으냐. 자시에는 태양이 땅밑에 드니 만물이 어두워 오직 하늘만이운행하고, 축시에는 동쪽으로 당겨 가니 동방이 벌어져 땅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인시에는 더 밝은 기운이 터올라 날이 새는지라, 날 새면 자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므로, 인시부터는 사람의 시간이라 하는 것이다. 어둠이 물러가고 사람이 세상을 주재하는 그 인시에 이르도록까지는 여전히 어둠의 새상이라. 그러니 사람도 그 동안만은 세상을 어둠한테 내주고 죽은 둣이 자지 않느냐. 그것이 순리니라. 물론 이와는 반대로 하루에 태양이 가장 밝아 온 천지에 어두운 곳이 없이..

혼불 5권 (1)

1. 자시의 하늘  자시가 기운다. 바람끝이 삭도같은 섣달의 에이는 어둠이, 잿빛으로 내려앉는 겨울 저녁의 잔광을 베어 내며, 메마른 산과 산 능선 아래 움츠린 골짜기로 후벼둘고 헐벗은 살이 버슬버슬 얼어 터지는 등성이와 소스라쳐 검은 뼈대를 드러낸 바위 벼랑 허리를 예리한 날로 후려쳐 날카롭게 가를 때, 비명도 없이 저무는 노적봉은 먹줄로 금이 간 몸 덩어리를 오직 묵묵히 반공에 내맡기고 있었다, 어둠의 피는 검은가. 휘이잉. 칼날의 서슬이 회색으로 질린 허공에서 바람 소리를 일으키며 노적봉 가슴패기에 거꾸로 꽂히자, 그 칼 꽂힌 자리에서는 먹주머니 터진 듯 시커먼 어둠이 토혈처럼 번져 났다. 바람이 어둠이고, 어둠이 난도였다. 어지러이 칼 맞은 자리마다 언 산의 생살이 무참히 벌어지고, 어둠은 그 틈..

혼불 4권 (完,47)

"허나, 이런 이야기도 있잖습니까? 공자께서 일찍이 무리와 더불어 천하를 주유하실 때 , 난을 만난 나라의 변방에 이르셨는데, 아비규환으로 피비린내 자욱한 마을이 온통 적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창칼에 도륙이 되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려. 그 와중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손에는 어린 자식, 앞에는 늙은 부모, 잡고 끌고 아우성인데, 저만큼 어떤 사람이 두 아이를 양팔로 붙안고 사뭇 섧게 섧게 울더니만 단호히 한 아이를 떼어 놓고 아이만 데리고 피난을 가더랍니다.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보면 차마 갈 길을 갈 수 없어 그랬겄지요. 공자가 제가를 시켜 남겨진 아이한테 가서 그 연유를 물어오라 했습니다. 다녀온 제자는 아내도 없는 처지의 그 사람이 데리고 간 아이는..

혼불 4권 (45)

"물론 법식을 지키기를 극진히 했다가 드디어는 그 법식을 떠남에 귀착하는 것이 그림의 도라고 한 왕안절의 말이 옳은 것이네만. 거꾸로 그 귀착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직 모지랑붓을 묻어서 필총을 이루고, 철연을 갈어서 닳아 없어지도록가지 공을 들여 연습을 해야만 된다고 할 수 있지. 과정도 결과에 이르고저 하는 것은 걷지 않고 천리를 가겠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느니. 다 이룬 다음에는 버릴 것일지라도, 그 이룸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없으매 절차마다 정성을 다해 보는 것이 인간이라. 그 중의 어느 것이 어디 가서 닿을지를 모르니. 그래서 사람이 살었을 때는 살어 있는 대로 인의예지가 있는 것이고, 죽어서는 죽어서 가는 길에 대한 서로의 인의예지가 있는 것이야."일개 이름 없는 아녀자가 제 쓰던 바늘이 부러진..

혼불 4권 (44)

"그러니 정신만 간추리면 되었지.""사람은 자네 말대로 물질이라, 물질을 매개로 의사를 표현허고 형식을 취해서 내면을 흩어지지 않게 걷어 담는 것 아닌가.""형식이라는 그릇이 없어도 저절로 뭉친 기운이 있어야 그것이 참정신이지, 그렇게 허울에 기대지 않고는 지탱할 수 없는 알맹이라면, 그것은 좁쌀이나, 띠끌, 아니면 연기 같은 허상이겄지요, 혹 그러다가 절차나 형식은 거창해서 엄청나고 빈틈없지만 실인즉 그 그릇 속에는 한줌 먼지밖에 쥘 것이 없는 경우도 많으리다. 일찍이 옛날에 성왕들은, 장사 지내는 예절에 관해서 법을 제정할 적에, 시의는 홀겹 세 벌이면 살이 썩기에 충분하고, 관목은 세 치 두께로 뼈가 썩기에 충분하며, 묘혈의 깊이는 지하수에 닿지 않을 정도면 족하고, 봉문은 그저 냄새가 밖으로 새어..

혼불 4권 (43)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이헌의에게 징의는 그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두사람 다 서른 몇 살로, 돌아보면 어제 같은 나이였다. 금의 사람으로, 자는 자단이요, 호를 황화노인이라 한 왕정균은, 생후 얼마 안되어 글을 보고는 열일곱 자를 스스로 알았고, 일곱 살에는 능히 시를 지었다는 소문이다. 그는 거동과 용모가 아름답고 훌륭한데다가 담소를 즐거워하였으며, 문을 지어 말하고 싶은 바를 잘 나타냈다 하는데, 산수, 고목, 죽석의 그림에, 당대에 따를 자 없이 빼어났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묵죽은 신품이었다. 타고난 재능에다, 송의 문호주를 종으로 삼아 밤낮으로 붓이 닳도록 대를 그리던 황화노인은"항상 등불 아래 대나무 가지를 비추어, 그 그림자를 모사하여 참모양을 그리었다."고 하였다. 천지는 거대한 ..

혼불 4권 (42)

그저 파적으로 대나 한 폭 치고, 배운 글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글씨를 쓰는 것이지, 아는 것도 없고 깨친 바도 없는데 남을 가르칠 수 없다는 사양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밀고 들어와 화선지를 펼지는 사람이 생기고, 그가 선서자라 는 소문이 인근에 널리 퍼지면서 문중에서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의 서화 한 점 얻기를 원하게 되었지만, 막상 그 자신은 족자 하나 반듯하게 걸어 놓을 자리도 없을 만큼 살림이 곤궁하였다. 강보에 싸인 유아를 면하지 못했을 때 불운하게 부모를 여의고, 가난한 숙부의 손에 맡기어져 자라난 그가, 타고난 필재는 참으로 남 다른 데가 있었다. 문중의 사숙에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할 때, 하늘 천 따지,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외우고 쓰는데, 처음에는 해서를 힘써 익히었고, 동몽선..

혼불 4권 (41)

19 동계와 남평  불용재위명봉관 불수절작조어간 천화백초조령후 유향분분설리간그 마디 잘라 내어 진기한 피리도 만들지 않고 모름지기 물가의 낚싯대도 만들지 않고 천 송이 꽃 백 가지 풀 다 시들어 사라진 뒤 푸른 댓잎 분분히 날리는 눈 속에 그대로 두고 보리매안의 이씨 문중에서 항렬과 연치가 가장 높고도 학덕이 있어 문장으로 받드는, 동계어른 이헌의의 큰사랑방 벽에는 몇 줄 화제가 쓰인 서화 한 폭이 걸려 있다. 설한 풍족이다. 이것은, 여러 해 전에 고희를 맞이한 이헌의에게 대여섯 살 수하인 재종 이징의가 축수 인사로 보낸 그림이었다."남평은 풍족이 일품이라. 이 사람의 대는 이상하게 박토에 뿌리를 박은 것같이 까칠하면서도 그 늙은 마디와 갈라진 노엽에 메마른 힘이 있다."하며 몹시 마음에 들어 한 이헌..

혼불 4권 (40)

"무릇 만물이 다 뿌리가 있으며 가지가 있다. 이 뿌리를 잘 돋우어야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한 법, 무심한 푸성귀나 나무 한 그루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야 더 이를 것이 있으랴. 무릇 조상은 뿌리요, 자손은 그 가지나 잎과 같은 것이니 조상을 잘 위해야 자손이 성하여 잘 되어갈 것이 아닌가. 효자 효부는 조상 받들기를 지극한 성심으로 하여 영원한 세월 동안 귀하게 되어서, 그 몸을 세상에 드러내고 이름이 빛난다. 진정으로 효도하는 것은, 생존한 부모에게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상도 잘 받드는 것이 또한 성효이다."하여, 집을 지으려면 받드시 먼저 사당을 지어야 한다. 만일 가세가 몹시 가난하고 집터가 좁으면 단지 한 칸 사당을 지어도 되지만, 할 수만 있으면 삼간 이상으로 짓고, 사당 안에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