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피츠제럴드]]
<다시 찾아간 바빌론> <겨울 꿈>
<다시 찾아간 바빌론>
-피츠제럴드 作-
***동우***
2013.07.25 06:12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
이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나는 피츠제럴드를 많이 읽지 못하였다.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로 보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영화로 보았다.
그의 문체가 훌륭하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하던데 영어를 모르는 내게 영문의 아름다움은 개발의 편자.
이 단편의 번역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환락과 혼돈의 시기를 겪은 후의 성숙함이랄까..쓸쓸함.. 같은 분위기가 짙게 느껴진다.
그런 정서가 이를테면 피츠제럴드의 것일런지.
'다시 찾은 바빌론'
<몽마르트르의 노력이고 창의성이라 한들 모두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은 그야말로 조악한 시설로 악덕과 낭비의 욕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방탕'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것은 엷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유에서 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세상사 그러한가.
어떤 이에게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가 어떤 사람에게는 허무와 환락의 도시 '바빌론'이기도...
파리뿐이랴. 예루살렘이나 메카도.
이문열의 해설을 보니, '내가 마지막 본 파리'라는 영화.
오래 전 감상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출연한 영화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 소설을 작가 자신이 각색하여 만든 영화라니 새삼스럽다.
흐릿한 기억 속의 그 영화는 이 소설의 분위기와는 아주 다른것으로 남아있는데 좀 뜻밖이다.
다음은 이문열의 해설.
++++
<불타버린 뒤의 적막감>
-이문열-
온당한 독법이 되지 못할는지 모르지만 '다시 찾아간 바빌론'을 정감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 스코트 피츠제랄드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스코트 피츠제랄드의 생애는 그의 소설 이상으로 다채롭고도 극적인 데가 있다. 그는 19세기 말 미국 미네소타주의 세인트 폴에서 태어났는데 대학 때부터 문필에 재능이 있어 주위의 인정을 받았고 교지의 편집자가 되기도 했다. 작가로서 그의 극적인 삶은 동창생이며 '미네소타주 뿐만 아니라 이웃 다코타주를 합쳐 가장 아름다운' 젤다 세이어와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젤다 세이어는 처음 피츠제랄드의 재능과 외모에 반해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끝내는 이름 없고 간난한 문학지망생에 불과한 그를 버리고 만다. 그로 인해 실의에 빠진 피츠제랄드는 몇 주일간이나 위스키에 빠져 지내다가 분발하여 쓰게 되는 작품이 장편 '낙원의 이쪽'이다.
미국적 물질주의에 매혹과 환멸을 동시에 나타내는 자전적 성장소설로서 그것은 그의 처녀작이자 대표작이기도 하다.
'낙원의 이쪽'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스물다섯 살의 그를 일약 미국문단의 총아로 만들고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 같은 성공에 힘입어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고 마침내 젤다 세이어와 결혼하게 된다.
이어 '위대한 게츠비'로 명성을 확고히 한 그는 헤밍웨이 포크너 등과 함께 이른바 '잃어버린 세대 (Lost Generation)'의 한 사람으로 1920년대 미국의 낙관주의를 대표하게 된다.
서른도 안된 나이에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된 그는 아름다운 아내 젤다와 파리로 옮겨앉아 그 모든 것을 탕진할 때까지 술과 파티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다가 방탕한 그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공군조종사와 연애를 하는 등 분방한 생활을 즐기던 아내 젤다가 정신분열증으로 입원하고 그 자신도 자살미수를 겪는 등 돌이킬수 없는 파탄에 이르러서야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 또 다른 그의 대표작 '바람은 부드러워라'로 재기를 기도하나 세상의 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뒤 젤다와 이혼한 그는 알콜중독에 빠져 세월을 허비하다가 다시 깨어나 마지막 장편 '최후의 대군'에 착수하지만 끝내 탈고하지 못하고 마흔넷의 젊은 나이로 숨졌다.
'다시 찾아간 바빌론'은 단편집 '기상나팔 소리에 술을 마시다'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몇 가지 지엽적인 사실을 빼고는 파리에서의 경험을 그대로 서술했다고 할 정도로 자전적이다.
여기서는 미국적 물질주의에 매혹보다는 환멸을 더 짙게 드러내 보이는데 그 또한 자신의 쓰라린 경험에 바탕한 것이라 보아도 좋다.
<몽마르트르의 노력이고 창의성이라 한들 모두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곳은 그야말로 조악한 시설로 악덕과 낭비의 욕구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방탕'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것은 엷은 공기 속으로 사라져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유에서 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구절은 이미 파리 시절의 어느 참담한 아침 그의 자성록 속에서 끄적거려졌을 법하다.
한때 그는 고레스(페르샤의 키루스 대왕)처럼 영광된 도시 바빌론에 입성했으나 방탕과 무절제로 모든 것을 탕진하고 추방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뒤 겨우 정신을 차려 돌아와보니 바빌론은 환멸의 도시로 변하고 옛 영광은 오직 돌아보는 쓸쓸함만으로 남았다.-이러한 바탕위에서 이 작품을 읽어나간다면 주인공에게 느끼는 연민과 애절함은 한층 더해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다시 찾아간 바빌론'을 이 책의 앞머리에 싣기로 하면서 내가 한 작품을 판단하는데 이른바 '전기적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나 걱정했다.
그러나 작품 그 자체로 보아도 이 단편은 한 전범으로 나무랄데가 없는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간명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그렇거니와 전편을 흐르는 불타버린 뒤의 적막감과도 같은 애조는 작가에 관한 전기적 지식이 없는 이에게도 흔치 않은 감동으로 다가들 것이다.
'다시 찾아간 바빌론'은 짧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피츠제랄드적인 작품이다.
그 자신의 각색에 의해 '내가 마지막 본 파리'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방영되었다.
++++
***teapot***
2013.07.25 07:43
주인공과 마음이 통하는 듯 한 느낌을 막연히 받으며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작가의 배경 설명을 해 주셔서 글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네요.
위대한 개츠비는 책이 있으니 다시 한번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동우***
2013.07.26 05:54
티팟님.
주인공과 마음이 통하는 바가 있으시다니.
피츠제럴드가 빼어난 작가라는게 그에서도 증명되는 듯 하군요.
'위대한 개츠비'
나도 한번 읽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겨울 꿈>
-피츠제럴드 作-
***동우***
2016.07.15. 00:30
'겨울 꿈' (Winter Dreams)
스콧 피츠제럴드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의 초기작이랍니다.
전문(全文)의 완벽한 번역이 아닌지라 두어군데서 문장을 업어와 내 나름대로(멋대로) 조합하였습니다.
중간에 이가 빠진 부분이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원작의 정취를 느끼기에 그다지 손색이 없지 싶은데 어떨른지..,
나로서는.
매우 아름다운 소설..
'위대한 캐츠비'의 분위기도 없지 아니하고.
필경 저물고야 마는 초원의 빛...
그런 애상(哀傷)이 늙은 가슴에도 쓰리고 허전하여, 깊은 곳 몹시 서늘하였습니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함께 읽어요.
***동우***
2016.07.16 04:06
중산층 출신의 야망에 불타는 덱스터는 건실한 남자입니다.
골프장 캐디로 일하던 열네살 소년 덱스터는 어느 날 열한살짜리 소녀 '주디 존스'를 보는 순간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청춘을 오랜 세월 지배하였던 겨울 꿈이 시작된 것입니다.
'주디 존스'는 금수저의 부유함과 아름다움을 갖춘 분방하고 럭셔리한 여자입니다.
그녀에게는 작가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의 이미지가 어느만큼 투사되어 있을런지요.
분방하고 화려하고 변덕스러운.
주디 존스로 부터 두번이나 배신 당하는 덱스터의 사랑.
이윽고 덱스터의 겨울꿈은 한여름밤의 꿈처럼 허망하게 스러지고 맙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그리고 겨울이 지나갔다. 새로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왔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정력적인 부분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주디 존스의 입술에 바쳤다. 반면 그녀는 단지 흥미로, 때로는 격려와 악의, 무관심, 그리고 경멸로 그를 대했을 뿐이다. 그녀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상처와 모멸감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실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에 복수를 하듯이.>
죽을만큼 아픈.. 사랑의 열병.
우리, 가슴을 한번 뒤져 보십시다.
만져지는지.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우리 가슴에도 있었을 법한 그 상흔(傷痕)이.
'헤어지자'는 통고에 '그러던지'하고 싹 돌아서는 요즘 세월.
세속(世俗)으로 늙은 나 또한 중얼 거립니다.
"여보게 텍스터, 저 낭비쟁이 바람둥이 주디 존스로 부터 벗어난 것은 정말 다행일세. 주디 존스 대신 아이린을 아내로 맞은 것은 자네의 행운이야."
실연으로 양잿물 마시는 어줍이가 요즘 있을것 같지 않습니다만, 사랑의 아픔이야 여일할터 겉모습이 그렇다는 것이겠지요.
늙은 나는 아픕니다.
초원의 빛, 꽃의 영광으로 사라진 것들..
++++
<그는 긴 의자에 기대어 마악 해가 분홍빛과 황금빛의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면서 뉴요크의 고층건물 뒤쪽으로 가라 앉는 것을 창가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덱스터는 자기가 주디 존즈와 결혼하여 그녀가 자기 눈앞에서 늙어가는 것을 본 것같이.
“이제 꿈은 사라졌다. 그에게서 무엇인가가 없어져 버렸다.
공포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그는 두 손바닥을 두눈에 갖다 대고 셰리 아일랜드를 찰싹찰싹 때리는 물결이며, 달빛에 비친 베란다며, 골프장에서 입은 깅엄 골프복이며, 그녀의 목덜미에 난 부드러운 황금빛 솜털의 모습을 불러오려고 애썼다.
그리고 또한 키스할 때 축축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입술이며, 우수에 젖은 서글픈 두눈이며, 아침이면 느낄 수 있던 새로 짠 좋은 린넨 같은 그녀의 신선함도 말이다.
아, 이런것들은 이제 더 이 세상에는 없구나!
그것들은 과거에 존재했을 뿐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몇 년만에 처음으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지금 그 눈물은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는 입이며 눈이며 움직이고 있는 손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멀리 사라졌으며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고, 해가 졌으며, 모든 시간을 견뎌내는 강철의 잿빛 아름다움 말고는 이제 아름다움은 없었다.
심지어 그가 참을 수 있었던 슬픔조차 그의 겨울 꿈이 활짝 날개를 펼치던 환상의 나라, 청춘의 나라, 풍요로운 삶의 나라 뒤쪽으로 멀리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오래전에” 그는 말했다.
“오래전에 나에게는 무엇인가가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 이제 그건 사라져버렸어. 없어져 버렸단 말이지. 그런데도 나는 울 수가 없구나. 그것에 대해 마음 쓸 수도 없어. 이제 그것은 영원히 아주 영원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지.”>
++++
사라져버린 사랑.
뻥 뚫린 가슴의 동공(洞空).
오, 그 사랑은 바로 나였습니다.
아아, 내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어디 있니? 상헌아.
넌 시방 어디 있는게냐?
참으로 서늘하고 애틋하고 애린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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