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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亂中日記 (29) -李舜臣-

카지모도 2021. 2. 20.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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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11월 (1594년 11월)

 

 

 

11월 초1일 [양력 12월 12일] <乙亥>

새벽에 망궐례를 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11월 초2일 [양력 12월 13일] <丙子>

맑다. 전라좌도에서는 사도첨사(김완)를, 전라우도에서는 우후 이정충을, 경상도에서는 미조항첨사 성윤문을 장수로 정하여 적을 수색·토벌하게 들여 보냈다.

 

11월 초3일 [양력 12월 14일] <丁丑>

맑다. 김천석이 비변사의 공문을 가지고 와서 투항해 온 야에몬(야여문) 등 세 명을 데리고 진에 이르렀다. 수색토벌하러 나갔다 오니 벌써 밤 열 시쯤이었다. 이영남이 와서 봤다.

 

11월 초4일 [양력 12월 15일] <戊寅>

맑다. 투항해 온 왜놈들의 사정을 들었다. 전문을 가지고 갈 유생이 들어왔다.

 

11월 초5일 [양력 12월 16일] <己卯>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송한련이 대구 열 마리를 잡아왔다. 순변사(이일)가 그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세 명을 잡아 보냈다. 밤새도록 비가 많이 내렸다.

 

11월 초6일 [양력 12월 17일] <庚辰>

흐리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이영남이 와서 봤다. 이정충도 왔다. 첨지 신호와 함께 이야기했다. 송희립이 사냥하러 나갔다.

 

11월 초7일 [양력 12월 18일] <辛巳>

저녁나절에 개었다. 아침에 대청으로 나갔다. 항복해온 왜놈 열일곱 놈을 남해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금갑도만호·사도첨사·여도만호·영등포 만호가 아울러 왔다. 이 날 오정때에 첨지 신호는 원수가 되돌아와서는 수군에 머물러 있다더라고 보고했다.

 

11월 초8일 [양력 12월 19일] <壬午>

새벽에 잠깐 비가 뿌리더니 저녁나절에 개었다. 배 만들 목재를 운반해 왔다. 새벽 꿈에, 영의정이 이상한 모양을 차려 입었고, 나는 관을 벗은채 함께 민종각의 집으로 가서 같이 이야기하다가 깨었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11월 초9일 [양력 12월 20일] <癸未>

맑으나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11월 10일 [양력 12월 21일] <甲申>

맑다. 이희남이 들어왔다. 조카 뇌도 영문에 왔다고 했다.

 

11월 11일 [양력 12월 22일] <乙酉>

동짓날이라 11월중임에도 새벽에 망궐례를 드린 뒤에 군사들에게 죽을 먹였다. 우우후와 정담수가 와서 보고나서 돌아갔다.

 

11월 12일 [양력 12월 23일] <丙戌>

맑다. 일찍 대청으로 나가 순천 색리 정승서와 역자가 남원에서 폐해를 끼쳤기로 벌주었다. 첨지 신호에게 작별의 술을 대접 했다. 또 견내량에서 경계선을 넘어 고기를 잡은 사람 스무네 명을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

 

11월 13일 [양력 12월 24일] <丁亥>

맑다. 바람이 차차 자니 날도 따뜻했다. 첨지 신호와 아들 회가 이희남·김숙현과 함께 본영으로 갔다. 종 한경도 은진 김정휘 집에 다녀 오게 일렀다. 장계도 내보냈다. 원수가 방어사의 군관으로 하여금 투항해 온 왜놈 열네 명을 데리고 왔다. 저녁에 윤련이 그 누이의 편지를 가져 왔는데, 망발이 많다. 우습다. 버리고자 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까닭이 있다. 버려진 세 아이가 마침내 의지할 곳이 없게 된 때문이다. 열닷샛 날은 아버지 제삿날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밤에 달빛이 한 낮 같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11월 14일 [양력 12월 25일] <戊子>

맑다. 아침에 우병사(김응서)가 투항해 온 왜놈 일곱 명을 자기 군관을 시켜 데리고 왔다. 그래서 곧 남해현으로 보냈다. 이함이 남해에서 왔다.

 

11월 15일 [양력 12월 26일] <己丑>

맑고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 음양의 조화가 질서를 잃은 것 같으니 그야말로 재난이다. 오늘은 아버님의 제삿날이므로 나가지 않고, 홀로 앉아 있으니, 슬픈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저물무렵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순천의 교생이 교서의 등본을 가져 왔다. 또 아들 울 등의 편지 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상주의 사촌 누이 편지와 그 아들 윤엽이 본영에 이르렀다.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읽어보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영의정의 편지도 왔다.

 

11월 16일 [양력 12월 27일] <庚寅>

맑으나, 바람기가 제법 쌀쌀하다. 밥을 먹은 뒤에 대청에 앉았다. 우우후·여도만호·회령포만호 ·사도첨사·녹도만호·금갑도만호·영등포만호·전어란진만호 ·정담수 등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는 날씨가 무척 따뜻해졌다.

 

11월 17일 [양력 12월 28일] <辛卯>

맑고 따뜻하다. 서리가 눈처럼 쌓였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나절에 산들바람이 종일 불었다. 밤 열 시쯤에 조카 뇌와 아들 울이 들어왔다. 한밤에 미친듯 바람에 세게 불었다.

 

11월 18일 [양력 12월 29일] <壬辰>

맑다. 바람이 저녁내 세게 불더니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11월 19일 [양력 12월 30일] <癸巳>

맑다. 바람이 세게 불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1월 20일 [양력 12월 31일] <甲午>

맑다. 아침에 바람이 잤다. 대청으로 나갔다. 조금 있으니 경상수사 원균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바람이 밤까지 세게 불었다.

 

11월 21일 [양력 1월 1일] <乙未>

맑다. 아침에 바람이 잤다. 조카 뇌가 나갔다. 그리고 이설이 포폄하는 장계를 가지고 갔다. 종 금선·우년·이향·수석·행보 등도 나갔다. 김교성·신경황이 나갔다. 남도포만호·녹도만호가 나갔다.

 

11월 22일 [양력 1월 2일] <丙申>

맑다. 아침에 회령포로 나갔다. 날씨는 무척 따뜻했다. 우우후(이정충) 와 정담수가 와서 봤다. 활 다섯 순을 쏘았다. 왜놈의 옷감으로 무명 열 필을 가져 갔다.

 

11월 23일 [양력 1월 3일] <丁酉>

맑고 따뜻했다. 흥양 군량과 순천 군량 등을 받아들였다. 저녁나절에 이경복이 자기 소실(첩)과 함께 들어 왔다. 순변사 등이 비난을 받는다고 하였다.

 

11월 24일 [양력 1월 4일] <戊戌>

맑다. 따사롭기가 확실히 봄날 같다. 대청으로 나가서 공문을 적어 보냈다.

 

11월 25일 [양력 1월 5일] <己亥>

흐렸다. 새벽꿈에, 이일(이일: 순변사)과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며, "이같이 나라가 위태하고 혼란한 날을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뱃심 좋게 음탕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성밖 여염집에 거처하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또 수군 각고을과 포구에 배정된 육전의 병기를 독촉하기에만 겨를이 없으니, 이 또한 무슨 이치요? 라고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하품하며 기지개켜다 깨고 보니 한 바탕 꿈이었다. 식사를 한 뒤에 대청에 앉아 공문을 적어 주었다. 조금 뒤에 우우후와 금갑도만호가 왔다. 피리를 듣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11월 26일 [양력 1월 6일] <更子>

소한. 맑고 따뜻하다. 방에 앉아 있으면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이 날 메주를 열 말을 쑤었다.

 

11월 27일 [양력 1월 7일] <辛丑>

맑다. 밥을 먹은 뒤에 대청으로 나가 앉아 있다가 좌도·우도로 갈라 보낸 투항해 온 왜놈들을 모조리 와서 모았다. 그래서 총쏘는 연습을 시켰다. 우우후·거제현령·사도첨사·여도만호가 아울러 왔다.

 

11월 28일 [양력 1월 8일] <壬寅>

맑다.

 

(** 11월 28일 맨 뒷장(제3책 52장)에 나오는 자료로서 13 장에 걸쳐 적혀 있다. 먼저 그 첫장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망하기는 어렵습니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 없으니, 거듭하여 배들을 덮어 그로 하여금 안전치 못합니다. 안으로는 방책을 세울만한 기둥 재목 같은 인재 없으니, 기계를 고치고 다루며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였습니다. 나를 알고 저를 알면 백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저를 모르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저도 모르면 싸워봐야 반드시 지게 됩니다. 이것은 만고의 바뀌지 않는 진리입니다.

(** 이 다음 장부터는 글쓴 내용이 많이 고쳐 적혀 있다.)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짐이 육지나 바다가 똑 같이 되버렸습니다. 대총 유정은 이미 군사를 철수시켜 고국으로 되돌아가니 위급한 세력의 급박함이 호흡하는 순간에 달려 있어 온갖 생각을 해도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또 하나, 영남의 좌우 연해에 많은 적들이 가득하고, 저돌적인 침범이 근심됨이 반드시 아침 저녁 - 코앞에 다가 왔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킨지 3년이나 되어 공사간에 재물이 다 없어지고, 학질 등의 병이 극성이어서 사망으로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호남의 한 도에 의뢰하였으나, 호남에도 큰 난리가 일어나, 전쟁으로 화재를 입은 땅이 더욱 심하며, 이때부터 닥칠 앞 군량과 군사를 의뢰할 곳이 전혀 없습니다. 날마다 줄어드니, 급히 모음만 같지 못하고, 곳곳의 잡색 군사 육로의 요해지를 끊어 막거나 혹 수군을 합세하여 곧바로 적진에 쳐들어 갔습니다. 하나, 영남의 우도의 적세는 전과 같이 별로 다른 흔적이 없고, 다만 다시 그 형상을 보니, 굶은 빛이 많이 있는데, 그 뜻은 반드시 가을 곡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으며, 우리 나라가 미리 방어 해 놓고 있어야 하는 데 극히 두려워하는 자는 수군이요, 수군으로서 전쟁에 임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옮겨 다니며 얻어 먹는 무리도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대가 양식을 보지 못하여 질병이 또 일고, 사망이 서로 줄을 이었으니, 여러 장수가 이에 갖추고자 공문을 원수와 관찰사에게 돌리고 계략도 베풀 명령도 없습니다. 온갖 생각을 해보지만, 방어하여 지킬 방도가 전혀 없습니다. 수군의 한 가지 일이 세력이 파산되어 이 한 몸 만번 죽음도 달게 받을진대, 이 나라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수군은 사소한 군량일지라도 연 해의 여러 고을에 쌓여 있어도 관찰사와 원수가 군관을 파견하여 곳간을 뒤지어 조사해 실어가도 저는 다른 도 먼 바다에 있으니 아무런 조치를 하지 못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만약 달리 수군을 보내어 어사가 모든 수군의 일을 구제할 수 있을 것 같아 망령되이 장계합니다. 그러나 만약 옳지 않다면 영남의 순무어사가 명령을 한 날에 겸하여 불러 모을 군사는 오로지 물러만 갈 것입니다. 하나, 순변사 이일 그 집에 있어 적들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 듣고 일시에 달려와 모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해의 수군의 원 소속 병사들이 일시의 편안이 거의 내버려 두게 되어 그 고을에서 독려한다면 순변사가 연해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잡아 오지 않는 것이 일일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나, 정경달이 종사관이 되어 다음을 다하여 감독하고 공문에, 도 안의 일이 본디부터 관찰사가 주재하고 통제하여 둔 전치는 일을 검사받게 하는 것은 실로 그 본디 임무가 아닙니다. 하물며 다른 도의 바다에 진을 치고 멀리 있으니 이 또한 검사하면서 지을 수도 없고 이 뒤로는 일체 검사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제 함양군수가 되었다고 하니 민망함니다. 추수할 때까지만이라 도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검사하도록 장계합니다. 하나, 파총 장홍유가 이 달 17일 진에 도착하여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탄복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내년 봄 산동·천진 등에서 비호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곧바로 제주도로 경유해서 한산도로 와서 합세하여 함께 적들을 토벌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비록 깊이 믿을 건 못되지만, 그 정황은 익히 보아온즉 빈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 3일 머물러 있으니, 송·이의 옹폐 (옹폐: 어른의 총명을 막아서 가림)함이 많이 유감스럽습니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나라는 어지럽건만 바로잡을 이 그 누구뇨. 몇 해를 배를 타며 해놓은 일들도 홀로 생각하니 임만 속이고. 수십년 뱃전에서 해놓은 일들도 이제와 돌아보니 임만 속였네. 비바람 부슬부슬 흩뿌리는 밤, 생각만 아물아물 잠 못 이루고 긴 한숨 거듭하니 눈물만 주룩주룩 흐르는구나.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이 아무도 없네. 제갈량 중원 회복 어찌했던고, 제우치던 곽자의 그리웁구나. 쓸개가 찢기는 듯 아픈 이 마음 살을 에는 양 쓰린 이 가슴 나라가 태평한지 200년이요 문물의 화려함은 3000 이라네. 몇 해를 원수 막이 꾀 뿐인걸.

앞에서 나온 것과 본영의 것을 가져와 모으니, 하얀 접는 부채(백 첩선) 358 자루, 보통보다 달리 만든 부채(별선) 453 자루에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5 자루를 보냈다. 기름친 부채(유선) 590 자루에 서 7월 10일 순변사에게 10 자루를 보냈다. 옻칠한 부채(칠선) 58 자루에서 5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일반부채(선선) 50 자루에 서 10 자루를 순변사에게 보내고, 갈모(입모) 40개, 손칼(도자) 323 자루, 육장부(육장부) 2개, 들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장유지) 5 권, 기름 먹인 종이(주유지) 5 권을 본영으로 가져 왔다. 들기름 먹인 종이(장유지)와 기름 먹인 종이(주유지)는 앞의 것과 같다. 수은을 빼낸 금(화김) 70은 이미 명나라 장수에게 주었다. 흥양에서 대대로 사는 종 매마(매마)· 대준(대준)· 영세(영세)· 방죽(방죽)·영로(영로)가 큰 대(대죽) 23개, 중치 대(중죽) 23개를 7 월 4일에 만들려고 옥지(옥지)가 받아 갔다. 크고 작은 대 93개를 7월 27일 옥지(옥지)가 만들려고 받아 갔다. 큰 대화살(대죽전) 65 개를 만들어 바쳤다. 중치 대 화살(중죽전) 40개와 22개를 9월 5일 에 무재(무재)가 바쳤다. 6월 6일 삶은 대(숙죽)로서 약간 무거운 것이 50개, 상품(상품죽) 11개, 약간 가벼운 대(경죽) 53개가 좋은 품질이다. 가볍고 작은 대 (경소죽) 48개에서 30개를 충청병사에게 보냈다. 큰 대 78개를 군관 등에게 주었다. 다음 중치 대(차중죽) 44개를 우수사에게 보냈 다. 좋지 않은 대(하하죽)는 26개다. 본영(여수)의 전선 7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5 척을 정비하여 왔 고, 전에 만든 2 척에서 의병에 1 척, 개조한 것이 1 척이다. 순천에는 10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 1 척 방답의 배 5 척이다. 흥양에는 10 척에서 그 현(현)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본영의 배 1 척, 사도의 배 5 척이다. 낙안에는 3 척에서 그 군(군)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광양에는 4 척에서 그 현(현)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1 척, 본영의 배가 1 척이다. 보성에는 8 척에서 그 군(군)에서 새로 만든 것이 2 척, 전에 만든 것이 2 척, 녹도가 2 척, 발포가 2 척이 다. 방답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여도에는 3 척에 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발포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사도에는 4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4 척이다. 녹도에는 3 척에서 새로 만든 것이 3 척이다. 도양장 논의 벼가 20섬 13말 5되 이고 아울러서 13섬 14말 8되와 콩 1섬 7말을 지었다. 1594년 1월 21일에 싸움에 나갈 수군(분부수군) 21 명을 내 보고, 팔결군(팔결군) 16 명을 도로 보냈다. 5월 3일 곳간 뒤지어 조사하 니, 군량이 349섬 14말 4□, 나무를 팔아서 들인 쌀 8십□□ 모두 432섬 14말 4되에서 지금 보내온 것이 65섬 12말 4되가 있다. 명나라 장수 장홍유(장홍유)의 자(자)는 중문(중문)이고 호는 수천 (수천)이며 □강성 영파부(절강성영파부)에 살며, 머슴은 주증(주 증)·구덕(구덕)이고, 같이 온 기패관은 장도관(장도 )·반준(반준) ·주봉(주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