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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16) -채만식-

카지모도 2021. 4. 2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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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화는 돈에는 주의도 하지 않고 입술에다가 루즈칠만 한다.

“빨리 빨리!”

“서두는 게 오늘 밤에 또 울어 뒀다, 고주사.”

“미쳤나! 내가 울긴 왜 울어”

“말두 마이소. 대체 그 초봉이락 하능 기 뉘꼬…… 예? 장주사는 알지요”

“알기는 아는데 나두 상판대기는 아직 못 봤네.”

행화는 제중당에 있는 그 여자가 초봉인 줄은 모른다. 모르고 어느 기생으로만 알고 있다.

“오늘 좀 불러 봤으면 좋겠다!…… 대체 어느 기생이길래 고주사가 그리 미망이 져서 울고불고 그 야단을 하노”

“허허허허.”

형보는 행화가 초봉이를 이름이 그럴듯하니까 기생인 줄만 알고 그러는 것이 우습대서 껄껄거리고 웃는다. 태수도 쓰디쓰게 웃고 섰다.

“예? 고주사…… 난두 기생이니 오입쟁이로 내 혼자만 차지하자꼬마는, 그러니 강짜를 하는 게 아니라아 고주사가 구만 하두우 미망이 져서 날로 붙잡고 초봉이, 초봉이 카문서 우니 말이오.”

“잔말 말앗!”

“앙이다! 그라지 말고오, 오늘은 어데 어떻기 생긴 기생인지 좀 구경이나 합시다, 예”

“까불지 말래두 그래!”

“하아! 내 이십 평생에 까분단 말이사 첨 듣소…… 예? 고주사, 오늘 데리구 같이 갑시다. 어느 권반이오”

“기생 아니야! 괜히 그런 소리 하다가는…….”

“하아! 기생 아니고, 그럼 신흥동(新興洞 : 유곽) 갈보라요”

“이 자식!”

태수가 때릴 듯이 엄포를 하고, 행화는 까알깔 웃으면서 방구석으로 피해 달아난다.

“잘한다! 잘한다!”

형보가 아랫목에서 제풀에 곱사춤을 춘다.

형보의 몫으로 기생 하나를 더 불러, 네 남녀가 탄 자동차는 길로 먼지를 하나 가득 풍기면서 공원 밑 터널을 빠져 ‘불이촌(不二村)’ 앞을 달린다.

바른편으로는 바다에 가까운 하구의 벅찬 강물에 돛단배들이 담숭담숭 떠 있고, 강 건너 충청도 땅의 암암한 연산(連山)들 봉우리 너머로는 오월의 창공이 맑게 기울어져 있다.

곱게 내리는 햇볕에 강 위의 배들이고 들판의 사람들이고, 모두 움직이건만 조는 것 같다.

태수는 그러한 풍광보다는 이 길이 공동묘지로도 가는 길이니라 생각하면, 나도 오래지 않아 죽어서 시체만 영구차(靈柩車)에 실리어 이 길을 이렇게 달리겠거니, 그리고 오늘처럼 돌아오지 못하고 빈 영구차만이 이 길을 돌아오겠거니 생각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눈가가 매워 왔다.

그러나 그 슬픔에는 초봉이로 더불어 죽어 더불어 묻히고, 더불어 돌아오지 못하니 차라리 즐겁다는 기쁨이 없지도 않았다.

일행은 은적사로 나가서 술 섞어 저녁을 먹고 훨씬 저문 뒤에 시내로 들어왔다. 시내로 들어와서는 다시 요릿집에 들어앉아 자정 후 두시가 지나도록 술을 먹고서야 파하고 헤어졌다.

태수는 술을 많이 먹느라고 먹었어도 종시 취하지를 못하고, 몸만 솜 피듯 피로했지, 취하자던 정신은 끝끝내 초랑초랑했다.

그는 자동차를 타고 오다가 개복동 어귀 행화집 앞에서 행화와 갈렸다. 행화는 기왕 늦었으니 제집으로 들어가자고 권했고, 태수도 그리하고는 싶었으나 좋게 물리쳤다. 너무 여러 날 바깥 잠만 자고 제 방을 비워 두어서는 안 될 ‘의무’ 한 가지가 있던 것이다.

태수는 바깥주인 탑삭부리 한참봉이 차라리 첩의 집에 가지 않고 큰집에서 자고 있기나 했으면 되레 다행이겠다고 생각하면서, 지쳐만 둔 대문을 살그머니 여닫고, 마당을 무사히 지나 뜰아랫 방인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마악 양복 저고리를 벗었을 때에, 신발 끄는 소리와 연달아 방문이 열리면서, 안주인 김씨가 눈이 샐쭉해 가지고 말없이 들어서더니, 다짜고짜로 와락 달려들어 태수의 팔을 덥석 물고 늘어진다.

 

5 아씨 행장기(行狀記)

 

김씨가 이럴 제는 탑삭부리 한참봉은 첩의 집에 가고 없는 게 분명했다. 줄 맞은 병정이라 태수는 마음놓고,

“아이구 아얏!”

허겁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방구석께로 피해 들어간다.

김씨는 물었던 것을 놓치고서 새액색 기어들고, 태수는 방구석에 가 박혀 서서 두 손을 내밀어 김씨를 바워 낸다.

“다시는 안 그럴게, 다시는…….”

태수는 어리광을 떨면서 빌고, 김씨는 약올랐던 것이 사그라지기 전에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참을 겸 입을 따악 벌리고 연신 덤벼 든다.

“아, 안 돼. 아, 안 돼.”

“다시는 안 그러께요. 거저 다시는 안 그러께요!”

태수는 지친 몸을 지탱하다 못해 펄씬 주저앉아서 두 손바닥을 싹싹 비빈다.

김씨는 태수가 그러면 그럴수록 꼬옥 한 번만 더 물고 싶어 죽는다. 인제는 밉살스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뻐서 물고 싶다.

김씨는 물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태수가 이뻐도 물고, 미워도 문다. 물어도 그냥 질근질근 무는 것이 아니라, 사정없이 아드득 물어뗀다. 이렇게 물어 떼는 맛이란, 잇념 속이 근질근질, 몸이 금시로 노그라지는 것 같아 세상에도 꼭 둘째 가게 좋지, 셋째도 가지 않는다.

그 덕에 태수는 양편 팔로 어깨로 젖가슴으로 사뭇 이빨자국투성이다.

처음 시초는, 소리를 내서 티격태격하기가 조심이 되니까, 소리 안 나는 싸움을 하느라고 물고 물리고 했던 것인데, 시방 와서는 그것이 둘 사이에 없지 못할 애무(愛撫)가 되고 말았다.

무는 김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물리는 태수도 아프기야 아프지만, 그놈 살이 떨어질 듯이 아픈 맛이란, 약간 안마(按摩) 못지않게 시원하다.

김씨는 태수가 젊고, 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좋은 데가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물어 뗄 수 있는 것이 더욱 좋았다.

그는, 언젠가 남편이 첩의 집에 가지 않고 큰집에서 같이 자던 날 밤인데, 아쉰 깐에 태수한테 하던 버릇만 여겨, 그다지 기름지지도 못한 남편의 젖가슴을 텁석 물어 떼었다.

했더니, 탑삭부리 한참봉은 경풍하게 놀라,

“아니, 이 여편네가 이건 미쳤나!”

고함을 지르면서 김씨의 볼때기를 쥐어박질렀다. 그런 뒤로부터는 김씨는 남편과 잘 때면 조심을 하느라고 애를 쓰곤 했었다.

김씨는 종시 입을 따악 벌리고,

“아…… 한 번만 더 물자. 아.”

하면서 자꾸만 태수 앞으로 고개를 파고든다.

“아퍼 죽겠구만!”

태수는 먼저 물린 자리를 만지면서 바로 응석을 부린다.

“그래두. 그새 죄진 벌루다가…… 아, 한 번만 더. 아.”

“싫여이!”

“요것아!”

물기도 이골이 나서 어느결에 들이덤볐는지, 태수의 어깨를 덥석 물고 몸을 바르르 떤다. 으응!

소리가 사뭇 징그럽다.

“아이구우! 이놈의 늙은이가 인전 날 영영 죽이네에!”

태수는 방바닥에 나동그라져 우는 시늉을 하면서 물린 어깨를 손바닥으로 비빈다.

“아프냐”

김씨는 좋아서 태수의 얼굴을 갸웃이 들여다보다가, 머리를 안아올려 무릎을 베게 해준다.

“응, 아퍼 죽겠어!”

“아이 가엾어라! 내 새끼…… 자아 그럼 쎄쎄 해주께, 응”

김씨는 태수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싹싹 비비면서,

“쎄쎄 쎄쎄, 까치야 까치야, 우리 애기 생일날…… 아이 술냄새야! 술을 또 퍼먹었구나”

“응, 아주 많이…….”

“왜 그렇게 술을 몹시 먹구 다녀! 그대지 일러두”

“속이 상해서!”

“속이 왜 상허구, 또 속상헌다구 술만 먹구 다녀선 쓰나? 몸에 해룹기나 허지. 무엇 밀수(蜜水)나 좀 타다 주까”

태수는 고개만 살래살래 흔들고 눈을 스르르 감는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태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김씨도 역시, 태수만 못지않게 얼굴에 수심이 드러난다.

“아무래두! 아무래두…….”

김씨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하듯 혼자말로 뇌사린다.

“……너를 장가나 딜여서 맘을 잡게 해야 할까 부다! 아무래두.”

“장가? 흥! 장가아!”

태수는 시쁘듬하게 제 자신더러 하는 듯 이런 조소를 하다가 다시,

“……혹시 우리 초봉이라면!”

“건 안 될 말이다!”

김씨는 시방까지 추렷하고 상냥스럽던 얼굴과는 딴판으로, 더럭 표독스럽게 잡아뗀다.

“대체 어째서 초봉이라면 그렇게 치를 떨우”

태수는 열이 나서 벌떡 일어나 앉아 눈을 찢어지게 흘긴다.

“……초봉이가 당신네 신주단지요”

“네게는 과분해.”

김씨는 아까 낯꽃 변했던 것을, 태수한테 띄지 않고 얼핏 고쳐, 천연스럽게 갖는다.

“내, 오기루라두 기어코 초봉이허구 결혼하구래야 말걸”

태수는 씹어 뱉듯이 두런거리면서 아무 데나 도로 쓰러진다.

“내가 방해를 놀아두”

“그게 원 무슨 놈의 갈쿠리 같은 심청이람!…… 그래, 우리가 언제까지구 이렇게 지내다가는 못쓰겠으니 갈려야 하겠다구, 뉘 입으루 내논 말야…… 뭐 또, 날더러 맘을 잡으라구, 다아 그렇게 하자면 역시 장가를 들어야겠다구 한 건 누구야? 내가 장가를 가겠다면 중매 이상으루 가진 뒷수발 다아 들어 주겠다구는 뉘 입으로 한 말야”

“그래 글쎄! 내가 중매까지 서구, 말끔 대서 장간 딜여 줄 테야!”

“그런데 왜 내가 좋다는 초봉인 훼방을 놀려구 들어”

“초봉인 안 된다! 네게루 가면 그 애가 불쌍해. 천하 건달 부랑자한테루 그 애가 시집을 가서 신세를 망친대서야 될 말이냐”

“별 오라질 소리두 다아 허구 있네!”

태수는 골딱지가 나서 벽을 안고 누워 버린다.

태수는 그래서 골을 내는 것이지마는 김씨는 김씨대로 노여움이 없지 못하다. 노여움 끝에는 자연 일의 시초가 여자답게 뉘우쳐지기도 한다.

태수가 여관에서 묵다가 아는 사람의 반연으로 이 집으로 하숙을 잡아 들기는 작년 여름이다.

제 밥술이나 먹는 탑삭부리 한참봉네가 무슨 우난 이문을 바라서 그런 건 아니고, 기왕 뜰아랫방이 비어 있으니 비어 내던져 두느니보다 점잖은 손님이라도 치고 싶다고 김씨가 이웃에 말을 냈던 것이 계제에 염집을 구하던 태수한테까지 발이 닿았던 것이다.

본시야 서로 코가 어디 가 붙었는지도 모를 생판 남이지만, 한번 주객이 되고 보매 둘 사이는 매삭 이십오 원이라는 밥값을 주고받는다는 거래를 떠나서 서로 마음이 소통되게끔 사정이 마침 맞았다.

태수는 생김새도 흉치 않거니와 성품도 사근사근하니 정이 붙게 하는 데가 있어 탑삭부리 한참봉더러도 아저씨 아저씨 하고 정말 일가뻘이나 되는 조카처럼 따르고 더러는 맛좋은 정종병도 들고 들어와서 적적한 밥상머리에 앉아 반주도 권해 주고 하는 짓이 수월찮이 밉지 않게 굴었다.

탑삭부리 한참봉은, 그것도 자식 없는 사람의 약한 인정이라, 태수가 그래 주는 것이 적잖이 위로가 되고, 그러는 동안에 정이 들어, 지금 와서는 어느 때는 태수가 꼭 자기의 자식이나 친조카같이 생각되는 적도 있었고, 그래서 그는 늘 태수의 밥상 같은 것에도 마음을 쓰고, 아내더러 도미를 사다가 찜을 해주라고까지 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모르는 건 놈팽이뿐.’

이런 물 건너 속담도 있거니와, 물론 그는 아내와 태수 둘이서 그런 짓을 하고 지내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여자라는 것은 무슨 정이고 간에 정이 들기가 남자보다 연한 편이다.

김씨는 태수가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면서 상냥하게 굴고 하는 서슬에 그가 주인 정해 온 지 석달이 채 못해서, 남편이 일 년 가까이 된 요새 겨우 태수한테 든 정 그만큼, 도타운 정이 그때에 벌써 들었었다. 김씨는 그래서 그때부터, 조카같이 오랍동생같이 나이를 상관 않고 자식같이 귀애했고, 귀애하기를 남편 한참봉만 못지않게 귀애했다.

그러하던 중…… 작년 시월 초생, 음력으로 보름께였던지, 달이 휘영청 밝고 제법 산들거리는 게 젊은 사람은 객회가 남직한 밤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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