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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31)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7.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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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 노릇이군!”

더욱 감격하다 못해 필경 눈이 싸아 하고 눈물이 배는 것을, 그러거나 말거나 앉아서 중얼거리듯

탄식을 하던 것이다.

“으음…….”

다시 훨씬 만에, 이번에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면서 연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는 비로소 아까 초봉이를 야속해하던 생각이며, 그의 혼인을 훼방 놀지 못해 초조 불안하던 것이며, 더구나 태수한테 질투와 증오를 갖던 제 자신이, 초봉이의 그렇듯 깨끗하고 아름다운 맘씨에 비하여 얼마나 추하고 부끄러운 소인의 짓이던가 싶었다.

“거룩한 노릇이야!”

승재는 마침내 남의 그렇듯 거룩한 행위에 대한 감격이 적극적인 의욕으로 번져 나가면서, 그리하자면 우선 손쉽게 가령 태수한테라도 그에게 가지던 비열한 마음을 죄다 버리고 일변 그의 병을 정말 지성스런 마음으로 치료를 해주는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고, 하면은 더욱이 초봉이를 위하여 정성을 씀이 되는 것이니 두루 추앙할 일일 것 같았다.

결심을 가지고 나니 승재의 마음은 노곤했던 잠결같이 편안해졌다.

승재가 마치 몽유병자가 된 것처럼 별안간 감격 황홀해져서 있는 것을, 계봉이는 과실과 과자를 서로가람 집어다 먹어 가면서 우스워 못 보겠다는 듯이 해끗해끗, 재미있어만 하다가 승재의 거룩한 노릇이라는 두 번째 탄성에는 말끄러미 경멸하듯 올려다보고 있더니 필경,

“가관이네…… 아니, 쥐뿔은 어떻구”

하면서 우선 한마디 쏘아다 부딪는다.

“왜…… 아름답구 거룩한 거 좋잖아”

승재는 아직도 꿈을 꾸는 듯 얼띤 얼굴에 허한 음성이다.

“오오라!…… 그럼 남서방두 인제 딸 나서 자라믄 장사 밑천 얻자구 아무한테나 내주겠구려”

“허어! 난 그런 것보담두 위선 초봉이 언니의 아름다운 맘씨를 가지구 하는 말인데!”

“아름다운 맘인가? 아주 케케묵은 생각이지!”

“못써요!…… 아름다운 건 아름답게 보아 버릇해야 하는 법야…… 초봉이 언니 맘씨가 오죽 아름다워”

“못나서 그래요!”

“저거! 하는 소리마다!”

“괜히 잠꼬대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혼내 줄 테니…….”

“계봉이 못쓰겠어!”

“흥! 그래두 두고 봐요!”

“두고 보아야 머 응석받이”

“암만 응석받이라두 나두 눈치는 다아 있어요…… 이봐요 남서방…… 글쎄 이번에 우리 언니가 그 결혼을 해서 잘산다구 칩시다…… 그렇더래두 말이지, 맨 첨에 맘을 먹기를 장사 밑천 얻을 양으루다가 딸을 내놓는 그 맘자리가 그게 고약스럽잖우…… 그러니깐 아무리 우리 부모라두난 나쁘다고 할 말은 해요…… 말이야 다아 그럴듯하잖어…… 사람이 잘나구, 머 똑똑하구, 전문대학교를…… 하하하하, 글쎄 우리 어머니가 전문대학교래요! 그래 내가 있다가, 대체 전문대학교가 어딨느냐구 핀잔을 주니깐, 하는 소리 좀 들어 봐요!…… 아 이년아, 더 높은 학굔 게로구나, 이러겠지? 하하하하, 내 온…….”

계봉이가 웃는 바람에 승재도 섭쓸려서 웃는다.

“……그래 글쎄, 그렇게 사람이 잘나구 어쩌구저쩌구 해서 너를 위해서 첫째는 이 혼인을 하는 것이라구, 그러구 장사 밑천이야 다아 여벌이 아니냐구 그리더라나…… 아이구 거저, 내가 그대루 앉았다가 그런 소릴 들었더라믄 뾰죽하게 한바탕 몰아세는걸.”

“그러면 말이지…….”

승재는 계봉이가 어찌하나 본다고,

“……자식이 부모를 위하여 희생하는 게 나쁘기루 치면, 부모가 자식 때문에 자식을 모두 길러내느라구 고생하구 하면서 역시 희생하는 것도 마찬가지루 나쁜가”

“아니.”

“왜? 그건 어째서”

“부모는 자식을 제가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두룩 길러 내구 교육시키구 그럴 의무가 있으니깐, 그러니깐 희생을 해서라두 의무 시행을 해야 옳지…… 세납 못 바치믄 집달리가 솥단지나 숟갈집어 가듯이…… 우리집에서두 전에 한번 그 일 당한걸, 하하하.”

승재는 인제 겨우 여학교 삼년급에 다니는 열일곱 살배기 계집아이가 대체 어느결에 어떻게 해서 그런 소리까지 할 줄 알게 되었나 싶어 아까 누이동생 정하기 싫다구 하던 때와는 의미가 다르나 역시 놀랍구 겁이 나는 것 같았다.

이튿날 승재는 태수의 ××을 혼인날까지 기어코 낫우어 줄 딴 도리가 없을까 하고 두루두루 궁리를 해보면서 혼자 애를 썼다. 그리고 앞으로는 태수를 결코 미워하지 않겠다고, 다시금 제 마음에 맹세를 했다.

그러나 막상 오후가 되어 태수가 척 들어설 때는 승재의 마음의 맹세는 그다지 힘을 쓰지 못했다.

마음은 그래서 동요가 되었어도, 그는 그것을 억제하면서 밤 사이의 증세도 물어 보고, 술을 삼가고 음식을 자극성 없는 것으로 조심해서 가려 먹으라고 두루 신칙하기를 잊지 않았다.

 

9 행화의 변(辯)

 

치료를 받고 난 태수는 그 길로 개복동 행화(杏花)의 집을 들렀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오늘도 형보가 먼저 와서, 아랫목 보료 위에 가 사방침을 베고 드러누웠고,

행화는 가야금을 심심삼아 누르고 있다.

“자네, 집 장만했다면서 방이 몇인가? 남을 게 있나”

태수가 마루로 올라서노라니까, 방에서 형보가 이런 소리를 먼저 묻는다. 형보는 태수가 결혼을 하고 살림을 차리면 비벼 뚫고 들어갈 요량을 대고 있는 참이다.

“염려 말게. 그러잖아두, 다아…….”

태수는 방으로 들어서면서 우선 양복 저고리를 훌러덩 벗어 들고 휘휘 둘러보다가 행화가 차고 앉은 가야금 위에다 휙 내던지고 모자는 벗어서 행화의 머리에다 푹 눌러 씌운다.

“와 이리 수선을 피우노…… 남 안 가는 여학생 장가나 가길래 이라제”

행화는 익살맞게 그대로 까딱 않고 앉아서 태수한테 눈을 흘긴다.

“하하하하, 그래그래, 내가 요새 대단히 유쾌해!”

“참 볼 수 없다!…… 그 잘난 제미할 여학생 장가로 못 갈까 봐서 코가 쉰댓 자나 빠져 갖고 댕길때는 언제고, 저리 좋아서 야단스레 굴 때는 언제꼬!”

“하 이 사람, 그러잖겠나? 평생 소원을 이뤘으니…… 그렇지만 염려 말게…… 신정이 좋기루 구정이야 잊을 리가 있겠나”

“아이갸! 내 차 타고 서울로 가서 한강 철교에 자살로 할라 캤더니, 그럼 그 말만 꼬옥 믿고 그만 두오, 예”

“아무렴, 그렇구말구…… 다아 염려 말래두 그래!”

시방 행화는 농담으로 농담을 하고 있지만, 태수는 진정을 농담으로 하고 있다. 그는 초봉이와 약혼을 한 그날부터는 근심과 불안을 요새 하늘처럼 말갛게 싹싹 씻어 버렸다.

그새까지는 근심이 되고 답답하고 할 적마다, 염불이나 기도를 하는 것과 일반으로, 뭘! 약차하거든 죽어 버리면 고만이지, 하고 그 임시 그 임시의 번뇌를 회피하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일을 좀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늘 불안과 더불어 그것이 가슴에 서리고 있었다.

하던 것이, 영영 그를 모피하지는 못할 형편인데 일변 한 걸음 두 걸음 몸 바투 다가는 오고 그러자 마침 초봉이와 뜻대로 약혼까지 되고 나니, 그제는 아주 예라! 이놈의 것…… 하고, 정말로 죽어 버릴 결심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해서, 그 무겁던 불안과 노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을 받은 것이다.

--제일 큰 소원이던 초봉이한테 여학생 장가를 들어 마지막 원을 푼 다음에야 단 하루라도

좋고 이 생에 아무 미련도 없다. 그리고 (그래서 장차 어느 날일지는 몰라도 그날에 임하여 종용 자약하게 죽음을 자취할 테나) 그러나 그날의 최후의 일순간까지라도 이 세상을 깊이 있고 폭 넓게, 단연코 즐거운 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리하자면 첫째 초봉이로 더불어 맺은 꿈을 최대한으로 호화롭게 꾸며야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많이 많이 뚱땅거리고 술을 마시면서 놀아야 한다. 계집도 할 수 있는 껏 여럿을 두고 지내야 한다. 하니까 행화도 그대로 데리고 지낼 테다.

돈도 도적질도 좋고 빚도 좋고 사기 횡령 다 좋다. 재주껏 끌어 대면 그만이다.

즐겁고 유쾌하자면 그러므로 몸에 고통이 없어야 한다. 그러니까 병원에를 다니면서 ××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렇듯 태수는, 마치 무슨 의식을 거행하는 데 순서를 작정해 논 것처럼, 앞일을 가뜬하고 분명하게 짜놓았다.

해서 그는 진정으로 유쾌하고 명랑했던 것이지 조금도 억지로 그러는 것이 아니던 것이었다.

태수와 행화가 주거니 받거니 한참 지껄이는 동안, 형보는 제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이윽고 끙하면서 일어나 앉더니 태수 앞에 놓인 해태 곽을 집어다가 한 대 피워 물고는, 저도 말에 한몫 끼자고,

“행화가 말루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해두 다아, 속은 단단히 꽁한 모양이지”

“와”

“아, 저렇게 이쁜 서방님을 뺏기니깐…….”

“하! 고주사가 이쁘문 거저 이뻤나? 돈을 주니 이뻤제…….”

“조건 농담을 해두 꼭 저따우루 한단 말야!”

“와 농담고? 진정인데…….”

“그래그래, 말이야 말루 바른말이다…… 그런데, 아무튼 고주사가 장가를 든다니깐 섭섭하긴 섭섭하지”

“체! 고주사가 장가 안 가구 있으문 언제 나한테루 장가온다 카던기요…… 내는 조강지처 바래지도 않소.”

“거저 저건 팔자에 타고난 화루곗물건이야!”

“아니, 장주사두 철부지 소리로 하지 않소”

더럭 성구는 행화는 그렇다고 흥분한 것은 아니나, 농담하는 낯꽃도 아니다.

“……기생이문 기생답게 돈이나 벌고 다아 그랄끼지, 아이고 무얼 팔자 탄식을 하고, 첩이 싫다고 남의 조강지처나 바라고 하는 거 내 그만에 구역이 나더라, 제에!”

“흥!”

“그라제…… 또오, 기생년이 뭣이냐 연애한다고 껍덕대는 거, 내 참 눈이 시여 못 보겠더라.”

“아니, 기생이라구 연애하지 말라는 법두 있나? 이 사람 자네 너무 겸손허이!…… 괜히 동무들한테 몽둥이 맞일…….”

“기생이 연애가 어데 당한 거꼬…… 주제에 연애로 한다는 년도 천하 잡년, 기생년하고 연애하자구 덤비는 놈팽이두 천하 잡놈…….”

“아니 어째서……”

여태 싱글싱글 웃고 앉아서 저 하는 양만 보고 있던 태수가, 저도 어디 말을 시켜 본다는 듯이 얼른 거들고 나서던 것이다.

“……이건 내가 되려 행화 말마따나, 차를 타구 서울로 가서 자살을 하던지 해야 할까 보아 응…… 아, 그래두 난 여태 행화허구 연애를 하거니 하구서, 멋없이 좋아하잖앴나!”

“하아! 당신네들이 암만 그란다고, 내 무척 입살을 탈 내오!…… 아예 말두 마소…… 돈 받고 ×××× 연애라 카오…… 뭇놈이 디리 주무르던 몸뚱이제, ××이야 매독이 시글시글해서 그만에 한쪽이 썩어 들어가제, 그런 주제에 연애가 무어 말라죽은 거꼬”

“허!…… 그래두 난 행화한테 연앨 한걸”

“말두 마소…… 글쎄 고주사만 해두, 나하구 살로 섞고 지내문서 달리 초봉이라 카는 색시하고 연애로 해서 장가가지 않소…… 그걸 쥐×도 내가 시기로 하는 기 아니라, 그것만 봐도 기생하고는 연애가 안 되길래 그러는 기 아니오? 이 답답한 되련님, 요!”

“흥! 그래두 난 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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