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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56)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7.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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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지막 잘라서 하고 난 제호는 이어 몸을 움직여 대뜰로 내려갈 자세를 갖는다.

인제 할 말도 다 했거니와 볼일도 없으니 나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객꾼인 걸 더 충그리고 있을 며리가 없지 않으냐

이렇게 생각하면 자리가 열적기라니, 기다란 몸뚱이를 어떻게 건사할 바를 모르겠었다.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선뜻 발길을 떼어 놓잔즉, 그것은 더구나 점직해서 할 수가 없었다.

짜장 초봉이더러는 검다 희단 말 한마디 않고서 코 벤 돼지처럼 이대로 휭하니 달아나자니 원 천하게 열적기란 다시 없는 짓이다.

여태 가까이 두고 제가 탐탁해서 데리고 살던 계집인 걸 비록 요새로 들어 안팎 켯속이 다 파탈은 날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한데 마침 처분하기 십상 좋은 계제는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아무려면 남보다 갑절이나 긴 얼굴을 들고서 이다지도 박절하게 (실상인즉 싱겁게) 꽁무니를 빼다니, 항차 저게 생억지엣뗀 줄을 빤히 알면서 언덕이야 그걸 핑계삼아 부우 거짓말을 흘려 놓고 도망가는 마당에 말이다.

제호는 어쩔 줄을 몰라 속으로 쩔쩔맬 것 같았다. 그런 걸 마침 또 이 열없는 곱사 서방님이 귀인성 없이 재치를 부려 놓으니 딱 질색할 노릇이다. 형보가, 바야흐로 제가 주인이 된 듯 손님을 배웅하는 좌석머리의 태를 내어,

“어 참, 이렇게 다아 깊이 이해를 해주시니…….”

하면서 곱사등을 너풋 꾸부리던 것이다. 그래, 제호는 사뭇 질겁을 하여,

“이해라니요! 건 아닙니다…….”

하면서 화급히 형보를 가로막는다.

“……천만엣말씀이지, 난 머 그런 이해구 무어구 그런 게 아닙니다. 난 참 말하자면, 패하구서 쫓겨가는 패군지졸인걸요. 별수없이 그렇지요, 패군지졸!”

제호는 맨 끝에,

‘패하고 쫓겨가는 패군지졸.’

이란 말을 일부러 감회 있이 소리나게 하느라고 없는 재주를 부리다가 잘 되지를 않으니까, 건 세리프로 한번 더 되풀이를 한다. 연극을 하자는 것이다.

그는 제 의뭉한 배짱은 깊이 묻어 두고 약삭빨리 서둘러, 얼은 입지 않고서 되도록이면 좋게 갈리고 싶었다. 그래야만 오늘 갈리고 내일부터는 안 볼 값에, 초봉이며 또 그의 부친 정영배한테라도 체면이 유지가 될 것이었었다. 그래서 이 마마손님을 건드릴세라, 어물쩍하고 달아나려는 참인데, 형본지 곱산지가 나서서 긴찮게 방정맞은 소리를 지절거리고 보니, 일이 단박 외창이 나게 되던 것이다.

형보의 말이 깊이 이해를 해주어서라고 했으니, 그걸 그냥 두고 만다면 초봉이의 해석이 자연 온 당치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내 둘이 대가리를 맞대고 앉아서, 자 그건 내 계집이다 인 다구, 아 그러냐 그러면 옜다 나는 방금 염증이 나던 판인데 실없이 잘되었다 자 가져가거라, 이렇게 의논성 있이 한 놈이 한 놈한테 떠맡기고서 내빼는 놀음쯤 된 혐의가 없지 못했다. 거기서 제호는 연극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는 우정 초봉이더러 들으라고 이해라니 천만엣소리라고 펄쩍 뛴 것이요, 그리고 나도 할 수 없어 너를 뺏기고 쫓겨나니 그 회포가 자못 처량쿠나, 그러니 너도 이러한 내 심정이나 헤아려 다구, 이런 옹색스런 근천을 피우느라고 쫓겨가는 패군지졸이네 무어네 하면서 아쉰 세리프를 뇌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출 수 없는 그 세리프가 우환중에 침통한 소리로 나오지도 못하고 어색하디어색했으니 연극은 실패요, 하니 인제는 영영 민두룸히 달아나 버릴 수는 없고 말았다.

제호는 할 수 없이 초봉이한테 이를 말을 생각해 가지고 몸을 돌이키면서 안방께로 두어 걸음 주춤주춤 다가선다. 영락없이 어린 아이들이 쓴 약이 먹기 싫어서 눈을 지그려 감고 약그릇을 집어드는 꼬락서니다. 그는 눈이야 감지 않았어도, 얼굴은 아직 똑바로 두르지 못하고서 거진 옆 걸음걸이를 하듯 우선 안방 문께로 다가서기만 해놓는다. 그러고 나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바로 돌려 초봉이의 얼굴을 마주본다.

그 선뜻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이다. 제호는 등골이 그만 서늘해서 오싹 몸서리를 친다.

쏘아 올라오는 초봉이의 눈살…… 마침 기다리던 듯이 이편의 돌리는 눈앞에 와서 딱 마주치는 초봉이의 눈살은 금시로 새파란 불이 망울망울 돋는 듯했다. 그것은 매서운 걸 한 고비 지나서 일종 처염한 광망(光芒)과도 같았다. 분명한 살기이었었다.

제호는 사람의 눈에서, 더욱이 여자의 눈이 이다지도 무서운 살기가 뻗쳐 나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하려던 말도 칵 막혀 버리고 제호는 어름어름한다. 남의 웬만한 노염이나 흥분 같은 것은 짐짓 모른 체하고 제 할 노릇만 버엉뗑 하면서 해치우는 제호지만 이대도록 칼날이 선 이 자리의 초봉이 앞에서는 그러한 떡심도 별수없고 오갈이 들려고 하던 것이다.

초봉이는 실상 제호가 아까 첫번에 하던 말은 그게 무슨 뜻인지 분간을 못 하고 어릿두웅했었다.

다음 번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속을 알기는 했는데 진실로 마른 하늘의 벼락이었었다.

사세가 옴나위할 수 없게 절박했던 만큼 기대도 천근으로 무거웠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 무거운 기대를 메고 동동 달려 팽팽하게 쎙겼던 다만 한 가닥의 줄이 의외에, 참으로 의외에도 매정스런 한 칼에 뚝 잘려 버리는 순간, 천길 높은 절벽으로부터 쏟쳐 내려치는 듯 아찔해서 정신을 수습지 못했다.

순간이 지나자 빼쳐 나갈 골이 없는 절망은 곧 악으로 변했다.

초봉이는 제호가 혹시 일을 저 혼자 감당하기에 힘이 겨우면 초봉이 저더러라도, 자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또 하다못해 형보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겠다고라도 일단은 상의나 권고를 해는 볼지언정 이대도록까지 양박스럽게 잡아 끊고 나서리라고야 천만 생각도 못 했던 일이다.

핍절한 여망을 배반당한 분노는 컸다. 아드득 깨물어 먹고 싶단 말이 있거니와, 시방 초봉이가 제호한테 대한 노염이나 원한은 마치 그런 것일 게다.

형보는 아직 둘째다. 생각도 안 난다. 시방은 제호, 오직 제호가 눈에 보일 뿐이다.

천하에 몹쓸 놈이다. 내게다가 그다지도 흠선히 굴면서 평생 두고 변치 않을 듯이 하던 건 누구며, 그러던 박제호가 나를 저 흉악한 장형보한테다가 떠밀고 도망을 치다니! 의리부동한 놈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속여 농락만 해온 것이 아니냐

초봉이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타오르는 분노에 악이 기름을 친다. 치가 떨렸다.

제호의 변해 버린 근일의 심경을 알지 못하는 초봉이로서는 당연한 원혐이기도 했다.

제호는 초봉이의 이 지나친 격동에 언뜻 한 가지 의념이 솟아났다.

내가 표변을 한 걸로 저렇게 격분을 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것이 단지 이 곱사한테로 가기가 싫어서만 그러는 것일까? 그러나 그거야 제가 싫으면 내쫓아 버리면 고만일 걸 가지고 저다지도 지레 요란떨이를, 더구나 내게다 대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 제호는, 그러면 저 계집이 쌀쌀하던 것은 겉뿐이요, 실상 속은 따로 내게다가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게 아니던가 하는 반성이 노상 없을 수는 없었다.

제호는 그러나 잠깐 침음하다가 역시 허황한 생각이라고 혼자 고개를 흔든다. 초봉이를 데리고 살아오는 동안 어느 한구석, 어느 한 고패서고 그의 계집다운 진정의 포즈를 본 적이 있다고는 믿고 싶어야 믿을 건지가 없던 것이다.

제호는 시방이야 다 식어졌다 하지만 돌이켜서는 저 혼자나마 정을 붙였던 계집이요, 일변 또 그 마음을 앗으려고 온갖 정성을 다 들이던, 말하자면 애원(愛怨)이 상반하던 계집이다.

그러던 것을 마침내는 그다지 간절하던 뜻을 풀지를 못하고서, 내 정이 식은 끝에는 두루두루 짐스러운 생각만 남았는데, 계제에 핑곗거리를 얻은 터라, 덤쑥 남의 손에다 떠맡기고 바야흐로 물러서는 마당에 이르고 보니 다 시원하고 일이 다행스런 것이야 여부가 없으나, 그러나 그래도 어느 한구석엔가는 가느다란 미련이 한가닥 처져 있지 않진 못했었다. 이런 제호 제 자신 의식지도 못할 미련으로 해서, 혹시나 내가 애정의 관측을 그릇했던 것이 아니던가 하는 저도 모를 새에 센티멘털한 반성을 해보았던 것이다.

제호는 그러느라 잠시 침음에 잠겼었으나 실상 일순간이요, 곧 정신이 들었다.

이 잠깐 동안의 침음으로 해서 제호는 초봉이에게 대한 과거의 불만을 되씹은 덕에 도리어 생각잖은 이문을 보았다.

‘흥! 저는 내게다 무얼 잘했다고 눈살이 저리 꼬옷꼿한고? 아니꼽다!’

‘계집애 한 마리 겁나서 할 일 못 할 내더냐? 그래 어때? 헌계집 데리고 살다가 내버리는 게 머 역적도모더냐’

제호는 뱃심이 금시로 불끈 솟았다. 그러면서 그는 우정 초봉이게로 한발짝 다가선다.

초봉이는 종시 깜짝도 않고 제호를 올려 쏘고 있다. 가쁜 숨길이 보이는 것 같다. 얼굴은 해쓱하니 핏기 한 점 없고, 지그시 문 아랫입술은 새파랗게 질렸다. 젖꼭지를 물고 안겨 있는 송희의 가슴께로 드리운 왼편 팔끝의 손이 알아보게 바르르 떨린다. 무슨 말이 와락 쏟아져 나올 텐데 그게 격분에 막혀 터지지를 못하는 체세다.

“어, 그새 참…….”

제호는 저편이야 무얼 어쩌거나 말거나 인제는 상관 않기로 하고, 제가 할 말만 의젓이 늘어놓는다. 그래도 살기 띤 눈살은 피해서 입께를 보면서,

“……변변찮은 내한테 매달려서 고생 많이 했소. 생각하면 미안한 말이야 다아 이를 데가 없소마는…….”

초봉이는 말소리가 들리는가 싶잖게 이내 그 자세로 까딱도 않고 있고, 제호는 잠깐 숨을 돌렸다가 다시 뒤를 이어,

“……그리구 어, 그 동안 두구 보았으니 내 성밀 알겠지만, 내가 이렇게 선뜻 일어서는 건, 결단코 임자가 부족한 데가 있어서 그런다거나, 또 새삼스럽게 과거지살 탈을 잡아 가지구서 그리는건 아니구, 내란 위인이 본시 못생겨 먹은 탓으루, 가령 이런 일만 하더래두 마주 겯구 틀구 다아 그리질 못하는구려!…… 그렇지만 나는 물러나선다구, 그렇다구 임자더러 저 장씨의 사람이 되란다거나 다아 그런 의사는 아니니깐, 그런 거야 종차 두 분이 형편대루 상의껏 조처할 일이지, 내가 그걸 좌지우지할 동기가 된다던지, 더욱이 내가 또 이러라저러라 시킬 며리는 없는 것이니까…….”

제호는 여기까지 단숨에 말을 해놓고 보니 끝이 무뜩 잘리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 끝을 잇댈 말도 별반 없었다. 그래서 그만하고 작별인사 겸,

“자아, 그러면…….”

마침 이 말이 나오는데, 그러자 별안간 초봉이가,

“다들 가거라 이놈들아!”

하고 목청이 터지게 외치면서 미친 듯 뛰쳐 일어서던 것이다. 그 서슬에 송희를 문턱 안에다가 내동댕이를 쳤고, 그래 아이가 불에 덴 듯이 까무러치게 울고 해도 초봉이는 모르는 모양이다.

눈에서는 닿으면 베어질 듯 파랗게 살기가 쏟쳐 나온다. 아드득 깨물어 뜯은 아랫입술에서는 검붉은 피가 한 줄기 조르르 흘러내려 턱으로 또렷하게 줄을 긋는다. 풀머리를 했던 쪽이 흐트러져 머리채가 한가닥 어깨 앞으로 넘어와서 치렁거린다. 그다지 고르고 곱던 바탕이 간곳없고, 보기싫게 사뭇 삐뚤어진 얼굴은 터질 듯 경련을 일으켜 산 고깃덩이같이 씰룩거린다. 이는 여느 우리 인간의 눈이나 얼굴이기보다도 생명을 노리는 적에게 바투 몰려 어디고 침침한 막다른 골로 피해 들었다가 절망코 되돌아선, 한 약한 짐승의 그것이라고 하는 게 근리하겠다.

옳게 겁을 먹은 제호는, 이 계집이 혹시 상성이 되는 게 아닌가 하고 눈이 휘둥그래진다.

초봉이는 처음 한마디 고함을 치다 말고 숨이 차서 가쁘게 씨근씨근한다.

형보는 등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봉이의 형용을 보지 못하기도 했지만, 종시 귀먹은 체하고 서서 담배만 풀썩풀썩 피울 뿐 아무렇지도 않아한다.

제호는 물심물심 뒤로 물러서다가 슬금 돌아서 버린다.

송희가 으악으악 울면서 치마폭을 잡고 기어올라도 초봉이는 눈도 거듭떠보지 않는다.

“……이 악착스런, 이 무도한 놈들 같으니라고!”

마침내 초봉이는 마루청을 쾅쾅 구르면서 두 주먹을 부르쥐고 목청껏 외쳐 댄다.

“……하늘이 맑다구 벼락두 무섭잖더냐? 이 천하에 무도하구 몹쓸 놈들아…….”

음성은, 외치던 고함이 그새 벌써 넋두리로 변해 목이 멘다.

“……내가 느이허구 무슨 원수가 졌다구 요렇게두 내게다 핍박을 하느냐? 이 악착스런 놈들아!…… 아무 죄두 없구, 아무두 건디리잖구 바스락 소리두 없이 살아가는 나를, 어쩌면 느이가 요렇게두 야숙스럽게…… 아이구우 이 몹쓸 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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