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새까지는 네가 박제호의 첩으로 있었지만, 나는 독신이니까 인제부터는 버젓한 정실 노릇을 할 뿐더러 어린것도 사생자라는 패를 떼게 되지 않느냐.
형보는 간간 담배도 피워 가면서 한 마디씩 두 마디씩 넉장으로 뜅기고 앉았고, 초봉이는 자는 송희 옆에 두 무릎을 깍짓손으로 껴안고 모로 앉아 형보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그냥 그러고만 있다. 그렇게 하기를 한 식경은 한 뒤다.
“오-냐! 네 원대루, 네 계집 노릇 해주마. 그렇지만…….”
초봉이는 마침내, 모로 앉았던 몸을 돌려 윗목의 형보한테로 꼿꼿이 고개를 두른다. 물론 마음먹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지, 무슨 졸리다 못해 나오는 대답인 것은 아니었었다.
승낙이 내리자 형보는 좋아라고 그러잖아도 큰 입이 더 크게 째지면서, 아무렴 그래야 옳지야고 진작 그럴 것을 가지고 어째 그랬단 말이냐고, 버엉떼엥 아랫목께로 조촘조촘 내려앉는다. 하는 것을 초봉이는 소리를 버럭,
“왜 이 모양이야……아직 멀었으니 거기 앉아서 말 듣잖구서…….”
“네에 네, 흐흐.”
“흥! 물색 없이 좋아 마라! 내가 뭐어 맘이 내켜서 네 계집 노릇 하겠다는 줄 알구…… 괜히 원수풀이 하잔 말이다, 원수풀이…….”
“허어따! 쓸데없는 소릴!”
“두구 보려무나? 내 신세를 요렇게두 지긋지긋하게 망쳐 준 네놈한테 그냥 거저 다소굿하구 계집 노릇이나 해줄 성부르더냐? 흥!…… 인제 대가리가 서얼설 내둘리게 해줄 테니 두구 보아라!”
초봉이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큰소리를 하기는 해도 마음은 결코 시원하지 못했다. 원수풀이를 하잔들 무얼로 어떻게 원수풀이를 할 도리가 있을까 싶질 않았다. 자는데 몰래 칼로 배를 가른다거나, 국그릇에 비상을 쳐서 먹인다거나 한다면 그거야 못 할 바는 없지만, 그런다고 짓밟힌 생애를 도로 물려 오지는 못할지니, 헛되이 내 손에 피칠이나 하는 짓이지, 원한이 풀릴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생각하면 속절없는 팔자요, 눈물이 솟아났다.
“여보, 이왕지사 다아 이리 된 바에야…….”
형보는 곱사등을 흔들흔들, 쪼글트렸다 주저앉았다 못 견디어 납뛰면서,
“……노염 다아 풀어 버리구려, 응…… 그리구서 우리두 처억 어쨌든지, 응? 재미있는 가정을, 쓰윽 한바탕…… 흐흐.”
“어이구, 옜다!…… 메시껍구 아니꺼워!”
“허허엉, 그리지 말래두 자꾸만 그러는구려!”
“너 돈 있는 자랑 했겠다? 대체 몇 푼이나 되느냐”
“한 육천 환…….”
“거짓말 없지”
“아무렴! 당장이라두 보여 주지!”
형보는 잊지 않고 끌고 들어온 손가방을 돌려다보면서,
“……예금통장에 이천여 환 있구, 수형 받은 게 사천 환 가까이 되구…… 자아 시방 볼 테거들랑 보지”
“가만있어, 인제 꺼내 노라는 때 꺼내 놓구…… 그러면 어쩔 테냐? 너 내가 해달라는 대루 해줄테냐”
“네에, 거저 하늘의 별이라두 따올 수만 있다면 냉큼 가서 따다 디립죠!”
“그러면 첫째, 이 애 앞으루다가 네 이름으루 하나 허구, 내 이름으루 하나 허구, 생명보험 하나씩…….”
“얼마짜리”
“천 원짜리.”
“천 원짜리? 천 원짜리가 둘이면 가만있자…… 얼마씩 부어 가누”
형보는 까막까막 구누를 대보다가,
“……그랬다!”
하면서 고개를 꾸벅한다.
“그건 그렇구…… 그 댐은, 그새 박제호두 그래 왔으니깐 너두 나무 양식 집세는 다아 따루 내려니와, 그런 것말구두 가용으로 다달이 오십 원씩 내 손에다 쥐어 줘야지”
“그러자면…… 매삭 백 환이 훨씬 넘는데…… 그렇지만 할 수 있나! 박제호만큼 못 한대서야 안될 말이지. 그럼 것두 자아 그랬다!”
“그리구 또, 그 댐은, 돈을 한목아치 천 원을 나를 주어야 한다”
“천 환? 현금을”
“그래.”
“그건 좀 문젠걸……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장사하는 밑천이라 놔서 한목에 천 환을 집어 내구보면 그만큼 수입이 준단 말이야!…… 시방 육천 환을 가지구 주물러서 맥삭 이백 환 가량 새끼가 치는데, 만약 천 환을 없애구 보면 아무래두 어렵겠는걸…… 대관절 현금 천 환은 무엇에다 쓸려구 그러누”
“우리 친정두 먹구 살게시리 한끄터리 잡어 주어야지!”
“얘! 이건 바루 기생 여대치는구나”
“머, 내가 기생보담 날 건 있다더냐”
“무서운데!”
“또 있다…… 우리 친정 동생들 서울루 데려다가 공부시켜 주어야 한다!”
15 식욕의 방법론
또 한번 해가 바뀌어, 이듬해 오월이다.
태수와 김씨가 그의 남편 탑삭부리 한참봉의 한 방망이에 맞아 죽고, 초봉이는 호젓이 군산을 떠나고, 이런 조그마한 사단이 있은 채로 그러니 벌써 두 번째 제 돌이 돌아는 왔다.
그러나 이곳 항구 군산은 그러한 이야기는 잊은 지 오래다. 물화(物貨)와 돈과 사람과, 이 세 가지가 한데 뭉쳐 생명 있이 움직이는 조그마한 거인(巨人)은 그만한 피비린내나, 뉘 집 처녀가 생애를 잡친 것쯤 그리 대사라고 두고두고 잊지 않고서 애달파할 내력이 없던 것이다.
해는 여전히 아침이면 동쪽에서 떴다가 저녁이면 서쪽으로 지고, 철이 바뀌는 대로 풍경도 전과 다름없이 새롭고, 조수 밀렸다 쓸렸다 하는 하구(河口)로는 한모양으로 흐린 금강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러는 동안 거인은 묵묵히 걸음을 걷느라, 물화는 돈을 따라서, 돈은 물화를 따라서, 사람은 그 뒤를 따라서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고, 그리하여 그의 심장은 늙을줄 모르고 뛰어, 미두장의 ×××도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정주사도 무량하다. 자가사리 수염은 여전히 노란데 끝도 그대로 아래로 처졌고, 눈도 잊지 않고 깜작거린다. 소일도 모습과 함께 변함없다. 남은 몇천 금을 걸고 손바닥을 엎었다 젖혔다하는 순간마다 인생의 하고많은 부침을 되풀이하는 그 틈에 끼여 대판시세가 들어올 적마다 하바꾼 우리 정주사도 오십 전 어치 투기에 몸이 자지러진다.
그러나 한 가지 놀라운 발육(發育)은 단 몇십 전이라도 밑천이 떨어지지를 않는 것이다. 어디서 생기는 밑천이든 간에 같이서 하바를 하는 같은 하바꾼들한테 ‘총을 놓지 않아서’ 실인심을 않고 지내니 발육이라면 그런 발육이 있을 데가 없다. 단연코 작년 가을 이래 정주사는 여재수재가 분명했지 도화를 부르고 멱살잡이를 당하거나 욕을 먹거니 한 적이 없다.
이것은 맏딸 초봉이가 작년 가을 서울서 돈 오백 원을 내려 보낸 것으로 부인 유씨가 구멍가게 하나를 벌여 놓은 그 덕이요, 그 끈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거니와, 애초에 죽은 고태수가 소절수 농간을 부리던 돈으로 미두를 하다가, 아시가 나게 된 끄터리를 형보가 얻어가졌고, 형보는 그놈을 언덕삼아 오륙천의 큰 수를 잡았고, 그 돈에서 도로 오백 원이 초봉이의 손을 거쳐 정주사네게로 왔으니, 기특하다면 기특한 인연이 아니랄 수 없다. 따라서 어느 사위가 되었든지 사위 덕은 사위 덕이요, 결국은 초봉이라는 딸을 둔 보람이 난 것이라 하겠다.
가게는 삯바느질도 있고 해서 유씨가 지키고 앉았고, 정주사는 밖에서 물건 사들이는 소임을 맡았다.
새벽이면 정거장 앞으로 나가서 길목을 지키다가 촌사람들이 지고 들어오는 채소도 사고, 공설시장에서 과실이며 과자 부스러기도 사고, 더러는 ‘안스레’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다준다. 그러고 나면, 정주사는 온종일 팔자 편한 영감님이다. 하기야 유씨가 바느질을 하랴, 가게를 보랴 하느라고 손이 몰리곤 하니 가게나 지켜 주었으면 하겠지만, 한 마리에 일 전이나 오 리가 남는 자반고등어며 아이들의 코 묻은 일 전 한 푼을 바라고 오도카니 지켜 앉았기가 갑갑하기도 하려니와, 일변 미두장에 가서 잘만 납뛰면 한목에 오십 전이고 일 원이고를 따니, 그게 사람이 활발하기도 할 뿐더러 이문도 크다 하는 것이다.
호마는 북풍에 울고, 월조라는 새는 남쪽 가지에다만 둥우리를 얽는다든지, 정주사도 시방은 다 비루 먹은 태마(馱馬)라도 증왕에는 천리 준총이었거니 여기고 있다. 그러니까 오십 전짜리 하바라도 하고 싶다.
밑천까지 털리는 손은 어떻게 하느냐고 부인 유씨가 고시랑거릴라치면 잃지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만날 희떠운 소리다. 이 말은 돈을 잃어도 관계치 않다는 뱃심과 같은 뜻이다.
오늘도 정주사는 듬뿍 삼 원 돈을 지니고서 한바탕 거들거리고 하바를 하던 판이다.
이 삼 원의 대금(大金)은 마침 가게에 북어가 떨어져서 아침결에 어물전으로 흥정을 하러 가던 심부름 돈이다.
배고픈 호랑이가 원님을 알아볼 리 없고, 무슨 돈이 되었든지 간에, 마침 또 간밤에는 용꿈을 꾸었겠다 하니, 북어값 삼 원을 밑천으로 든든히 믿고서 아침부터 붙박이로 하바를 하느라 깨가 쏟아졌다. 그러나 따먹기도 하고 게우기도 했지만, 필경 끝장에 와서 보니 옴팡장사다. 밑천이 절반이나 달아나고 일 원 오십 전밖에 남지를 않았던 것이다.
미두장의 장이 파하자 뿔뿔이 헤어져 가는 미두꾼 하바꾼 틈에 끼여 나오면서 정주사는 비로소 잃어버린 북어값을 생각하고 입맛이 찝찝해 못 한다.
오월의 눈부신 햇볕이 환히 내리는 행길바닥으로 패패 흩어져 나오는 미두꾼이나 하바꾼들은 응달에서 자란 식물을 갑자기 일광에 내쬐는 것 같아, 어디라 없이 푸죽어 보인다.
하기야 많고 적고 간에 돈을 먹은 패들은 턱을 쑥 내밀고 흐물흐물 웃으면서 내딛는 걸음이 명랑한 성싶기는 하나, 그것은 이 햇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래서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활기 같다.
턱 대신 코가 쑤욱 빠지고 죽지 부러진 장닭처럼 어깨가 처지고 고개를 수그리고, 이런 패들은 사오십 전짜리 하바를 비롯하여 몇백 원 혹은 몇천 원의 손을 본 축들이다. 이런 축들 가운데 더러는 저 혼자 점직하다 못해 누구한테라 없이,
“헤에, 참!”
하면서 뒤통수로 손이 올라가다가 만다. 분명 울고 싶다는 게라, 웃는다는 게 우는 상이다. 이축들은 더욱이나 이 명랑한 오월의 태양 아래서는 이방인(異邦人)같이 어색하다.
북어값 삼 원에서 일 원 오십 전을 날려 버린 정주사는 코 빠진 축으로 편입될 것은 물론이다. 그는 여럿의 틈에 끼여 행길바닥으로 나섰다가 멈춰 서서 입맛을 다신다. 인제는 하바판도 다 깨졌은즉 잃어버린 북어값을 추는 도리는 없고 하니 아무나 붙잡고, 한 오십 전 내기 짱껜뽕이라도 몇 번 했으면 싶은 마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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