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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59) -채만식-

카지모도 2021. 6. 11.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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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사!”

넋을 놓고 행길 가운데 우두커니 섰는데 누가 마수 없이 어깨를 짚으면서 공중에서 부른다. 고개를 한참 쳐들어야 얼굴이 보이는 ‘전봇대’다. 키가 대중없이 길대서 ‘전봇대’라는 별명이 생긴 같은 하바꾼이다.

“……무얼 그렇게 보구 계시우? 갑시다.”

하바에 총만 놓지 않으면 아무라도 그네는 사이가 다정한 법이다. 단 한 모퉁이를 동행할망정 뒤에 처지면 같이 가자고 하는 게 인사다.

“가세.”

정주사는 내키잖게 옆을 붙어 선다. 키가 허리께밖에는 안 닿는다. 뒤에서 따라오던 한패가 재미있다고 웃어도 모른다.

“정주사 오늘 괜찮었지”

“말두 말게나!”

“괜히 우는 소릴…… 아까 내해두 오십 전 먹구서…….”

“그래두 한 장하구 반이나 펐네! 거 원 재수가…….”

“당찮은 소리!…… 그런 소린 작작 하구, 오늘 딴 놈으루 저기 가다가 우동이나 한 그릇 사시우. 난 시장해 죽겠수!”

“시장하기야 피차 일반일세!”

정주사는 미상불 퍽 시장했다. 작년 가을 이후로는 팔자가 늘어져서 조석은 물론 굶지 않거니와, 오때가 되면 휭하니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오곤 했는데, 오늘은 마침 북어값 삼 원을 밑천삼아 땄다 잃었다 하기에 재미가 옥실옥실해서 점심 먹을 것도 깜박 잊었었다. 그래서 비어 때린 점심이라 시장기가 들고, 그 끝에 돈 잃은 것이 이번에는 부아가 난다.

“그 빌어먹을 거, 그럴 줄 알았더면 그놈으루 무엇 즘심이라두 사먹었으면 배나 불렀지!”

“거 보시우…….”

정주사가 혼자 두런거리는 것을 전봇대가 냉큼 받아,

“……우리 같은 사람 가끔 우동 그릇이나 사주구 하면, 다아 하누님이 알아보십넨다!”

“하누님이 알어보신다? 허허, 제엔장맞일. 아따 그러세, 우동 한 그릇씩 먹세그려나!”

“아니, 진정이시우”

“그럼 누가 거짓말 한다던가…… 그렇지만 꼭 우동 한 그릇씩이네? 술은 진정이지 할 수 없네”

“아무렴! 피차 형편 아는 터에, 술이야 어디…….”

하바꾼도 옛날 큰돈을 지니고 미두를 하던 당절, 이문을 보면 한판 진탕치듯이 친구와 얼려 먹고 놀던 호기는 가시잖아, 이날에 비록 하바는 할 값에 단돈 이삼 원이라도 먹으면 가까운 친구 하나쯤 따내어 우동 한 그릇에 배갈 반 근쯤 불러 놓고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감회와 울분을 게다가 풀 멋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시방 정주사가 전봇대한테 우동 한턱을 쓰기로 하는 것은 그런 호협이나 멋이 아니라 외람한 화풀이다.

돈 잃은 미련이 시장한 얼까지 입어 화증은 더 나는데 전봇대가 연신 보비위는 하겠다, 미상불 그놈 우동 한 그릇을 후루룩 쭉쭉 국물째 건더기째 들이 먹었으면 아닌게아니라 단박 살로 갈 것 같고, 그래 예라 모르겠다고 나가자빠지는 맥이다. 물론 전 같으면야 우동이 두 그릇이면 싸라기가 두 되도 넘는데 언감히 그런 생심을 했을까마는, 지금이야 다 미더운 구석도 없지 않아, 말하자면 그만큼 담보가 커진 것이라 하겠다.

가게는 같은 둔뱀이는 둔뱀이라도 전에 살던 집처럼 상상꼭대기가 아니고 비탈을 다 내려와서 아주 밑바닥 평지다. 오막살이들이나마 살림집들이 앞뒤로 늘비한 길목이라 구멍가게치고는 마침감이다.

가게머리로 부엌 달린 이칸방이 살림 겸 바느질방이다.

지난해 가을 초봉이가 내력 없는 돈 오백 원을 보내 주어서 삼백 원을 들여 이 가게를 꾸미고 벌여 놓고 했다.

일백이십 원은 재봉틀을 한 채 사놓았다. 나머지는 이사를 하느니 오래 못 벗긴 목구멍의 때를 벗기느니 하느라고 한 사십이나 녹아 버렸고, 그 나머지는 장사를 해나갈 예비돈으로 유씨가 고의끈에다가 챙챙 옹쳐 매두었었다. 정주사는 그놈을 올가미 씌워다가 사십 원 증금(證金)으로 쌀이나 한 백 석 붙여 놓고 미두를 하려고 갖은 공력을 다 들였어도 유씨는 막무가내하로 내놓지를 않았었다.

아무튼 그렇게 장사를 벌여 놓으니, 가게에서 매삭 삼십 원 넘겨 이문이 나고, 재봉틀 바느질로 십여 원 들어오고 해서 네 식구가 먹고 살아가기에는 그리 군색지 않았다. 정주사가 가끔 미두장의 하바판에서 돈 원씩 날리기도 하고, 오늘처럼 우동 한턱을 쓸 담보가 생긴 것도 알고 보면 다 그 덕이다.

권솔이 더구나 단출해서 좋다. 초봉이는 재작년 이맘 때에 벌써 식구 중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작년 가을에는 계봉이를 제 형이 데려 올려 갔다. 실상 형주도 그때 같이 올라갔을 것이지만, 그 애는 작년 사월에 이리(裡里) 농림학교에 입학을 해서 통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학을 하느니 자리를 옮기느니 하면 번폐스럽기만 하겠은즉 그럭저럭 졸업이나 한 뒤에 상급학교를 보내더라도 우선 다니던 데를 그대로 눌러 다니도록 두어 둔 것이다.

이렇게 식구가 단출하게 넷으로 줄고 그 대신 다달이 사오십 원씩 수입이 있으니, 유씨의 억척에 다만 몇 원씩이라도 밀려 차차로 가게를 늘려 가기도 하고 했을 것이지만, 부원군 팔자랍시고 정주사가 속속들이 잔돈푼을 ‘크게’ ‘낭비’를 해서 병통이요, 그래서 전에 굶기를 먹듯 하고 지낼때보다 집안의 풍파는 오히려 잦다. 더구나 유씨는 시방 마침 산기(斷産期)라, 히스테리가 가히 볼 만한 게 있다.

날도 훈훈하거니와, 오월 초생의 오후는 늘어지게 해가 길어 깜박깜박 졸음이 온다. 유씨는 이태전이나 다름없이 다리 부러진 돋보기를 코허리에다 걸치고 졸린 것을 참아 가면서, 보물 재봉틀을 차고 앉아 바느질에 고부라졌다.

다르르, 연하게 구르는 재봉틀 소리가 달콤하니 졸음을 꼬인다. 졸리는 대로 한잠 자고는 싶으나, 바느질도 바느질이려니와 가게가 비어서 못 한다. 남편 정주사는 인제는 기다리지도 않는다.

아무 때고 들어왔지 별수가 없을 테고, 거저 들어오기만 오면, 어쨌든지 마구 냅다…… 이렇게 꽁꽁 벼르고 있다.

올에 입학을 해서 일학년이라, 항용 두시면 돌아오는 병주도 오늘은 더디어 낮잠 한잠도 못 자게하니 그것도 화가 난다.

동네 안노인이 아이를 업고 행똥행똥 가게 앞으로 오더니 한다는 소리가 남 속상하게,

“북엔 없나 보군”

하면서 끼웃이 들여다본다. 유씨는 일어서서 나오려고 하다가 고개만 쳐든다. 오늘 벌써 세 번째 못 파는 북어다. 부아가 나는 깐으로는 물이라도 쩌얼쩔 끓여 놓았다가 남편한테 들어서는 낯짝에다가 좌악 한 바가지 끼얹어 주고 싶다.

“……북엔 없어. 저 너머까지 가야겠군!”

동네 노인은 혼자말같이 쑹얼거리면서 돌아선다.

“인제 좀 있으문 이 애 아버지가 사가지구 올 텐데요…….”

유씨는 다섯 마리만 잡더라도 오 전은 벌이를 놓치는구나 생각하면서 다시금 남편 잡도리할 거리로 단단히 치부를 해둔다.

“걸 언제 기대려? 손님들이 술잔을 놓구 앉아서 안주 재축인걸.”

“그럼 건대구를 들여가시지”

“건대구는 집에두 있는데 북에루다가 마른안주만 해딜이라니 성화지!”

동네 노인이 가게 모퉁이로 돌아가자 마침 병주가 씨근벌떡하면서 달려든다. 콧물이 육장 코에 가 잠겨서 질질 흐르기 때문에 입으로 숨을 쉬느라고 입술은 다물 겨를이 없고 밤낮 씨근거린다.

“엄마!”

한 번 불러 놓고는 책보를 쾅 하니 방에다가 들이뜨리고 모자를 벗어 휙 내동댕이치면서, 우선 사탕목판을 들여다본다. 아무 때고 하는 짓이라 저는 무심코 그러는 것인데, 돋보기 너머로 눈을 찢어지게 흘기고 있던 유씨는,

“네 이놈!”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생각잖은 고함 소리에 병주는 움칫 놀라 모친한테로 얼굴을 돌린다.

“……어디 가서 무슨 못된 장난을 하다가 인제야 오구 있어”

유씨는 금시로 자쪽을 집어 들고 쫓아나올 듯이 벼른다. 그는 시방, 자식의 버릇을 가르치자고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남편한테 할 화풀이야 낮잠 못 잔 화풀이야를, 애먼 어린 아이한테 하느니라고는 생각도 않는다.

병주는 첫마디에 벌써 볼때기가 추욱 처지고 식식한다.

막내동이라서 재미삼아 온갖 응석과 어리광은 있는 대로 받아 주던 아이다. 그놈이 인제는 품안에 안고 재롱을 보던 때와는 딴판이요, 전처럼 응석받이를 안 해주고 나무라면 이퉁을 쓰고, 아무가 무어라고 해도 듣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작년부터는 성가시니까 버릇을 가르친다고 회초리를 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유씨뿐이요, 정주사는 이따금 나무라기나 할 뿐이지, 나무라고서도 아이가 노염을 타서 울면 되레 빌기가 일쑤다.

병주로 당해서 보면 모든 것이 제 배짱과는 안 맞고, 저 하고 싶은 대로 못 하게 하니까 심술이 난다. 대체 그렇게도 저 하자는 대로 다 해주고 이뻐만 하더니 어째 시방은 지천을 하고 때리고 하는 게며, 또 학교에서 오는 것만 하더라도 여느때는 아무 소리도 없으면서 오늘 같은 날은 불시로 늦게 왔다고 생야단을 치니 어째 그러는 게냔 말이다.

병주로서는 당연한 불평인 것이다.

“아, 저놈이 그래두!…… 네 요놈, 그래두 이짐만 쓰구 섰을 테냐”

유씨는 속이 지레 터지게 화가 나서 자쪽을 집어 들고 쫓아나온다. 병주는 꿈쩍도 않고 곁눈질만 한다.

“이놈!”

따악 소리가 나게 자쪽으로 갈기니까 기다렸노라고 아앙- 울음을 내놓는다. 필요 이상으로 울음소리가 큰 것은 부친의 역성을 청함이다.

“이 소리! 이 소리가 어디서 나와? 응? 이놈, 이 소릿!”

말 한마디에 매가 한 대씩이다. 병주는 악을 악을 쓰면서 가게 바닥에 주저앉아 발버둥을 친다.

“이놈, 이 이퉁머리! 이마빡에 피두 안 마른 것이…… 이놈, 이놈, 어린 놈이 소갈머리 치레만 해 가지구는…… 이놈…….”

사정없이 아무 데고 내리 조진다. 병주는 영 아프니까는 그제야 아이구 안 할게 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그것도 비는 게 아니고, 고래-고래 악을 쓰면서 일종의 반항이다.

병주는 매를 맞기 시작하면서 다급하면 안 할게라는 소리를 치는 것도 같이 배웠다. 그러나 때리면서 그렇게 빌라고 시켰으니까 하는 소리지 그 뜻은 알지를 못한다.

“다시두”

“안 하께!”

“다시두”

“아야, 아아, 안 허께, 이잉.”

유씨는 겨우 매질을 멈추고 서서 가쁜 숨을 허얼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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