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聖 夜 (4)

카지모도 2022. 3. 21. 09:16
728x90

 

1971 즈음 써클.

(크리스마스 주제로 글쓰기)

 

 

<聖夜 -도시. 1971에피소드>

 -이상헌-

 

성탄절 전야.

그 도시에는 바다가 있었다.

 

역전(驛前)의 도심(都心).

밤은 시나브로 무르익어 간다.

 

번잡한 거리를 조금만 비껴 올라가면 엉크러진 뒷골목이다.

 

남자는 역사를 빠져 나오자 중늙은이 여인에 잡혀 팔을 낚아 끄는 대로 허적허적 골목을 들어섰다.

홈스팡 외투의 깃을 올려 목을 파묻고 목발을 짚고 절룩이며 걷는 중년의 남자는 성가시지만 방기하는듯한 몸짓으로 펨프 여인이 이끄는대로 따랐을 뿐이다.

 

골목안 옥호도 어지러운 집들의 유리창 너머 불그레한 전등불 밑희미하게 떠오르는 뱀딸기같은 여인들의 벗어 올린 넓적다리에 남자는 도시 관심이 없었고그래서 약이 오른 펨프여인은 골목 한켠에 있는 허름한 비어홀에다 남자를 밀어넣고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씨발놈그 짓 안할래믄 뭐 빨아먹으려고 따라온거야.”

 

그러나 골목 안은 예나제나 어차피 홍등가다.

삼류 비어홀의 실내에는 퀴퀴하게 절은 맥주와 안주냄새 그리고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때로 여자의 교성이 자지러지고 항구와 마도로스를 노래하는 유행가가 웅웅거린다.

 

구석진 복스에 외투도 벗지 않고 접대부도 물리친채 유령처럼 홀로 앉아 있는 남자의 테이블에는 몇병의 맥주와 안주접시가 올려져 있었으나 익숙한 술꾼은 아닌 듯 술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간혹 고개를 재껴 꿀꺽 술을 넘기고는 허공을 응시하는 그 눈매는 서늘하고 깊었지만 눈망울에는 핏발이 섰고 무언지 모르게 깊은 고통의 빛이 서려있었다.

 

한켠 쪽의 여자.

그 비어 홀의 입구쪽에서 여자는 가죽잠바를 입은 젊은 사내에게서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사뭇 눈을 부라렸다가 때로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응석스레 굴기도 하면서 여자에게 돈 만원을 해내라고 졸라대는 가죽잠바.

"꼬불친 돈 있잖아내란말이야.”

"없어요아직 개시도 못했는데.”

사내는 실실 웃으며 장난처럼 여자의 뺨을 툭툭 때린다.

"이게 정말내 성질 알면서 이러네."

"나도 주고 싶어근데 없는걸 어떻게 해요정말."

여자가 대응하는 어투는 심상하기만 할뿐 어디에도 가시가 들어있지 않다.

 

그런 실랑이를 두칸 건너 저 쪽에서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눈길에 우연히 여자의 눈이 마주쳤고 눈길을 마주 한채로 남자가 손짓으로 여자를 불렀다.

닥아온 여자에게 만원의 지폐뭉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남자가 말한다.

"가져다 줘요.”

몇 년만에 처음으로 입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처럼 메마른 음성이다.

여자는 일순 당황하여 멈칫하였으나 남자는 가져가라고 손짓을 하며 재촉한다.

"가져 가라니까.”

이내 여자는 남자의 속샘을 알아 챈다.

테이블 옆에 기대 세워 둔 목발과 의자에 앉은 자세의 어색함에서 남자의 불구를 알아 차릴수 있었고한 절름발이 남자의 욕정을 눈치채지 못할바도 없었던 것이다.

 

그 돈을 가죽잠바에게 건내준 여자가 한숨을 쉬듯 말한다.

"오늘 또 낯선 남자에게 시달리게 되었어요.”

"잘해 봐.”

 

싱글거리면서 가죽잠바는 떠나고여자는 동료들의 선망과 비웃음의 소리를 등으로 받으면서 남자의 좌석으로 가서 그 옆에 앉았다.

"봉이야저 년 오늘 밤 봉을 물었어.”

"병신이 여자 생각은 간절한가 보지?”

"그런데 저 쑥같은 계집애가 저런 봉을 요리나 할 줄 알아야지.”

 

그러나 중년의 남자는 말이 없었다.

면도를 하지 않은 까실한 수염의 마른 얼굴에 빈 눈빛만 가지고 있는 그런 남자일 뿐이었다.

여자가 남자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

"고마워요.”

남자는 대꾸가 없다.

"...”

"누군지 아세요돈 받아간 사람.”

말을 하고는 푸웃하고 여자가 웃는다.

"둥기예요

"둥기?”

"그런게 있어요기둥서방이라고.”

"...”

"나쁜 사람 아니에요이 골목에서는 가장 친절한 사람인데.. "

남자의 침묵이 자신의 사내를 나무라고 있다고 생각한 여자는 도리질을 하며 가죽잠바를 변호한다.

 

짙은 화장은 도무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속눈썹 따위는 커다란 눈망울의 천진한 표정까지 숨기지는 못한다.

창백한 낯빛의 가냘픈 외모이지만 연연한 모습이다.

 

다시 남자는 침묵으로 빠져든다.

술잔도 비우지 않은채 줄곧 똑 같은 자세로 곁에 앉은 여자에게는 무관심하기만 하다.

여자도 어느 새 그 텅 빈듯한 분위기에 젖어든다.

 

그렇지만 싫다거나 싫은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그런 것은 아니다.

여자를 젖어들게 하는 정체는 외로움이었고 여자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 편안함이었다.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조심스레 여자가 묻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남자는 고개를 돌려 여자의 눈을 내려다 본다.

마주 바라보는 천진한 여자의 표정에 남자가 눈을 몇번 깜빡였다.

"아까 열차에서 내렸어

"멀리서 오셨나 봐요.”

"................"

"이 도시에는 어쩐 일로..?"

"누굴 만나려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오셨구나

여자가 비로소 대화의 물꼬를 잡았다는듯 목소리가 높아진다.

"사랑하는 사람...?”

"크리스마스이브 잖아요?

"아니야.“

"그럼 누구?"

"이곳 형무소에서 내일 출감하는 사람성탄절 특사로.”

"어머어쩌다가 형무소에.. 정말 가까운 분인가 봐요

"가까운..... ”

여자의 말을 받아 중얼거리더니 남자는 짓씹듯 한 소절씩 말을 뱉는다.

"가장증오하는.. 사람.”

"무슨 말씀이세요?”

남자의 눈빛에 예의 고통스런 빛이 다시 어렸다.

 

갑자기 남자가 벌떡 일어선다.

남자가 절룩거리며 그곳을 나설때여자는 재빠르게 외투를 찾아입고 남자를 따라나선다.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여자가 밖으로 나온 남자의 등뒤에서 짐짓 투정하듯 말을 던진다.

남자가 돌아본다.

"무얼..?”

여자는 “주신 돈....”이라고 말을 하려 한다.

그러나 웬지 돈이라는 말이 남자를 무척 화를 내게 하리라는 느낌이 들어서다리 불편하시면 제게 기대세요.”하고 말해 버린다.

그 말 역시 내뱉고 나서는 금새 후회한다.

(화를 낼거야불구자는 자신의 불구를 얘기하면 제일 싫어 한다는데...)

 

그러나 남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공연히 쑥스러운 여자가 남자의 팔을 끼며 부축하려하자 남자는 풀썩 웃음을 짓는다.

"괜찮아이렇게 뛸수도 있는걸.”

하면서 정말 한쪽 발로 껑충 뛰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절름발이 남자의 웃음만이 눈에 들어왔다.

(웃을줄 아는구나... 그런데 참 쓸쓸한 웃음이야..)

 

"가서 일해야 하잖아.? 들어 가 봐요.”

"괜찮아요선생님하고 있고 싶어요.”

금새 앵무새같이 되받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남자가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고 여자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으나 남자는 그런 여자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

남자는 절룩거리며 걷고 여자는 한발짝 뒤에서 그 뒤를 따른다.

 

호젓한 골목 안을 그렇게 걷다가 갑자기 남자가 섰다.

세멘트 담벼락에 몸을 기대면서 여자를 향하여 몸을 돌린다.

남자가 쉰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 오늘 밤....무섭고... 외로워.”

무덤에서 끄집어 올리듯세음절의 단어를 힘들게 말하는 남자의 눈동자에 더욱 핏발이 섰다.

여자는 그 눈빛을 남자의 욕정으로 알아차린다.

그러자 여자는 주저없이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여자의 깊은 곳에서 아주 잘디 잔 생물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일어난다.

(안기고 싶어... 안고싶어... 불쌍한 사람....밤새도록 이 사람 얘기를 듣고싶어...무언가 괴로운... 외로운... .. 사람...)

서늘한 남자의 품에는 그저 빈 냄새만이 가득하였고여자는 한동안 그 허허로움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는 여자의 등을 토닥이며 한결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한다.

"따뜻하군.”

포옹을 푼 남자는 여자를 살며시 밀어낸다.

그러나 여자는 아주 가까이에서 남자의 눈을 들여다 보면서 빠르게 속삭인다.

"선생님한테 오래 안기고 싶어요어디 방으로 가요.”

"아니야나는 당신의 몸을 탐하는게 아니야잠시 따뜻했으니 이제 되었어.”

 

불현듯 여자는 초조하다.

남자를 떠나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저는... 선생님의 괴로움을... 저는...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을 거에요.”

"그럴 필요없어.”

"그냥 함께 있어 드리고 싶어요그냥요.”

"나는 오늘 밤 혼자 있어야 해.”

"함께 있게 해 주세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애절함이 배어있다.

"아까 그.. 당신 남자라도 찾아서 같이 즐기도록 해.”

남자가 등을 보이며 돌아선다.

여자가 그 등에다 대고 수줍은듯 말한다.

"오늘 무슨날인줄 아세요?”

남자는 대답이 없고 여자가 다시 묻는다.

"오늘 무슨 날인줄 아세요?”

".......”

"예수님이 탄생하신..오늘은 바로 크리스마스이브예요아세요?”

남자는 등을 보인채 여전히 말이 없다.

"오늘이 가장 즐거운 날이랍니다고아원에선.”

"고아원..”

"그럼요고아원에선 성탄절이 가장 즐거운 날이에요자기 생일을 모르는 아이들에겐 이 날이 바로 생일이죠기쁘다 구주 오신 날... 아세요?... 기쁘다 구주오신 날.. 미국에서 온갖 선물들이 오고....즐거운 날이에요오늘은.예수님 태어나신 즐거운 날이에요.”

"즐거운 날...예수.....”

여자의 말을 받아 뇌이는 남자의 억양에는 어딘가 비웃음이 배어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혼자서 짊어지고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분이라면서요?.”

남자가 돌아서 여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 양반을 좋아하나?”

"그러믄요.. 예수님은 우리같은 고아에게는 정말 고마우신 분.....기도를 들어주시는.”

여자는 부끄러운듯 작은 소리로 덧붙인다.

"그래서 저는.... 아주 외로울때면 기도를 드리죠.”

남자가 여자의 눈길을 잡는다.

"기도를 하면 외롭지 않게 되던가?”

"그럼요저는 고아거든요.”

"고아....”

"모르실거에요. ...고아란 말이죠.”

남자가 진지한 듯 반응을 보이자 여자가 참새처럼 지저귄다.

"엄마를 생각하면.... 엄마라는 존재가 어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 견딜수 없어요그냥 막... 미처버리는 거에요.... 정말 엄마라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면...가슴이 찢어지고....그 생각에 사로잡히면 정말 죽을 것처럼 괴로운거에요.”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여자의 지저귐을 듣는다.

"홀에서 짖꿎은 손님에게 시달리다가도 엄마생각에 사로잡히면... 화장실로 쪼르르 달려가요그곳만이 내가 혼자 기도할수 있는 곳이니까요그래서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되지도 않는 기도를 하는거죠."

여자가 푸웃하고 웃는다.

"후후우습죠?”

"우습지 않아.”

"그냥 '예수님예수님울 엄마 생각나지 않게 해 주세요울 엄마 생각나지 않게 해 주세요.' 하면서 염불하듯이 계속 중얼거리는 거에요그러다 보면 변기에 물흐르는 소리가 응답해 주기도 하죠.. 그 소리는 제게 속삭여 주어요엄마란 없어... 엄마란 없는거야.. 세상은 좋은 거야...그냥 세상은 좋은거야....하구요그런 응답을 들을수 있는 날이면 그것으로 전 그 외로움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그런 날은 더욱 정성을 다해서 손님께 서비스하게 되고 또 그런 날은 팊도 최고로 올릴수 있어요어머죄송해요이따위 더러운 기도 얘기를.”

남자의 눈길이 한결 깊어진다.

"아냐그렇지 않아그 기도는 진짜 기도야.”

남자는 스스로의 어떤 겨움이 있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리고 여자의 눈길을 잡고 말한다.

"고아원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즐거운 날일수 있을거야오늘.”

여자의 얼굴이 활짝 밝아진다.

"그래요.”

"당신 생일 잔치를 벌일까?”

"생일 잔치그런 말씀을...

"그럼 성탄절 만찬이라고 하지.”

"만찬이요?”

"그래어디 근사한 곳에 가서 아주 비싼 요리와 비싼 술을 마시는거야함께 가 주겠어?”

".”

여자가 꾀꼬리처럼 기쁜 목소리로 대답한다.

"골목 밖은 소란스럽고 즐거워요.”

 

골목밖의 거리는 정말 즐거움에 넘쳐 소란스럽다.

마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소리높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

불야성을 이룬 상점의 진열창에는 데코레이션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고 방울소리처럼 흥겨운 캐럴이 넘쳐 흐르고 색색의 불빛이 난무한다.

도심의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형형색색의 웃음과 웃음들이 강처럼 밀리고 흘러간다.

 

앞서 가던 중년남자가 곁에 있는 술집으로 동료의 팔을 끌면서 떠들고 있다.

"딱 한잔만 더 하자구이 봐오늘이 무슨 날이야바로 구리수마수통금 없는 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통금없는 밤의 자유를 선사한 날이란 말야안 그래이런 날 안마시면 일년 내 후회하게 된다구.”

"이 봐오늘은 그만 해우리 막내 딸년하고 철석같이 약속을 했단 말야케잌 사들고 일찍 들어가겠다구.”

그러나 그들은 도어보이가 “어서 옵쇼!“하고 악쓰듯 소리치는 술집의 도어 안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것을 보고 남자를 올려다보며 여자가 웃는다.

 

남자와 여자가 택시에서 내려 들어선 곳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멜로디가 가득 흐르고거리의 혼잡함이 침범하지 못하는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이다.

좌석마다 붉은 갓을 쓴 램프의 불빛이 아늑하여 거리의 소음에 비하면 이 곳은 어항 속과 같은 고요함이 넘실대고 있었다.

아까의 뒷골목의 더럽고 어수선함은 어디에도 없다.

 

구석 테이블에 마주앉자 남자는 웨이터를 불러 무언가 잔득 주문한다.

이윽고 주문한 것들이 테이블에 늘어 놓아졌으나 남자도 여자도 음식에는 그다지 손을 대지 않는다.

 

여자는 꿈꾸듯 행복한 표정이다.

남자는 아까부터 그런 여자를 고즈넉히 바라보고 있다.

여자도 그런 남자를 말갛게 쳐다본다.

"처음이에요이런 곳..”

"....”

"너무 좋아요. ”

그 눈길을 의식한 남자가 어색한 듯 웃는다.

"마시지.”

남자가 병을 들어 붉은 액체를 여자의 잔에 따르고 가볍게 잔을 부딪친다.

이와 같이 호젓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는 여자는 램프 불빛의 바알간 테두리안에서 마냥 행복하여 포근하다.

 

여자가 눈을 감고 깊숙히 몸을 묻는다.

(늘 들여다 본 그림.. 언제나 들여다 보기만한 남의 행복..그 그림의 정경 속에 지금 내가 있어..이 불빛.. 따뜻함..)

 

"행복하다는 게 이런 건가봐요.”

여자의 눈은 꿈결처럼 남자의 눈을 응시한다.

남자도 여자의 눈을 들여다 본다.

"마시지.”

"마시겠어요오늘 아주 많이 마시겠어요.”

똑같이 고개를 들어 잔을 비운다.

 

남자가 맞은 편의 행복한 얼굴을 조용히 바라본다.

"따뜻한 램프 불빛을 보고 있으니까 어떤 동화의 얘기가 생각나는군.”

잔을 내리며 남자가 중얼거린다.

"무슨 얘긴데요?”

"안델센이라는 사람이 지은건데아주 슬픈 얘기지.”

"혹시 그 얘기.. 성냥팔이 소녀그 얘기 아닌가요?”

여자의 얼굴이 홍조를 띈다.

"그 얘기를 아는 모양이군.”

"아아어쩜.... 저도 그 생각을 했는데..고아원에서 선교사님이 얘기해 주었어요.”

여자의 눈빛이 빛난다.

여자는 이 상상의 해후가 말할수 없이 기쁜 모양이다.

"우린 서로 따뜻한 걸 생각하고 있었군.”

"얘기해 주세요또 듣고 싶어요.”

"눈이 왔지.”

"그래요눈내리는 아주 추운 겨울날 저녁이었지요.”

"여자 아이는 어느 집 처마밑에서 창너머 방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지.”

"성냥은 팔리지 않았어요.”

"방안에는 식탁에 둘러앉은 단란한 가족이 즐거운 크리스마스 만찬을 즐기고 있었지.”

"그래요그렇지만 그 계집아이는 무척 춥고 배가 고팠어요.”

"그런 소녀에게 창너머 보이는 그 정경은 무척 따뜻하고 행복하게 보였겠지.”

"아니에요따뜻한 것만이 아니에요따뜻한거 보다 더욱.. 따뜻한.. 더욱 더욱 따뜻한 것..”

"성냥을 자꾸만 켜 언 손을 녹이다가 소녀는 얼어 죽고 말았던가.”

"틀려요엄마가 와서 데려갔어요하늘나라에...”

 

 

술기운이 감미롭게 올라오는 듯 여자가 두 손을 깍지끼어 의자의 쿳숀에 등을 기대면서 눈을 감는다.

(지금은 이토록 따스하고 포근한데.. 행복한데... 성냥팔이 계집아이...외로움... 그런게 내게 있었던가.. .. 기억할수 있어.. 삭풍 몰아치던 밤... 훈이와 나는 고아원의 철조망을 넘었지...배가 고프고... 굉장히 추운 밤이었어... 그리고.. 그리고 무어지그냥 살아 왔어... 그냥... 구걸도 하고... 술을 따르고... 남자 품에 안기고... 좋은 사람... 가끔은 싫은 사람들과 부대껴 가면서.... ..엄마는 없어..엄마는 없어.... 세상은 좋은거야... 그냥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면 그냥 좋은거야....사는것도 좋은데.... 좋은데.... 아파서....아파서...그래.. 죽으면 죽는거지 무어..)

 

여자가 눈을 떴을 때 남자는 들어 올린 목젖을 꿈틀하며 술잔을 비운다.

"이상해요.”

남자의 눈이 무엇이하고 묻는다.

"이상해요선생님이 그리고 제가.”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그럼 뭐라고 불러요성함도 모르고... 당신이라고 할수도 없고..”

"당신 쪽이 좋군.”

"오랫동안 쭈욱 만나 온 사이같아요이렇게 편하고 따뜻하다니요.”

"편하고.. 따뜻하다고그래 그렇다고 하지.... 나도 당신이 좋아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당신을 바라보는 게 좋아.”

"정말이세요정말 그렇게 생각해요당신이.... 당신이라는 말정말 어색해요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를래요.”

"누군가에게 당신이라고 불러본 적이 없나?“

여자의 얼굴이 술탓만도 아니게 붉어진다.

"있었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아원에서 같이 도망쳐 나온 .. 그 사람 깡패였어요.... 그렇지만 그 사람에겐 제가 있어야 했는데... 그런데 가버렸어요이젠 제가 필요 없대요.”

"당신이 싫어진게로군.”

"재수없는 여자래요.”

여자가 씁쓸하게 웃는다.

"제가 없으면.. 갈 곳도 없고... 나쁜 짓만 했거든요..... 어차피 마찬가지 였겠지만요저하고 있을 적에도 나쁜짓을 했지만 저는 모른 척하고 있었어요... 때리는건 더욱 싫었거든요.”

"때렸나?”

"나쁜 짓하지 말라거나 용돈을 적게 주면 가끔 때리곤 했어요.”

"나쁜 친구로군.”

남자의 그 말에 여자는 고개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에요아니에요나쁜 사람은 아니에요그저 불쌍해요불쌍한 사람이죠..”

"사랑했던 모양이로군.”

"모르겠어요아마 사랑하진 않았을거에요정이란 거겠죠우린 고아원에서 함께 자랐거든요.”

여자의 목소리는 연민에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자기 앞에선 늘 사랑한다고 말해 줘야 했어요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그 사람... 실 눈이 되어 웃어요그 웃는 모습이 좋아서 사랑한다고 말해주곤 했죠사랑한다고 말하면 무어라는줄 아세요?"

"..... "

"저더러 엄마,누이,마누라랍니다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가늘게 떠 올려다보면서 엄마야 누이야 마누라야하는 거에요그 말을 들으면 참 마음이 따뜻해졌는데... 그런 웃음과 그런 말이 듣고 싶어서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는지도 모르죠."

여자가 소리내어 웃는다.

남자는 웃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섹스폰이 감미로운 멜로디를 낮은 소리로 연주하고 있다.

조용하던 홀안이 갑자기 들이닥친 시글쩍한 패들 때문에 소란스러워 진다.

"그 융자 건 말이지이제 그것만 해결되면 이 몸도 신세 피는거라구그러니깐두루 들어들라구뭐야시시하게.. 들자니까.”

"좋아좋다구자네 사업을 위해그리구 통금없는 오늘 그리스도를 위하여건배!”

그들은 잔을 쨍그렁 부딪치며 훌쩍 마시고는 껄걸 웃는다.

 

별안간 여자가 가늘게 기침을 시작한다.

가늘게 터져나온 기침은 점점 심하여져서 여자는 테이블 모서리에 이마를 기대고 엎드린다.

"왜 그래어디가 좋지 않아?”

남자의 물음에 대답할 겨를없이 여자는 그저 어깨를 들먹이며 발작처럼 기침을 계속해 댄다.

 

이윽고 기침이 잦아졌다.

기침을 그친 여자가 고개를 일으켜 방긋 웃어 보인다.

그 웃는 낯빛이 창백하다.

"이제 괜찮아요끝났어요.”

"얼굴빛이 몹시 좋지 않은데.”

여자가 다시 웃었으나 붉은 램프불빛 속에서 그 얼굴은 더욱 하얗게 떠오른다.

"사실은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런데 건강한 사람모양 그렇게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해.”

남자는 엄격한 얼굴이 된다.

여자는 걱정을 하여 주는 남자에게 이를 들어내고 웃는다.

"너무 기뻐서요처음 뵐 때보다 선생님의 밝은 표정이 기뻐서..”

"바보로군그 따위로 기뻐하다니.”

그리고 남자가 묻는다.

"무척 아픈 모양인데어디가?”

"가슴이래요그래서 그 남자도 제게서 떠나 버렸어요.”

남자는 깊은 눈길로 여자의 얘기를 기다린다.

"병원에 같이 갔었죠병원이라는데는 정말 무서워요혼자 가기가 무서워서 그냥 참고 있으려고 했지만 여간 괴로워야죠.”

여자는 무심한 눈빛을 램프 갓에다 주며 중얼거리듯 말한다.

"가슴이 갑갑하구... 기침을 할 적마다 가슴이 타는 것 같구... 그래서 그 사람더러 같이 병원에 좀 데려다 달랬더니 뭐라고 그랬는줄 아세요?”

 

남자는 뚫어지게 여자를 바라본다.

"병은 무슨 병밥 잘먹고 잠 잘자면 낳을걸 가지구.. 병원 갈 돈있으면 이리 줘구두나 맞춰 신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론 무척 걱정했을거에요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다 홀에도 며칠 나가지 못한채 누워 기침을 하고 있는데 아뭇 소리없이 저를 끌고 나가더군요병원이었어요진찰도 받고 무슨 검사도 받고 사진도 찍고 그랬어요그 사람 마음은 착한 사람이죠?”

여자가 밝게 웃는다.

"그래서 그 사람은 떠나버렸나?”

"병원에 다녀와서 약봉투를 휙 던져주면서 ‘재수없게며칠 누워있어 봐그리고 이 약을 하루에 세 번 거르지 않고 먹는거야알았어재수없게.' 그리고는 휭 밖으로 나가 버렸어요.“

"그것이 마지막이었군.”

"아니에요그 날 한 밤중이었어요잠 결에 무슨 소리가 나서 눈을 떠 보니까... 후후.”

"왜 웃는거야?”

"그 사람이었어요어둠 속에 엎드려서 내 손을 꼭 움켜잡고 자기 뺨에 대고서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고 있지 않겠어요저는 자는척 하면서도 가슴이 미어질만큼 고마웠지요그 밤만 생각하면....저도 공연히 슬퍼졌나 봐요눈물이 핑 돌대요그렇지만 모른척 손을 그렇게 맡겨둔채 자는 척하고 있었어요그러다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어요아침에 눈을 뜨니까 그 사람은 가버리고 없었어요머리 맡에 쪽지가 있더군요거기 뭐라고 써 있었는지 아세요단 세마디. ‘요양원에 가야 한 대신세많았어안녕.' 후후후 우습죠?”

여자는 정말 우습다는 듯이 쿡쿡거리며 웃는다.

"슬프진 않았어요그 사람은 한 밤중에 내 손을 뺨에 대고 날 위해 울어주었는걸요... 그리고 내가 몹쓸 병에 걸렸는걸요.”

남자가 여자에게로 손을 뻗어 머리결을 쓰다듬는다.

"아까 홀에서 선생님이 주신 돈 받아가던 사람있잖아요그 사람도 곧 날 떠나 갈 거에요저는 그걸 알고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원망하진 앟나?”

"왜 원망해요제 병때문인데... 그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모두 좋아요사람들은 모두 좋은 거에요비록 친절하지는 않더라도 불쌍한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에요.”

"세상을 원망해 본 적이 없나?”

"불쌍한 사람들이 이렇게 시끌하게들 살고 있는데 세상을 원망할 건 뭐에요?”

"당신의 운명을 슬퍼하지도 않아?”

"슬퍼한다고 운명이 바뀌기라도 하나요?”

남자는 갑자기 화를 내는듯한 표정이 된다.

그리고 술을 가득 따라 단숨에 비워 버린다.

"우울해 지셨군요모처럼 즐거우셨는데.."

"아냐우울하지 않아."

그러나 그 음성에는 잔뜩 분노가 서려있다.

그리고 천장을 올려다 본다.

 

남자의 입에서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듯 침통한 신음소리가 낮게 비어져 나온다.

그런 남자에게서 여자는 무언가 깊고 어두운 응어리를 느낀다.

그것이 여자의 아픔이 되고 그 아픔에 테이블 위 남자의 손등에 자기의 손을 포개어 얹는다.

그 감촉으로라도 남자의 괴로움을 덜어 주려는것처럼.

"얘기 해 주세요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싶어요.”

"할 얘기가 없어.”

"사람은 누구나 얘기를 갖고 있는 법이래요.”

"내게는 그런 얘기마저도 없어.”

"저는 얘기 들어주는 선수랍니다얘기해 주세요.”

순간 남자는 단호하게 여자의 말을 끊는다.

"묻지 말아.”

그리고는 의자에 몸을 묻고 저쪽 천장 한 곳을 눈을 부릅떠 노려 본다.

핏발진 눈에서 불길이 인다.

 

묻지 말아....타오르는데.. 이 타오르는걸 어떻게 하나.. 싯뻘건 불꽃이 소리를 내며..쉬익 쉭탄다...타오른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여인의 얼굴이 타오른다... 그 어여쁨이 탄다.... 신이 준 그 축복이 탄다.... 신이 준 그 저주가 탄다... 하나님 당신보다 더 사랑하게 한 아내의 얼굴이 불꽃에 타 녹아 내린다...

 

묻지 말아.. 오오묻지를 말아.. 타오른다쉬익 쉭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철이 그 놈의 얼굴이 타오른다.. 어렸을적부터 거두워 주었던....나를 형님으로 불렀던 철이놈의 얼굴이 탄다..타오른다..쉬익 쉭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타오른다..

 

탄다탄다타오르는 불길이다그 날 밤이 탄다쉬잇 쉭미친 듯이 타오른다..예정보다 일찍 돌아 온 집...거친 남녀의 숨소리... 놀라 화들짝 일어나는 그들보다 스스로 먼저 뛰처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날 밤...그 밤의 어둠이 맹렬하게 타오른다... 허청허청 걷는데 타오르는 불꽃 하나 덮치더니..... 교통사고.... 왼발의 불구......모든게 하냥 타오를 뿐.. 묻지말아... 이 타오르는 것들.. 이 불꽃들을 어이하랴...묻지 말아..

 

남자가 눈을 질끈 감는다.

"묻지 않을게요아무 것도... 그렇지만 선생님은 아주 좋은 분이세요.”

"난 좋은 사람이 아냐!”

"아니에요선생님은 좋은 분이에요."

".......”

"불쌍하거든요선생님은 불쌍한 사람.... 좋은 사람이에요.”

여자가 아이처럼 고집스레 말한다.

 

갑자기 남자가 일어섰다.

여자도 화들짝 남자를 따라 일어선다.

남자는 목발을 집고 뚜벅뚜벅 카운터로 가 계산을 마치더니 문을 나서고 여자는 얌전하게 그 뒤를 따른다.

 

밖으로 나서자 한겨울 냉기가 두사람의 얼굴을 덮친다.

남자가 고개를 바투 꺾어 하늘을 본다.

"눈이 내렸으면...”

남자의 말 속에는 간절한 간구와 같은 절실함이 담겨있다.

"정말 하얀 눈이 펑펑 내렸으면..”

여자도 고개룰 들어 하늘을 본다.

 

거리는 밤이 깊어감에 따라 홍수처럼 밀려 다니는 사람들은 시나브로 잦아들고 점점 밤의 정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차가웁게 깊어가는 거리를 아직까지 지키고 있는 자선남비의 종소리가 더욱 맑게 울리고 있다.

이제 그만 이 거리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부산함이 여기저기서 서성인다.

남자와 여자는 그저 말없이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 없다.

남자는 여자를 내치지도 않고 여자는 남자의 곁에서 떨어질 염도 없다.

왼편 팔뚝을 결코 놓지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두 손을 모두어 꼭 끼어 안으면서 여자는 걷고 있었고 남자는 오른 손의 목발로 일정한 간격으로 보도의 블록을 울리면서 걷고 있을 뿐이다.

 

도심을 벗어난 그들이 걷고있는 그 저쪽 벼랑 아래는 바다가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건축중인 큰 건물들이 황량한 뼈대를 드러 내고 거대한 공룡의 화석의 실루엣처럼 줄지어 버티고 서 있는 공사장이 보인다.

그너머 파도소리가 희미하게 그곳까지 들려 온다.

진작에 이 곳으로 오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남자와 여자는 살벌하고 황량하기만 한 공사장으로 들어 선다.

띄엄띄엄 희미한 빛을 가냘프게 발산하고 있는 보안등만이 호젓하게 깨어있을뿐 그 곳에는 모든 것이 죽어 있었지만 저 멀리 그들이 떠나 온 도심의 불빛은 멀리서도 환하게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여자는 그 도심의 밝음이 이 곳에서는 너무나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를 올려다 본다.

(무언가... 무척이나 불행한 사람... 괴로운 사람....불쌍한 사람... 울고 싶어.. 이 사람 품 속에서 실컷 울고 싶어. )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정말로 여자의 목에서는 울음같은 것이 북받쳐 오른다.

여자는 그것이 울음이 아니라는 것을 금새 알아 차린다.

손으로 입을 막으며 남자에게 빠르게 말한다.

"잠깐잠깐만요!”

그 얼굴은 몹씨 창백하다.

몇걸음 달려가지 못한 여자는 근처 모퉁이에 몸을 기울인다.

여자의 등이 들먹거린다.

발작처럼 터져나오는 기침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적막을 찢는다.

남자는 그 자리에 우뚝 선채로 저만큼 앞에서 들먹거리는 여자의 등을 바라본다.

 

그토록 무연하게 여자의 괴롭게 들먹거리는 등허리를 보고 있던 남자의 눈에는 갑자기 넘쳐나도록 눈물이 그렁거린다.

눈물은 이내 눈망울을 넘쳐 흘러 뺨을 타고 흘러 내린다.

성근 턱의 수염을 지나 빗물이 되어 외투의 깃과 가슴을 적신다.

어깨를 들먹이며 남자는 오열한다.

그러나 그 오열은 안으로만 파도치고 있을 뿐으로 밖으로 소리되어 새어 나오지는 않는다.

 

여자는 몸안의 것들을 모두 토해 내려는 것처럼 기침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백열등의 붉으레한 빛이 여자의 등과 늘어진 머리카락의 들먹거림에 불꽃처럼 여울거린다.

그 여울거림을 보면서 남자가 여자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얼었던 몸이 움직임을 방해하여 목발이 조금 휘청거린다.

이제 남자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눈은 빛난다.

남자는 걸으면서 입술을 들먹거린다.

익숙한 어조로 무언가를 소리내어 중얼거린다.

 

"주의 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나이다주의 진노로 인하여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아오며 나의 죄로 인하여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무거운 짐같으니 감당할수 없나이다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

 

여자는 이제 기침이 멎고 고통이 사라져 몸을 일으키고 돌아 선다.

남자의 눈 밑에 여자의 눈물 고인 눈망울이 맑게 빛난다.

여자가 입을 막고 있는 손에 쥐어 진 손수건은 함빡 피를 머금고 있다.

여자가 객혈한 피다.

백열등의 창백한 빛의 테두리 안에서 창백한 얼굴의 커다란 눈을 올려다 보며 검붉은 피에 젖은 수건으로 입을 막고 있는 그 모습이 섬찟하도록 예쁘다.

남자가 별안간 오르르 몸을 떤다.

"아름다워.”

말하는 남자의 입술이 실룩이며 웃는 듯 하다.

"그런 말씀... 부끄러워요오늘 마지막 기침 손님이었어요정말 미안해요선생님..”

여자는 두 손을 앞으로 모두어 공손하게 머리를 숙인다.

"아름다워알겠어당신의 피는 아름다운거야.”

"병균에 썩은 피가 어떻게.”

"그건 썩은 피가 아냐!”

남자가 목발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여자의 두 손을 감싸쥐고 그것을 여자의 가슴위로 가져간다,

여자의 낯빛만큼 손의 감촉도 창백하다.

 

어디선가 쏴-하고 한줄기 바람이 불어 와 저 쪽 모퉁이로 사라진다.

여자의 어깨가 오르르 떨린다.

"고개를 이렇게 해.”

남자는 입술을 가져가 여자의 입술에 겹쳐 자신의 입술로 여자의 입술에 묻은 피찌꺼기를 닦아낸다.

여자는 아기처럼 그 입술을 남자에게 맡긴다.

또 저 쪽에서 한줄기 바람이 몰아쳐 온다.

 

별안간 남자가 입술을 떼고 여자를 충동적으로 쓸어 안는다.

"춥지춥지너무나 춥지!”

그 목소리가 방금 휘몰아처간 바람보다 더 추운거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남자의 가슴을 파고든다.

여자의 뺨이 눈물로 번들거린다.

(괴로운... 외로운.. 이 사람... 불쌍한 사람... 아아!)

여자의 어깨가 이 번에는 흐느낌으로 들먹거린다.

 그리고 먼 하늘에서 울려 오는듯한 남자의 음성을 듣는다.

 

"그 분을 사랑했었지지극히 거룩하신 그분을 .... 그런데 그 분이 날 버렸어...... 더 사랑한... 어여쁜 여자... 내 아내.... 그 아내를 주심으로 그 분의 학대가 시작되었지 ....동생같은 그를 유혹하여 날 배신한 아내..... 그러나 그는 아내를 찔렀어... 죄의식이었을까... 아니,벗어나고 싶어서였을 꺼야.. 내 어여쁜 아내를 찔렀지.... 아내는 죽지 않았지만.... 그는 살인미수로 감옥에 가고.... 그리고 나는 아내에게 무릎꿇고 애원을 하였지.... 돌아와 달라고...내게는 이미 신은 없다고..오직 당신뿐.. 다시 시작하자고..... 그러나 아내는 자기를 칼로 찌른 그를... 그래도 사랑한다고....자신은 그 사랑에서 벗어 날수 없노라고..... 자신도 어쩔수 없다고....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어.. 내 아내가.. 목숨같은 내 아내가 ... 죽었어.... 다른 사랑을 위해 죽은거야....그 후 나는 언제나 불타고 있어...타는 불꽃만 남고 나의 모든 것은 아내와 함께 죽어버린거지... 내게는 살아야 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타오르는 불꽃만이 남아... 더 이상 그 분의 학대를 견뎌낼 길이 없어.... 그러나 꼭 그를 한번 만나봐야.. 난 떠날 수 있을거 같아서... 내일 출감하는 그.. 난 그를 맞으려 이 곳에 온거야."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여자가 도리질을 한다.

남자가 고개를 하늘로 향하여 갑자기 부르짖는다.

"불타는 번제를더러운 영혼의 번제기꺼이 드리지황금대신유향대신몰약대신!”

남자의 음성이 갈라지고 숨을 헐떡거린다.

 

말을 마친 남자의 몸이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목발이 뒹굴어져 튕겨 나간다.

여자가 목발을 집아들고 남자를 보았을 때 남자는 좀 전의 부르짖음의 격정을 가라 앉히려는지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다.

남자가 땅바닥에 손을 짚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 하늘은 별도 없는 암흑의 공간이다.

 

"저는 .... 아무 것도 모르고... 그 괴로움을 이해할순 없지만.... 없지만.... 도와드리고 싶어요... 아니 그저 곁에서 지켜드리고.... 아니그냥 곁에 있고 싶어요.”

여자가 눈물을 반짝이며 남자에게 말한다.

그리고 남자의 바지자락에 매달리듯 주저 앉으며 무릎을 꿇는다.

"부탁입니다선생님곁에 있게 해 주세요.”

남자가 여자를 일으킨다.

"이제 늦었어요착한 아가씨늦었어요.너무나.”

남자의 그음성은 아까의 격함에 비하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남자가 비칠거리며 일어나 목발을 바로 잡아 몸을 가눈다.

그리고 여자를 향하여 빙긋 웃어 보인다.

이미 그 얼굴에는 눈물의 흔적도 격정의 괴로움도 없다.

남자도 여자도 한동안 말이 없다.

남자의 서늘한 실루엣을 바라보며 여자는 이제 자신의 위로따위는 이 남자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낀다.

 

감자기 여자가 소리친다.

"눈이 와요!”

캄캄하게 드넓은 공간에 정말로 히끗히끗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남자가 얼굴을 들어 그 눈발을 맞는다.

성근 눈발은 금새 솜과 같은 눈송이의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한다.

간헐적으로 불던 바람은 이제 사라지고 사각거리며 내리는 눈만이 정일한 고요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부탁이 있어.”

남자가 여자쪽으로 몸을 돌린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꽤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어 여자의 외투 주머니에 넣어준다.

"뭐에요이것.”

"당신을 만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당신에게 주려고 오래 전부터 준비한거야가져 주어그리고 당신의 옛남자가 말한대로 꼭 요양원에 가도록 해.”

여자의 입술이 싫어욧하고 움직이려 하자 남자의 표정이 엄격해 진다.

"우리 다시 만날 때에는 건강한 몸으로 만나야지.”

(우리 다시 만날 때....)

여자는 남자의 눈빛에서 이것은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강한 호소를 읽는다.

 

"이건 버리겠어.”

남자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날이 접힌 한자루 나이프였다.

남자는 그것을 바다 쪽 어둠 속으로 힘껏 내 던진다.

"이제 그를 만나지 않아도 좋아... 혼자 갈테야.”

그리고 여자의 눈 속을 그윽히 들여다 본다.

"나는 그 분의 종.. 목사였어.”

 

파도소리가 눈내리는 정일한 소리를 비집고 들려 온다.

남자가 여자에게 등을 돌려 바다를 향하여 섰다.

남자가 걷기 시작한다.

여자가 그 뒤를 따르려는 듯 한발짝 나선다.

"따라 오지마!”

남자의 그 단호한 한마디는 거부할수 없는 힘으로 여자를 압도한다.

여자는 따라 갈수가 없다.

최면에라도 걸린양 여자는 꼼짝못하고 그 자리에 붙박혀 버린다.

그리고 여자는 저 마음의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지금 이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아... 따라 가서는 안돼.... 따라 가서는 안돼.... 이 사람은 지금 혼자 있어야 하는거야...)

 

여자가 점점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크게 소리친다.

그 목소리는 기쁨이 섞여있는 울음이다.

"선생님살아요봐요.. 저는 살아요제가 사는 걸 봐요!”

남자가 돌아 본다.

그 얼굴에 빙긋 미소가 어려 있다.

 

어느새 남자의 헝클어진 머리에도 어깨에도 목발 쥔 팔뚝에도 하얗게 눈이 쌓여있다.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정말 고마워...고마워이제 타오르지 않아 ..”

그리고 다시 돌아 서 걷기 시작한다.

눈송이 사이로 멀어져 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노래하듯 중얼거리는 남자의 소리가 잦아들고 이윽고 그 모습이 바다가 있는 저 쪽 어둠에 잠겨 사라질 때까지 여자는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붙박혀 서 있을 뿐이다.

 

(다시 저 분을 만날 수 있어.... 꼭 만날 수 있을거야..... 아아나는 병이 낳아야지병이 나아서 저 분을 만나야지..)

 

눈발은 한층 더 풍성하여 지고 어디선가 멀리 종소리가 들려 온다.

 

-

'내 것 > 잡설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월 아침과 최한배님 (0,0,3,3)  (0) 2022.08.06
살고자 하는 생명 1.2.3 (0,0,3,3)  (0) 2022.07.19
뷰리플 썬데이 (4)  (0) 2022.03.21
어떤 종말(4)  (0) 2022.03.21
흙에 스미는 AB형의 피는 30%짜리 사랑이다. (4)  (0) 2022.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