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살고자 하는 생명> 1
***동우***
2008. 9. 24
출간된지 오래인 우찌무라 간죠의 ‘기독교문답’을 읽으려고 책장에서 꺼내어 펼쳐 들었다.
그런데 활자가 눈에 들어오기도 전 책갈피 사이에 묻어 있던 먼지 알갱이 하나 꼬물꼬물한 움직임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이크론 단위를 겨우 벗어난 작디작은 벌레(책벌레?) 한 마리.
아무 생각없이 검지를 눌러 꼬물거리는 먼지 알갱이를 압살해 버린다.
그 먼지같은 주검의 부피같은 것도 있을리 없어 그 존재의 흔적은 한 점 희미한 얼룩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 벌레는 생존을 위하여 손톱보다 작은 종이 한 조각이면 족할듯 하고, 그것을 지워 버리는데는 0.01g의 가압(加壓)이면 충분하다.
0.01g 손가락 놀림의 행위 따위는 일상중 지극히 심상(尋常)한 행동인지라 마음에 둘 바 추호도 없었다.
며칠전 ‘리처드 W 블리엣’의 ‘사육과 육식’을 읽고나서 쓴 책부족 친구의 독후감을 읽었다.<독후감이라기보다 그 책이 동기가 되어 쓴 사적인 사유(思惟)의 글이었다,>
나는 원작 ‘사육과 육식’은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그 친구의 글은 무릇 생명의 관리에 대한 신랄함이 있었고 생명을 사랑하는 따스한 마음이 있었다.
어떤 착한 짐승의 씩씩대는 입김이 내 코 끝으로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사람과 함께 지구촌 대기를 호흡하였던 생명이었을 도축된 고기들.
소와 돼지와 닭을 유전학적 공학적으로 대량 사육하여 기계적으로 대량 도축하는 매카니즘의 운용.
한 생명의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철저하게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 사체 고기 덩어리로서의 의미만을 탐닉하는 육식하는 문명.
오로지 일개 공산품이라는 인식으로 먹거리 문화를 향유하는 이른바 후기사육시대(또는 반려동물로서 사람 이상의 대접을 받는 양극화의 시대)를 살면서 그는, 가축으로서 사육되던 전기사육시대 자신의 성장기를 감성적으로 회억(回憶)하며 내게 어떤 살아있는 짐승의 순하고 따순 숨결을 맡게 해 주었던 것이다.
아무런 의식없이 내 손끝을 잠시 까딱하여 눌러 죽인, 내 사육한바 없는 책벌레가 생각났다.
지극히 미세하고 하찮은 벌레 한마리
먹이사슬의 어느 위치에서 그 벌레는, 이를테면 목숨 값을 하고 있었던 겔까.
도대체 그토록 작고 하찮은 것이 왜 한 목숨으로 태어나야 하고 죽어야 하는가.
그토록 짧은 생애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생명마다 질(質)이 있어 등급이 존재하고, 생명마다 크기가 달라 양화(量化)하는 것이 타당한지.
커다란 코끼리의 목숨은 하루살이의 목숨에 비하여 그 덩치만큼 무거운 것인지.
모기의 목숨은, 파리는, 바퀴벌레는.
인간이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하여 그 목숨은 자연의 무엇과 비할바 없이 막중한 것인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그러한가.
멋대로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처분하는 전능한 창조자와 형리(刑吏)의 역할을 인간에게 부여할 당위가 내포된 성서의 말씀인지.
공장에서 생산된 공산품을 대량 소비하듯 먹어 재끼는 데 있어 생명에 대한 연민 한조각 없어도 무방한지.
그러한지, 그러한지.
생명에 대하여 나를 소스라치게 하는 아포리즘 하나 있으니, 그러하지 아니하다.
정신이 신음으로서 내지르는 불멸의 소리.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알베르트 쉬바이처.
그를 생각한다.
오늘은 안녕.
***송현
2008.09.25 07:26
얼마전 지금은 사용하지않는 오랜 담장에 담긴 쓰레기 통을 치우는데
그곳은 버려진 폐품 나무등 지저분한 먼지나 물건이 썩어서 만든 흙이 좋아보여 화분에 옮기려 하는데
그 어두운 속을 지키는 토용(지렁이) 등이 강한 해빛을 받고 버둥대는 모습에 많은 생각을 한적이 있어요.
평상시 징그럽다고 36계 달아나던 저는 그날 어둠속에서 흙을 유익하게하고 지구를 유익하게하는 너.
정상 이탈 시켜서 정말 미안하다....
***후니마미***
2008.09.25 15:58
집안에서 같이 살던 쥐와 뱀과....
떄로 쥐는 쥐약놓는 날 모두 잡는다 아우성해도 여전히 우리 곁에 몰래 있었지요.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기도 했던 쥐들
근래 거의 보이지 않아요.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뱀은 물론 눈에 하나 안 띄구요
그런데 이렇게 살기 좋아지고 그들이 사라져버렸는데
우리는 요새 더 무서운 세상에 사네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균들의 공포
진정 이것은 너무 많이 알아서 더 얻게 된 무서움은 아닌지요?
이 공포에 기대어 산업은 또다시 늘어난 듯 해요.
며칠 전 우리 빌라 전체가 방역사업을 했는데 그런 후엔 바퀴벌레가 안 보여요.
바퀴벌레 개미를 방어하는 그 방역사업은 고작 몇 번 창문과 현관문 옆에
무슨 약인가를 바르는 것이었는데
그 약의 정체는 정녕 바퀴벌레보다 안전한지 알 수 없었죠.
다만 모기들만이 방충망을 뚫고 기어이 들어와 더 아프게 피를 뽑고자 하네요
무심코. 그래야 하니까
탁 때리고 그래서 죽이고 들어오지 말라 방지를 하고 있다가
생명인데.. 라는 생각 잠깐 하지요
그래도 또 탁 때리지요. 죽인다는 생각없이 물리친다는 생각으로만.
그리고 무심코 또
가까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지요
물리치고 방어하고 도망가고.
사람이 이렇네요
***심천 향나무***
2008.09.27 12:45
좀전에 인터넷을 열기전 "지구 떠돌이 함께 뒹굴며...."라는 책을 읽었었습니다.
희미하게 책벌레 한마리가 시야에 들어와 쓱 문질러 버렸답니다. 책벌레 자신은 살기위해 발버둥 치는 것일텐데 저는 그냥 쓱.....
***에필리아***
2008.10.13 18:07
너무 좋은 글이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동우님. <^
생명현상으로서의 물리적 개체는 신이 명령하지 않는 이상, 등급이 존재할리 만무하지만
이미 지상에선 인간이 신이 아닌지요. 아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층계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영역에서 하위 개체군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독재자라고 할까요.
하는 말로는 거룩한 일자를 받들며 산다고 하는데, 그건 우주만물에 대한 인사치례일 뿐이고
실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설혹 밑빠진 독에 물붓기 일지라도 서슴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육을 자행하지요. 생명을 사육하고 거래하고 도살하고 먹어치우고...
인간도 마찬가지 생명의지를 가졌으니 <사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지키려고 같은 인간을 죽이거나 다른 동식물을 잡아먹을 수도 있지만 지금에선 욕망의 대상과 충족의 시장이 전지구적으로 경계없이 확장된 상황인지라 사람 하나 살자고 모태로서의 지구를 황폐지경으로 내모는 형국인 셈이지요.
모친이라면 쌩떼 같은 자식 뒷바라지를 어이 마다 하시리까마는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고기도 좀 덜 먹고, 땅도 좀 그만 파헤치고, 자식도 좀 덜 낳아서 지구 인구도 좀 줄이고 욕망도 좀 절제하고, 맑은 공기도 쐬고 깨끗한 물도 마시고, 그리고 제발 술도 좀 작작 마시고(^^;)
머~ 그런, 말로만이 아닌 진정한 신의 자녀로서 권한을 행사한다면...
그나마의 죄책감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기를 아예 안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구촌 인구를 고려할 때 대량 사육 시스템은 이제로선 멈추기 어렵지 않겠어요.
의문은 철학적이지만 무심결에 또 한마리의 벌레를 죽이고 부지중에 또 알지 못하는 수효의 가축을 조각내어 식탁 위로 가져오네요. 그런게 우리네 삶이 아닐런지...
-
어맛 ! 엉뚱사설을 그만 주저리주저리... ㅇㅇ'' 도망가잣 ! ~~~~~~~~ ㅜ.ㅜ (^^;;)
***황호민***
2008.12.30 12:58
오래된 책을 펼쳐 보시는 모습에 엄숙함이 느껴집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참말로 필요한 것이지요. 지구를 지켜야 모두가 사는 것인데요.
<살고자 하는 생명> 2
***동우***
2008. 9. 25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생명을 얘기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신랄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이 어디 또 있을까?
살기를 원하는 생명.
모든 산 것들의 꼼지락거림은 ‘살고 싶다’는 엄숙한 선언(宣言)이다.
모든 언어의 술부(述部)에는 ‘나는 살고 싶다’는 이중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의미의 전제없이 언어란 도무지 성립될수 없다.
꼬물거리는 책벌레, 부지런히 어딘가를 달려가는 개미, 날개짓 애련한 나비, 잠자리, 벌, 시시때때로 몸짓이 변하는 꽃, 나무, 도끼 내리치기전 올려다 보는 소의 눈빛, 비 온 뒤 축축한 흙을 기어가는 지렁이, 어둔 그늘에 숨어 배가 고파 푸른 눈 빛내는 도둑고양이, 산채로 솥 속에 집어 넣어지는 꿈틀거리는 낙지, 뚜륵뚜륵 슾 속 새의 울음소리. 젖달라고 맹렬하게 우는 아기.
살기를 원하지 않는 목숨은 목숨일수가 없다.
<“누구한테 왜 당했을까
짓뭉개진 하반신을 끌고
뜨건 아스팔트 길을 건너는 지렁이 한 마리
죽기보다 힘든 살아내는 고통이여
너로 하여
모든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엄숙한가.“
‘전율’ -유안진->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쉬바이처.
나는 그의 저서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를 읽었을 뿐이고, ‘역사적 예수의 탐구’는 꼭 읽으려 작정은 하였으나 아직 읽지 못하였고, ‘문화와 윤리’를 읽기는 읽었는데 그 철학적 사유를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인지라 수박 겉핥기식.
허지만 그 사상의 오의에 이르지 못하면 어떠랴.
쉬바이처 생애의 흔적을 따라가 그 고결한 정신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정신의 각성을 위하여 충분한 가치가 있다.
헤르만 하아게든의 '쉬바이처 전기'를 다시 꺼내 읽고 나의 옛 기록도 되짚으면서 한 위대하고 고결한 정신을 반추한다.
쉬바이처는 1875년 1월 14일 유럽 알사스에서 태어나 기독교에서 비롯된 확고한 윤리관과 가치관의 덕목이라는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열 살때 파이프오르간을 접하여 예술적 소양을 깊이 하였고 18세 때 신학과 철학의 공부를 시작하여 음악과 신학과 철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에 이른 수재였다.
그의 나이 스물한살 어느 날 아침.
음악과 학문과 청춘에 대한 찬연한 망아적(忘我的) 기쁨에 잠겨있는 그는, 마음 속에서 울리는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
그의 의식 속으로 뛰어 들었던 그 소리는 예수의 목소리였다.
<누군가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그는 알려지지 않은 자, 이름도 없는 자로서 우리한테로 찾아 옵니다. 마치 갈릴리 바닷가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간것처럼. 그는 그 때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그대 나를 따르라'고. 그리고는 그가 우리 시대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 앞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현인에게도, 현인이 아닌 자에게도.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와 함께 자유, 활동, 투쟁, 고뇌를 체험케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말할수 없는 비밀가운데서 그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아낌없이 내게 주어진 행복을 도대체 어떻게 해서 갚을수 있을까? 서른 살- 예수의 서른 살이 되려면 내게 아직 9년이 남아 있습니다. 9년이 지나면 무엇이 나의 과제가 될 것인가를 지금 알수 없지만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 봉사하는 삶을 살것- 다만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잊지 않을 것. 다만 약해지지 않을 것. 마음의 불을 꺼뜨리지 않을 일입니다. 그 외의 것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손에 맡겨저 있을 뿐입니다>
그 9년이 거의 되어 갈 무렵에 그는 철학과 신학과 음악의 박사가 되어 있었다.
그 즈음, 우연히 불령 콩고에서의 의료의 부족에 관한 것에 관한 논문을 어느 잡지를 접한 쉬바이처.
아프리카 흑인들의 미신과 질병의 고통과 삶의 공포의 현장에 대한 글을 읽고서 죄의식과 함께 어떤 절대적 소명감에 사로잡힌다.
자신과 같은 백인으로부터 야기된 불행이 지배하는 곳, 아프리카.
<하나님의 뜻이다>
쉬바이처는 조용히 결심한다.
<아프리카인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자.>
학자이며 목회자이며 음악가인 쉬바이처.
그는 머지않아 강의도, 연구도, 설교도, 오르간도 없는 아프리카로 가려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새로운 학문인 의학공부에 매진한다.
그동안 그가 이룩한 신학적인 작품들의 완성, 음악가로서의 높은 수준, 의학의 연구등은 가히 초인적인 것이었다.
신학과 철학과 음악과 의학.
그를 이루는데 끊임없는 그의 노력에 있어서 가장 큰 것은 수면시간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극히 드물게 쉬는 날이면 귄스바하의 목사관으로 달려가 몇시간이고 숲속에 앉아 있거나 포도산의 바위 위에서 새소리,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하면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고, 때로 필사적으로 틈을 내어 성 니콜라이 교회의 어둠 속에 잠겨서 오르간단에 앉아 전신을 바쳐 행복에 젖은채 바하의 물결에 몸을 잠기는 것이다>
오늘은 안녕.
***송현***
2008.10.03 06:46
어제는 탑 여배우의 자살로 우리사회의 큰 경종을 울렸습니다.
저 역시 미물로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제 탓인 것 같은 생각에 주위 친지를 돌아보았지요.
소통 안되는 사회, 닫힌 마음글, 물질주의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는지...
평상시 알고 지내던 끝까지 노력하는 평생 음악인인 분이 인사동 고택에서 이제는 나이가 드신 모습이지만 탈을 쓰시고
어쿠스틱 기타로 친구와 자작곡 유랑길은 함께 한 이들에게 눈물나게 아름다움을 주었습니다.
엔돌핀 그이상의 감동과 웃음 가장 큰 보약을 먹은 기분 활력 넘치는 날이 되었지요.
그분은 오늘 공연은 아주 성공이다 라고 하시며 온갖 고통 다격고, 남의 궂은 뒷일 다하고, 늘 빌어먹는 나도 이렇게 살아가는데.......
기타하나가 달랑인 살림.
비운 모습은 늘 가득 차 보이는 그분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아닐가?
어려서 읽은 적도의 성자 슈바이쳐와 동우님 글을 보니 마음의 바다를 가는 생각이.....
<살고자 하는 생명> 3
***동우***
2008. 9. 26
쉬바이처는 자신의 이상을 향하여 결코 쉬지 않았다.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만족하기 위하여 조금도 휴식하지 않았다.
매 순간순간마다 최대의 이상으로만 살았다.
이것 하나로 나와 같은 범부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쉬바이처.
아프리카에서의 고난과 업적.
포로로써의 귀환되고 아프리카를 향한 재도전.
람바레네의 성자란 칭호와 노벨평화상 수상.
그가 쓴 예수전(傳)에 대하여 이단적 논문이라고 비난하는 종교계.
바하 전기, 문화 철학등.
그의 행적과 방대한 업적과 사상의 오의는 나와 같은 미숙한 속물짜리에게는 차라리 진부하다.
아프리카에 가기전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사명감을 획득하고 그를 위하여 기울이는 그의 의지와 헌신의 행적, 그것만으로도 이미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쉬바이처는 적어도 기독교적 도그마에 사로 잡힌 형해화된 신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철학은 행동이 따르지 않고 사변에만 치우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뚜렷하고 드높은 목적의식, 현실적인 의미에서도 참된 이상주의자이며 진정한 계몽주의자, 진짜배기 예수의 영혼을 닮으려는 또 하나의 아시시사람 프란치스코.
어떤 인간이 실존의 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본받고자 끊임없이 자신의 본능, 이기심과 싸우면서 베푸는 희생적인 사랑, 아가페의 사랑으로 일생을 바치고자 하였을 때, 실증적으로 천국이라던가 하나님의 심판같은 아무런 보상이나 징벌이 없다는 확신에 이르러 자각을 하여도, 그는 그 베푸는 행위를 멈출수 없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윤리의 조건일 것이다.
파스칼이 말하였던가? 예수를 믿어 손해 될것이 없다고.
하나님이 존재하면 그것은 축복일 것이고,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뚜렷한 가치관으로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므로.
혹자는 쉬바이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불교도에 가깝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도그마가 아닌 예수의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다
나는 예수의 사고가 인류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서구문명, 특히 청교도에 의하여 정립된 자본주의의 발달 역시 예수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역사 속의 기독교가 세속화되고, 권력과 결탁하여 권력지향의 폭거를 휘둘렀고, 샤먼화로 흐르고, 세계대전중에는 그토록 무력하였고, 또한 예수를 이리 뜯고 저리 뜯고, 요래 저래 화장시키고, 그 분의 죽음을 이래 저래 두드려 입맛대로 맞추고, 시대의 트랜드에 맞추어 요란한 화장을 하더라도 오소독스한 예수의 정신은 여일하게 살아있다.
그것만이 기독교를 지탱해주고 있는 근간이고 예수의 정신이 죽으면 기독교도 죽는 것이다.
서구문명의 무릇 좋은 형태로 나타난 모든 형태의 것들은 예수의 변형이다.
자본주의의 좋은 것들은 예수이고 사회주의의 좋은 것들은 예수이다.
나는 세례 받은 입장으로서 내게 기독교를 위한 변증은 없을지언정 예수를 위한 변증은 있고자 공부하고 노력하는 편이다.
쉬바이처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에 대한 인류에 대한 사명을 자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잠자고 있는 영혼을 깨우고 사고(思考)를 유발케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생(生)에의 외경(畏敬)으로 사고한다는 요구와 능력을 재발견케 하는 것이다.
아아, 그는 참된 계몽주의 철학자이다.
<生에의 畏敬! 덤불을 가로지른 오솔길이 그의 앞에 열리었다. 철문이 마침내 열린 것이다!
이제 그는 세계 및 인생의 긍정과 윤리를 포함한 이데(이념)에로 들어 선 것이다. 이제 그는 윤리적인 세계 및 인생의 긍정에 대한 세계관은, 그 문화이상과 함께 이 생에의 외경이라는 사상 속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성적인 思考로부터의 도피, 아니 사고하는 것 자체로부터의 도피는 당시 이미 인간의 양심에 재앙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는 전에 볼수 없었던 사회적 정치적인 단체들, 심지어는 종교적인 단체까지도 개인 사고의 가치는 하락되고 있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독자적인 사고를 집단의 권위에 일체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思考의 힘을 이데로 부터가 아니라 강제적인 일치로부터 도출해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아, 이는 작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 특성이 아닐까.
프로이트가 말한 일종의 Herd Allegiance(군거적 순종의 원리)에 의하여 우리는 이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있지는 아니한지.
<인간은 생명을 부정할수 있고, 그 부정이 투철하다면 자살을 범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생명을 긍정한다면, 만일 생명이 그에게 있어 의미와 타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의 의지를 심화하고 내면화하여, 다른 모든 생의 의지에 대하여 자신의 생에 대한 것과 같은 외경의 염(念)을 표시하고자하는 충동을 자신의 내부에서 느끼게 될 것이고,
그는 또다른 생명을 자기의 생명가운데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는 사상(事象)일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생명에 대해서는, 그것이 내가 접촉하는 범위 안으로 들어오는 한에 있어서 나는 수동적으로 그 생명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에 대하여 행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생명있는 모든 것에 봉사함으로써 나는 나의 지향하는 그 이상에 도달할수 있습니다>
<생에의 윤리는 삼라만상에게 확충된 사랑의 윤리입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으로 인정되는 예수의 윤리입니다>
<인류가 스스로의 뜻에 의해 만드는 것 이외에 인류의 운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가 몰락의 길을 더듬어 간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나는 진리와 정신의 힘을 믿기 때문에 인류의 미래를 믿습니다. 나의 스승 괴테는 말하였습니다. 인간최고의 노력은 자기자신의 길을 인식하고 그 인식 밑에 윤리적인 심성과 행위에 의하여 자기를 초월해 성장해 간다는 목표에 종사하는 것이어야한다. 고>
<세계사 속에 일어나고 있는 지금의 모든 것은 정신적인 그 무엇의 위에 정신적이 아닌 것이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정신적인 것이 강하다면 그것은 세계사 속에 반드시 창조적인 힘을 나타낼 것입니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선이며, 생명을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악입니다>
<인간은 생명을 파괴하지 않을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생명을 보다 높은 형태에서 유지시키거나 발전시키기 위해서만 그러합니다>
<만사가 잘되어 가고 있다고 당신의 양심이 당신에게 속삭일 때에는 경계하십시오. 만족한 양심이란 악마가 발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모든 것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살고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날엔 무엇인가에 반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필연적으로 행복한게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은 봉사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성장이야 말로 결정적인 것입니다. 즉 사랑하는 능력과, 가치가 적은 것을 가치가 많은 것을 위하여 희생으로 바치는 능력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색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인 파산선고와 같습니다. 자신의 사색에 의하여 진리를 인식할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진 곳에서 회의주의는 시작됩니다. 기독교는 사색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자기인식에 이르기 위하여 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는 사랑과 자비의 명령을 전통적인 진리로서 신봉해 오면서도 그 때문에 노예제도, 분살, 고문 그 밖에 숱한 고대 중세적 비인도행위를 배척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겨우 계몽시대의 사색의 영향을 받고부터야 인도주의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 과거의 기억이야말로 어떠한 사색불필요론으로부터 기독교를 영원히 수호하는 것입니다>
<생에의 외경 윤리는 나의 권리조차도 나에게 속하지 않게 합니다. 생에의 외경 윤리는 나의 행복조차도 나에게 함부로 주지 않습니다. 내가 무애의 기쁨에 젖고 싶은 순간에 내가 보았거나 미루어 헤아렸거나 하는 모든 비참한 생명을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생에의 외경 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생활 사정여하를 불문하고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인간과 인생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인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인간으로서 봉사하기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 윤리는 학자가 설령 그 학문에 의해 세상에 크게 유익한바가 있다손 처도 오직 학문의 길에서만 살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술가가 설령 그럴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우선하여 그 생명의 일단을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바칠 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생명.
어떤 내 친구는 죽은 도둑고양이 사체를 거두어 묻어주면서 흐느낀다.
어떤 내 친구는 일부러 고기집에 고기 먹으러 가지 말자고 가족들과 약속하여 육류에 대한 욕망에 저항한다.
잡식동물일 나 또한 육류를 좋아하는 편이다.
콜레스테롤을 걱정해야 할 형편인데도 고기 맛을 포기할수 없다.
살고자 하는 생명 하나가 끔찍하게 살다가 끔찍하게 도살된 주검을 입맛 다시며 즐거워 하는 내가 끔찍하지만, 곧 욕망에 항복해 버린다.
생각은 있으되 몸(미각)의 기억을 떨쳐 버릴수 없는 것이다.
아아, 가냘픈 의지.
게걸스레 고기를 뜯는 오, 슬픈 내 생명이여
그러나 관념일지언정 쉬바이처는 나의 정신을 고양시킨다.
1875년에 알사스에서 태어나 1965년 람바레네에서 죽은 또 한분의 프란시스코.
나와 동시대를 잠시 사셨던 쉬바이처.
국가가 아니고, 사회가 아니고,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임을 온 존재로 말씀하셨던 이.
쉬바이처 정신은 낡은 패러다임이라고 말하려는가.
집단주의 물신주의 쾌락주의가 지배하는 시대.
이 시대여.
***송현***
2008.10.03 07:16
이 험난한 아귀세상에서 동우님이 건져내신
이 시대의 필독글 슈바이쳐 아무리 시대가 지나도
금강석 같이 거룩하고 거룩 합니다.
종교나 단체 빛나고, 인간 빛나는사회
사색이없는 사회, 주입식 사회
청맹과니 이 사회, 물질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후니마미***
2008.10.03 19:36
전기로 후루룩 읽었던 슈바이쳐.
그리고 모두 다 알고 있어서 제대로 읽지 못하는 예수
그들의 공통점은 알고 있는 걸 몸으로 실천하였다는 것이겠죠
역경은 자연히 따랐던 것이고 몸의 고생이야 이루말할 수 없었네요.
ㅈ
현대종교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혹은 이 나라 대통령의 종교라는 것 때문에 거부하고 있는 기독교에서 그 핵이라고 해야 할 것, 신약은 2000년동안 우리를 가르치고 있고 진정성은 이미 우리 알고 있을진대
실천하는 이는 극히 적습니다
슈뱌이처는 실천자지요?
생각을 생각만큼 몸으로 하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생각 따로 몸따로 라고나 할까요.
이것이 보통과 위대를 가르는 지점인거겠죠
***심천 향나무***
2008.10.09 01:16
각기 다른 다양한 직업에 종사할지라도 그와같은 계몽주의적인 사고를 가진이가 늘어가야할텐데 그 반대로 돌아가니 참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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