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89. 4

카지모도 2016. 6. 22.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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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94 1989. 4. 1 (토)


회색수면.

반은 깨어있고 반은 잠속에 빠져있는 상태로, 꿈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어 결국 새벽의 머리는 깨어질 듯 아프다.

어제는 외주기성책정에 대한 대가로 김사장에게 반대급부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갈등이 되어 난삽한 꿈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하나님은 이해하신다. 연민의 눈길과 긍휼히 여기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것은 심리학적인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나약함을 인식한 후 하나님께 기대는 진정한 신앙의 자세에서 나온 안심일수도 있을 것. 아, 나는 모르겠으나.


엎드려 창세기 두어장, 기도.


15396 1989. 4. 3 (월)


어제 오전동안, J와 고스톱.

가시버시의 화목한 그림인데, 나의 도박심리는 J보다 치사하다. 졌는데도 돈을 안주려하는 나.

오후 잠시 시내 나간다.

흘러 흘러 넘치는 사람들, 쌓여쌓여 넘치는 상품들. 소비가 미덕이라는 도그마의 구호.

거대한 시장. 시장만이 얘기한다.

그러나 다양한 듯 하지만 기실 그 원리는 단순하고 그 현란무쌍함은 표준화된 개성이 금새 드러나고 만다.


15397 1989. 4. 4 (화)


신동아에서 읽은 필맥.

숙명여대 학보사의 편집국장, 스무살 남짓의 소녀가 겪은 암울한 80년대의 대학신문.

정의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언제나 가슴을 친다.


그에 비하여 구상유취하였던 나의 대학시절이란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다.

정의감, 분노가 있었던가? 공의의 울분이 있었던가?

그저 당구, 막걸리, 폼만 잡는 감상주의, 되지도 못한 예술지상주의,여자 꽁무니나 따라다니고... 다만 사적인 범주안에서의 그것 뿐.


새벽.

중국의 공산혁명- 오랜 세월 끈기와 포용력으로 이루어낸 그야말로 대장정의 대륙적인 혁명이야기를 읽다.


英이 어제 시험.

아빠를 향한 생경한 표정, 내 딸은 사춘기다. 사춘기다...

그리고 학습태도- 초저녁부터 쏟아 퍼붓는 졸음버릇을 고처주어야 하는데 이를 또한 어쩌나.

俊이는 오늘 소풍, 성지곡 수원지.

어제는 그토록 바람이 불더니 이 새벽 다행히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15398 1989. 4. 5 (수)


기능직 사원 강당에 모아놓은 교육시간.

며칠전 아침 조선일보 칼럼에서 오려내고 백과사전으로 자료를 보충한 미국 노동법 성립과정, 로버트 태프트 상원의원의 법안에 관하여 강의하다.

나의 의도와 논리가 먹혔는지?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그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고 나의 신념으로써 씨부리고 있었는지.

종일 고려해운 선주감독 박부장등과의 테크니컬 미팅.


퇴근하여 필갑이집 집들이.

왁자지껄 어울리는 고스톱판은 어김없이 벌어지고.

나는 그런 분위기에 짐짓 이방인 몇몇과 술잔만 비운다.


15399 1989. 4. 6 (목)


박영한 '지옥에서 보낸 哲'

경제성장 와중의 도시근교. 변화하는 삶의 양태..

어제 치킨하고 책 몇권 사들고 온다.

J와 앉아 먹고 마시며 예수님 얘기하였는데, 아내님께서는 진지하게 들으셨는지.


15400 1989. 4. 7 (금)


英이, 환경정리 때문에 10시 가까이 귀가하면서 올무렵되어서야 한통 전화.

제 엄마 아빠가 얼마나 노심초사한줄은 아랑곳없이.

지금은 조심스런 물건일때다. 英이는.


"감자먹이기

달아나는 희망의 등에다 감자먹이기

비음이 너무 많은 우리들 시 속으로 감자먹이기

가노라 너무나 북적대는 이 황야를

떠나노라 너무나 식어버린 이 지구를

감자먹이기

잡티가 대량으로 섞인 우리들의 살 속으로 감자먹이기

돌아보는 희망의 마빡에도 감자먹이기

감자먹이기 당신의 망설이는 귀향길에 고시레에 감자먹이기"

-김명리 '혹성탈출 첫발자국'-


이 시는 시니컬함만이 아니다.

나의 입버릇인 '죽겠다'라던가 '빌어먹을'이라던가 '씨발'과 같은 상투성의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뭇 진지함이다. 피흘려 정면으로 인식하는 진지함이다.


또다른 조선일보의 칼럼하나.

법정스님의 씨니컬하지 않은 선문답 하나.

나는 이런 불교에서 예수님을 본다.

나의 예수님꼐서 주장자를 번쩍 들어 마룻바닥을 내려치며 한마디,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할!"


문익환 목사는 늙고 여린 감상적인 시인인가. 완강하고 거센 혁명적 사상가인가.

통일, 통일.. 통일은 내게 있어 무엇인가?


감자먹이기.

나의 자기폄훼에 대하여 감자먹이기.


15401 1989. 4. 8 (토)


숙면. 어제의 소주 탓일게다.

그러나 창궐한 혓바닥의 반란군.

흐린 아침녁. 회색의 하늘과 부우연 바다.

구름 속에 감추인 태양은 붉은 휠터의 조명인 듯 바다 복판을 모호한 붉음으로 물들인다.


새벽.

기도.

하나님 그분은 계신다.


15402 1989. 4. 9 (일)


일직근무.

오후 3시쯤 집에 돌아온다.

흐린 날씨이지만 봄날의 따스함은 온누리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모처럼 마음밭의 안온함은, 이 봄의 제전을 누리라고 스트라빈스키의 목소리로 속삭이고 잇다.

음악들으며,

우리 예민한 英이를 감싸안아 마음을 열게하여, 열여섯짜리 나의 딸과 서너시간을 부녀가 정답게 재잘대다.

영화,연극,음악,만화.. 친구,선새님, 대학 얘기서껀 나누는데 아빠의 짐짓 진지코자하는 폼은 얼마나 촌스런 것인지 모른다.

다만 英이에게 함께 느껴주고 이해하는 아빠라는 폼만을 과시하는수 밖에.

우리 수린이, 우리 英이.

우리 딸은 이미 커다란, 자꾸 커다랗게 변하고있는 미지의 괴물인 것을..

나의 딸, 나의 아해, 나의 생명 조각.


진해 군항제 벚꽃은 이제 한풀 꺾였다고.

영도 봉래산 중턱에 한자락은 허이옇게 벚꽃이 만개하였는데 멀리 바라 뵈는 그 부위는 주위의 녹,홍,황색의 색상 속에서 그 부위만을 촉광 높은 전등불을 켜 놓은 것 같다.

이렇게 또렷하게 드러나는 깨끗하고 아쌀함이 바로 일본기질을 닮았구나하는 느낌이 절로 든다.


15404 1989. 4. 11 (화)


어제 동원산업 2척의 경사시험 준비로 바쁘고 고된 육체노동.

땀에 폭 젖는다.

임금협상 첫날. 예상컨데 5월 1일 전국 연대투쟁으로서 총파업이 무서운 복병일 것이다.

노총의 우리 회사가 민주노조의 입김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퇴근 길, 만수무강의 빈대떡과 동동주.

중년을 훨씬 넘은 주모의 상냥한 표정과 조신하고 부드러운 언행은 꼬부랑 노파일지라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새벽.

내 방에 앉아 누가복음.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다.

조심스레 온갖 소망과 경외와 믿음을 담은 그 손길.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저를 구원하였으니...


아침의 저 바다.

붉게 물든 저 풍경화.

그러나 저 바다는 시나브로 메꿔지고 있다.

뒷편의 저 산은 포크레인으로 무자비하게 깎아내리고 있다.

주책없고 사려없는 개발이란 이름의 횡포여.

자연을 바꾸지 맙시다. 하나님의 조화를 깨지 맘시다.


15406 1989. 4. 13 (토)

어제 늦도록 마시다.

유치함을 장식으로 두르고 유치함으로 히히덕거려 스스로 유치함에 자족하여 낄낄거리는 인격들을 나는 폄훼해서는 못쓴다.

구상유취한 인격들이라고 나는 그들을 폄훼할 자격이 없다.


12시 넘어 들어 와 옥상에 올라가 노래부르며 나는 또 나대로의 유치함을 발산했던 모양.

그러나 또한 이러한 나의 유치한 감상주의가 절대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그 유치함이 남아있음이 자랑스럽기조차한 이것은 아직 작취미성인 정신 탓일까.

작취미성의 기도도 주님은 들으신다.


15408 1989. 4. 15 (토)


英이 성적표.

전학년 30등.

분발시킬 무엇이 필요하다.


俊이 어제 시험치르고 단체로 '간디'보았는데 별로 재미는 없더라고.

좋은 영화일텐데 俊이의 감수성은 그런 쪽이 아닌가.

상상력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데..

지금의 내 아이들에게는.


노동법개정으로 이제 토요일은 그야말로 반공일이다.

그러나 현장의 관리자는 12시 땡 친다고 발딱 일어설수 있을런지.


15410 1989. 4. 17 (월)


어제 어머니 오시다.

모두 역에 도열하여 마중.

어머니를 둘러 싼 가족들.

약간의 소유의 삶의 행태는 어쩔수 없는 것.


15411 1989. 4. 18 (화)


수직적인 사고로 참신한 새로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못하는 회사.

보수주의자란 색채를 과장되게 드러내 보이는 경영진.

진정한 보수꾼이라면 진보꾼에 대하여 철저한 보수의 논리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도 아니고.

다만 알량하게 내세운 그 논리가 공격 당하면 어린애처럼 화를 내는 것일뿐.

세상은 바뀌는데 구각을 벗을 줄을 도통 모른다.

지금의 이 나라의 모든 상황을 보혁구도로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와 같은 회색분자도 엄연한 세를 이루고 있을 것이고.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지도자, 그런 인격의 계층이 없다는 것이다.


새벽.

베드로전서.

기도.

속사람의 온유.

속사람의 안정.

무한한 균형감각, 그 절대적인 발란스.


15412 1989. 4. 19 (수)


시류를 따라 변신하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다는 생활인으로서의 당위성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도되며는.

프랑스 혁명당시 최대위 일간지 '모니퇴르'

1815년 3월1일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쥐앙만 상륙하여 점점 파리로 입성할때의 논조가 이러하였단다.

'살인마, 소굴에서 탈출'

'코르시카의 아귀, 쥐앙만 상륙'

'괴수 카프에 도착'

'괴물, 그레노블에 야영'

'폭군, 리옹을 통과'

'약탈자, 수도 60마일 지점에 출현'

'포나파르트, 급속히 전진, 그러나 파리입성은 절대 불가'

'황제, 퐁텐블로에 도착하시다'

'어제 황제께옵서는 충성스런 신하들을 거느리시고 튀를리 궁에 듭시었다'

이것은 불과 3일간의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진보를 향한 어떤 신념같은걸 보여준다.


15413 1989. 4. 20 (목)


홀로 있을 때 짐짓 군자의 풍격을 흉내내 보려해도 근본 소인배는 소인배일뿐.

선비적인 명상은 불가하다.

가만히 눈 감고 무념의 경지에 이르고자하는데 내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정신병리적인 증후이다.

나의 정신구조는 명상이란 군자의 격에는 맞지 않는 모양이다.


아침.

바다는 완전히 안개에 덮혀잇다.

연기가 피어 오르듯 바다에서 안개는 무럭무럭 피어 오르고 있다.

기도드리는 소인, 군자의 마음을 갖게 하여 줍시사고.



15414 1989. 4. 21 (금)


새벽일어나 성서개론 다시 읽기 시작.

오주혜박사의 책에서 크리스찬의 직업이라는 항목의 글을 읽으면서 쓴 웃음.

그는 이 자본주의의 산업사회 속의 직업이라는 것에 대하여 매우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가 얘기하는 크리스찬의 직업이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직업'인데 어림 반품어치도 없는 얘기다.

허위, 기만, 허영, 공해, 공갈을 유발하지 않는 직업이 존재할까?

자신의 인격을 올곧게 유지하며 남의 인격을 올곧게 대접할수 있는 직업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것은 신앙과 직업의 여떤 연관성을 운위할 정도의 문제도 되지 못한다.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포기의 문제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포기하여 대열에서 벗어나던지, 그 대열에 합류하여 끌려가던지.

날로날로 교회가 번성하고 있는 까닭중 하나는 바로 이 대열의 덕을 보고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 -누가-


15417 1989. 4. 24 (월)


새벽3시.

창문에 빗방울 서려있다.


폴 데이비스 '현대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 중에서 '자아'와 '기적'편을 진지하게 읽는다.

자아는 어디에 있는 건가? 의식 속인가, 기억 속인가.

찾으려 하면 하나님을 기억하는 어떤 인자는 발견될수 있을까.

물리학이 하나님을 추론하지 못하는 것같이 그 인자는 발견될수 없을 것이다.


기적이라면 우찌무라 간죠가 논증한 바로 그것이 기적이다.

모든 존재의 생성 소멸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의식체계, 그 의식체계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기적일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

요한복음.

에베소서.


15418 1989. 4. 25 (화)


NK선급의 검사관.

거만하고 저속한 인격에 시달린다.

그것도 끝발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필리핀 선주감독 MR 카마초, 귀염성있는 동글동글한 얼굴의 남방인은 지구촌 곳곳에서 체득한 예리한 기술력으로 파고든다.

필리핀 3류 국민 운운하는 몇몇 치사한 쇼비니즘의 국산품들이 오히려 우습다.


봄이다, 봄.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대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

-초록기쁨-


15419 1989. 4. 26 (수)


피곤한 몸을 누이고, 아이들과 우스개소리.

다소 늦은 아침.

오늘 英이 소풍날.

英이는 부쩍 여자티가 난다.


시끌시끌, 대동조선 농성돌입, 타코마는 두 번째의 태업.

회사는 오늘이 고비가 될 것이다.


15420 1989. 4. 27 (목)


어제밤, 내 공간의 책상 앞 앉아 홀로 소주 마신다.

술을 마시며 고즈넉한 사념에 잠기면 영감처럼 여러 가지 단상들이 명멸하지만 아침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알콜이 체내에 들어가 감정 세포가 흡수하면 이윽고 의식은 감미로운 카오스가 된다.

그러나 일견 혼돈과 깥은 그 의식의 소용돌이는 나름대로 저떤 체계와 질서가 있는 듯, 언젠가 어느 잡지에서 본 핵분열의 사진, 극도의 혼돈 속에서도 엄격한 질서와 법칙이 작용한다는 카오스 이론.

술 마셔 난무하는 의식의 카오스의 법칙을 이루는 주제는 무엇일까?

잘 못 살아오고, 잘 못 살고있는 생에의 자각 ?

어제 밤 끄적거린 낙서 하나가 남아 있다.

무슨 뜻일까?

"어허 달구. 되게도 해쌓았구나. 그 놈의 어색한 짓거리를.

어허 달구. 네꾸따이 맨 놈은 맨 놈대로, 똥지게 진 놈은 진 놈대로, 째지게 웃는 놈은 웃는 놈대로, 찔찔찔 짜는 놈은 짜는 놈대로, 되게도 해쌓았구나. 그 놈의 꼭두각시 짓거리를.

너무나도 팽팽팽 정신이 없었구나, 야아 야아 허어 달구.

그녀러 심장마다 어찌 그리도 서리서리 미쳐갔는지.

허더꿍 허더꿍 올라가보이, 온 길이 억울쿠나 허어 달구. 갈길이 처량쿠나 허어 달구.

다 잃어뿔고 허겁지겁 들어선 그곳, 참 개씹도 아니고마 허어 달구.

돌아보이 참 좆도 아이구마는 달구야 허어 달구야.

좆빨라고 이래 살았더나, 야바우 속판을 부대끼면서 살았단 말가, 허어 달구 어허 달구."


달구는 무엇이고, 이같은 가락은 어디 숨어있다가 술취한 의식 속에서 나왔단 말인지.


기도.

어머니, 아내, 아이들, 형네, 媛네, 사랑하게 하소서.

모든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이다.

먼저 이 추악한 심령을 수술하여 주소서.

내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 속 티만 보이는.


15422 1989. 4. 29 (토)


어제 밤 성을 주제로 한 영화 한편.

영화적인 에스프리는 전혀 존재하지 않고, 튼튼한 구성력에 기초한바도 없으며, 주제도 없고, 테크닉으로서의 영화언어도 없다.

꽤 소문 난 영화인데 이 꼴이다.

이런 비디오를 빌려다 보는 내 취향의 저질스러움, 다만 성적 환상의 엑스터시만을 기대하였을 것인데 그 마저도 없는 영화이고, 무엇이 잘 만들었다는 것인지.


15423 1989. 4. 30 (일)


어제 김철수 부부, 신혼 인사차 집에 오다.

우리 집이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주는 몇몇 직원들.

아마도 내 위선적인 포즈 탓일건데, J의 손님을 응대하는 포즈가 은근한 탓도 있다.


아침.

창에서 보면 까치가 자주 눈에 뜨인다.

흑백의 조화로만 꾸며진 새, 좋은 소식이 온다는데.

공연히 좋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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