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89. 3

카지모도 2016. 6. 22.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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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3 1989. 3. 1 (수)


어제 불면의 악한 영이 괴롭히다.

그것은 또한 생생한 꿈의 모습으로 잠들지 못하는 나의 심리를 끊임없이 농락한다.

현실과 환상과 기억의 칵테일. 현상과 환각의 비빔밥. 과거와 현재의 판타지... 꿈.

물, 바다인지 강인지- 물은 무의식이라는데.

연락선, 해변의 저택, 초라한 모습의 규정이, 집에 오니 시큰둥한 어머니...

드라마의 진행과 분위기는 심리극에 가깝다.

억제된 욕망의 데포르마숑인가. 어떤 한에 대한 안타까움인가, 정을 향한 가없는 욕구인가.


억지로 내리누르는 그 괴물을 뿌리치고 일어난 시각은 이미 7시를 넘어섰다.

오늘 할아버지 기일, 15주기.

큰 집 모여 예배보기로 한 휴일이다.


오늘은 강철빛으로 완강하게 번득이는 바다.

기름에 덮힌 것 같이 매우 불결해 보인다. 내 꿈의 풍경화를 닮았다.


15364 1989. 3. 2 (목)


울부짖는 바람소리.

새벽의 드넓은 공간을 울부짖으며 휘돌아 다닌다.

엎드려 마태복음.


어제 모두 둘러앉아 가야숙모의 인도로 예배.

주은이 경상대 금융학과, 어린 조카딸 쌍거풀 수술시킨다고 데리고 가는 어머니의 자상함.


15365 1989. 3. 3 (금)


어제 머리깎은 俊이 모습, 제법 의젓한 중학생 티가 난다.

새벽.

클래식 기타가 연주하는 찬송가를 작게 틀어놓고 엎드린채 로마서 읽는다.

기도.

어린아이가 어머니 젖을 사모함과 같이 아버지의 신령한 젖만을 열망하는 아이의 단순한 욕구를 주소서. 타성에 젖은, 육신의 소욕과 세상의 환락을 단호하게 거부치 못하는 이 나약한 영육을 긍휼히 여기소서. 어머니, 아내, 아이들을 주님께 더욱 바싹 당겨 주소서.

경건함이 주는 평강 이외에 진정한 균형있는 평강은 어디에도 존재치 않습니다.


英이 학습태도가 심히 염려스럽다.

간단하게 물어보니 의외로 영어실력이 형편없다.

도무지 고등학생의 영어실력이라고 믿을수 없을 정도이다.

중학교때 전교 3등의 실력은 다 어디로 갔는지.

방법이 틀렸을까?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가 부족한가?

J의 방식에도 문제는 있다.

인상쓰며 잔소리로 닥달할 뿐이지, 차근차근 동기를 부여해주는 배려와 자상함이 부족한 것이다.

진정한 동기유발, 은근히 충동질하는 경쟁심리, 미래에 대한 장미빛 비젼 같은...

우리 英이는 사춘기인데.


나는 무엇인가? 아비짜리로서 제대로 딸아이의 교육에 관여한 적이 있는지.


15366 1989. 3. 4 (토)


겨울장마.

올 겨울에는 참 끈덕지게 자주도 비가 내린다.

현장의 공정은 흐트러지고 나는 그로 인해 곤혹을 당하고 있다.

나의 낭만은 비내리는 걸 좋아하고, 비오는 풍경화는 평화롭고 안온한 기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지만.


어제 화신기업 김사장 접대로 박두성씨, 박세동씨와 술.

박두성씨의 다소 지나친 자기현시 욕구. 그것은 열등의식의 보상심리인걸 나는 훤히 간파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그런 과시가 일종의 자기만족이 되는 모양이다.


새벽.

밖의 어둔 공간에 또 비내리는 소리.

엎드려 기도. 英이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며.


15367 1989. 3. 5 (일)


파마를 하기 위하여 교회는 가지 않는다.

엄격한 안식일의 예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나는 참 큰 죄인이다.

안식일의 준수라는 계율을 현세의 교회참석에 대입시킬수 없는 내 의식은 어쩌면 굉장히 잘 못된 것일수도 있다.

추상이 아닌 성경의 말씀, 옛날 안식일의 준수는 곧 현세의 교회 참례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나의 생각이라는 것이 실은 교회가기 싫다는 간교한 자기합리화의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파마.

쏟아지는 빗줄기, 오후 1시를 넘어서자 그 빗줄기는 탐스런 눈송이로 둔갑을 한다.

저 숲을 배경으로 난무하는 수억 눈송이 송이..

그러나 따뜻한 대기의 기온과 먼저 온 손님인 땅에 고인 빗물때문에 쌓이지 못하고 금새 녹고 만다.

은세계를 연출치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눈내리는 풍경화를 감상할수 있었다는 것은 부산에서는 행운이다..

펄철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패티김의 아도르를 들으며, 한잔 술을 비우며, 내 방 창곁에 앉아있는 일락.

이 일락이 이토록 좋은데 어쩔거나.


15369 1989. 3. 7 (화)


어제 늦추위.

새벽에 느끼는 아파트 안의 온도와 실제 밖의 온도는 꽤 차이가 있다.

밖은 상당히 추운 날씨.


아이들 첫 등교.

얘들아.

부디 새마음으로 너희의 이 아침을 맞거라.


J는 벌써 오래전에 운전면허 취득하여 아직 면허없는 나를 무색케 하는데, 이런 면에서도 J는 나보다 훨씬 더 적극성이 있지 않은가.

적어도 J는 햄릿적인 성격은 아니다.

동키호테에 가까울지언정 햄릿적은 아니다.

나는 동키호테적이라기 보다 햄릿적인데 성격적으로 나와 J는 상호보완적인 절묘한 팀웍이 아닌가.


15370 1989. 3. 8 (수)


영하의 추운 날. 꽃을 시샘하여 겨울이 부리는 심술- 꽃샘추위.

그러나 봄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꽃샘추위 바로 등뒤에 술레로 숨어서 곧 까꿍할 것.


새벽.

이사야서, 누가복음.

아내여, 어머니여, 英이여, 俊이여, 내 영혼이여. 아, 가련한 인간이여. 영원히 도달치 못하는 것을 꿈꾸는 동물에서 출발한 나그네여. 창조주를 희미하게 기억은 하고 있으되 이미 에덴의 낙원을 떠나서 잃어버린 슬픈 방랑자, 너 인간의 실존이여. 실존을 인식하는 너 인간의 아득함이여.

그리하여 이제 창조주를 기억해 내고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는 너 인간의 다행스러움이여.


15371 1989. 3. 9 (목)


어제밤, 불면을 다스리는데 이제 아티반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차라리 술을 마시자고 소주잔 비우다.

CBS의 새롭게 하소서 들으면서.

락음악- 악마숭배주의에 대한 증언들.

젊은이들이 그런 음악들을 듣는 것이 곧바로 악마숭배주의에 빠져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일 듯 싶다.

현대의 문화 자체가 악마성을 띄고 있지 않을까?

강렬한 리듬감, 현란하게 번쩍이는 조명, 카오스적인 율동들- 이런 것들은 어떤 원초적인 악마적 흥을 북돋운다.

비단 음악이라는 장르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 곳곳에, 모든 표방하는 문화 풍조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이 현대의 문화를 호흡하듯 수렴하여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이야 정말 어쩔수 없지 않겠는지.


일출의 장관, 오늘 아침 연출되다.


15372 1989. 3. 10 (금)


어제 늦도록 TV.

녹화한 '광주는 말한다'와 '5공의 인권'본다.

오늘이 휴일이므로 느긋하게 본 것이다.

광주의 화면은 실로 충격적이다.

그러나 광주시민의 한이라는 것이 내 표피적 감상의 차원으로는 절절하게 느낄수 있지만, 그 사실적인 경험에 의한 한이라는 것은 나같은 지극히 사적인 언저리에 서성이는 인간으로서는 이해불가할 것이다.

맹목의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의 군인들 역시 또다른 측면의 피해자는 아닌지. 나 역시 군인이었을 적에 그런 임무의 부대에 소속되었다면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상대를 폭도로 인식하고, 만일 전우가 희생당하면 보복심에 불타고, 그것이 곧 사기로 오용되어.


김근태씨에게 가해진 고문. 조작을 위한 고문들.

권력자가 '네놈은 싫다"하면 죄인이 되는 무법천지.

그 죄인도 어디 시시껄렁한 죄인인가.

남영동 대공분실의 방. 보안사의 컴컴한 지하실. 안기부의 무시무시한 밀실. 영화감독 가브라스의 방.

거기서 만능방망이 용공분자라는 방망이로 조지면 그만이다.


TV의 용기, 평민당에 항거하는 조선일보의 용기.

비겁하고 소심하고 사적인 범주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나란 위인은 그런 용기들의 그늘에 숨어 그저 쑥덕이나 멕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후덕해 보이는 俊이 담임선생님 방문.

J와 동갑내기인 모양인데,

J에게 이사직책을 맡아줄 것을 간청하였다니 무슨 소린고?


15375 1989. 3. 13 (월)


일요일의 회사.

이제 조선소의 현장에서 동구권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격세지감.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아예 눈빛만 마주쳐도 안된다는 관념에 푹 젖어있었을때가 엊그제같은데.

폴란드선원에게서 쏘련제 면도기 만원주고 사다.

디자인은 매우 조잡하지만 성능은 괞찮을듯하여.


자본주의의 그 부요한 듯 허황한 외모 앞에 그들은 주눅이 들은걸까. 노상 술에 취하여 있다.

인간성으로 따지자면 자본주의의 인간성보다 사회주의의 인간성이 훨씬 우월할 것인데도.

더구나 뀌리부인의 나라, 쇼팽의 나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술들에 취해 있는지.


새벽의 대기에서 이제는 봄이 느껴진다.

엎드린채 누가복음 뒤적이고 기도.

기원의 간구함에 애통함의 색채가 점점 옅어짐은 어인 일일까.

타성, 발뒤꿈치와 같이 굳어져 형해화된 중얼거림....


15376 1989. 3. 14 (화)


눅눅하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간밤은 눅눅한 수면.

깨어나 俊이 책상 앞에서 누가복음.

그리고 안병무교수의 논문 '신학성서에서 본 회개' 읽는다.

육체적인 여러 욕망에 의한 죄의식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그런 죄의식을 아마도 야단치셨을 듯 하다.

왜 그런 따위로 죄의식을 갖느냐고 하시면서.

캐토릭의 분위기는 음주,끽연 게다가 나른한 성적인 분위기도 있는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세계와는 엄청나게 떨어져 있는 전혀 별개의 세계라고는 생각지 못하겠다.

그저 역사적 때가 낀 세속화의 결과일뿐.

안병무 교수는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하는 세례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회개의 조건은 엄연히 상이했음을 논한다.

요한은 말하자면 금욕적이고 일상적인 외적 육체적인 회개이고, 예수님은 심령적인 내적인 것- 곧 심령이 변화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기를개방하는 것을 의미하였다고.


15378 1989. 3. 16 (목)


어제 화신 김사장의 접대.

고깃집에서들 아귀아귀 그 기름진 고기를 쑤셔넣는 광경을 이상구 박사가 목격했더라면 독덩어리를 먹고있다고 기겁을 했을 것이다.


어머니- 서울가시다.

21일경 작은어머니와 일본행.

건강하고 즐겁고 가치있는 여행이시기를.

없는 돈에 금일봉 고이 싸 어머니를 배웅한 J가 고마웁다.


15379 1989. 3. 17 (금)


어제 김태경 사표.

함께 가볍게 마신다. 녀석은 재주도 있고 영리하다.

코오롱 상가에서 제 취미인 카메라점을 계획하고 있다.

얼마나 후련할까?


최민종과 면담.

이 신입사원 녀석은 현장근무가 도무지 싫어 죽겠는 모양이다.

적시하지는 않으나 말하자면 높은 치들의 유치한 권위주의가 아니꼽고 더럽다는 것이겠는데. 간곡하게 설계부 쪽으로 전보하여 줄 것을 간청한다.

나 역시 전적으로 녀석의 기분은 한편 이해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나무란다.

그것은 이제 갓 들어 온 녀석이 무얼 안다고.하는 고리타분한 기성꾼의 버릇이기도 하고, 한편 네 눈 속의 들보를 먼저 보라는 기특한 충고이기도 하였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실은 이 녀석아. 내가 떠나고 싶어 죽을 지경이란다.


어제 밤.

英이 머리 펄펄 끓다.


15380 1989. 3. 18 (토)


새벽.

英이 이마 만져보니 열은 내렸다.


오주혜박사 '죽음으로부터의 삶'.

레위기.

레위기는 언제 읽어도 난삽하다.

깊은 오의가 있을 터인데 부박한 내 심령의 눈은 아직 그 오의를 발견치 못하고 있다.


극도로 약해 진 기억력.

기억력은 자신있는 편이었는데.

불과 1,2년 전에 읽고 분명히 무언가 인상깊게 느꼈던 내용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때가 자주 있다.

어떤 문장같은걸 접하고는 '분명 어디선가 읽었던 문장인데..' 하고 한참을 끙끙 댄다.

나는 이런 암시에 사로잡히면 그것이 해결 될때까지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향이 짙으니까 정말 한참을 이리저리 기억 창고를 뒤진다.

그러다가 기억이 떠오르게 되는 실마리는 기억을 되살려서가 아니라 그 문장이 주는 분위기나 느낌같은 것을 단서로 왼쪽 뇌가 아닌 오른 쪽의 감성 뇌에서 찾게 되고는 한다.

육체의 년조, 음주, 두뇌훈련의 나태함, 일상 군더더기의 장애등이 원인일 텐데.

두뇌훈련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겠다.


15381 1989. 3. 19 (일)


오주혜박사의 책.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참으로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삶이란 '목적없는 삶' '찰나적인 삶' '생물학적인 삶'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그렇고 말고.

거짓의 삶, 스스로 속고있는 삶, 취생몽사의 삶, 헛된 문화에 스스로 속고자 하는 삶..

신앙인이 되지 않으려거든 인간은 철학자나 심리학자라도 되어야 한다.

진지하게 인생과 목숨이라는 걸 궁구 할줄은 알아야 할게 아니냐?

요컨데 인류는 정신이 지배하여야 하노라.


어제 J, 아이들과 연복반점에서 탕수육.

'에덴의 동쪽' 비디오 밀려 온 식구 모여 앉아 감상.

내가 제일로 치는 영화. 존 스타인벡, 에리아 카잔과 제임스 딘이라는 전설적인 이름들.

아담과 아벨과 카인, 영원한 주제. 칼의 어머니는 칼의 의식속에 어떤 의미로 각인되어 있었을까. 유아적 집착?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카메라 워크, 콘트라스트 짙은 톤.

영화에는 뚜렷한 고전이 있는 법이다.


15382 1989. 3. 20 (월)


서면 상곤 제2의 가게 개업.

부산상고 앞 요지 1층의 전자제품등의 종합가게.

아, 돈버는 기술을 상곤씨 에게서 전수 받았으면.

상곤, 낙영, 황근과 함께 서면서 마시다.

정작 부러운 것은 상곤의 현실적이고 상업적 재능이면서 나는 감정의 객기와 방탕을 농한다.

되지도 못한 사변 쪼가리들을 이리저리 흩뿌리고, 감상은 죄충우돌...

술이 깬 후의 참담함.

상곤이는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15384 1989. 3. 22 (수)


모처럼 새벽 경건.

골로새서 공부.

기도.


오늘 이른 아침 SB-348 진수예정.


법정스님의 건강에 관한 칼럼.

첫째, 마음의 안정,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라. 남을 미워하는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라.

둘째, 나름의 투철한 삶의 질서를 가지고 즐겁고 유쾌란 나날을 보내도록 하라.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자주적으로 살도록 하라. 즐거움이 넘치는 심장이 가장 좋은 약이다.

셋째, 합리적인 식사. 아침은 부드럽게, 점심은 제대로, 저녁은 가볍게. 몸이란 마음의 그림자이다.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는 사람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 그러나 영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영원히 불멸한다.(바바 하리다스의 말).


15385 1989. 3. 23 (목)


금주의 의지를 나흘쯤 과시하고 있는건가.

그러나 오늘은 마시게 된다.


보통 퇴근후의 음주에의 욕망은 대단하다.

현장에서의 건조해질데로 건조해진 마음밭에 촉촉한 단비를 뿌려주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물론 위장의 시장끼도 그 액체를 목말라 하고 있는 것이다.

퇴근 후의 갈증 해소의 어떤 농밀한 즐거움이 술마시기 이외에는 있지 아니하다니 참 누제는 문제로세.

다른 취향의 성향도 없지 않으면서.

독서와 음악듣기. 무슨 목표를 세운후의 학습.

그러나 아마도 그런 것들은 쾌락의 것은 아닌 모양이고, 곤비한 육신과 의지박약의 정신은 어떤 마비로서의 쾌락과 마음밭의 급한 도약감정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어서 그 효과가 가장 분명한 술을 원하는 것일게다.


새벽 일어나, 팬 파이프의 은은한 찬송들으며 에베소서.

기도.


15386 1989. 3. 24 (금)


어제 회식후, 게르만 호프의 생맥주집.

피곤스럽기 그지없는 인격과의 육체적 충돌 일보전.

나의 직속 상관이라는 그. 그는 또 나의 고교 3년 선배이다.

처봐라하고 턱을 내미는 그에게, 턱 밑에까지 주먹이 올라갔다가 부르르 떨며 내리는나의 참는듯한 폼은 무엇이고, 나중 박세동과 찾아간 그의 집에서의 사과는 또 무에란 말인가?

아, 이제야말로 사직서를 던져야 할 시기가 도래한 모양이다.


그 얼굴을 대하며 아무렇지도 않을 폼 잡을 배짱이 없어서 회사는 나가지 않는다.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

내게 주어진 직장이라는 곳이 이토록 개같은 곳이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지!


J, 俊이 학교 이사회간다고 외출, 멋쟁이 내 마누라가 괴로운 내 눈에는 생경하다.

여우같은 마누라, 토끼같은 새끼들이 있는데 내 경제적 생존력은 이토록 미약하다.

분연히 뛰쳐나와 나의 진정한 경제적 생존방식을 찾아 피흘리며 맞붙고자하는 용기.

이것도 직장이라고 그저 수긋이 안주코자하는 이 게으른 의식구조.

40넘어.

겁쟁이.


오후 빈집에서 큰소리로 기도.

두려움을 물리쳐 주소서. 용기를 주소서.


15388 1989. 3. 26 (일)


하루 하루의 일과.

고통스러움.

그러면서도 시나브로 그 분위기에 다시 순치되어가는 나의 못남이여.

게다가 을씨년스러운 부산의 봄. 춥기가 겨울보다 더하는 것 같다.


일요일. 부활절.

예수님은 부활하셨는데..


<밤>

현장 나간다.

오후 화창하게 날씨는 변한다.

봄이 오는 미세한 소리를 듣는다.

내 속의 청춘 한자락이 부스스 부스스 기지개를 털고 일어선다.

한 음절의 시어에 영혼이 다소곳이 귀를 기울인다.


사무실.

음습한 나의 자리 음울한 공간에서, 도무지 아늑하지않은 회전의자에 파묻혀 책을 읽을수 있는 일요일은 그나마 다행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그의 생각들은 이제 꽤 낯이 익다.


그리고 2시쯤, 회사를 빠져나온다. 만수무강 빈대떡 집.

그곳에 홀로 앉아 동동주를 표주박으로 떠마시며 일락에 젖는다.

한국일보의 시. 코 끝에 향그로운 시어들. 현실은 승화되는가.


-송수권 '山門에 기대어'-

-지리산 뻐꾹새 부모-

만남, 흐름, 섞임, 열림, 일어섬, 추스름, 밀어올림.

지향성을 갖는 단어들.

시인은 안다. 소유를 버리고자하는 그 오의를.


15389 1989. 3. 27 (월)


새벽.

기도.

월요일의 아득함, 직장을 생각하면 영혼이 짖눌린다.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보다 많이 숙고해야 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그대의 존재가 적어질수록, 그리고 그대의 삶을 표현하는 일이 적어질수록, 그대는 더욱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대의 삶은 더욱 심하게 소외된다.' -카알 마르크스-


15390 1989. 3. 28 (화)


갈등의 하루. 어제는 월요일이었다.

삼류인격과의 부대낌보다 그 부대낌에 즐거운 듯 응대해야하는 내가 정녕 싫었다.

SB-350 진수.

CEREMONY를 주관하는 선주측, 필리핀 신부의 캐토릭 행사가 엄숙하고 경건해 보인다.


<밤>

퇴근후 돌아 온 나의 공간.

토닉 워터에 탄 소주 한병과 팬 파이프의 찬송가.

이 곳 내 공간의 분위기에 젖은채, 맴 돎에 대해서, 소시민적 정신영역 이상 상승하기를 거부하는, 나의 벗어나지 못함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 한다.

훨훨 털어버리고 옳은 것, 잘난 것, 높은 것, 큰 것을 향하여 우뚝 서고 싶은 마음은 있으되 행위의 결단이 없음은 순전히 내 의지의 문제일까, 용기의 문제일까, 그외 무엇무엇의 문제일까....

그 배후에 숨겨 진 내 심층심리의 상태는 어떠할까. 신경증세에서 오는 무엇이 아닐까.

이토록 뚜렷하고 확신에 찬 나의 벗어남에 대한 관심사가 존재하는데, 어이하여 엉거주춤, 진흙탕의 오욕 속에서 허위적거리는 겐가.

이 산업사회의 자본논리가 최상의 가치가 되는 유물론적인 사회-

이 사회를 살아 낼, 내게 주어진 방법이 과연 이 뿐이란 말가?

안일함만을 꿈꾸는 한 마리 달팽이. 꼬챙이로 달팽이를 건드려 보라. 달팽이는 잽싸게 자신이 지고 다니는 그 알량한 어둠 속으로 쏙 파묻혀 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더듬이를 앞세워 다시 주춤주춤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그리고는 안심스럽다는 듯이 다시 자기의 집을 등에 업고 그 알량한 실존을 시작하는 것이다.


나의 논리로서 하나님을 알수는 없다.

그러나 요즘 하나님은 내게 오염되고 있다.

이토록 나약한 품성에는 무교회주의가 정말 무리이다.


15392 1989. 3. 30 (목)


어제 이덕찬씨와 집에 까지 와 가볍게 마시다.

근본이 선량하다는 것과 착각 속에서 굴절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산다는 것과 결합하면 그 세상살이의 외관은 참 가련한 형태일 것.


세상은 더없이 시끄럽다.

문익환 목사 평양 방문. 황석영씨도.

나는 이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갖고 있을까?

글쎄, 나의 감상주의는 다소 흥분하지만 의견은 유보다.

현대중공업은 100일 넘도록 극도의 분규 계속.

정치판은 주도하는 세력도 없이 이전투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모든 존재의 소망일진데. 그 소망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

역사의 완성. 내세에서 뵙는 하나님, 심층심리의 구조변화로서 이른바 뒤집어 짐.

나의 지금의 소망은 세 번째의 것.


15393 1989. 3. 31 (금)


새벽4시. 괴종시계의 알람에 눈은 떴으나 머리 속은 무척이나 무겁다.

혓바늘의 기미도 있고.

무슨 꿈을 꾸었으나 기억할수 없다. 몸살 기운인지.


엎드려 창세기 노아편을 읽는다.

기도.

시간 단위, 아니 초단위로 촐삭대지 못하도록 심령에 묵직한 돌 하나 얹어 주십시오. 월단위 년단위로 생각하여 살게 하십시오. 현상따위에 상처받거나 기쁘지 않게 하십시오.

영원으로 작용하고 계시는 당신의 입김과 손길을 느낄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오래참음과 온유라고 말씀하신 뜻을 알게 하십시오.


이 숨가쁜 산업사회의 원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도록 부단하게 인간을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신앙, 어머니의 기쁨, 아이들에 지혜로운 부모.... 아, 감사와 온유의 그리스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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