辨明 僞裝 呻吟 혹은 眞實/部分

1989. 5

카지모도 2016. 6. 22.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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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4 1989. 5. 1 (월)


계절의 여왕. 5월의 첫아침.

꿈속을 헤매이다.

외가의 규선이형과 당구, 외숙모, 작은 외숙모 누워 앓고, 어딘가 생활의 척박함이 흐르는 분위기, 비디오가게, 느닷없이 이상우, 천복환등도 등장.

엎드려 성경 펼치다. 이사야서 53장이 펼처진다.

기도.

사랑. 남을 사랑함.

어떤 못마땅한 행위가 율법으로는 아무런 상관없는듯하다고 아무리 자의적으로 합리화시킨다해도 결코 떳떳할수 없는 것.

또한 아내를 물리적으로 신앙에 유도하여서는 오히려 반발만 불러일으킬 뿐, 그녀의 딱딱하게 굳은 심령을 감화 감동케 하여 스스로 녹여줄 수 있는 어떤 화학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아이들, 건강과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는 지혜를.

부모짜리들의 지혜를.

어머니, 진리에서 우러나는 기쁨, 홍서방의 쾌유.

아, 형네 처가등 나의 삶에 깃든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본받고자하는 열정을.


오늘 메이데이.

세계노동자의 날 100주년이라고.

100년전 시카고의 사건이 작금 우리 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부활하자는 것인지.

오늘 시끌시끌한 세상은 또 어떻게 나를 놀랠킬까.


15425 1989. 5. 2 (화)


어제 임금협상 타결.

고임금을 주는만큼 부려먹어라하는, 어떤 유치한 발상의 기법이 이제 쏟아져 나올건지, 지레 끔찍해진다.


가위눌린 듯, 비몽사몽간을 헤매인 간밤의 잠.

답답하여 숨이 막혀 눈을 뜨면 아직 2시, 3시...

기억도 못할 꿈 꿈 꿈들.

그러나 새벽 무거운 머리를 보듬어 일어난 후의 기분은 그렇게 까지 무거운 기분은 아니다.

이사야서 읽다. 기도드리다.

새벽의 경건함을 허락하여 주신 분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한줌 걱정있으니, 나의 경건이 세월에 빛바래듯 그렇게 퇴색해 가는것이나 아닐까하는.

아니다. 그게 아니다.

점점 강력한 경건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자,

이것이 자기암시일지라도 이를 폄훼하지 말자.

원시 종교감정으로부터 세련된 종교 감정으로의 전이(?)

율법주의, 단순주의, 말씀주의로부터의 상승(?)

소승에서 대승에로의 확장(?)

도피주의에서 참여주의에로의 진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15426 1989. 5. 3 (수)


어제 피곤한 하루 일과.

그러나 영혼까지 피로한 것은 아니다.

은총의 瑞氣.

담대하라.

자질구레한 것, 하잘 것 없는 것들을 괘념치 마라.

커져라, 상승하라, 대범하라.

사적인 암시의 사슬을 과감히 끊으라.

심리의 악마에 희롱 당하지 말거라.

상승하라, 대범하라.

사소한 율법주의의 가시에 아파하지 말라.

좀 더 담대한 신앙을 가지라.


새벽.

펼처지는대로 구약, 소리내어 읽다.

기도드리다.


"당신을 우리에게 부으실 때 당신을 낮춧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흘려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모으시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들어오실 내 영혼의 집이 좁사오니 넓혀 주소서. 당신을 통하여 넓혀 주소서. 그것이 다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일으켜 세워 주소서"

-아우구스티누스-


15427 1989. 5. 4 (목)


꿈- 황천의 바다로 시운전 항해하는 화물선, HOLD안에 묶여서 극심한 고통에 사지를 버둥거리는 황소 한 마리,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꿈 속의 나 또한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 덤덤하고 능숙하게 황소의 각을 뜨는 작업에 열중하는 조선소의 사람들의 면면, 비수로 심장을 저며내는데 돌연 그 황소가 최일구 반장의 모습으로 바뀐다. 폭풍우 속.

무슨 메타포? 선창에 묶여있는 황소는 번제의 제물인 모양인데...


15428 1989. 5. 5 (금)


어제 시내나가 책 사다.

라인홀드 니버 '그리스도인의 윤리'

알버트 슈바이처 '문화와 윤리'

그리고 옷, 약, 술.


대낮의 고즈넉함을 즐긴다는 것은 고작 음주와 비디오보기.

소인배의 한가로움은 어쩔수 없나보다.

그러나 이런 소인배의 크리스찬은 스스로 괴로워하지 말기로 하자.

어린이날, 장인어른 생신.

J와 英이만 뵙고 오다.

숙제 많은 俊이와 어줍잖은 사위녀석은 가지 않는다.


"잠겨 있군. 모두 가버렸구나....나를 잊고 갔군 그래. 그렇지만 괜찮아.. 이렇게 여기 앉아 있자... 그런데 나리께서는 아마 털외투도 입지 않고 보통 외투를 입고 가셨을거야! 내가 잘 보살펴 드리지 못했으니... 정말 젊은 사람들이란!

한평생이 지나고 말았어. 산 것 같지도 않게... 어디 누워볼까. 에이 무슨 꼴이야. 힘도 근력도 다 빠져 버렸어. 빈 껍질 뿐이야. 에이, 이... 머저리같은 놈.

(저 멀리서 마치 하늘에서 울린듯한 소리가 난다. 마치 현이 끊어진듯한 소리로 차츰차츰 슬프게 사라져 간다. 다시 정적. 그리고 멀리 정원 쪽에서 나무를 찍는듯한 도끼 소리만이 들린다.) -막." -체호프 '벚꽃동산'-


시대의 종장, 한 시대의 마감.

한 생명은 그렇게 시대와 함께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 간다.


15429 1989. 5. 6 (토)


어제 불결한 느낌의 몸뚱이 그대로 잠자리 든 탓일까.

어지러운 꿈, 회색수면.

년말인데, 기필코 12시까지는 회사에 도착하여야 하련만, 시내 외곽을 빙빙 돌기만한다. 오줌이 잘잘 나오도록 안타깝고 초조하기만한데 결코 회사에 시간내 도착하기는 무망하다.

전형적인 미착 강박심리의 꿈.


요즘 읽는 김주영 '객주'

일종의 박물소설, 이조 말의.

그러나 수호지식의 과장과 황당무계함이 있는데 그것이 김주영의 노고에 찬 리얼리즘의 성공을 반감시킨다.


15430 1989. 5. 7 (일)


나는 극단적인 기갈스러움과 극도의 험상궂은 마음밭을 갖고있는 여성과 살고 있다.

여성다움. 부드러움과 배려함의 마음씀.

이를 소유치 못한 그녀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기도 한데...

아, 누구를 폄하고 누구를 훼할수 있단 말가.

이 척박한 환경의 탓이라고 해 두자.

그러나 마음밭은...

부글부글 끓는 이것은.. 나는 도무지, 결코 이 상황에서는 크리스찬이 될 수 없다는 ...

절망, 반사적인 극악한 본노의 감정... 저나 나나 인간의 탈을 쓴 돼지의 품성들을.....


15431 1989. 5. 8 (월)


술은 내게 어떤 위안을 주는가.

날카로운 것들을 어떻게 무디게 만들어 주는가.

마비와 도취, 그리고 망각과 쾌락의 부정적인 덕복만 있는게 아니다.

새벽.

내 방에 불밝혀 앉아 성경 뒤적뒤적.

불 꺼 기도.

아내의 영혼 밭, 그 척박한 밭에 거름을 주소서.

말씀의 씨앗, 부드러움과 여성스러운 말씀의 씨앗 하나 심어 주소서.

그 황무지에 비를 내리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여.

무엇보다 약해 빠진 나의 내면으로 살아내야 하는 나의 삶이, 나의 목숨이 처연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도와 주소서. 나의 하나님.


15432 1989. 5. 9 (화)


이제 현장의 업무는 어느 정도 타성이 붙었는가.

제법 합당한 동기부여에 의하여 일을 꾸려가고 있는 느낌.

이거야 말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나의 시간중, 가장 중요한 항목이고, 그래서 가장 감사해야 할 항목이 아닌가.

늦잠, 흐린 새벽.

멀리 개짖는 소리 들린다.

요즈음 객주읽는 재미에 빠져 있는데,

이조의 언어, 이조의 풍물, 내게있는 기억의 자락 어딘가에 이조의 잔영을 느끼게 해주는 무엇이 있다. 내수동 외가의 다락에 있는 물건들, 외할머니의 한복입으신 모습. 외숙모가 구사한 서울 깍쟁이의 욕지거리. 그 욕속에는 경아리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외갓집 콩기름 먹인 대청마루에서 나는 냄새, 이조 중인계급의 냄새...

그리고 객주에서의 감동 한토막은, 귀밑머리 마주 푼 인연으로서 가시버시의 情과 恨이라는 것. 천륜으로서의 부부라는 것. 하늘이 준 뜻으로 인식하는 그 절대성의 의미. 이조의 범부범부들.

성경의 어떤 도덕율은 유교의 그것과 크게 배리하지 않는다.


15433 1989. 5. 10 (수)


새벽 책상 앞에 앉아 본훼퍼의 시 한편 읽다가 문득 느낀다.

나의 도피주의의 소극적인 인생 자세를, 그에 대한 변명을.

그 변명이 주는 암시에 묶여 진정한 자유를 상실하고 있음을.


"그대가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고 하거든.

욕망과 그대의 지체가 그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감각과 영혼을 훈련하는 것을 배우라.

정신과 육체를 정결케 하고, 그대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거기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라.

자유의 비결을 맛본 자는 없다 그것은 다만 훈련에 의할 뿐이다" -훈련-

"마음대로 행하지 말고, 정의를 단연 행하고, 가능성 속에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대담하게 붙잡으라.

자유는 사상에의 도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속에만 있다.

다만 하나님의 계명과 그대의 신앙만을 의지하고, 불안한 주저를 버리고 生起의 폭풍 속으로 나서라.

그리하면 자유는 그대의 혼을 환호하며 맞으리라." -행위-

"놀라운 변화, 힘차고 살아있은 손이 그대에게 연결되어 있다.

무력한 고독 속에서 자기의 행위에 彦을 맞이해도, 그래도 그대는 안심하고 조용하게 믿고, 강한 하나님의 손 안에 정의를 맡기고, 스스로 만족한다. 한 순간이지만 자유에 접하여 축복을 얻으면, 영광 속에 성취될 날을 바라보면서, 자유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라" -고난-

"자, 이제는 오너라. 영원한 자유에의 도상의 최고의 향연이여.

죽음이여. 이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보이기를 꺼리는 것을 마침내 보기 위하여, 우리의 덧없는 육신과 현혹된 우리의 혼의 질곡의 쇠사슬과 벽을 부수고, 자유여, 우리는 훈련과 행위와 고난에 있어서 오랫동안 그대를 찾아 다녔다.

죽음에 임해서, 지금 하나님의 얼굴 속에 그대 자신을 보노라" -죽음-

본 훼퍼- 나치의 감옥에서 조용히 끌려나가 처형당한 행동주의의 신앙인.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빛이 신념이게 하소서, 용기이게 하소서, 행위이게 하소서, 일관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아, 사랑이게 하소서.

음습한 사상의 질곡, 부정적인 괴물들이 웅크려 살고 있은 그 심층심리의 암시의 동굴에서 분연히 뛰처나와 사랑과 긍정의 밝은 초원을 뛰어 달려가게 하소서.

지지배배 종달새처럼, 노래하며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소서. 아내,어머니,아이들,형,형수,조카들,媛이,홍서방,조카들,장인,장모,처남들,처남댁들,처제들,처조카들 모두에게 해위로서, 긍정의 행위로서 닥아가게 하소서.

나를, 이 네가티브의 부정적인 벌레에게 기쁨의 은총을 주소서.


15434 1989. 5. 11 (목)


새벽 일어나다.

폭풍.

갈기를 풀어헤친 사자의 포효처럼 새벽 어둔 하늘공간을 비바람은 아우성이다.

아마 어둠 저편 먼바다 태종대의 기슭에는 산더미같은 파도가 부숴져 흰 포말의 불껓놀이를 연출하고 있으라라.

베란다 내 방은 바닥에 물이 고인다.

간이식으로 꾸며진 아담한 내 방의 하나의 약점이라면 누수현상일 것이다.

엎드린채 성경 뒤적인다.

기도.


황석영씨, 지금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

이 시대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는 법이 없이 늘 정면으로 껴안고자 하는 빼어난 작가.

사변적이고 좀 구름똥싸는 소리를 곧잘 지껄이는 이문열류와는 근본적으로 종이 틀리다.

그가 끊없는 애정을 갖는 쪽은 늘 '살고있는 사람들'쪽인 것이다.

生을 관념적으로 인식하거나, 生을 관조하는 시각이나, 어떤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生이라거나, 풍자적이거나, 시큰둥하게 살아가는 生따위를 살아가는 사람은 황석영의 사람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하려는 삶, 도식적인 삶, 문화의 겉멋만이 잔득 들어있는 삶따위 역시 황석영의 삶이 아니다.

말하자면 나와 같은 삶은 황석영의 삶과는 너무나 괴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는 나를 경멸하겠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

존경하면서 한없이 그에 대하여 열등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나도 그렇고 저들도 모두 본성을 잃어 미쳐버린 껍데기가 아닌가하고 끔찍한 생각도 듭니다. 나는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누군가에게 내 몫을 빼앗긴 것만 같습니다. 굶주림보다도 더욱 못견딜 고통입니다." -섬섬옥수-


"여럿의 윤리적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거야. 걸인 한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너는 저 깊고 수많은 안방들 속의 사생활 뒤에 음울하게 숨어있는 우리를 상상해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생활에서 오는 피로의 일반화때문인지 , 저녁의 이 도시엔 찬바람만 지나간다. 우리는 항상 너를 기억하고 있으며, 너는 우리에게 소외되어 버린 자가 절대로 아니니까말야." -아우를 위하여-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 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뚜기 한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야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몰개월의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한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몰개월의 새-


황석영의 소설, 민중,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산문이 아니고 詩다. 그리고 그 시는 진정 아름다운 시다. 내가 황석영씨에게 한없이 한없이 부끄럽고 열등감에 사로잪히는 까닭은 나는 그렇게 아름다울수 없다는 자괴감인 것이다.

나의 하나님은 내 인생의 도정을 어쩌면 그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변케하실지도 모른다는 예감...


15436 1989. 5. 13 (토)


곁에 새벽 잠 혼곤한 俊이.

그 볼을 만진다. 얄랑얄랑한 볼을 갖고 있다고 해서 제 친구들이 얄랑이라고 부른다던가.

볼도 그렇거니와 중학교1학년 짜리 사내 녀석이 아직 갖난 애같은 육체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내 아들.

막내라서 그런걸까.

허지만 녀석의 사려있음은 때로 제 누이를 능가할 때가 있다.


토마스 아 캠피스.

기도.


15437 1989. 5. 14 (일)


토요일, 과우회모임- 멀리 동해안 칠암이라는 곳까지 가서 회와 소주.

승합차 차창을 스처가는 시골 풍경의 어떤 모습들.

양광을 받고 호젓한 돌담 모퉁이. 황토길.

민둥산의 한그루 나무.

기시감, 데자뷔...

시골에서 살아 본적이 없건만 눈에 익고 마음에 익은 풍경들.


영도에 돌아 와 또 맥주마시고, 종장에는 박쌍현과 집에 와 마감.

감정의 방탕은 없었는지.


일요일.

오전 내내 깊은 잠에 빠지다.

짓푸른 바다, 5월의 바다는 코발트의 초록의 아니 보라의 바다.

자유의 칼라. 평화의 칼라. 온유의 칼라.

그 바다 한가운데에서 오후의 기도를 드린다.


15440 1989. 5. 17 (수)


한밤중, 꼭 약속된 빚을 갚아야 하듯이 깨어나 백번에 가까운 기침 행사를 치른다.

감기기운이 있다하면 기침이니 원.

그리고 다시 잠들면 압착기에 눌린듯한 어지러운 꿈.

가위 눌린 듯 땀에 푹 젖다.


15441 1989. 5. 18 (목)


어제 밤, 俊과 여성지 보면서, 술잔을 기울이며, 노닥거리다.

기침은 목에 턱 걸리었으나 술기가 올라오며 그 증세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잘도 넘어간다. 소주는.


덕분에 간밤의 숙면. 꿈도 없었던 듯.

흐린 아침.

가까운 바다위의 잔물결의 움직임은 흡사 강물이 흘러가는 듯 보인다.


카잔차키스.

대지와의 연대의식.

나무와 풀과 새와 고양이와, 그리고 선조들과 가족들, 이웃들, 낯선 이방인들.

그리고 하나님.

모든 것과의 연대의식.

그러한 인식에의 도정.

범신론이 아니다. 카잔차키스의 이것은 사랑이다.


15442 1989. 5. 19 (금)


나에게 방문한 기침 손님은 일정한 기간의 의식을 치루어내야만 물러가는 손님이다.

약과 주사로 다스려질 물건이 아니다.

우선 마음으로 이겨야 한다.

기침에 주눅들지 말고, 기침 위 높은 곳에서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내려다 봐야 할 것이다.

꿈도 없는 잠.

곁에 俊이가 강아지처럼 잠들어 있다.

바다와 하늘은 잿빛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수평선이 어디쯤인지 가늠되지 않는다.

엎드린채 기도.


15443 1989. 5. 20 (토)


기침따위는 아예 언급치도 말라.

결코 이런 따위에 지배 당한다는 눈치를 기침에게 채게 하지말라.

기침따위 육체의 메시지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육체를 이기라는 말씀은 이와 같이 육체의 암시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이다.


토요일-

새벽 일어나 이 책 저 책 뒤적거린다.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은 얼마나 얼마나 많은가!

내게 있는 책들로서 독파하지 못한 책들도 상당하다.

시간과 마음의 여유, 이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조선소의 현장에서 벗어 난 저녁 나절의 몇시간은 집중적으로 독서에 몰두하기에는, 적어도 나의 의지로는 불가능하다.

새벽의 한두시간. 이 시간이 귀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 날 예견되는 현장의 어떤 부담이 예견되면 이 또한 어려워지고 만다. 심리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이럴 때는 이런 심리의 암시에서 벗어나고자 소리내어 성경을 읽는다. 그러다 보면 차츰 마음은 안정을 회복하는데... 이런 것도 신비주의인가? 주술과도 같은.


기도.

울리는 찬송가.

아내,어머니,아이들,형네,모든 가족... 그곳에 사랑. 사랑.

주님의 나라, 하늘, 영광... 죽음, 소망.


15444 1989. 5. 21 (일)


이제 세상은 바뀌어 토요일은 토요일다운 반공일이다.

5시 퇴근하여도 오후시간은 참 넉넉한 마음인 것을.

소인배는 그 넉넉함을 음주로 채우고 만다.


일요일.

이제 계절은 성하 그 축제의 장으로 진입하려고 한다.

오늘도 나는 교회에 가지 않지만, 아이들은 교회인이 되었다.

아빠도 가자고 옆구리를 찌르곤 하는 아이들.

나의 핑계인즉슨, "네 엄마가 가자고 할 때까지 아빠는 가지 않을거야"


俊이 손을 잡고 오후, 5월의 따스함 속을 걸어 동삼중리로 산책한다.

자동차문화, 너도 나도 장만하는 자동차라는 물건.

미상불 부럽지 않은바는 아니나 기동력을 소유한 사람들은 또다른 허덕거림이 있다.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다는 기능을 부여받으면 허덕허덕 어디든지 가야한다는.

기동성을 만끽하고자 하는 또하나 자유의 속박.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소주마시는 오후.

英의 책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뒤적이며.

우주. 우주. 상상이 극도로 확장되는 어떤 공간.

한편 그 책의 고고학적인 과거의 세계는 또한 나를 매료시킨다. 옛성, 그 고즈넉한 고성의 회랑. 어느 방, 그곳에 세월의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있은 옛적 기록들, 성주가 공녀가 쓴 기록. 옛난 삶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흥미..

로제타석을 해독해 낸 샤폴리옹은 나와 같은 감상주의자는 아니었을테지만 그에게 작용한 고고학적인 동기부여는 무척 근사할 것이다.


15446 1989. 5. 23 (화)


한번 작정한 마음가짐, 스스로에 대한 약속의 허망함을 익히 알고있기에 작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하고자하는 희망만이 존재할 뿐이다. 주님도 말씀하셨다. 맹세하지 말라....

일관되게 초심을 유지하여 끝까지 밀고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득 아차, 그때 작정한 것은?하고 깨달았을때는 그 작정은 이미 깨뜨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작정이 아니다. 깊이 각인된 실존의식으로서 받아들인 영혼의 문제이다.죽음을 무의식중에 늘 지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일진데, 믿음에 대한 문제는 일상중 때때로 육체의 소욕이나 상황의 형편에 따라서 잊는 순간이 있다하여도 곧 조율되고 마는 것이다.

'사니까 사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사람과 '살려주고 있기 때문에 살고있다. 그 때문에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람.

사회과학적 인간과 종교적 인간.

생물적인 사실을 초월하여 인격적으로 사는 것의 실존을 의식하는 것.

죽음에 투철한 생을 사는 것.

크리스찬, 그 고독한 기쁨.


15447 1989. 5. 24 (수)


어제 퇴근길, 모처럼 김기창, 이광섭씨와 술마신다.

이광섭씨의 얘기, 농촌의 피폐함, 농촌 정책이 그의 말대로라면 정말 농촌사람들의 반란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김기창씨의 단순한 사고. 그의 직책상 온 세계로 그토록 외국출장이 많은데도 코스모폴리탄적 감각은 없다.

그러나 해외영업팀과의 어울림은 노가다의 어울림과는 다른 맛이 있는 것.


내일 俊 생일.

욕심없는 아이, 아이다운 탐욕스러움과 심술같은게 이 녀석에게는 없다.

떼를 쓴다던가하는 행위는 俊이에게서는 상상도 할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아비 어미는 걱정이다.


15448 1989. 5. 25 (목)


다섯시 눈 뜨다.

俊이 생일.

야고보서.

아침 식탁 나의 식구 둘러앉아 기도.


한낮인데 돌연 하늘이 캄캄해 진다. 순식간에 검은 구름이 하늘 뒤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낮은 산등성이에 오밀조밀한 주택가.

그 인구밀도가 무척 높을 것 같은 동네가 어두운 풍경 속에 회색 빛으로 모여있다.

드라마틱한 풍경이다. 폼페이 최후의 날같은....

하늘은 점점 어두워 음산한데 옹기종기 모여사는 일상의 삶이 있고.

나는 이런 풍경화에 이상스레 안온해 진다. 그리고 익숙하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자연의 음울함에 영향을 받아 어떤 공약수적 의식을 일깨우는.

그래서 오손도손 끼리끼리 방으로 모인다.

하나의 방.

인간과 인간 사이의 최소 단위의 공간.

그곳에서 진정 실존함의 타인을 향한 사랑이 움트고.

오늘 일기예보도 예측치 못한 그 농밀한 분위기를 겪었다.


드로우잉 아카데미의 '연필 초상화 드로우잉 통신교육' 신청키로 한다.

그림은 내가 좋아하는 분야다.


15449 1989. 5. 26 (금)


깨어난 아침은 벌써 5시.

거짓말처럼 하늘은 개여 수평선 위로 둥실 떠오른 태양은 5월의 현란함이다.

연미복을 뽐내며 날고 있은 까치 두어마리, 저기 아치섬을 중심으로 왼편으로는 오륙도, 오른편으로는 니스의 해안선을 이루고, 그 끝에 태종대의 산자락.

그리고 그 너머 아물아물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호화 여객선이 미끄러져 현해탄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15450 1989. 5. 27 (토)


어제 분주한 현장의 하루 일과.

퇴근길, 이덕찬씨와 몇병의 맥주 마신다.

무릇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 무지, 또는 쾌락주의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잊고 산다.

스스로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깨닫거나 고칠 念도 품지않은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덕찬씨, 한없이 선량하고 착한 품성.

주님께서는 이러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계실 것이다.


새벽.

4B 연필을 뾰죽하게 깎아 교재에 나온대로 눈을 그려 본다.

연필 드로우잉의 원칙, 손가락을 움직이지 말고 손 전체를 움직여 그려라.

이런 細筆로 그리려니 그 정확도는 더욱 요구된다.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은 욕심이 앞서지만 그럴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작은 처남 재희의 초상을 그리는 솜씨는 굉장한 수준일 것인데. 재희에게는 천재적인 장인의 솜씨가 느껴진다.


<밤>

일찍 퇴근하는 토요일.

너무 화창한 날씨.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俊이와 T.V의 축구보다.

소년의 마음 속에는 함께 열광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도 필요하다.


서울 성동구 화양동 영전기계의 선반공인 趙正植씨.

25살, 경북사대부고 수석졸업, 서울대 물리학과 재학중 86년 11월 반제동맹사건으로 구속, 88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 민주화 실천 가족운동 협의회등 재야단체에서 봉사,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영전기계 입사, 89년 5월 24일 작업장에서 선반기계에 매단 쇠뭉치에 뒷머리를 맞아 숨지다.


내 꿈꾸어 오던 일련의 질문.

네게서 빼앗는다. 황금을, 단지 황금만을.

네게서 빼앗는다. 네 권력, 너의 자아도취된 테크닉으로 만들어 버린 네 숭배자들만의 네 권력을.

네게서 빼앗는다. 단지 너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은 너의 재능을.

너는 무엇이 남는가.

오직 너의 실존, 너 홀로 숨쉬며 존재해야 한다는 그 무서운 고독....


15451 1989. 5. 28 (일)


어제 늦도록 이태리 섹스코미디 영화 비디오.

이런 섹스오락물을 만드는데도 이태리다운 에스프리가 있는데, 국산의 섹스를 표방한 영화의 유치함이란.


J와 英이가 남편과 아비를 대하는 표정과 말투, 흡사 비렁뱅이를 대하듯 하는 그 생경스러움. 사춘기의 英이 제 엄마가 아빠를 대하는 포즈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실로 목구멍까지 치미는 분노와 슬픔.

여성다움, 새벽마다 이 간구의 끝장은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준비하고 계실까?

이사야 한구절 읽고 기도.

온유케 하소서. 주위에서 자꾸만 자꾸만 온유하지 말아라하고 부추기더라도 온유케 하소서. 온유케 하소서.


15452 1989. 5. 29 (월)


일요일, 드로윙 연습하고, 소설읽다가 TV보다가 하면서 종일을 소모한다.

나는 무위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무위로울때는 허무감에 휩싸여 괴롭기까지 하다.

술에 취하는 찰나적 일락에 정신을 맡기게 되는 때에도 대개 이 무위로움에서 도피코자 함이다.

이것은 조급함이기도 하다.

넓은 뼘으로 인생을 재면 찰라의 무위로움 따위는 무어란 말인가?


어제 媛이가 과자를 보내주다.

俊이 성적 떨어지다.

이 성적이란 놈에 노심초사하지 말도록 하자.

이 또한 넓은 뼘으로 인생을 겨냥하자.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아비의 좁은 눈으로 오히려 좁혀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짙게 안개 낀 아침.

내려다 모이는 교회의 앞마당네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여인네들의 모습.

J를.


15453 1989. 5. 30 (화)


어제 몹시 바람이 불다. 내항에 파도가 드세어 결국 SB-350 경사시험은 집행치 못하다.

눈병, 왼쪽 눈꺼풀이 퉁퉁 부어오르고 멍울이 만져진다.

집에 돌아와 일찌감치 잠자리 들다.

5시 기상, 벌써 찬란한 태양의 5월 아침이다.

기도.

아내여, 아내여. 온유한 심령, 온유한 심령.

문득 느낀다.

나의 가족들의 대화의 미숙함. 커무니케이션의 서툶.

대화 테크닉의 부족, 감정 밭에서 아무런 정화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튀어나오는 언어들.

그 테크닉을 위한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나태함은 일종의 죄악이기까지 하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진지함, 설득코자 하는 성실함, 진지하게 애정으로 경청코자하는 포즈, 이런 것들을 너무나 구사할줄을 모른다.

불학무식한 환경이다. 동물적인 환경이다. 사람은 말을 한다. 개만이 짖을 뿐이다.

개는 왜 짖는가? 제 마음을 얘기할수 없으니 그저 짖을 뿐이다.

대화, 감정의 교류는 대화 밖에 무슨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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